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도 인생도 직진, 거침없는 승부사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의미로 ‘풍운아’. 볼을 잡으면 맹수처럼 날쌔서 ‘아시아의 표범’. 한 번 맺은 약속은 끝까지 지킨다고 ‘의리의 사나이’. 놀기도 일등이라는 뜻을 담은 ‘이춘풍(春風)’까지.
이회택(72)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별명이 많다. 여러 가지 별명들의 함의는 모두 한 가지 공통점에 수렴한다.
직진(直進). 축구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친구 또는 선ㆍ후배로, 가족으로 살아오는 동안 이 전 부회장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심이 서면 곧장 실행에 옮겼고, 충분하다는 판단이 들기 전까진 멈춰 서지 않았다.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아시아 축구 올스타’로 선정되고,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골잡이로 인정받고, 대한축구협회 선정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는 등 빛나는 발자취의 대부분은 ‘직진 본능’이 빚은 열매들이다.
때로는 그른 방향으로 내달릴 때도 있었지만, 잘못을 깨닫고 멈춰서면 언제나 그 나름의 교훈을 얻었다는 게 이 전 부회장의 회고다.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서울 효창운동장 내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옳은 선택인지, 더 좋은 길이 있진 않은지 고민하느라 좀처럼 출발점을 떠나지 못하는 청춘들에게 “일단 최선을 다 해보라”고 충고했다.
저걸 못 꺾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Q.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 게 고등학생 때부터라던데.
김포의 초등학교 선배가 영등포공고 출신 축구선수였는데, 소개해 줄테니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영등포공고에서) 처음 선수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5~6개월 정도 다녔는데, 학교에서 (김포농고 1학년을 마친 나를) 다시 1학년으로 등록하려고 축구협회에만 적을 두고 학교에는 적을 두지 않았다.
부정선수 시비가 불거져 고민하고 있을 때 지금은 돌아가신 박병석 감독님께서 동북고에 와서 뛸 의향이 없는지 물어보셨다.
당시 동북고는 당대 최고였는데, 그 팀에서도 최고로 잘하는 김기복(현 실업축구연맹회장)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저걸 못 꺾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밤낮 없이 축구공만 붙들고 살았다.
Q. 축구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아시아 올스타 뽑힐 정도로 급성장했는데.
물론 노력도 열심히 했지만,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병석 감독님께서 축구의 탁월한 기술들을 가르쳐주셨다.지도자를 나는 한 번도 그냥 ‘선생님’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신’이라고 생각하고 믿었다.
그분께서는 ‘거리를 걷다 돌멩이 하나를 발견해도 그냥 지나치지 말라’고, ‘차에 타서도 앉지 말고 발목을 돌리며 운동을 하라’고 하셨다.
지도자 생활을 할 때 후배와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지도자를 하늘로 봤는데, 너희들은 목사님까지만이라도 생각해서 내 말을 명심하라’고.
Q. 부친이 축구선수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서너 살 때 6.25 전쟁이 났으니까 아버님이 축구를 했는지 기억하긴 힘들다. 다만 학창시절에 집에 있던 장롱에 아버님의 유니폼들이 좀 있었다.
시골 분이니 축구선수 생활을 하셨다기보다는 동네에서 축구를 하셨던 것 아닐까.
Q. 전쟁 중에 이별한 아버지와 1990년 평양 방문 시에 만났는데.
아버지를 만난 지 20분 정도 되니까 북측에서 ‘오늘은 그만 만나고 내일 만나시라요’하며 떼어놓으려 했다.
기가 막혀서 ‘40년 만에 만난 부자지간을 20분 만나고 내일 만나라는 게 어느 나라 법이냐’고 화를 냈다. 그랬더니 높은 분들끼리 이야기를 해서 그날부터 한 호텔방에서 같이 지낼 수 있게 됐다.
