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가 전하는 소리 / 고연숙
난 한라산 자락에서 태어난 까마귀우다, 가악 까악. 하지만 고심 끝에 정든 고향을 떠나기로 작정핸 예. 한라산을 왜 등지냐고요? 하이고 말도 마십쇼, 밉살맞은 천덕꾸러기 신세라 그렇습니다.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그 비참함이랄까 설움을 잘 모를 겁주.
예전에는 사람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아나수다. 한라산이 영산(靈山)이라면서 여기서 살아가는 동식물을 신령스럽게 여겼으니까요. 그중에서도 우리 까마귀들은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았더랬지요. 육지 사람들은 몸이 새까만 우리를 하시(下視)하며 재수 없다고 하는데 제주 사람들은 우리한테서 경외감마저 느껴진다고 했죠. 심지어 ‘태양의 전령사’라는 별칭까지 달아줬답니다. 몸이 까만 건, 태양을 오가며 그을린 거라나요.
그러다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해수다. 육지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그들은 무슨 무슨 산악회라는 꼬리표를 달고 왁자하게 나타나 해발 몇백 미터 표지석 앞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습죠. 인증샷까지 날리고 나면 곧바로 산해진미를 펼쳐놓고 술판에 들어가기 일쑤입니다.
어느 날 어린 조카가 진수성찬에 홀려서 호로록 내려가서 예.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읍디다만 보드카를 따르던 여자가 미소짓기에 안도했지요. 그런데 살쾡이처럼 생긴 여자가 “에고 재수 없어, 큰 까마귀가 나타났네. 누가 죽게 생겼나벼.” 하지 않겠습니까.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아기한테 큰 까마귀라니요. 물론 몰랐을 겁니다, 생후 한두 달이면 어른 몸체만큼 커진다는 사실을요. 다만 분홍색 부리냐 검정 부리냐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애정 어린 눈으로 봐주는 사람한테만 보이죠.
조카는 여자의 악다구니에도 불구하고 천진난만하게 다가감신게마씸. 그리곤 육포에 손을 댑니다. 그때 얼굴이 불콰한 사내가 “저리 꺼져!” 하며 젓가락으로 휙 후려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휴, 맞지 않아 다행입니다.
이쯤에서 포기하면 좋으련만 철없는 녀석이라 또 기웃거렴수다. 이번엔 새우깡 봉지에 눈독을 들염신게마씨. 아마도 통째로 물고 오려는가 봅니다. ‘후딱 올라오렴’ 아, 사내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마네요. “꼬록 꼬록 끼로로록” 숨이 곧 넘어갈 듯 위태위태합니다. 얼른 구해와야 할 텐데 다리가 덜덜거려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바로 그때여수다. 제수씨가 잽싸게 날아와 사내를 격합니다. 그놈이 비명을 지르며 떼굴떼굴 구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통쾌한지요.
아기를 안고 재빨리 올라온 제수씨가 날 쳐다봠서 예. 저는 자책감으로 간이 바짝 오그라들고 있습니다. 조카를 구해와야 했는데 제 목숨이 먼저였답니다.
제수씨가 지 새끼한테 먹이를 주고 이수다. 그리곤 머리에 물을 얹어 토닥토닥 두드리며 빌엄신게마씨. “할마니임 손지아판 어떵ᄒᆞ코 어떵ᄒᆞ코, 아맹이나 할망ᄌᆞ손 낫게ᄒᆞᆸ서 낫게ᄒᆞᆸ서…” 지 새끼가 넋이 나가면 인간들도 삼신할망께 저렇게 빌더군요.
어쨌거나 그 사건 이후로 저는 니빨 자그물고 큰 결단 내려수다. 삶의 터전을 옮겨야겠다고요. 아무리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지만 목숨을 담보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날이 갈수록 한라산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멸종 위기에 놓인 희귀종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라산 산신은 화가 치밀대로 치밀어 있을 겁니다. 이대로 가다간 언제 불바당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작년 봄, 새로운 터전에 둥지를 틀었지요. 여기는 해발 오백 미터인 **오름이고 사방으로 예닐곱 개의 오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남쪽으론 한라산, 북쪽으론 태평양 바당이 시야 가득 펼쳐지고요. 다행히도 여기는 올레 코스에 포함되지 않아 관광객이 잘 모르는 곳입니다.
