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여미고 겨울을 맞이하자
아래 글은 법조협회가 발행하는 “법조”지 2006. 11월호에 게재된 서울중앙지방법원 임치용 부장판사님의 “위대한 파산자들”이라는 글의 일부를 전재한 것입니다.
자의이던 타의이던 삶의 과정에서 파산에 이르렀던 사람들이 재기하여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된 사례를 담고 있어 어려운 분들도 힘을 내시라는 취지에서 게재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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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파산자들
다음 인물들은 공통점은 무엇일까?
밀튼 허쉬, 헨리 존 하인츠, 마크 트웨인, 킴 베이싱어, 래리 킹, 헨리포드, 월트 디즈니, 도날드 트럼프, MC 해머.
이들은 모두 파산하였다가 재기하여 인류에게 부와 문화유산을 남긴 사람들이다.
허쉬는 초창기에 그가 운영하던 사탕제조회사가 2회 파산한 후에 1903년 펜실베니아의 한 지역에서 허쉬 밀크 초코렛바를 생산하여 재기에 성공하였다.
그는 자신 재산의 상당부분을 재단에 기부하였고 재단은 고아들을 위한 밀턴 허쉬라는 직업학교와 놀이공원을 세웠다. 펜실베니아주는 그 도시의 이름을 허쉬로 명명하였다.
하인츠는 원래 오이 피클, 식초 등을 제조하는 회사를 운영하다가 18875년 파산신청을 하였다. 그 후 그는 케첩(ketchup)이라는 신제품을 생산하여 지금까지도 우리의 식탁에 오르게 하였다.
마크 트웨인으로 알려진 사무엘 랭혼 클레멘스는 1894년 전동타자기 사업에 투자하여 파산하였다가 재기한 후 미국과 영국에서 강연을 통한 수입으로 빚을 완제하고 글쓰기를 계속하였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에게 예일대학교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미주리주립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은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킴 베이싱어는 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 나인 하프 위크, 배트맨 등에 출연하여 번 돈으로 조지아주의 토지사업에 2천만 불(200억 원 상당)을 투자하였다가 영화출연 계약의 파기로 피소되어 8백만불의 손해배상채무를 지고 파산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재기 끝에 1997년 “LA Confidential”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래리 킹은 1978년 35만 불의 빚을 갚지 못하여 파산신청을 한 후, 방송사에 고용되어 라디오 심야토크쇼에 사회를 맡아 재기하여 현재의 유명한 래리 킹 라이브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었다.
월트 디즈니는 캔사스시티에서 미술과 사진을 다루는 사업을 하였다가 22세에 파산한 후 1923년 헐리우드로 옮겨 월트디즈니 스튜디오를 개설하여 미키마우스의 만화영화를 제작하고 1955년 캘리포니아에 디즈니랜드를 세웠다.
헨리 포드는 한 때 2개의 자동차 회사를 갖고 있었는데 하나는 파산하였고 다른 하나는 동업자와의 불화 끝에 청산하였다. 그 후 재기하여 설립한 회사가 현재의 포드 자동차 회사이다.
도날드 트럼프는 호텔, 카-지노의 황제로 그의 자서전 “Trump”라는 책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역시 1992년 카-지노 사업에 실패하여 파산신청을 하였다가 재기한 후 2004년 두 번째 파산신청을 하였다. 2005년 봄 다시 그의 사업을 재건하여 재기의 명수라는 칭호를 얻었다.
MC 해머는 미국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랩송가수이다. “U Can't Touch This”라는 노래로 성공하였으나 젊은 날의 방탕으로 1996년 파산신청을 하였다. 파산을 겪은 후 그는 종교에 귀화하여 복음가요로 성공하여 수익의 일부를 9.11테러 희생자에게 기부하고 TV에 출연하는 등 재기하였다.
만일 면책제도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포드 자동차를 타고 미키마우스가 인사하는 디즈니 월드에 가서 허쉬 초콜릿을 먹고 해머의 랩송을 들으면서 만화영화 허클베리 핀을 볼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이와 반대로 면책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부모 또는 자신의 가난으로 빚이라는 악령에 쫓겨 옥바라지를 하거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빚을 갚기 위하여 글을 쓰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들도 있다. 다니엘 데포우, 찰스 디킨스, 율리시스 그랜트 등이다.
