***간증: 1409. [역경의 열매] 김종식 <1-10> 절에서 장모님 49재… 후배 두 명이 찾아와 전도
“정말 하나님 계시면 만나달라” 기도… 술·담배 단번에 끊어지는 충격 체험
사역 8년차 한국방문 중에 캄보디아에선 느낄 수 없는 6월의 신록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김종식(오른쪽) 권찬식 선교사 부부.나는 올해 64세다. 오래전에 출가해 승려가 된 할아버지에 이어 4촌 형님도 승려고, 6촌 여동생은 비구니다. 나 역시 그 길 위에 있다가 48세에 회심해 지금은 소명을 받고 캄보디아 선교사로 8년째 사역 중이다. 파송교회 안식년 선교사공동체훈련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 그간의 삶을 나눠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늘 그랬듯이 하나님께 여쭸다. “왜 저인가요.” 그때 나를 위해 20년을 기도하시고 88세에 소천하신 장모님이 떠올랐다. 이 글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 영혼 구원을 위해 20년의 무릎제단을 쌓은 그분의 기도에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드리며, 죄수 중에 죄수였던 비천한 인간이 거듭나게 된 신앙고백을 한다.
2002년 8월 8일 장모님 장례식에 영락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오셔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간단히 성경 읽고 찬송 부르는 게 전부였다. 천국 간다는 목사님 말씀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기에 나는 절에서 49재를 따로 지내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산해진미의 제사상 앞에 목탁 치고 불경 외우며 반나절씩 지극정성으로 드렸다. 그 과정은 기독교의 짧은 예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게 5재를 드렸을 때 후배 두 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나를 전도하려다가 무수히 수모를 당했는데 이 날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불심으로 가득한 나에게 이처럼 예수를 전하려 할까. 과연 예수는 누구인가.” 아마 천국가신 장모님이 절에서 제사 지내는 나의 영혼 구원을 위해 이런 마음과 그들을 보낸 모양이다. 결국 나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게 됐다. 그들을 따라 영성집회에 참석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
그날은 2002년 8월 21일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정말 하나님이 계시면 나를 만나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됐고 이후 불같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다. 귀신이 소리치며 쫓겨나가고, 28년 동안 몸에 밴 술과 담배가 단번에 끊어지는 충격적인 체험을 하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이사야 44장, 신명기 8장이 떠올려져서 성경을 찾아봤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느니라.”(사 44:6) 또한 내 인생을 광야 길에 비유하며 지난 40년 동안 나를 낮추어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시고, 이제까지 먹이시며 입히셨다고 하신다.(신 8:2∼4) 그 말씀에 눈물을 쏟았다. 당시 나는 고액의 연봉을 받던 다국적기업 임원 출신으로 사업에 큰 실패를 겪었다. 후배의 동호인 주택건설에 참여했다 전 재산을 잃고 강북의 지하 단칸방에 살고 있었다. 돈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의 유혹을 받았다. 그런 나의 형편과 사정을 성경말씀이 완전히 꿰뚫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날 나는 절대자 앞에 무너졌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다. 이 글을 통해 나 같이 방황하는 ‘단 한 사람’이라도 빨리 주께 돌아오기를 소망한다. 이 글의 목적이 그것이다. “아일러으니, 쏨 쮸읍 쁘레아예수 찌윗 로버 네악 능 플라쁘도우.” 캄보디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이 말을 모두에게 전한다. “지금 예수를 만나세요. 당신의 인생이 바뀝니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종식 <1> 절에서 장모님 49재… 후배 두 명이 찾아와 전도
* [역경의 열매] 김종식 <2> 中 유학간 딸, 기독인 급우가 도시락 싸주며 보살펴
* [역경의 열매] 김종식 <3> 낮술·담배 하던 젊은 날… 폐 자연치유 뒤늦게 발견
* [역경의 열매] 김종식 <4> 마을에 번진 뎅기열… 기도로 낫자 하나둘 교회로
* [역경의 열매] 김종식 <5> 너무 고됐던 첫 교회 건축… 어금니 4개나 빠져
* [역경의 열매] 김종식 <6> 8박10일 전도집회… 첫날 1500명 영접기도 받아
* [역경의 열매] 김종식 <7> 여공 대신 신학생으로, 농부에서 동역자로
* [역경의 열매] 김종식 <8> 7년간 104개 학교에 우물 뚫어… 현지 정부서 훈장
* [역경의 열매] 김종식 <9> 인터넷 세상에 '복음의 집' 세워
* [역경의 열매] 김종식 <10·끝> 아브라함의 늙은 종처럼 충성하며 사역할 것
약력=△1954년 서울 출생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예장총회신학대학원 △서울 온누리교회 파송 장기선교사 △현 GMP 개척선교회 캄보디아필드 대표 △캄보디아 굿뉴스하우스(goodnews.asia) 대표 △2011년 그리스도열매교회 개척
***[역경의 열매] 김종식 <2> 中 유학간 딸, 기독인 급우가 도시락 싸주며 보살펴
선교사 훈련받던 7년간 딸 못 돌봤지만 예비하심 속 대학까지 무사히 마쳐
3년 동안 둘째딸의 도시락을 싸온 우쓰쓰(왼쪽 동그라미)와 둘째 딸 김경아(오른쪽)의 고등학교 졸업사진. 나는 한 번도 중국에 가보지 못해서 딸과 찍은 사진이 없다. 김종식 선교사 제공나는 선교사로 소명을 받고 7년간의 훈련을 받았다. 똑같은 기간 동안 중국에서는 둘째 딸이 현지 고등학교를 거쳐 베이징사범대학을 졸업했다. 나와 아내는 그 기간 동안 한 번도 중국엘 못 가봤다. 오직 순종.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고 의지했다. 그 기간이 끝나고 나서야 선교지로 나갈 수 있었다. 딸을 통한 순종훈련 중에 3가지 사건이 기억난다.