Q. 북한의 축구영웅 박두익 씨를 통해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했다고.
박두익 씨를 처음 만난 건 1974년도다. 아시안게임 기간 중이었는데 나는 남한팀 선수, 박두익 씨는 북한팀 감독이었다.
그때부터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이후 1986년도에 내가 감독을 맡고 있던 포항제철이 프로축구 우승팀 자격으로 태국 킹스컵에 출전했는데, 그 대회에 북한대표팀을 이끌고 온 박 감독과 다시 만났다.
그때 박 감독에게 아버지를 찾아 달라, 살아계신 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는데, 198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이탈리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다시 만난 박 감독이 아버님의 사진과 편지를 가져왔다.
정상적으로 대학 생활을 마쳤더라면…
Q. 동북고 졸업반 무렵부터 이른바 '옆길'로 샜다고 하던데.
(고등학생 때는) 정말 축구에 미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착실하게 했다.
1966년에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박병석 선생님이 성균관대 감독이 되면서 나를 성균관대로 데려가셨는데, 사실 내 목표는 연ㆍ고대 진학이었다.
그래서 결국 대학을 다시 가기로 하고 학교를 나왔다. 석탄공사 축구팀에 1년 있다가 연세대 시험을 보고 입학식을 2주 정도 남긴 시점이었는데, 신체검사 통지문이 날아오더니 곧 입영 영장이 나왔다.
그리고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양지팀을 창단하면서 나를 데려갔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팀에 끌려간 게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정상적으로 대학 생활을 마쳤다면 더 훌륭한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오른 것에 자극 받은 중앙정보부는 이듬해 2월 육ㆍ해ㆍ공 3군 소속 선수를 대상으로 현재의 국가대표격인 양지팀을 창설했다.
당시 입영대상자였던 이회택 전 부회장은 선택 가능한 부대 중 복무기간이 가장 짧은 해병대를 선택해 양지팀 멤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양지팀은 정부의 도움을 받아 파격적인 지원을 받았고, 소속 선수들은 당시 실업축구팀 선수들의 몇 배에 해당하는 파격적인 연봉과 보너스 등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다.
Q. 양지팀에 차출된 이후에 '이춘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당시 양지팀 선수들은 대부분 7~10년 선배들이었는데, ‘술도 잘 먹어야 축구를 잘 한다’며 음주를 권하곤 했다.
내가 술이 받지 않는 체질이기에 망정이지, 술을 마셨다면 20대 초반에 선수 인생을 끝내지 않았을까 싶다.
양지팀에 간 이후 최고 권력기관 소속으로, 갑자기 큰 돈도 생기고 하니 좋지 않은 데로 빠지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이춘풍은 당시에 친구들이 부르던 별명인데, 푼수 같다는 뜻 아니었을까.
Q.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도 대표팀에서 빠진 기간이 있다던데.
무릎을 다친 것을 비롯해 부상이 많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1971년에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던 날, 뮌헨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치렀는데,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우리가 0-1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코너킥 찬스를 얻었다.
당시 올림픽 본선에 나가는 게 간절한 소원일 때라 꼭 이겨야 하는 경기였는데, (지고 있어서) 눈물과 빗물이 범벅이 되어 뛰었다.
코너킥을 준비하는데 관중석에서 소주병이 날아들어 하마터면 눈에 맞을 뻔했다. 내가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바깥쪽, 관중석 쪽으로 공을 차버렸다. 그게 문제가 돼 대표팀에서 빠졌다.
Q. 1977년에 열린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항명 파문도 유명한데.
한동안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다 오랜만에 복귀했는데, 팬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경기 전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는 경기장에 나갔는데, 내 생각엔 그리 못한 것 같지 않은데도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감독이) 교체를 지시했다. 그때 내가 안 좋은 이야기를 중얼거리면서 축구화를 땅바닥에 한 번 내리쳤다.
