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질풍노도(疾風怒濤)
그때는 나의 사춘기로 내 인생의 질풍노도(疾風怒濤, Sturm und Drang, 슈투름 운트 드랑) 시기라고 할만 했다.
18세기 말 독일 낭만주의 운동을 일컫는 이 말은 실제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 있었다.
우리라고 하는 말은 그 당시 나의 단짝인 '박시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아이는 고교 2학년 올라가 내가 사귄 급우였는데
그 시기에 이미 철학의 거목 프리드리히 니체를 옆집 아저씨처럼 끼고 사는 조숙한 천재였다.
(우리 사회에 니체가 본격적으로 운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로 아는데
지금 생각해도 1970년대 일개 고교생이던 그의 니체 이해는 정통한 데가 있었고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가 그것을 누구에게 전수받았든.)
시골 출신으로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던 그는
철학자 니체처럼 늘 고독을 친구삼던 외톨이였지만
역할 모델을 갈망하던 내가 접근해 어렵게 사귄 친구였다.
나는 학교의 말썽꾸러기 그룹과도 어울리는 등 교제 범위가 넓은 카멜레온이었지만,
그는 주위의 모든 그룹과 동떨어져 있었다.
늘 낡은 교복에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끈 풀린 군용 워카를 질질 끌고 다니던 그는,
언뜻 보면 단순히 불량해 보이는 나와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학구적이고
무섭게 내향적인 면이 느껴지는, 한 눈에 독특한 아이였다.
실제로 그는 학업 성적도 우수해 입학할 때 몇 안 되는 장학생에 끼기도 했다.
그 밖에 아무도 몰랐지만 그는 거의 독학으로 바이얼린을 공부하는 클래식광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의 하숙집 근처 개천가에서 밤이면 별을 보고,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헤세와 노발리스, 토스토에프스키, 우리 나라 시인 이상(李箱) 등을 논했다.
그에게 나는 안수경을 만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래? 잘 되었네. 나의 골드문트여.(*헤르만 헤세의 소설 '지知 와 사랑[나르시스와 골드문트]'에 나오는,
사랑을 대표하는 골드문트.
지성을 대표하고 사제가 되는 나르시스와 사랑과 감성을 대표하는 골드문트의 우정을 통해
구도 과정을 다룬 헤세의 소설.)
앞으로 너의 첫사랑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하니 기대가 부푸는구먼. 하하하."
시원은 놀리듯 말했지만 그것은 그 후로 진담이 되었다.
그 날 수경과의 조우에 놀란 나는 한동안 얼떨떨해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이끌어 근처 제과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둘이 나눈 이야기를 통해
나는 수경이 야간 상고에 다니고 있으며 병환으로 일년을 휴학해
나보다 한 학년 아래에 진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국민학교 때도 그녀가 한동안 보이지 않곤 했던 때가 있었던 듯한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는가 싶었다.
나는 등교하는 길이라는 그녀에게
기어코 다음 일요일에 시내 모처에서 만날 약속을 받아냈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른다.
당시는 휴대폰은 물론 집전화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이라
거기서 놓치면 찾을 길이 망망하다는 생각에서였으리라.
하지만 거기서 그녀와 그냥 헤어졌다 해도 나는
어떻게든 그녀를 다시 찾아내고 말았으리라.
이를테면 허구헌 날 그 길목을 지켜서라도....
첫댓글 혹시 나르치스님은 스님이 되어 계실까요 ?
조숙하고 진지했던 지우님~
그녀와의 스토리가 박시원만큼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