첫 번째는 2004년 둘째 딸이 열여섯살 고교 1학년때였다. 딸은 하얼빈에서 사역하던 여선교사를 통해 선양(瀋陽)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4개월의 언어교육을 받고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따라 혼자 선양시 교육부를 찾아갔다. 그곳은 한국보다 더 넓은 중국 동북3성의 모든 학교를 관장하는 곳이다. 선양 교육부에선 혼자 찾아온 외국인 여학생에게 놀라고 감동을 받아 대학진학을 할 수 있는 한족고등학교 8곳을 배려해줬다. 그중에 선택한 학교에서 하나님의 자녀 우쓰쓰를 만났다. “중국여학생이 달력에 한글로 인쇄된 요한복음 3장 16절을 찢어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그걸 읽어보라고 했어요.” 딸은 우쓰쓰와의 첫 만남을 그렇게 전했다. 알고보니 그 학생 가족은 중국 문화혁명 당시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초기 기독교인이었다. 딸은 우쓰쓰 가족의 보호아래 3년 동안 학교를 다니고, 베이징사범대학으로 가게 됐다.
두 번째는 어느 날 딸이 사는 집 전화선이 칼로 끊어진 사건이었다. 딸에게 해를 끼치려고 누군가 자른 게 분명했다. 딸은 두려운 심정에 울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중국 친구의 도움으로 공안(경찰)에 신고했고 10여 명의 공안이 와서 조사했으나 알아낸 건 없었다. 중국으로 갈 여력이 없던 우리 부부는 밤낮으로 기도에 매달렸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두 달째 됐을 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딸아이가 세 들어 사는 아래층의 조선족 부부가 눈물을 흘리며 용서해달라고 찾아 왔단다. 부부는 혼자 사는 딸아이를 돌봐준다며 평소 친절을 베풀고 금전을 요구하다 겁을 주려고 이런 짓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병원에 가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으로 얼마나 아팠던지, 나가지도 않던 중국인처소교회에서 교우들과 함께 기도 중에 회개가 터져 이 같은 일을 고백한 것이다. 우리 가족은 이때 중보기도의 강력한 능력을 체험했다. 서울에서 기도할 때 바다건너 중국 선양에서 이 같은 역사가 일어났다.
세 번째, 딸은 베이징에서 1년 동안 유학생반을 거쳐 중국인만 들어갈 수 있는 본과에 정식 입학했다. 그것도 장학금을 받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 일등하게 돼서…. 이제 중국인반으로 가면 정말 장학금은 생각하기 힘들다고 했는데, 지난 1년 동안 유학생반에서 거둔 성적으로 이렇게 받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는 거 같아요. 엄마아빠도 고맙고 사랑해요.” 2007년 10월 16일 딸이 내게 보내온 이메일 내용이다.
나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체험을 통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하신 그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긴다.
이제부터 역경의 열매에 게재하는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의문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나 자신도 그 당시에는 그랬으니까. 돌이켜보니 모든 키워드는 ‘순종’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종식 <3> 낮술·담배 하던 젊은 날… 폐 자연치유 뒤늦게 발견
선교사 검진 때 결핵 완치 흔적 나와 “하나님은 치료자” 은혜에 눈물로 감사
사랑의 크리닉 부원장 이태성 박사가 필자의 흉부와 목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있다. 우측 폐는 결핵을 앓았지만 자연치유 됐다. 오른쪽은 위장과 대장의 내시경 사진으로 나이에 비해 깨끗하다.나는 48세에 선교사로 소명을 받고 55세까지 7년간의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금세 선교지로 나갈 줄 알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캄보디아의 풍토 속에서 잘 견뎌낼 수 있을지 건강에 확신이 없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의 부르심을 통해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깨달음을 주셨고, 아주 특별한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2007년 2월 11일 주일이었다. 성령께서 들려주신 생생한 음성이 있었다.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출 7:7)는 사실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렇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40년간 수명이 연장됐다. 그래서 120세에 사역을 마칠 때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않은” 건강한 모습이었다(신 34:7). 누구든지 하나님이 택하시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건강도 지키시고 생명도 연장해서 쓰신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모세를 통해서 내려놓음과 사역, 건강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기쁨으로 나머지 훈련과정에 임할 수 있었다.