다니엘 데포우는 무역을 통하여 돈을 많이 벌었으나 1692년 선박보험계약을 체결하였다가 1만 7천 파운드를 잃고 파산하였다. 1719년 로빈슨 크루소를 발표하여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30세부터 죽기까지 빚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는 1697년 “OF BANKRUPTS”라는 글에서 당시 파산제도가 파산자를 바보로 만들고 있으며 채권자들에게 복수심의 만족을 줄 뿐 파산자는 그저 굶어 죽게 하는 야만적인 제도라고 비판하였다.
그의 다른 작품 ‘몰 플랜더스’(1722)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가난을 ‘무시무시한 귀신’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가난이 그의 작품의 대표적인 주제였으며 채권자들을 피해 있다가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찰스 디킨스는 아버지가 파산하여 채무불이행죄로 템즈강변의 채무자구금소에 갇히는 바람에 12살에 학업을 중단한 채 구두약 공장의 공원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돈이 없어 감옥에 가는 사회제도의 모순을 관찰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은 그의 유명한 법률소설 ‘음산한 집(Bleak House)’과 다른 법률소설을 낳았다.
디킨스는 파산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파산으로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을 상상하고도 남는다.
그랜트는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운 대로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사령관으로서 승리 후 1868년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직을 마친 다음 금융회사를 경영하다가 파산하였다. 빚을 갚기 위하여 자서전의 저술에 착수하였으나 마지막 페이지를 끝내지 못하고 1885년 사망하였다.
전직 대통령이 파산신청을 하지 아니한 이유는 불행하게도 상인이 아닌 사람에게도 파산신청권과 면책의 혜택을 부여한 1841년 파산법이 채권자들의 반대로 1843년에 폐지된 상태였고, 그가 대통령이 될 무렵인 1867년 파산법 역시 1878년에 폐지되는 바람에 글을 쓰는 동안에는 파산면책제도를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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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길고 험한 인생의 역정에서
누구나 어렵고 힘겨운 상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지고, 서로간의 경쟁과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의 정도가 깊어지면서
그 어떤 사람도 일단 실패하면 헤어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아버지나 어머니로서
존경하는 부모님의 아들이나 딸로서
아끼고 예뻐하는 선배나 후배로서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의 상사로서
나의 능력을 인정하고 보살펴주는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무력한 지식인으로서(http://blog.naver.com/choe0ho/140020755666)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지 못한 가이없는 한 생명으로서
우리는 점점 더 사람구실 하기 어려운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제 또 한 해가 저물고 겨울이 옵니다.
결혼식, 장례식, 동창회, 동문회, 향우회, 동호회 등등
모든 모임과 부름들이 만남의 기쁨이나 친목의 향상보다는
장수를 세어보는 돈 봉투와 싱겁고 헤픈 웃음을 의무로 챙겨야하는 부담스런 자리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힘으로 버티지 않으면
이 두터운 도시의 낯설음을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우리는
절대로 이겨낼 수 없습니다.
파산을 당하고도 그 질곡을 이겨낸 위대한 사람들
그들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위로해가면서
우리는 다시 겨울에 맞서야 합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당당하게 봄을 기다립시다(‘06. 11. 10. 최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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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망의 바다에서 자기자신만이 유일한 해답이죠 . 변호사님도 해탈을 하신건지~ㅎㅎㅎㅎ
돈 봉투나 세는 모임엔 돈 안 주면 되잖아요~~~~ 그럼 두번다시 초대 않을텐데~~~~
인생을 살아가는데에...여러가지 방식이잇겟죠? 잘보구갑니다~~
가난--- 무시무시한귀신..섬뜩한 말입니다. 책임을 지는 삶이어야하는데...
사랑이라는 힘으로... 이 세상을 밝게 이끌어 가는 힘.. 함께 열어가시게여~~ 생각 많이 하고 갑니다..(참 블로그 말고.. 플래닛은 안되나여~!? ㅎㅎㅎㅎ)
파산.가난 같은 이름들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쓰신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마치 상처를 보듬고 다듬으면 보석이 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