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형에게(대구사향곡大邱思鄕曲) - 이종주 前 대구광역시장 자서전 '염평봉직(廉平奉職)'에서 단편 소개
대구사향곡(大邱思鄕曲)은 이종주(1935.3.27∼2023.5.17) 前 대구광역시장께서 1991년 영주시장 당시 쓰신 글이다. 1960년 대구시 공무원을 시작으로 1995년까지 많은 분야에서 근무를 하셨다.
주요 직함을 보면 대구시 공보계장, 총무과장, 기획담당관, 동구•중구청장, 보건사회국장, 내무국장, 기회관리실장까지 역임하신 후 영주•구미•포항시장과 경북 기획관리실장에 이어 대구부시장과 제27대 대구광역시장까지 36년간 대구를 위해 일해 오셨다.
또한 이 시장께서는 문학, 미술 등에도 남다른 예술성을 지닌 분으로 ' 염평봉직(廉平奉職)'이란 이름으로 2004년에 자서전을 내었다. 그 중 'T형에게(대구사향곡大邱思鄕曲)'는 한 때 대구를 떠나 영주시장 재직 시절, 대구를 항상 그리워하며 T형으로 이름하여 남겨놓은 단상(斷想)으로서 자서전의 한 편이다.
여기 동우회 카페에 감동적인 이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많은 동우회 회원들과 후배들은 이종주 시장의 대구 사랑을 통하여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고, 당시 대구의 산 역사를 뒤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대구발전을 위해 헌신과 노력은 물론, 직원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이종주 시장님은 우리들의 대 선배로서 모두의 자랑이요, 자존심이다.
이 기회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이종주시장님을 추모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구행정동우회 사무처, 카페영상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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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형에게, 대구사향곡(大邱思鄕曲)
이 종 주
동네 밖을 모르며 그저 마을 안을 오르내리며 살아온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바깥세상을 전혀 몰랐으니 무엇을 했고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아쉬운 것인지, 무엇이 그리운 것인지를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개구리가 어쩌다가 우물 안을 뛰어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 멀지는 않지만 그래도 환경을 달리하고 생활이 달라져 버렸으니 이제야 그때 그 우물 안에서 이뤄놓은 일들이 생각나고 좋았던 것, 보람 있었던 것이 생각나고 아쉬운 것이 생각나고, 그리운 것이 생각납니다. 우리들이 지혜와 정성을 모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60년대 감히 교향악단을 만들고 뿌리를 찾겠다는 마음으로 시정(市政)에 처음으로 3권의 시사(史)를 만들어 출판회를 하던 날 우리는 대구를 다시 찾고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관풍루(觀風樓)를 복원하고 시민회관, 복지 회관, 장애자복지회관, 충혼탑, 선열묘지의 성역화, 올림픽 기념관을 짓고, 2.28 30주년을 재조명하는 기념탑을 훌륭하게 이전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파계사(寺)의 옛 모습을 찾고 동화사(寺)의 통일대불統一大佛) 건립을 위해 합장하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고 또 창조하는 일, 그것은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지혜와 정성이 뒤따라야 하고 엄청난 예산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 훗날의 고귀하고 자랑스런 우리의 유산이 될 것입니다. 그 문화유산에서 숨 쉬고 있을 혼을 생각하고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보다 충실하게 보다 완벽하게 정성을 쏟아 넣었는지를 돌이켜보게 됩니다. 그 누군가가 했어야 했는지는 모르지만 손길이 가고 동분서주하며 관여했던 보람을 그리며 못내 아쉬워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흐뭇해하기도 한답니다.
T형,
우리가 함께 오손도손 우리 모두의 마음을 합치고, 굳게 닫아버린 이웃의 담장을 대문을 활짝 열어 보자던 반상회는 잘 되고 있겠지요. 새마을, 새 마음, 새 질서, 통일을 다짐하고 그리고 두 차례의 올림픽을 위해, 그리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자며 수없이 함께 모여 절규하던 그때의 함성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달구벌축제로 모두가 칠성원두(七星原頭)로 두류광장(頭流廣場)으로 뒤쳐 나와 신나게 한판을 벌이던 일이 그림처럼 머릿속에 되살아납니다. 자랑스런 시민에게 메달을 목에 걸어주며 뿌듯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86.88 두 올림픽 대구대회의 하나가 되었던 달구벌의 모습, 그때 우리는 고통도 없고, 장애도 없고, 보람만 있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환희 의 그것이었습니다.