2009년 8월 10일 장기선교사 정밀검진을 받는 날이었다. 수십 가지에 이르는 종합정밀검사에서 뜻밖에도 오른쪽 폐에 모래알처럼 무수히 많은 구멍들이 뚫려있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흉부 엑스레이 검사를 담당한 의사는 나에게 언제 결핵을 앓은 적이 있는지 물었지만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 어째서 직장건강검진에선 이런 상태가 발견되지 않았을까. 나 역시 궁금했다. 자연치유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지만 정확한 원인과 결핵균 활동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예정에 없던 CT촬영과 가래검사를 추가하게 됐다. 모든 폐기능은 정상이었다. 병원에서는 CT촬영 동영상과 진단서를 영문으로 작성해서 한 장의 CD로 만들어줬다. 왜냐하면 이런 의학 장비가 없는 선교지에 가면 엑스레이검사만으로는 폐결핵 환자로 판명돼 추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오십 중반의 나이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위장과 대장이 깨끗했다. 장기 내부를 촬영한 사진들을 보여주며 설명하는데,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모든 것이 좋았고 윤기가 흘렀다.
회심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술을 무척 즐겼다. 의사들이 볼 때도 심각한 알코올중독 상태였다. 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고 나중에는 근무시간에도 술 생각이 나서 참을 수 없었다. 점심이면 이런 저런 술자리 핑계를 만들어 소주 한 병씩을 비울 정도였다. 여기에 하루 두 갑 이상 담배를 피웠으니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나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치료자이시다. 나같이 오래된 중고품을 택하시고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게 여러 곳을 고치셨다. 의학적으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나의 경우를 보며 의사는 “오늘의 기적이 내일은 과학”이라고 말했지만, 나와 같은 경우가 과학적으로 입증될 쯤에는 믿기지 않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영원하다. 나는 이렇게 치유하신 하나님 은혜 가운데 캄보디아 선교지로 출발했다.
***[역경의 열매] 김종식 <4> 마을에 번진 뎅기열… 기도로 낫자 하나둘 교회로
벙어리·앉은뱅이·뇌종양·시력 이상… 치유의 역사 앞에 신앙 고백 이어져
김종식 선교사가 뎅기열에 걸린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고 ‘여호와 라파’ 기도를 하고 있다. 아이가 회복되자 엄마는 가족과 함께 교회에 출석했다.캄보디아는 4월 건기 때 기온이 43도까지 치솟는다. 뜨거운 날씨만큼 풍토병도 많다. 요한계시록에는 사탄 마귀의 형상이 ‘머리가 일곱 개 달린 뱀’으로 기록돼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뱀이 조상신이며 부처의 수호신으로 절마다 자리를 잡고 있다. 여기에 온갖 우상과 정령까지 숭배의 대상이다. 1만4000개 마을이 절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고 반경 2㎞ 이내엔 어떠한 종교시설도 허락되지 않는다.
2010년 6월 8일에 캄보디아에 도착한 나는 1년 동안 현지 언어훈련을 받으며 뚜올살라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게 됐다. 하나님의 계획은 참으로 오묘하셔서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 7000명’을 남겨 두셨던 것처럼, 뚜올살라 마을의 썸쏘완을 만나게 하셨다. (나중에 다시 소개하겠지만, 농부 썸쏘완은 나와 함께 예배당을 짓고 프놈펜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마을엔 뎅기열이 번져 허약한 아이들이 몇 집 건너 하나씩 누워있었다. 선교사인 내게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여인들이 많았다. 나는 돈 대신 기도해 주었다. 그동안 하나님 은혜로 많은 치유의 역사가 있었다.
뚜올살라마을 컨와엔(58)은 에이즈환자다. 한 달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보건소에 가서 피검사를 해야 한다. 자녀들까지 에이즈 양성반응을 보이는 수직감염자였다. 이처럼 험난한 삶을 살았던 그녀가 예수를 믿고 성경을 가장 많이 읽는 여인으로 바뀌었다. 믿음의 기도는 벙어리에 앉은뱅이이며 오른쪽 팔까지 선천적 불구로 태어난 그 여인의 세살 된 손녀를 말하고 걷게 했다. 가족이 손녀와 함께 교회에 찾아와서 기적을 간증했다.