경기를 마친 뒤 단장님께서 ‘무례한 행동을 했다’며 나무라셨는데, 받아들이고 ‘죄송하다’고 말해야할 것을 내가 한 마디로 딱 잘라 ‘대표 선수 그만두겠습니다’ 해버렸다. 국가대표 이력이 그렇게 끝났다.
월드컵 본선행을 못 이룬 건 축구인으로서 산송장
Q. 올림픽이나 월드컵 본선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클 것 같다.
당시에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한 번 나간다는 건 축구협회 뿐만 아니라 축구계 전체의 희망이었다. 그걸 못 이룬 건 축구인으로서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인 느낌이다.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 축구가 세계화가 되어 있지 않을 때다. 4-4-2가 생겼는지, 3-5-2가 생겼는지, 4-2-4가 생겼는지 아무 것도 몰랐다.
한참 지나간 뒤에야 이런 전술들이 있나 싶었다. 그렇게 우리가 준비나 시스템, 그런 부분들이 아시아에서도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주먹구구식이랄까. 예전 1950년대에 하던 축구를 60년대 70년대 초까지 했으니까.
Q. 1970년대 초에 가수 조용필 씨를 발굴했다던데.
내가 가수를 만든 것은 아니고. 조용필 씨가 ‘25시’라는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참 잘했다.
하루는 나를 찾아와 ‘형, 나를 25시에서 좀 빼달라’고 부탁했다. 그 밴드를 이끌던 분이 조갑진 씨라고 내가 잘 아는 선배였는데, 만나서 ‘지금부터 내가 이 친구를 데리고 있겠다. 이제 내가 매니저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조용필 씨가 그 팀을 나와 만든 밴드가 ‘위대한 탄생’이다. 그 팀을 만들어서 합숙도 시키고 했는데, 그러던 차에 킹레코드사에서 찾아와 ‘음반을 취입시키자’고 제의했다.
그때 ‘정’, ‘돌아오지 않는 강’,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의 노래가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뜨기 시작했는데, 내가 조금 인기가 있을 때니까 TBC, MBC 등등 직접 방송국 돌면서 피디도 찾아가고 그랬다.
Q. 현역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가수를 관리한다는 게 가능한가.
그 시절엔 가수나 영화배우들과 가깝게 지냈다. 이봉조, 안치행, 남진 등등. 남진하고는 친구로 지냈다.
요즘도 연예인들과 스포츠인들이 가깝게 지내는 모양이던데, 그땐 축구선수 인기가 최고로 좋았다. 지금은 야구가 국민 스포츠가 되어버렸는데, 그 당시에 야구가 인기가 있었다면 야구선수가 되었을 것 같다.
Q.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은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데.
그런 건 매스컴에서 하는 이야기지 계보랄 게 있나.
스트라이커다 하면 대선배님이신 최정민 감독님이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전형적인 스트라이커가 나였다.
그 이후로 한참 스트라이커들이 나오지 않았는데, 내가 버티고 있으니까 대표팀에 들어오면 내 자리에 들어오긴 어려웠다.
아쉬운 건 대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축구사랑 밖에 몰랐다. 하지만 이후에 연예인도 알게 되고,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방탕한 생활이 너무 빨리 왔다.
그때 나를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훌륭한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프로가 있었고, 외국으로 나갈 수 있었다면….
Q. 세계적인 수준의 공격수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충분히 가능했다고 본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체질이 타고 났다고 할까. 한 달 두 달을 쉬다 그라운드에 나와도 크게 어려움을 못 느꼈다.
축구선수가 타고 나야하는 게 순발력인데, 그걸 타고났다. 축구도 결국은 지능이 좋아야 하는데, 축구장에 들어서면 머리가 트였다.
(경기에 대한) 설계가 잘 됐다. (그라운드) 바깥에서는 설계가 잘 안 되는데. 지금처럼 프로가 있었고, 외국으로 나갈 수 있고, 그런 게 있었다면 아마 그 이상으로 잘 했을 것 같다.