T형,
2천 년대의 대구 도시기본계획을 짜느라 모이고 토론하고 이견들을 맞추느라 무척도 고심했습니다. 달성공원, 두류공원, 앞산 · 팔공산 자연공원이 개발되기까지의 숱한 사연 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구의 젖줄인 금호강 • 신천의 개발은 그 옛날 어릴 적의 뱃놀이를 그리며 과감하게 투자를 했지요. 마음은 벌써 시를 쓰고 낚시질을 하고 있습니다. 신암·동부·남부지구의 구획정리사업은 대구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으며 이현공단·성서공단·월배공단의 조성, 종합유통 단지의 구상은 내륙공업도 시(市)로의 위용을 갖추게 했습니다. 칠곡지구 개발계획은 집 없는 이웃을 위한 노력이지만 2천 년대 도시구상 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모두는 가난한 도시, 무질서한 도시, 한정된 도시를 살찌게 하고 넓혀가며 풍요롭게 아름답게 만들어 보자는 의지와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나의 도시가 아니라 내일을 살아갈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영원한 고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그림인지 잘못된 그림인지는 훗날 많은 사람들이 평가해 주겠지요. 고통스럽긴 했지만 이 모든 계획에 참여하게 된 보람, 또한 평생토록 간직하렵니다.
T형..
1조원의 예산을 시정사상 비로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대견스런 일입니까? 그리고 지하철 시대를 개막한 주역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90년의 대정부 예산투쟁을 위해 오르내린 한양길이 고달프고 고통스럽긴 했지만 몇 차례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1천 7백억 원의 국가예산을 받아오는데 피로를 몰랐습니다. 그저 신나기만 했습니다.
동대구역의 건설, 대구역의 현대화, 사상 처음으로 동신지하상가 조성, 대동·대서로·동서신로의 건설, 팔공산 순환도로의 건설, 팔공로•파계로의 확장, 13.5km의 광로 신천대로의 건설, 구안국도확장, 서부진입 서변 IC, 이현 IC, 남부 IC 건설, 제2 대봉교. 제3 아양교• 무태교의 건설, 이 모든 것이 오늘의 대구를 자랑할 수 있는 도시동맥이기에 마음은 장애 없이 시원하게 뻗어버린 신천대로를 가슴 활짝 열고 달립니다. 대구시보를 읽으며 쾌속의 지하철을 타고 달려 봅니다.
T형,
도시가 안고 있는 빼놓을 수 없는 고민이 무엇입니까? 쓰레기의 매립입니 다. 보잘 것 없는 쓰레기를 싣고 달성군 현풍까지 실어나르며 시민들의 아우 성이 하늘까지 올라갔던 일, 그로 인해 20년을 매립할 수 있는 방천동 매립 장을 7년 동안에 걸려 완성시킨 것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보람입니다. 많은 시련과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누대에 걸쳐 살아온 전답과 마을을 건네준 방천동민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2백억 원의 차관으로 추진한 쓰레기 소각장도 5년이란 세월을 흘러 착공 했지요. 위생처리장의 증설. 오랜 숙원이던 대명천 • 범어천 • 달서천공단천의 복개, 화장장의 현대화 등 수많은 도시의 고민, 그늘진 분야에 정력이 소모되었습니다. 긴 시간이 소요되고 많은 예산이 투입되고, 밀고 당기는 마찰이 있었지만 모두는 대구를 아름답게 하고 건강하게 하였으니 이 분야에 관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T형.
