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의 밤
水國秋光暮-넓은 바다에 가을 해가 저무니
驚寒雁陣高-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하늘 높이 날구나
憂心輾轉夜-마음이 우울하여 근심으로 잠 못 이룬 밤
殘月照弓刀-손톱 같은 가는 달빛이 활과 칼을 비추네.
이순신(李舜臣)
충무공 이순신 “자(字)”와 “호(號)” 사망 직전 글에서 찾았다 !!
지금까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으로만 대부분 알고 있었다.
“자(字)”와 “호(號)”가 있는 기록을 보지 못했다.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자(字)는 “여해(汝諧)”
※여(汝)-너여(손아래)
※해(諧)-화하해. 화답하다. 조화되다. 잘 어울리다. 고르게하다.
행동으로 보여 준다. 뜻이다.(국어 한자사전)
“여해(汝諧)”는 “너가 해결할 수 있다”란 뜻이다.
“너가 행동(行動)으로 보여준다”는 뜻이다(갑골문자 해석 인용)
어릴 때 자(字)는 “여해(汝諧)”는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지금 우리나라를 진심어린 통합으로 이끌어 나갈
이 시대의 충무공이 기다려진다.
거짓말로 쳐 바른 구역질나는 쓰레기 같은 정치인들 말고---
이순신 호(號)는 “덕암(德巖)”으로 밝혀졌다.
자(字)인 “여해(汝諧)”와 호(號)인 “덕암(德巖)”에 대한 내용은 아래 두 신문 기사를
읽으시는 것이 필자의 설명보다 더 정확할 것 같다.
요즘에는 전혀 따지지를 않지만 필자 어렸을때만해도 한 사람이 특히 남자가
출생하면 호칭(呼稱)이 4가지가 붙었다.
▶이름(名)-주로 부모(父母)나 조부(祖父)가 지어준다.
특별한 관계로 장래 스승이 될 사람이나 임금이 지어주기도 한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은 임금과 선생님 아버지는
같은 동급(同級)이라는 뜻이다.
이름은 세 사람만이 지을 자격이 있다.
이름도 군사부(君師父)만 부르게 되어 있다.
아무나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우리 직장시절에 주고받은 “명함(名銜)”란 것이 있다.
여기에 “함(銜)”은 입에 물리는 “재갈”을 뜻한다.
말이나 소에게도 함부로 입을 놀리고 물지 못하게 재갈을 물린다.
이름을 함부로 가볍게 부르지 말라는 뜻의 글자다.
허구 많은 글자 중에 “함(銜)”자를 쓴 것은 그만큼 이름은 귀(貴)하다는 뜻이다.
TV제목에 “집사부일체”가 있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자(字)-요즘에는 없어졌지만 지금 50대 필자 아들들은 딱 20세 되는 해에
새 옷 한 벌과 잔치로 성년식(成年式)을 치러주었다.
자(字)는 성년식(成年式)을 치른 아이에게 부담 없이 이름 대신 부르는 명칭이다.
자식들에게 “자(字)”를 지어 주었는데 한 번도 쓰는 것을 못 보았다.
▶호(號)-성년(成年)후에 이름대신에 부잣집 헌칼쓰듯 부담 없이 부르는 호칭이다.
호(號)는 친구가 지어 주기도 하고 자신이 스스로 짓기도 한다.
그래서 명필 김정희 선생은 호(號)가 500여개가 된다고 하였다.
김정희 선생의 마지막 호는 노년(老年)에 과천(果川)에서 살다 생애를 마쳤기
때문에 “노과(老果)”라는 호를 사용 하였다.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奉恩寺) 뒤편 불경을 보관한 건물 이름이
“판전(板殿)”이다.
이 글씨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애 마지막 글이다.
여기에 쓰인 호(號)가 “노과(老果)”다.
김정희 선생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고 묘도 그곳에 있지만 과천에서 71세로
돌아가셨다.