Q. 요즘 축구 후배들은 자신만의 특징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예전엔 자로 재는 듯이 패스하는 선수, 태클을 천부적으로 하는 선수, 슈팅이 벼락 같은 선수 등등 한 가지씩 특출한 게 있었다.
요즘 선수들은 뭐든 골고루 하고 체격도 작은 선수가 드물고, 전술적으로도 세계화가 됐는데, 정작 특징이 없다.
손흥민 선수만 해도 이전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보이지 않아서 큰 선수가 될까 의구심이 들었는데, 지난해 11월 콜롬비아전(한국 2-1승)에서 골을 넣는 모습을 보고 슛에 대한 감각이 아주 좋아졌다고 느꼈다.
특히나 볼을 가지지 않았을 때 빠져나가고 움직이는 모습이 돋보인다.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
Q. "열 번의 우승보다 한 명의 대표선수를 키워내는 지도자가 되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 대 뿐만 아니라 더 윗 선배님들도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을 가진 선수들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축구협회도, 운동장 시설도 향상되고 좋아져서 더 좋은 선수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해 아쉽다.
우승보다 대표선수를 키우라는 내 말의 의미는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는 뜻이다. 체력과 전술은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가서 배워도 충분한데, 초등학교 때부터 백패스를 가르친다.
전술 대신 기술을 가르쳐서 (지도자들이) 내 선수를 한 명이라도 더 대표선수로 성장시킨다는 꿈을 가지고 지도했으면 좋겠는데, 우승하지 못하면 쫓겨나는 상황이다보니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다. 자꾸만 기술보다 체력으로 가는 상황이 안타깝다.
Q. 최근에 축구 열기가 많이 가라앉았다는 우려가 나오는데.
인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고,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나 싶을 정도다. 축구계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운동장에서 유럽이나 남미에서 하듯 기술들이 나오면 팬들이 오지 말래도 오게 되어 있다. 전진패스와 돌파가 안 나오고 매번 백패스하면서 빙글빙글 볼을 돌리기만 하고, 비기려고만 들고 이렇다보니까 우리 스스로 팬들을 놓쳐버린 것 같다.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 성적도 중요하지만, 멋있는 경기를 해야한다.
Q. 70년 넘게 축구와 함께 하는 동안 최고의 순간은.
김포 출신의 무명 선수로 영등포공고에 올라와서 전국대회를 동대문운동장에서 했는데, 시골 촌놈이 부산상고를 상대로 두 골, 광주상고를 상대로 두 골을 넣었다.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 축구선수로 축구협회에 등록된 첫 번째 순간이면서, 첫 경기와 두 번째 경기에 두 골씩 넣었을 때 너무나 뿌듯했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Q. 인생이란 어떤 것이라 생각하나.
내가 세상을 그렇게 못 살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면 좋겠다.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 한다는.
Q. 삶의 가치관을 소개한다면.
나는 자식들한테도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는 게, 항상 솔직하게 살고 자신감을 갖고 살라는 것이다. 남을 존중하면서 자기 맡은 일을 충실히 하면 모든 것이 이뤄지지 않겠나.
[프로필]
1946년 경기도 김포 출생
김포중-동북고-한양대-대한석탄공사-양지-대한중석-포항제철
1965-1966 축구청소년대표
1966-1977 축구국가대표(A매치 82경기 21골)
1967 메르데카컵 최우수선수
1998-1990 축구대표팀 감독, 이탈리아월드컵 참가
1998-2003 프로축구 전남드래곤즈 감독
2004-2005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2005-2011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2005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헌액
2010 아시아축구연맹 공로상
글 송지훈 기자
사진 우상조 기자
첫댓글 이회택이 한양대시젤 효창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했는데~
지금의 차두리처럼 머리는 백구로 밀었고 표범처럼 빨랐으며 축구장은 잔디가 없는 맨땅의 운동장였지요~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많이 발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