저만치에서 오동통한 사내와 여자 둘이 올라오고 이신게마씨. 오늘도 우리를 아끼는 갈래머리는 참나무 아래 멈춰 서네요. 우리 둥지 쪽을 올려다봅니다.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려 몸을 슬쩍 숨깁니다. 친구인듯한 파마머리가 카메라를 들이대다가 사내를 부릅니다. “자기야, 요기 와 봐. 저거 까치 같지?” “까마귀잖아게. 혼차 있는 걸로 봐서 홀아방이 틀림없네.” 그러고 보니 내 새끼들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조급함에 앞뒤 가릴 겨를 없이 새끼들을 불러봅니다. “까악까악 까악, 꺄악!” 애들이 겁먹을 것 같아 이번엔 목소리를 낮춥니다. “가가악, 가악? 가악~”
응답이 없네요. 아무래도 멀리 나간 것 같아 찾아 나섭니다. 어디서 다정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머~, 어쩜 이리 귀여울까. 분홍 부리까지 잘도 아ᄁᆞ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갈래머리한테 재롱떨고 있지 않겠습니까.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어깨까지 좌우로 흔들면서요. 곧바로 내려갔습니다.
파마머리와 사내도 다가왐심게마씨. 사내가 흥분합니다. “카메라에 잡힌 그놈 아녀? 보랏빛 깃털도 반지르르하고, 풍채도 굉장ᄒᆞ다이?” 나는 으쓱해져서 날개를 옆구리에 착 붙이고 가슴에 힘을 꽉 줬습니다. “오, 보디빌더 못지않은데?” 남자가 육포를 내밉니다. 갑자기 각시가 생각나 눈물이 핑 돕니다.
각시는 독수리에게서 새끼를 구하다가 물려 죽어수다. 나뭇잎으로 각시를 묻어주고 있노라니 사방에서 몇십 명이 삽시간에 모여듭디다. “아악 아악 아악” 자기 일처럼 애도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뒤덮었지요. 속과 겉이 다른 인간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태원과 오송 참사 때 인간들이 얼마나 인정머리 없던지 참말로 기가 막힙디다. 만물의 영장이라고요? 잘난 척 그만 ᄒᆞᆸ서, 우리가 백배 나으니까요.
우리는 인간보다 정밀한 시각과 청각도 갖고 이서마씨. 인간이 개발했다는 최첨단 장비에 비할 바가 아닐 겁니다. 지구의 편광(偏光)과 초음파까지 감지할 수 있으니까요. 굳이 이런 면을 들어 잘난 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서로 도우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세상에 가치를 두고 싶으니까요.
신혼부부가 사는 옆집에서 깨가 쏟아졈신게마씨. 신랑이 먹이를 물고 상체를 구부렸다 폈다 절하면서 색시에게 다가갑니다. 색시는 짐짓 모른 체하면서 고고하게 걸어가고요. 신랑이 살그머니 쫓아가 색시 꼬리를 은근슬쩍 잡아당기자 토닥토닥하다가 한 몸이 됩니다.
앞집 어미는 먹이를 구해와 “꾸르르 까르르 꾸륵꾸륵” 새끼를 부르고 있네요. “께께께께 께께께” 스타카토로 빠르게 아우성치는 새끼들. 어미는 분홍빛 목구멍을 가장 크게 벌린 새끼한테 먼저 먹이고, 끈질기게 소리지르는 새끼한테 그다음 먹입니다. 새끼들 배를 채워준 어미 아비는 ‘그르르르 그르르’ 만족한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태양신께 감사 기도를 올리며 잠자리에 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