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서안(西安)]에서 5일(3-1)
(2024년 4월 24일∼28일)
瓦也 정유순
3-1. 함곡관(函谷關)
한성시(韓城市)의 밤은 짧다. 어제 서안(西安)에서 달려와 사마천을 비롯하여 공자와 관우의 흔적을 더듬느라 발걸음이 바빴고, 덕분에 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조반을 마치자마자 함곡관을 향해 버스는 달린다. 차 속에서 의자에 기대어 졸고 깨기를 반복하다가 우연히 차창 밖으로 넓은 호수가 보여 무심코 지도를 검색해 보니 운성(運城)시에 있는 중국사해운성염호(中國死海運城鹽湖)’라고 표시되어 있다. 운성은 예전에는 하동(河東)으로 불렸으며 삼국시대의 관우의 고향으로 알려진다.
<운성호수 지도>
<중국사해 운성 염호 지도>
그러고 보니 바다가 아닌 내륙에서 소금이 나는 운성호수(運城湖水)다. 내륙도시인 운성에서 소금으로 유명하게 된 계기는 호수가 염호(鹽湖)이기 때문이다. 춘추(春秋, 기원전 770~403)시대에는 운성을 염씨지성(鹽氏之城)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운성의 염호는 세계 3대 황산나트륨 형 내륙 염호의 하나로 염분 함유량이 중동의 사해(死海)와 비슷해 사람들의 몸이 둥둥 뜰 정도라고 한다. 개인 욕심 같아서는 한번 찾아가고 싶으나 예정된 일정 때문에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룬다.
<차창으로 보이는 운성염호>
한성시에서 두 시간 반을 달려 함곡관에 도착한다. 함곡관(函谷關)은 전국시대 진(秦)나라에서 산동(山東) 6국으로 통하던 관문으로 낙양(洛陽) 서쪽의 험한 계곡이라 ‘천하제일험관(天下第一險關)’이라 하였다. 제(齊)의 맹상군(孟嘗君)이 진나라에서 탈출한 통로여서 ‘함곡관에서 거짓 닭이 운다’라는 ‘함곡계명(函谷鷄鳴)’이란 말이 생겼다. 이에 두보(杜甫)는 “서쪽을 바라보면 서왕모 내리는 거둥이 보이고, 동쪽으로 나오는 붉은 기운이 함곡관 일대에 그득했었네.(西望瑤池降王母 東來紫氣滿函關)”라고 했다.
<함곡관 패관>
함곡관이 위치한 곳은 황하(黃河) 남안(南岸)의 허난성 싼먼샤 링바오시[하남성 삼문협시 영보시(河南省三门峡市灵宝市)] 남쪽 5km 지점에 있다. 이곳은 동서 8km에 걸친 황토층(黃土層)의 깊은 골짜기로 양안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고, 벼랑 위의 수목이 햇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낮에도 어두우며, 그 모양이 함(函)처럼 깊이 깎아 세워져 있어 함곡관이란 이름이 생겼다.
<함곡관 안내도>
그리고 관중의 4개 관문(소관, 산관, 무관, 함곡관) 중 하나이며, 중원과 관중 사이에는 태행산맥(太行山脈)이 가로막고 있어, 관중과 중원 양쪽 어느 곳에서 다른 한쪽으로 가려면 이 함곡관을 넘어가야만 하기때문에 천하를 다투는 격전장(激戰場)이 되었다. 현재는 중국에서 설치한 함곡관 관광단지로 지정되어 있다.
<함곡관>
함곡관은 서기전 춘추전국시대에 관중으로 가는 통로였기에 전투 기록이 많다. 노자(老子)도 노년에 서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낙양(洛陽)에 거주하던 노자가 고향과 반대 방향으로 간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노자의 고향 로이[녹읍(鹿邑)]에서 500km 떨어져 있다. 한 줌 흙으로도 봉쇄할 수 있다는 일환니봉함곡관(一丸泥封函谷關)의 땅에 도착한다. 함곡관 안으로 들어서니 높이 28m, 60톤 무게의 노자 동상이 죽간을 손에 들고 세상을 바라본다. 황금상 아래에는 도덕경 오천 자가 두루마리 형태로 세워져 있다.