끄라옥 마을 눈쎄(40)에겐 열살 아들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한쪽 몸이 마비되고 말도 못하고 혀가 굳어 음식도 못 넘겼다. 3개월 만에 가죽과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없는 돈에 프놈펜 깔멧병원까지 갔으나 머리에 종양이 있어서 그렇다는 진단을 받았다. 때마침 마을전도에 나섰다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기도하자 아이는 나았다. 그 후 아버지와 아들이 주일예배 때 하나님이 고쳐주셨다고,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고 간증했다.
메잉끼응(18)은 8세 때 눈병을 앓았다. 그동안 네 군데 병원을 다녔고 나중에는 안경까지 썼으나 사물이 잘 보이질 않았다. 12세 나이에 봉제공장을 다니다 13세 때 예수를 믿게 됐다. 마을에 교회가 개척된 이후 지금까지 찬양으로 섬기는 자매다. 어느 날 자매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그 후부터 자매의 믿음은 점점 더 강해져서 그녀의 눈이 나았다. 의사는 자매의 눈에 이상이 없다고 했다. 자매가 결혼할 때는 절공동체 마을사람들 앞에서 예배로 신앙을 고백했다.
우상숭배를 하던 나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셨으며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지금도 나와 같은 이들에게 이렇게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 보이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없는 그들은 “너희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고 묻는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기에, 지금 함께 계신다.
***[역경의 열매] 김종식 <5> 너무 고됐던 첫 교회 건축… 어금니 4개나 빠져
직접 자재 사서 운반하며 3000달러 절약, 뇌혈관 검사하려다 신학교 건축헌금 내
두 번째 교회 건축을 마친 뒤, 아끼고 모은 3000 달러를 프놈펜장로교신학교 건축헌금으로 전달했다. 캄보디아 장로교독립노회장 김항철 선교사, 신학대 김재규 총장, 김종식 선교사(왼쪽부터).나는 한 마을 한 교회(One Church, One Village) 전략으로 복음이 전해진 마을에 맞게 예배당을 건축한다. 교회 이름 앞에는 마을이름이 붙어 있다. 뚜올살라 마을과 스떵쯔러우 마을 그리고 뚠래찌윗 마을 3곳에 그리스도열매교회가 있다. 그중에서 2곳은 직접 자재를 사서 나르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건축했다. 교회 건축에는 유독 고난과 역경이 많았다.
2011년 8월 첫 교회에 이어서 2015년 3월에 두 번째 건축을 마쳤을 때였다. 두 곳 모두 함께 일했던 메찌응(십장)이 “이 정도 규모면 3000달러를 벌었어야 하는데 선교사가 자재를 일일이 사주는 바람에 그만큼 벌지 못했다”고 했다. 정말이지 공사를 마쳤을 땐 딱 그만큼이 남았다. 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첫 교회 건축 때는 매일 비가 오는 우기에 건축자재를 사서 날랐다. 마을까지 2시간씩 왕복 4시간을 비에 젖은 진창길을 다녀야 해서 아찔할 정도로 위험한 적이 많았다. 육체적으로 힘들어 그랬겠지만 하루아침에 어금니 4대가 빠졌다. 밥을 물에 말아 삼키면서 건축을 마쳤다.
두 번째 건축 때 완공을 며칠 남겨두고 혈압이 급상승하더니 한쪽 눈에 사물이 둘로 보였다. 구토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뜨거운 날씨 탓에 일시적인 현상으로 여겼으나 의사들은 위험한 상태라고 했다. 발견된 고혈압도 문제지만 여러 가지 이상증세가 나타나서 뇌혈관 조영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두 달 전에 유사한 증상으로 쓰러진 선교사가 있었단다. 이곳엔 장비가 없으니 빨리 한국으로 가라고 강권했다. 환자보다 의사들이 더 난리였다.
왕복항공료에 MRI 비용을 더해보니 대략 3000달러가 나왔다. 모든 것을 후원에 의지해오던 선교사에겐 큰 부담이었기에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렇게 연약한 부분을 드러나게 하시고 필요한 금액을 예비해주셨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감사기도를 드릴 때 마음 안에 음성이 들렸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거니.” 하나님 다 아시면서 왜 여쭤볼까. “병원 가려 합니다.” 그렇게 말씀드릴 때 프놈펜장로교신학교가 떠올랐다. 당시 나는 사역자 두 명을 신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한 명은 월요일에 학교를 가서 금요일에야 마을로 돌아온다. 교실 한 칸을 기숙사로 사용할 만큼 셋방살이 학교는 비좁아 빚을 내어 건축을 하고 있었다. 학교와 교수 선교사들에게 늘 빚진 마음이어서 일찌감치 건축헌금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하나님은 병원가려는 비용을 건축헌금으로 드리라는 마음을 주신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순종하면 된다. 어차피 나이 많고 중고품인 내 몸은 하나님이 다 아신다. 그동안 여러 번 고쳐주셨기에 이번에도 고쳐주실 줄 믿고 아내와 함께 학교를 찾아가 3000 달러를 헌금으로 드렸다. 이 후 이야기지만 한국 강남성심병원에서 MRI를 찍을 수 있게 됐고 결과는 멀쩡했다. 머릿속 혈관들이 밧줄 굵기로 보일만큼 크게 찍은 사진을 처음 봤다. 막힌 곳 하나 없이 깨끗하단다. 모두 하나님이 하셨다.
