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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의 올림픽 입성을 가능하게 만든 두 주역 사마란치(왼쪽) IOC 위원장과 김운용 WTF총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주에는 태권도가 해방 직후 어떤 혼란기를 거쳐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으며 1971년 제7대 대한태권도협회장에 선출된 김운용이 어떤 전략을 갖고 태권도의 국기화와 세계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했는지를 알아봤다. 이번 주에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때까지의 과정과 '세계화 이후의 세계화'를 위한 과제를 함께 살펴본다.
◇태권도의 올림픽 입성을 가능하게 만든 김운용-사마란치의 브로맨스(bromance)
태권도 세계화의 최종 목표는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이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두 사람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바로 김운용과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다. 두 사람 사이의 오랜 파트너 관계, 또는 동지적 유대감, 요즘 유행어로 말하자면 '브로맨스'가 없었다면 태권도의 올림픽 입성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두 사람의 숙명적인 관계를 한번 살펴볼 차례다. 김운용이 사마란치에 대해 갖고 있던 복합적인 감정을 그의 목소리를 통해 먼저 들어보자.
'필자는 사마란치와 30년 이상을 함께 지내왔다. 나이는 나보다 11살이 많았지만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사이였다. 그러면서도 사마란치는 2001년 모스크바 IOC 총회때 열린 IOC 위원장 선거에서 필자를 지지하기는 커녕 로게 편에 서서 각종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 이런 좋지 않은 추억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운동에 기여한 그의 공은 객관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라란치와 필자의 친분은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형제처럼 두터워졌다. 사마란치와는 서울 올림픽 유치 활동을 전개하면서부터 1988년 10월 2일 서울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거의 매일 연락을 했다. 서울 올림픽은 역사상 가장 훌륭하게 치러진 인류의 종합제전으로 평가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많은 난제를 안고서 치른 올림픽이기도 하다. 이는 사마란치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다.'(김운용 저,'김운용이 만난 거인들,p.99~106 발췌인용)
사마란치는 1980년 IOC 위원장에 선출돼 2001년 퇴임할 때까지 21년 동안 국제스포츠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파워맨이었다. 그가 IOC 위원장에 선출됐을 때는 올림픽이 미증유의 위기를 맞던 시기였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이 동서 양진영 냉전의 격화에 따른 쌍방 보이콧 사태로 나란히 '반쪽짜리' 올림픽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사마란치에게는 무엇보다도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이 중요했다. 국제스포츠계에서 자신의 위상과 정치적 생명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아마도 한국 사람을 제외하고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진정 원했던 단 한 사람이 있었다면 사마란치였을 것이다. 사마란치의 결정적인 측면 지원속에 김운용은 1985년 IOC 위원에 입성한다. 이후 김운용과 사마란치는 서울 올림픽 성공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절묘한 '2인3각'의 행보를 이어간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서울 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올림픽으로 손꼽히게 됐다. 김운용은 1990년에 서울 올림픽을 총결산하는 저서 '위대한 올림픽(The Greatest Olympics)'을 출간했는데 사마란치는 특별히 이 책의 서문을 통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실 제24회 서울 올림픽의 모든 과정들은 본인이 IOC 위원장으로 재직하기 시작한 때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올림픽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서울 대회에 본인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서울 대회를 둘러싼 얘깃거리는 참으로 많습니다. 아직 개발도상에 있는줄 알았던 분단 국가에서 조직되어, 국제정세의 묘한 기류에 휩쓸려 많은 공포와 위협에 직면했던 서울 대회는, 이제 올림픽 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위대한 대회로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펼쳐진 태권도 시범.사진=연합뉴스>
이 서문은 예의상 보낸 화려한 미사여구만은 분명 아니었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이 사마란치에게 준 영향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이런 성공을 함께 일궈내는 과정에서 김운용과 사마란치는 '부위원장, 위원장이란 직책을 떠나 서로가 부탁을 하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은 사이'(정태화 저,'세계를 품은 빅맨 김운용',p.302에서 인용)가 됐다. 이런 파트너십의 형성은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에 입성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서울 올림픽은 태권도의 올림픽 입성에 두가지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김운용-사마란치의 '서로 거절할 수 없는 파트너십'의 확립이다. 또 하나는 태권도가 사상 처음으로 서울 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채택됨에 따라 국제적 위상이 단박에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후 태권도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또 한차례 시범 종목으로 실시된 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은 건너뛰고)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역사적인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과정을 밟아가게 된다.