필자의 처음 호(號)는 “우보(牛步)”다.
서예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지어주셨다.
지금은 필자가 지은 농월(弄月)을 많이 쓴다.
어느 해 추석 고향으로 부모님 뵈려 내려가는 길에 차기 밀려 경남 함양
국도로 갔다.
거창군 안의면에서 육십령으로 향하는 국도에 지리산 자락계곡에
농월정(弄月亭) 정자(亭子)가 있다.
찻길이 메워 가다서다가 반복되는 밤길이었다.
지리산 계곡 농월정 아래서 잠깐 쉬면서 바라본 달이 너무 아름다워
필자스스로 호(號)를 “농월(弄月)”을 지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글자대로 설명하면 달과 장난치며 논다는 뜻이다.
▶휘(諱)-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거론할 때 “서거하신분의 휘가 무엇인지요?”
지나간 일이지만 생각만 하면 씁쓰레한 생각이 든다.
한때
김영삼 전 대통령을 YS
김대중 전 대통령을 DJ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JP라 불렀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정치인들은 아호(雅號)를 많이 불렸다.
가장 귀에 익은 호(號)가
우남(雩南) 이승만, 백범(白凡) 김구, 해공(海公) 신익희, 유석(維石) 조병옥,
죽산(竹山) 조봉암 등등 정치인 명사들의 호가 아름다운 노래 가사처럼 많았다.
1970년대에 영문 이니셜(initial)이 등장했다.
쿠바 핵 사태이후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를 “JFK”약칭으로 부른 후였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지금의 국정원)이 정치적인 문제로 제2차 외류(外流)를 하고
귀국하였다.
이 후로 “김종필”의 이름 영문 이니셜(initial)인 “JP”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호칭이 매력이 있었던지 그 후로 이름 있는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고유한 이름과
호(號)를 버리고 영어 이니셜을 불러주기를 바랐다.
심지어 신문기자에게 “꼭 영문 이니셜(initial)”을 부탁하는 촌극도 있었다.
시쳇말로 촌스럽기도 하고 웃기는 얘기다.
YS-(김영삼 전 대통령)
DJ-(김대중 전 대통령)
JP-(김종필 전 국무총리)
MB-(이명박 전 대통령)
아직까지 윤석열 대통령의 영문이름 이니셜(initial)이 등장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필자 개인 생각이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절대 영문 이니셜(initial)을
사용 안할 것이다.)
참고로 역대 대통령 호(號)를 기록한다.
이승만(李承晩)-우남(雩南)
윤보선(尹潽善)-해위(海葦)
최규하(崔圭夏-현석(玄石)
박정희(朴正熙)-중수(中樹)
전두환(全斗煥)-일해(日海)
노태우(盧泰愚)-용당(庸堂)
김영삼(金泳三)-거산(巨山)
김대중(金大中)-후광(後廣)
노무현(盧武鉉)-없음
이명박(李明博)-일송(一松)
박근혜(朴槿惠)-없음
문재인(文在寅)-없음
※이중에서 특이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은 프로 뺨치는 최고급 서예가(書藝家)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였다는 한학자 기록이 있다.
곳곳에 붓글씨를 남겼는데 한번도 “대통령 이승만”이라 쓰지 않고 “우남(雩南)”
호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정치를 떠나 인간적으로 멋있는 어른이시다.
이승만 대통령 이후 붓글씨를 쓴 대통령들은 전부 “대통령”을 “호(號)”자리에 썼다.
굳이 “대통령”이라 표시 안 해도 아는데 참 “촌스럽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그러니까 권력만 말고 멋을 모르는 대통령들이다.
이승만의 “체역집(替役集)” 한시집(漢詩集)이 있다.
주로 옥중 시집인 체역집(替役集)에 160여 편의 한시(漢詩)가 있다.
필자가 다 읽어보았다.