이 글을 연재하게 된 국민일보에는 역경의 열매가 있는데 달리 표현하면 순종의 열매 아닐까. 역경 앞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오직 순종으로 그 폭풍을 받아 넘길 때 믿음의 뿌리는 깊어지고 그 열매는 달고 향기가 있으며, 그 씨앗은 꿈을 품고 있어서 어디든 버려지기만 해도 자라서 복음의 열매를 맺는다. 코람데오!
“가서 열매 맺어라.” (요 15:16)
***[역경의 열매] 김종식 <6> 8박10일 전도집회… 첫날 1500명 영접기도 받아
집회 전날 간증책자 먼저 배포하니 효과… 선교사들 요청으로 책자 지금까지 쓰여
뚜올살라 마을 교회자매들이 이웃 마을에서 전도용 간증책자를 나눠주며 오후에 있는 간증집회에 초청하고 있다.몇 년째 캄보디아 사역현장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기적을 많은 사진과 함께 간증책자로 만들게 됐다. 첫 번째 책은 ‘나는 예수를 만났다’, 두 번째 책은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당신의 인생이 바뀝니다’, 세 번째 책은 3권 시리즈로 ‘지금 예수를 만나세요 당신의 인생이 바뀝니다’였다.
간증책자를 만드는데 영적 공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뱀의 움직임을 글자로 형상화한 캄보디아 문자 ‘크마에’도 어렵지만, 작은 인쇄소로 넘겨진 원고는 컴퓨터 모니터로 볼 때는 이상이 없었으나 막상 테스트인쇄만 하면 사진이 시커멓게 나오는 것이었다. 책자에는 간증자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사진이 많이 실려 있었다. 그때마다 수정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20년 경력의 사장과 직원들은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나중에는 더 이상 못하겠다며 다른 인쇄소로 가라고 했다. 인쇄 거절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전기조차 생산되지 않아 이웃나라에서 송전을 받는 캄보디아의 불완전한 전압만큼이나, 불완전한 제작과정에 감춰진 문제들을 성령의 지혜로 알게 되고 해결하기까지는 두 달 반이 걸렸다. 후원에 의지해야 하는 제작비 마련에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령께서 주신 감동을 따라 초판 2만부를 인쇄했다.
한국에서 온 10명의 예수제자학교(JDS) 학생들과 8박10일 여정으로 5개 마을과 2개 학교를 돌며 ‘내가 만난 예수’ 간증집회를 하게 됐다. 첫 번째 방문한 발랑마을은 캄보디아 동쪽 끝 베트남국경 가까이에 있다. 전체 인구는 264가정에 1247명(여자 623명, 남자 391명, 어린이 233명)인데 과부가 많았다. 내전으로 국기가 5번이나 바뀐 캄보디아 근대역사만큼이나 사람마다 깊은 상처가 있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마을 집회에는 하루 전에 간증책자를 배포해서 사진과 글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토록 했다. 마을이장 집 마당에 장소를 마련했는데, 얼마나 많이 모였던지 놀라웠다. 한국에서 온 분들의 간증과 복음이 증거 되고 영접기도를 하게 됐다. 기도를 받던 할머니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이 말이 “왜 이제 왔어요, 왜 이제 왔어요”로 들렸다. 순간 목이 메이고 가슴이 먹먹했다. 눈물이 났다. 이날 많은 이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간증책자를 개발하고 2000부를 인쇄해 사용한 첫 번째 전도집회 때 1500명이 영접기도를 받았다. 2차 인쇄 때는 간증도 20쪽으로 늘었고 6000부를 인쇄해 하루만에 5800부가 여러 선교사들 요청으로 곳곳으로 전해졌다. 3차 인쇄에서는 2만부를 찍어 지금까지 캄보디아 선교현장에서 쓰고 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놀라왔다. 무엇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여건은 아니지만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해결했다. 간증책자는 이처럼 하나님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캄보디아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94년 전인 1923년 1월이었다. 미국인 아서 하몬드 선교사에 의해서다. 이제 한인 선교도 24년째가 됐는데 이 작은 간증책자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해 개신교 복음화율 1%대를 넘을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길 원한다.