'1985년 6월 동독의 동베를린에서 열린 제90차 IOC 총회에서 태권도가 서울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최종확정됐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큰 도약을 향한 작은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1988년 9월 17일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역사적인 서울 올림픽 개회식 식전행사로 펼쳐진 태권도 시범은 전세계로 중계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육군 비호태권도단 808명과 미동초등학교 시범단 200명 등 1008명으로 구성된 시범단원은 <벽을 넘어서>란 주제로 태권도의 우수성과 예술적 가치를 전세계에 알렸다.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기본 동작과 격파 묘기로 진행된 시범 공연은 태권도를 전세계로 홍보하고 위상을 제고하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당초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개회식 태권도 시범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이 얘기를 김운용으로부터 전해들은 사마란치는 "꼭 하라"는 주문을 넣었다고 한다.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 경기가 열렸다. 태권도 경기장은 시범 종목임에도 불구하고 사마란치 위원장을 비롯한 많은 IOC 위원이 찾아와 성황을 이뤘다.'(서완석 외 저,'김운용 태권도를 세우고 세계를 호령하다',p.101~103)
서울 올림픽에서 펼쳐진 역사적인 태권도의 첫 경연을 '스포츠서울'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한국은 올림픽 사상 처음 시범종목으로 치러진 태권도 첫날 경기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를 따내 종주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금메달의 주인공은 남자웰터급의 정국현(지하철공사) 플라이급의 하태경(한체대) 여자플라이급의 추난율(영신여고). 태권도 첫 메달의 주인공이 된 여고2년생 추난율은 1회와 3회에 밀어차기로 각각 1점을 뽑았으며 2회에는 돌려차기로 점수를 올려 낙승했다. 이날 제일 먼저 경기가 끝난 여자플라이급의 메달리스트들에겐 사마란치 IOC 위원정이 메달을 수여했다.'
<시범 종목이었던 서울 올림픽에서 첫 금을 따낸 추난율에게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메달을 주고 있다. 사진=스포츠서울>
◇태권도, 드디어 올림픽 정식종목에 입성하다
매년 9월 4일은 세계태권도연맹이 정한 '태권도의 날'이다. 왜 이날이 태권도의 날로 지정됐을까. 1994년 9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기에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제 '운명의 9월 4일'을 향해 가보자.
1990년대 초반 상황을 기준으로 하면 새로운 종목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기 위한 정상적인 절차가 있었다. 우선 IOC 프로그램 위원회의 과반수 찬성을 획득해야 한다. 이후 집행위원회에 회부돼 다시 찬성을 얻어내면 IOC 총회에서 최종 결정이 된다. 프로그램 위원회는 일종의 조언기구다. 그 위원회의 결정이 최종적이지는 않다는 의미다. 집행위원회는 사실상의 결정 기구나 마찬가지다. 총회는 이를 최종 승인한다는 의미가 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이 되기 위해서는 규정상 6년전인 1994년 IOC 총회를 통과해야만 했다. 태권도는 첫 관문인 프로그램 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1993년에도 프로그램 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1994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운용은 정상적인 절차로 돌파하기 힘들다고 판단되자 '우회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IOC의 최고 권력자 사마란치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제 김운용-사마란치의 브로맨스가 본격적으로 가동될 때가 온 것이다.