주로 독립운동 시절의 글인데 구구절절 나라를 걱정하는 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필치(筆致)와 난초 그림에도 뛰어난 예술인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마디로 요즘 특히 강조되는
문사철(文史哲-문학.사학.철학)의 소양이 빼어난 학자이시다.
우리나라 대통령들 소양(素養)이 높아야 국민들이 본(本)을 받을 것 아닌가?
그냥 국민들 표 많이 얻어 대통령되었다고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야--
참 촌스럽다는 생각이다.
다 나이 들면 죽는데---
부모들도 IT시대 자식들이라고 스마트폰 컴퓨터에 마껴두고
예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이 들어 늙어지면 멋대로 키운 자식들의 업보(業報)가 다 자신에게 돌아온다.
병들어 외로워 죽고 싶다고 죽지 못하고 세월간것만 후회하고
그때 청승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자식들?
다 부모 하는 짓 보고 자란다!
자식위해서가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 자식 잘 키워야 한다.
이말 예사로 듣지 말기를---
국민들도
대통령 하는 짓 보고 !!!!
이순신 자(字) 호(號) 글 쓰면서 엉뚱한 말만 썼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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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인뉴스(HeadlineNews)
충무공 이순신 “자(字) 여해(汝諧)” 사망직전 마지막 글 찾았다
이순신 장군의 호는 덕암(德巖)이다
한정주 역사평론가
2014.09.11
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⑮
▲ 덕암(德巖) 이순신의 영정
[한정주=역사평론가] 영화 ‘명량’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을 일컬어 흔히 여해(汝諧) 혹은 충무공(忠武公)으로 부른다.
여기서 여해(汝諧)를 일반적으로 이순신 장군의 호(號)로 알고 있지만, 이는 자(字)다.
또 충무공(忠武公)은 시호(諡號)로 정작 그의 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충무공이 태어난 지 442년째가 됐던 1987년 4월28일자 경향신문에서
유인석 기자는 ‘충무공에게도 아호(雅號) 있었다’는 제목으로 이순신의 호가
‘덕암(德巖)’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기사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이순신 장군도 ‘덕암(德巖)’이란 아호를 사용했음이 한 고문서(古文書) 기록에서 밝혀졌다.
28일로 제442회 탄일을 맞은 충무공(忠武公)의 아호(雅號)는 ‘서원겸사기(書院兼史記)’란
필서본(筆書本)(성암고서박물관(誠菴古書博物館) 연구원 김연창(金然昌)씨 소장)에
게재되어 있는데 김씨가 이날 처음 공개했다.
이순신 장군의 아호 ‘덕암(德巖)’은 이 책의 ‘임진왜란록(壬辰倭亂錄)’
절의공신(節義功臣)편에 중봉(重峯) 조헌, 천곡(泉谷) 송상현, 제봉(霽峯) 고경명 등과
함께 덕암(德巖) 이순신으로 쓰여 있다.
교과서, 백과사전, 조선왕조실록 등 모든 충무공 기록에는 지금까지 자(字) 여해(汝諧)나
시호(諡號) 충무공(忠武公)만을 기록해 왔을 뿐 아호(雅號) 덕암(德巖)은 누락돼왔으며
또 학자들도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아호는 없었던 것으로 믿어왔었다.
서지연구가 김씨는 ‘조선조(朝鮮朝) 전란, 임진록(壬辰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정사(正史)만을 더듬어온 지금까지의 이순신장군의 연구도 좋았지만 앞으로
더 자세한 것은 야사(野史) 연구로 보완돼야 할 것’이라며 ‘엄연히 아호가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된 이상 그동안 잘못 전해진 기록들을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아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또 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 박성수 교수(한국사)는 ‘흥미 있는 자료 발굴’이라며 ‘충무공(忠武公)이란 시호에 밀려 아호(雅號) 쯤은 묻혔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림대 최영희 교수(한국사)는 의견이 달랐다. ‘무인(武人)이었던 충무공에게는 아호(雅號)가 없었다’며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회의론을 폈다.”