***[역경의 열매] 김종식 <7> 여공 대신 신학생으로, 농부에서 동역자로
8년째 청년들 제자로 양육… 현재 14명 한국 성도들 후원 있기에 가능한 일
10대부터 봉제공장 노동자, 외국인주택 가정부, 식당종업원 등을 전전하던 티어리가 프놈펜장로교신학교를 졸업했다. 아내 권찬식 선교사, 티어리, 김종식 선교사.(왼쪽부터)하나님은 캄보디아에 대해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라고 하셨다. 새 예루살렘으로 회복시키신다는 말씀도 주셨다. 그 말씀으로 8년째 젊은이들을 제자로 양육하고 있다. 몇 사람 이야기로 하나님사랑을 전한다.
런네악스머이를 처음 만난 건 그녀가 열네살 때였다. 뚜올살라 마을에 뎅기열이 퍼져서 기도해주러 갔을 때다. 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병원비와 장례를 치르느라 2000 달러의 빚을 졌다. 농장에서 일하는 자매 엄마의 하루일당은 5달러. 지금도 10년이 더 된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늘 근심뿐인데 예수를 믿고 달라졌다. 자매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있어 봉제공장 대신 중학교로 보냈다. 자매는 어려서부터 굶거나 참는 것에 익숙해져 몸이 아파도 내색하지 않았다. 십리길 학교까지 자전거로 다니다 의식을 잃고 길에 쓰러진 적도 있었다. 화장실에서 깨어나지 못한 적도 있다. 누구도 이런 사실을 몰랐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자매가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성령께서 네가 아프다고 하신다. 배 아래쪽이라고 하셨다.” 자매는 깜짝 놀랐다. 소변볼 때마다 아팠지만 돈이 없는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 부부는 자매를 프놈펜 헤브론병원으로 데려갔다. 엑스레이, 복부초음파에 피검사도 했다. 그때 자매는 혈액형이 A형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요로감염이 깊어지고 있었다. 치료와 함께 영양제와 음식, 생수를 계속 공급해 회복됐다.
자매는 교회에서 일대일 제자훈련을 마치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돌보며 찬양대로 섬긴다. 공장을 다니느라 21세의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9월이면 프놈펜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해 사명자로 교육을 받는다.
하나님은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고 순종훈련을 하던 7년 동안 딸을 중국에서 보살피시며 대학까지 졸업시키셨다. 우리 부부는 딸을 중국으로 보내고 7년 동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런네악스머이를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그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눈물만 날 뿐이다.
이 밖에도 런네악스머이의 친구 야나는 프놈펜 국제대학 3학년이 됐다. 티어리는 봉제공장에 다니다 지금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복음전파 사역을 함께하고 있다. 첫 교회 예배당을 함께 건축한 마을농부 썸쏘완은 48세에 신학을 시작해 4년 반 만에 졸업하고 나와 함께 사역하고 있다. 메잉끼응은 13세에 만나 19세에 결혼했다. 25세의 남편 쏙림과 일터사역자로 일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21세 르언달린 역시 남편과 함께 제자훈련을 받고 일터개척을 준비하고 있다. 쨘다는 18세다. 적성에 따라 직업훈련을 받고 있다. 이들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예루살렘 ‘헵시바’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뚜올살라 마을 그리스도열매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신학생과 중고등학생, 직업훈련생은 모두 14명이다. 우기 때 내린 비로 농사지어 어렵게 사는 마을 교회에서 한 달 헌금으로는 신학생 1명 학비조차 대기 어렵다. 그런데 매달 어떻게 지원이 가능한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다. 여러분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고 계신다.
***[역경의 열매] 김종식 <8> 7년간 104개 학교에 우물 뚫어… 현지 정부서 훈장
완성되면 전교생 모여 감사예배 드려… 인근 승려도 예배 듣거나 전도책 받아가
캄보디아 동쪽 국경지역 껌뽕뜨로바엑의 한 중학교 학생들에게 영접기도를 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다른 초등학교에서 복음을 전할 때 찾아온 캄보디아 승려.나는 2016년 2월15일에 캄보디아 국가재건공로훈장을 받았다. 등급은 ‘메다이미어’인데 번역하면 금장이라고 할까. 어쨌든 꽤 긴 이름의 훈장이다. 불교국가가 기독교 선교사에게 훈장을 준 사연은 이렇다. 캄보디아에선 ‘외국인을 3년 동안 지켜본다’는 말이 있다. 진정성에 대한 문제인데, 나는 복음의 접촉점으로 시골에서 우물을 파왔다. 대부분의 학교가 절 안에 있고 보통 100명에서 600명의 학생들이 다닌다.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부모들에게도 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시작된 우물파기는 아이들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6개월 우기에는 웅덩이 빗물을 사용하지만, 건기에는 물이 없어 화장실조차 가질 못한다. 특히 여학생들의 고통이 심하다.