대구의 체육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시청 배드민턴 팀을 창설하여 10 여년 전국체전을 누비던 일, 그로 인해 최고 체육상을 받고 보람찼던 일, 세 차례의 전국체전 대구대회 실무를 맡고 고심하던 일, 체육인으로서의 체육회의 참여, 럭비협회장, 핸드볼팀 단장, 86.88 올림픽 대구대회의 그 벅찬 사무총장직을 맡아 밤낮 없이 뛰었던 일, 생각만 해도 신이 나고 힘이 납니다. 올림픽 대구대회 사무총장직, 생애에 두 번 없을 올림픽을 담당한 영예는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기에 그 고된 과업을 차질 없이 수행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 뜻을 기리는 올림픽 기념관이 머지않아 문을 열겠지요. 고귀하고 값진 문화전당으로 우리 모두 함께 사랑하며 보존해 갑시다.
T형,
몸담았던 그 시절 5백 명 내외의 식구가 8천 명의 많은 식구로 늘어났지요. 상수도본부가 생기고, 지하철본부, 종합건설본부, 보건연구소, 전산본부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업소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산파역, 그 기구 속에서 많은 두뇌들이 시민을 살찌게 하고, 도시를 만들어 가고 있구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가족에서 떨어져 나와버린 자신을 생각 하며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T형.
아쉬웠던 이야기도 많습니다. 대구 상권의 요람이라고 하는 서문시장의 큰 화재는 그 몇 차례였습니까? 재산을 태워버린 상인들의 아우성, 3지구를 태워버리고 복구를 하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웠던 일, 60년대에 있었던 대구의 재앙이었습니다.
온 시가지를 메우며 운전자의 처우를 외쳤던 5.25 택시사건, 우린 그때 전국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노사문제를 경험하게 되었고 그로 인한 후유증. 그로 인한 대구의 인상이 말이 아니었지요. 간첩의 소행으로 막을 내린 미문화원의 피폭사건, 신암동 간첩사건, 이로 인해 우리는 또 그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재산을 소모하고 고통을 참고 견디어야 했습니까.
교복자율화와 더불어 바로 닥쳐버린 '초원의 집' 화재사건,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가슴 아파 했던 일, 그로 인해 대구 위생업계에 불어닥친 시련은 또 얼마나 컸습니까? 소위 말하는 GOGO클럽에다 자각의 교훈을 일깨워준 전국적인 큰바람이었습니다. 철부지 어린 중학생을 태워버린 아픈 상처가 지금도 지워지지를 않습니다.
대구의 명산이요 영산인 팔공산 한 모퉁이를 연 3일 동안 무참하게 태워 버린 적도 있지요. 남녀노소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애태워하며 타오르는 불길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굴리던 일, 홀랑 벗어버린 추했던 모습이 지금쯤은 어느 정도 옷을 갈아입었는지요. 헬기를 타고 내려다보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현기증이 일어납니다. 팔공산·금호강을 축으로 대구를 다듬어 보자던 그 팔공산, 그 팔공산이야말로, 어느 한 구석인들 소홀히 할 수 없으며 헤칠 수는 없습니다. 팔공산의 정기를 머금은 우리들이 아닙니까?
T형.
이제 할 말은 태산 같지만 마지막으로 그리운 이야기로 사연을 맺을까 합니다. 달구벌의 풀 한 포기 돌 하나에도 아끼고 가꾸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비 좁고 허물어진 뒷골목에도 숨결이 있었습니다. 땅을 파헤치고 길을 만들고 다리를 놓는 데 어느 한 곳 무심하지 않았습니다. 금호강 · 신천이 병들어가고 팔공산·앞산이 파헤쳐지는 데 가슴을 태웠습니다. 빌딩이 솟아오르고 자동차가 늘어나고 식구가 늘어나는 데 신이 났습니다. 고통스럽고 짜증스럽고 감당하기 어려웠던 그 많은 사연들도 그리운 옛이야기로 아름답게 그려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하여 이젠 먼발치로만 바라보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나그네란 언젠가는 추억과 낭만을 간직한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했지요.
T형.
부디 몸 건강히 그리고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다시 만나 우리 한 번 부둥 켜 안고 얼싸 춤이라도 추어 봅시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1년, 소백산령 하(小白山下) 영주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선배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