▲ 영화 ‘명량’ 포스터
이외에도 『소설 임진왜란』을 쓴 김성한씨는 이순신 장군에게는 덕곡(德谷)이라는 호가 있다고 했다.
필자가 보건대 ‘덕곡(德谷)’과 ‘덕암(德巖)’이 어느 곳인지는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 두 호는 그 유사성으로 미루어보아 동일한 지명(地名)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덧붙이자면 ‘여해(汝諧)’라는 이순신의 자(字)는 그의 어머니가 『서경(書經)』에 나오는 순(舜)임금의 “오직 너(汝)라야 세상이 화평케(諧) 되리라”는 말에서 뜻을 취해 지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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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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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운명"…'이순신 마지막' 찾아냈다, 日서 나고 자란 이 사람
중앙일보
2022.12.12 00:32
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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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만4341점.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숫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반환작업을 한지 올해로 10년. 많은 문화재가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이 지난한 작업 뒤엔 조용히 반환에 일조한 이들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제강점기 때 사라진 다보탑 돌사자 세 마리가 일본 어디선가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전역을 훑고 다니는 이부터, 발견한 문화재를 고국에 무상으로 기증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마음을 전한다.
이순신 이름에 정신이 번쩍
지난 9일 오후 교토대(京都大)에서 만난 김문경 교토대 명예교수가 활짝 웃었다. “비과학적인 이야기 같지만 우연은 아닌 것 같다”며 2시간에 걸쳐 공을 들여 설명한 건 ‘대통력(大統曆)’. 대통력은 조선 시대 관에서 금속활자로 찍은 일종의 정부 달력(冊曆)인데, 임진왜란 당시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이 달력을 일기장처럼 사용한 게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를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으로 부른다. 이 달력 일기장이 최근 일본서 발견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문화재 반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김 교수다.
지난 9일 김문경 교토대 명예교수가 자신이 연구하던 교토대 인문학연구소 앞에서 서애 류성룡의 기록이 담긴 달력인 '대통력' 반환 과정을 알려주고 있다. 교토=김현예 특파원
지난 9일 김문경 교토대 명예교수가 자신이 연구하던 교토대 인문학연구소 앞에서 서애 류성룡의 기록이 담긴 달력인 '대통력' 반환 과정을 알려주고 있다. 교토=김현예 특파원
지난 2020년 5월. 교토 고서점조합이 봄 경매 목록을 김 교수에게 보내왔다. 중국 문학을 연구해온 그의 눈에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대통력’이었다. 여기엔 1600년 6월 5일 기록으로 ‘보고에 보니 강항(姜沆·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의병장)이 일본에서 왔다고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금액은 228만엔(약 2180만원)이었다.
환수된 서애 류성룡의 대통력.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사망하기 직전 모습이 적혀 있는데, 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이순신을 일컫는 ‘여해’다. 연합뉴스
환수된 서애 류성룡의 대통력.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사망하기 직전 모습이 적혀 있는데, 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이순신을 일컫는 ‘여해’다. 연합뉴스
선조실록을 찾아보니 같은 내용이 있었다. 관심이 쏠렸지만, 코로나19 봉쇄 상황이라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일 년 뒤인 2021년 가을, 도쿄(東京) 고서점 경매 목록에서 또 같은 책을 발견했다. 이번에도 코로나19로 인해 가보지 못한 채 아는 고서점 주인을 통해 수소문해보니 팔리지 않았다는 답만 들었다.
잊고 지냈던 그 대통력이 다시 눈에 띈 건 지난 4월. 교토에서 봄맞이 고서적 경매가 열려 찾았는데, 책 한 권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앞서 두 차례나 정보를 접했던 대통력이었다. 경매 목록에 없었던 터라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는데 이순신 장군의 자인 여해(汝諧)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초서로 쓰여있었지만 ‘내가 파면됐다는 것을 듣고 여해가 한탄했다’는 문장이 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순간부터 이 대통력에 나온 일자별 특이 행적과 동선을 외우다시피 머릿속에 담았다.