우물은 반드시 70m 깊이로 뚫었다. 그래야 물이 마르지 않는다. 7년(84개월)동안 한 달에 한 개 이상 104개를 뚫었다. 훈장공적조서를 보게 됐는데 내 행적과 학교별로 우물깊이, 설치된 물탱크 등 부대시설과 사용인원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나의 행동을 누군가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물이 완성되면 전교생이 모여 감사예배를 드린다. 장소가 절이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왜냐하면 교장과 선생님들, 경찰관들과 지역지도자 모두가 학부모였기 때문이다. 큰 확성기를 사용해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이야기 소책자를 나눠준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에 영접기도를 하게 되는데, 기도는 나를 따라서 소리를 내어 하므로 어떤 아이들은 입도 떼지 못하지만 그보다 많은 아이들이 순수하게 예수님을 영접한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고 하셨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이때의 고백과 기억이 훗날 그들의 인생을 바꿀 것이다.
이제까지 3만여명이 우물의 혜택을 받았고 복음을 들었는데, 더욱 감사한 일들이 있다.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절 안쪽 여기저기서 승려들이 확성기로 들려오는 복음에 귀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학교선생님들에게 나눠준 예수님이야기 책자를 가져가는 승려도 있다. 어떤 학교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예배에 참석해서 복음을 듣기도 한다. 나는 그 심정을 이해한다. 진리를 찾아 갈등하고 방황하다 회심한 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지금 예수를 만나세요. 당신의 인생이 바뀝니다’ 책자를 여유 있게 학교에 남겨놓고 온다. 성경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는데, 나중에 승려 한 명이라도 책자를 가져가서 그토록 찾던 진리를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우물파기를 기뻐 받으시고, 지난 7년 동안 한 번도 재정이 마르지 않게 하셨다. 어떤 권사님은 서울에서 간증을 보내주셨는데, 우물파기에 동참하고 86세인 어머니 다리와 허리가 쭉 펴진 사례도 있다. 왜 그런 일이 생길까. 뙤약볕 아래 갈증 가운데 학교까지 걸어 다니는 아이들, 물이 없어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던 아이들, 그래서 모두 속앓이를 하는 선교지 어린 영혼들이 감사해서 드리는 통성기도. 하나님은 기도 중에 어떤 기도를 먼저 들으실까. 나는 감사의 기도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잠 19:17).
***[역경의 열매] 김종식 <9> 인터넷 세상에 ‘복음의 집’ 세워
인구 1600만에 휴대폰 2100만대 보급 / 性만 넘쳐나… 선한 콘텐츠로 씻어내기로
간증과 신약성경, 찬양 등이 담긴 ‘복음의 집’ 인터넷사이트. 아래 사진은 아내 권찬식 선교사가 한국 방문 중 지하철에서 만난 캄보디아 이주민노동자 자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며칠 째 성령께서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을 반복해서 주셨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그중에서도 내게 주신 감동은 ‘집’이었다. 영어성경(NIV)은 ‘당신과 당신의 가족(you and your household)’이라 했다. 왜 이 말씀이 계속 반복될까.
순간 깨닫게 되는 게 있어서 이 말씀과 관련된 도메인을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그래서 확보한 주소가 굿뉴스닷하우스(www.goodnews.house)와 굿뉴스닷아시아(www.goodnews.asia)다. 이날은 2015년 8월 13일 새벽 1시였다. 이렇게 해서 스마트폰으로 복음을 전하는 캄보디아어 사이트 ‘복음의 집’이 탄생했다.
캄보디아는 1인당 국민소득이 1100달러에 불과하지만 인구의 139%에 달하는 휴대전화 2100만대가 보급돼 있다. 그중에서 1000만대가 스마트폰이다. 중국산은 100달러도 안 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75만 봉제공장 젊은이들과 115만 명의 해외노동자의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졌다. 이제는 손 안에서 고향 집으로 연락하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문제가 심각하다. 구글에서 ‘쁘레아예수’를 검색하면 3만6000여 기사가 뜨지만, 플러으펫(性)은 1080만개의 사진과 동영상이 뜬다. 이런 환경에서 첫 교회가 세워진 뚜올살라 마을 자매들도 공장을 다니다가 16세, 17세에 아기엄마가 된다. 어쩔 수 없이 합법적인 나이인 18세로 서류를 고쳐 결혼식을 치른다. 이젠 먹고 사는 게 문제다. 주일에 예배도 드리지 않는다. 쉬지 않고 일해야 휴일수당을 포함해 200달러쯤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음이 전해져도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새로운 선교패러다임이 요구된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너무 커서 인터넷사이트 제작비용이 굉장하다.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내게 그만한 돈이 있는지 물어본다. 그들은 마태복음 6장33절을 세상 문법으로 ‘외상 거래’ 하자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면, 그것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확실한 약속의 말씀이 지급이 불확실한 ‘백지수표’ 정도로 보이는지 먼저 만들려고 하지를 않는다.