<노자 황금상>
황룡(黃龍)이 양쪽으로 호위하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도가지원(道家之源)’편액이 걸린 삼문(三門)이 나온다. 아마 ‘도가의 원천’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도가(道家)는 중국사상(中國思想)의 여명기인 춘추전국시대 이래 유가 사상와 함께 중국 철학의 두 주류를 이루었던 학파다. 대표적인 사상가는 노자와 장자(莊子)로 보통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도 한다. 도가는 참된 길, 즉 도(道)는 인위(人爲)를 초월한 곳에 있으며 그것은 직관에 의해 체득되는 것으로 사람은 그 참된 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도가지원(道家之源)>
삼문을 지나 약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1987년 중건한 건물인‘太初聖宮(태초성궁)’이라 쓰인 패관이 나온다. 태초성궁 입구에는 노자가 소를 타고 왔다가 다시 서쪽으로 가는 벽화가 새겨져 있다. 전각 앞에는 약 1m정도 되는 향이 온종일 연기를 뿜고 있는 것 같다. 전각 안에는 튀어나온 이마를 자랑하면서 동(銅)으로 만든 노자가 좌정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하늘이 하사한 칙령이라는 옥칙(玉勅)이라 적혀 있다.
<소를 탄 노자의 벽화>
<태초성궁(太初聖宮)>
태초성궁 뒤로 돌아가면 함곡관이 나온다. 성벽 위에 3층으로 들어선 두 개의 전각은 옛날 것이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 지은 건축물 같다. 전각 뒤로는 말을 탄 병사들이 움직인다. 찾아오는 관광객을 위해 마상(馬上) 시범훈련이라도 할 기세다. 함곡관 표지비각(標識碑閣) 주변에는 홍매(紅梅)가 물결을 이룬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조화(造花)다.
<기마병>
<함곡관표지비각>
표지비각을 지나면 함곡관 옛길을 표시하는 전각이 나오고 더 밖으로 나가면 산동(山東) 6국으로 가는 옛길이 나온다. 동으로 쭉 뻗은 길에는 마차(馬車)가 지날 정도의 폭으로 곱게 흙다짐을 하였다. 이 길을 보면서 노자는 왜 푸른 소를 탔을까? 벽화나 그림을 보면 푸른색의 소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오방색(五方色)의 이치에 따라 동쪽에서 온 성인(聖人)을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산동으로 가는 함곡관 초입 옛길>
함곡관에서는 노자와 윤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함곡관을 지키던 관리 윤희(尹喜)가 관문 위로 보라색 기운이 떠오르는 모습을 봤다. 천문지리에 통달했던 그는 성인이 ‘청우(靑牛)’를 타고 지나가리라 예상했다. 그때 노자가 동쪽에서 왔는데, 이를 자기동래(紫氣東來)라 한다. 윤희는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 노자는 5,000자에 이르는 도덕경을 집필하고 전수한다. 도덕경(道德經)은 동양 사상은 물론 도교(道敎)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함곡관 표지석>
또 인위를 배제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될 것을 권했다. 유가(儒家)와 도가의 차이점은 현실적이며 긍정적인 유가가 군주의 통치권을 합리화하여 역대 왕조의 통치이념(統治理念)으로써 사회의 기본사상으로 자리 잡은 것에 비해, 도가사상은 현실부정적(現實否定的)이고 도피적인 성향이 강해 하층민을 중심으로 내려오다가 도교(道敎)로 발전하여 민간신앙과 철학적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유가가 지배자의 사상을 대변한다면 도가는 지배층에 대항하는 피지배자의 사상으로 대변되었다.
<함곡관 전각>
<현지답사 중국 학생들>
노자는 춘추시대 말기 초(楚)나라 고현(苦縣) 사람이고, 도가(道家)의 창시자다. 이름은 이이(李耳)고, 자는 백양(伯陽)이다.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를 지냈다. 공자(孔子)가 젊은 시절 낙양(洛陽)으로 찾아가 노자를 방문해 예(禮)에 관해 물었다고 한다. 그것이 “공자문례(孔子問禮)”라는 고사이다. 훗날, 공자는 그때 만남을 회상하며 노자를 “용처럼 변화무쌍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황룡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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