집으로 돌아와 기록을 비교했다. 류성룡 연보와 대통력에 기록된 주요 행적이 모조리 일치했다. 소장 중이던 류성룡 도록 필체와도 비교했다. 필적전문 지인이 필체가 같다는 의견을 주면서 이 책이 류성룡 선생의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김 교수는 그길로 국외소재문화재단에 연락을 넣었고,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을 기록한 류성룡의 대통력은 그렇게 고국으로 돌아왔다.
2005년 충무공 김시민(1554∼1592) 장군 공신교서를 일본 고서점상에서 발견해 알린 이도 김 교수다. 경매에 나온 이 책이 알려지면서 국내에 환수 운동이 일었다. 김 교수는 후지스카 치카시(藤塚隣) 전 경성제국대학교 교수가 수집한 추사 김정희 관련 자료를 모아 교토 고려미술관에 기탁하기도 했다.
“대통력 반환이 운명인 듯”
김 교수는 일본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부친 고향은 전남 해남 문내면 선두리. 울돌목이 있는 바로 그곳이다. 마을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강제 철거됐다. 김 교수는 “당시 총독부가 있던 광화문 경복궁 뒤뜰에 비석이 쓰러져 있는 것을 부친이 발견해 미군에 연락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큰아버지께서 지역 분들과 농악대를 조직해 전국 순회를 하면서 돈을 모아 대첩비가 제자리를 찾았고, 비각을 지키는 어르신들 역시 같은 문중”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임진왜란과의 연결점은 또 있다. 금산 전투에서 의병 700명이 1만5000명의 왜군과 맞서 싸우다 모두 전사했는데, 당시 한 분이 김 교수의 조상으로, 그가 21대손이라고 한다. 김 교수는 이를 놓고 “이번 대통력 반환이 운명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웃었다. 그는 “류성룡 종가에서 14권의 대통력을 보유하다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며 현재 5권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며 “일본 어딘가에서 나머지 대통력이 다시 발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교토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미술관. 고 정조문 선생이 일본 전역에서 수집한 우리 문화재 1700여 점이 이곳에 있다. 지난 9일 조선왕조의 백자와 수묵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교토= 김현예 특파원
묵묵히 힘쓰는 문화재 지킴이들
김 교수처럼 일본에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국 문화재 수집과 반환에 묵묵히 힘쓰는 이들이 있다. 도쿄에서 고서점을 운영하는 재일동포 김강원 씨는 올해 ‘백자청화김경온묘지(白磁靑畵金景溫墓誌)’ 등을 직접 사들여 기증했다. 후손들에게 무상으로 돌려줬다.
교토대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고려미술관의 정희두 이사장도 문화재 지킴이로 나서고 있다. 지난 9일 찾아간 이곳에선 ‘조선왕조의 백자와 수묵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정 이사장은 미술관을 세운 고(故) 정조문 씨의 장남이다. 독립운동가 아들로 태어난 정조문 선생은 6세에 일본으로 건너와 막노동을 하다 파칭코로 큰돈을 벌었다. 이후 일본 곳곳에 있던 우리 문화재 1700여 점을 수집해 지난 1988년 미술관을 세웠다. 국보급 유물을 비롯해 흥선대원군 묵란, 유네스코 세계의 기록 유산에 오른 조선통신사 행렬도 등이 이곳에 있다.
부친의 뒤를 이어 혼자서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정 이사장은 “항상 적자 상태인 미술관의 운영 걱정도 크지만 내년 미술관 설립 35주년을 맞아 많은 사람에게 우리 문화재를 알릴 수 있도록 전시회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미술관 한편엔 소장품 보수와 관리를 위한 모금함이 마련돼 있었다.
이순신 ‘최후의 순간’ 담겼다…유성룡의 달력, 일본서 귀환
교토=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