교회사역을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틈틈이 필요한 콘텐츠를 준비했다. 딱 1년 만에 최고의 전문가를 만나 복음의 집을 인터넷세상에 세웠다. 성령께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합 2:14) 선한 콘텐츠로 악을 씻어내라 하셨다. 젊은 세대의 특성에 맞게 개발된 사이트에는 한국, 캄보디아, 태국 등 국적은 다르지만 예수를 믿고 인생이 바뀐 사람들의 간증과 수많은 사진들, 찬양, 말씀을 보고 듣고 영접기도를 할 수 있다. 국내 봉제공장과 해외이주민노동자로 떠나간 젊은이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있다.
캄보디아라는 영적 황무지에서 주신 말씀 하나로 온갖 고난 끝에 완성한 이것 또한 역경의 열매다.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 24:6)
***[역경의 열매] 김종식 <10·끝> 아브라함의 늙은 종처럼 충성하며 사역할 것
봉제공단 밀집지역 전도 새 비전 품고 쉼터교회 ‘굿뉴스하우스’ 건축 준비 중
굿뉴스하우스 예비부지 주변은 모두 닭장 같은 쪽방들이 자리 잡고 있다. 쪽방 사람들은 월말이 되면 돈이 떨어져 물로 공복을 달래려고 수돗가에 줄을 선다. 오른쪽 사진은 굿뉴스하우스 조감도.오늘로 역경의 열매 10회 연재를 마친다. 나는 회심이후 2003년 4월27일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세례 받았다. 당시 고(故) 하용조 목사님은 배우든지 가르치든지, 7년 된 교인은 떠나라 하셨다. 나는 세례 받고 말씀대로 7년만인 2010년 6월 10일 캄보디아 선교사로 떠나게 됐다. 그리고 2017년 6월 다시 7년이 됐고 ,역경의 열매를 통해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됐다.
이날까지 같이해온 나의 동역자 아내에게, 그리고 떨어져 있지만 늘 든든한 후원자가 돼준 한국의 두 딸과 사위들, 가족에게 감사한다. 파송교회와 파송단체, 기도와 후원의 동역자 모든 분께 감사하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창 24:2)처럼 주인을 위해 충성하는 모습으로 계속 사역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오늘이 있기까지 나를 살려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새 일에 함께하도록 불러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린다.
나는 제2의 삶을 살고 있고 하나님은 2기 사역 비전으로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요 5:17)하신 말씀 붙잡고 나 역시 따라가기 쉽지 않지만 충성을 다하겠다. 그리고 허락하시면 여러분께 그 소식을 전할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복음 전하기 어려운 지역 중에 하나가 국가기간산업인 봉제공장이 밀집된 공단이다. 전체 수출의 81%를 차지하는 1088개 공장에 전국 25개 주에서 올라온 자매와 형제들 75만 명이 있다. 한 달 200달러 미만의 급여를 받으며 월세 50달러 쪽방에 5∼6명씩 모여 생활한다. 이들은 수시로 모이고 함께하다가 미련 없이 떠나기에 복음을 전하기도, 열매 맺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들이 중요하다. 때가 되면 결혼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때 복음을 들고 함께 가길 원한다. 내가 만난 예수를 친구와 가족과 친척과 동네사람에게 전하기 소망한다.
성령께서는 이들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회복시킬 ‘헵시바’라 하셨고 복음을 전하도록 오랫동안 준비시키셨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집 비전을 주셔서 이미 스마트폰 사이트가 운영되고 있다. 모두 캄보디아어로 지원되지만 사진이 많아 이해하기 쉽다. 또 철저하게 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지금 예수를 만나세요. 당신의 인생이 바뀝니다’ 전도책자가 시리즈로 만들어져 한 번에 2만부씩 인쇄돼 전해지고 있다.
쪽방촌이 밀집된 지역에서 평일엔 점심 한 끼와 기술을 가르치며, 주일이면 예배드리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쉼터교회 건축이 준비되고 있다. 필요한 재정도 3분의 1은 모였다. 쌀 한 톨, 벽돌 한 장, 철근 한 근, 시멘트 한 포대씩 하나하나 더 모아야한다. 지난 연재기간 동안 하나님이 일하심에 많은 분이 용기를 얻었다 하신다. 또 격려해주시기도 했다. 기도와 후원과 동역으로 아버지와 함께 일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 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