'1994년 9월 4일 IOC 파리 총회 당시, 누구 한 사람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확신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새로운 종목이 IOC 총회에 상정되는 경우 우선 먼저 프로그램 위원회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러나 태권도는 전년도 5월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프로그램 위원회에서 11대9로 이미 한번 부결된 경험이 있었다. 태권도는 출발부터 핸디캡을 갖고 있었다. 프로그램 위원회에서 부결되었기 때문에 통상적인 경로를 경유해서 채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적적인 역전 드라마가 물밑에서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들의 <007 작전>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됐다. 나는 우선 10년 이상을 함께 한 친한파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 숙의끝에 <마지막에 끼워넣기 작전>이라는 특별한 전략을 만들었다. 프로그램 위원회서 부결된 것이기 때문에 설득 공작을 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더구나 의견 조정도 용이하지 않은 상황에 미리 집행위원회에 올려서 잡음을 초래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었다. 이 작전은 사마란치 위원장의 협조없이는 불가능했다.'(김운용 저,'세계를 향한 도전',p.82~83)
당시 태권도의 올림픽 입성을 저지하기 위한 반대 세력은 꽤나 광범위했다. 친북 경향이 강했던 국제태권도연맹(ITF), 유사 무도 종목으로 태권도가 올림픽에 들어가면 올림픽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가라테와 우슈, 신규 종목의 채택시 자기 종목의 메달수가 줄어들 것을 걱정한 레슬링과 복싱 등이 일종의 반(反)태권도 연합세력이라고 할만 했다. 김운용은 반태권도 세력을 견제하면서 자신이 말한대로 '007 작전'을 비밀리에 또 전격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우선 사흘간의 공식 집행위원회에서는 태권도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마란치는 김운용과 내밀하게 약속한대로 9월 3일 임시집행위원회를 전격 소집했다. 여기서 사마란치는 "마지막 안건으로 시드니 올림픽에 트라이애슬론과 태권도를 채택할지 여부를, 내일 총회에 상정할 것인지 집행위원들의 의견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기습작전이었다. 안건 상정에 대해서 반대 의견은 다행히 나오지 않았고 두 종목의 채택 여부가 총회 안건으로 상정됐다. 총회 결과는 참석한 85명의 IOC 위원 만장일치의 찬성이었다. 정상적인 루트를 우회한 '변칙 승부'가 통한 셈이다.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김운용과 사마란치의 '짜고 친 고스톱'이 완벽하게 성공했다. 두 사람 사이에 오랜 기간 숙성된 브로맨스의 승리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김운용은 태권도의 메달 수에 대해서 사마란치와 사전에 조율한 결과 당초 2개에서 8개로 늘리는 막후 협상력도 발휘했다.
<1994년 파리 IOC총회에서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이 확정된 뒤 김운용이 귀국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994년 9월 4일, 파리에서 100주년 기념 IOC총회가 열렸는데 향후 태권도의 날로 지정될 정도로 태권도로서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당연히 나는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위해 전력투구를 했다. 하지만 솔직히 태권도는 아직 준비가 덜 돼있었고, 이미 프로그램위원회에서 정식종목 채택안이 부결되기도 했다. 여기에 국제태권도연맹, 가라테 등의 반대가 거셌다.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앞으로 기회가 없을 것같아 나는 사마란치를 졸라서 태권도의 정식종목 채택을 계속 밀어붙였다. 처음 사마란치가 "남녀 한체급이 어떠냐?"고 하기에 나는 차라리 안하는 것이 낫겠다고 버텼다. 이후 남녀 2체급까지 사마란치의 OK를 받는데 성공한 나는 집행위원회에서 3체급씩으로, 그리고 총회에서 4체급씩 조금씩 금메달 개수를 늘렸다. 결과는 85대0의 만장일치 통과였다. 당연히 사라만치의 조언과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사마란치가 없었다면 태권도는 아직도 올림픽에 못들어갔을 것이다. 한국이나 태권도에게 그는 잊지 못할 은인인 것이다.'(김운용 저,'김운용이 만난 거인들',p.118~119)
태권도가 세계화에 성공하고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공로의 상당 부분은 김운용에게 돌리는 것이 맞겠지만, 우리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공헌자들이 또 있다. 바로 전세계에 퍼져나가 있던 태권도 사범들이다. 이들이야말로 태권도 세계화의 첨병이자 뿌리였고 숨은 공로자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스포츠서울'은 태권도가 정식 종목이 된 직후인 1994년 9월 5일자 특집기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의 근본적인 힘은 세계화의 성공에서 비롯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 미주와 대양주 유럽 동남아 등 세계 각지에 퍼져나간 태권도 사범들이 현지의 여러가지 위험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태권도를 보급, 오늘날 세계 144개국에 5000만 태권도 인구를 만들어냈고 이들의 목소리가 IOC로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진 것이다.'
◇'세계화 이후의 세계화' 무엇이 중요한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한국 스포츠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두가지 이벤트를 남겼다. 그 하나는 분단 55년만에 처음 실현된 남북 국가대표팀의 올림픽 공동입장이었다. '코리아'라고 쓰여진 표지판 뒤로 한국선수단 기수 정은순과 북한 선수단 기수 박정철이 함께 한반도기를 들었다. 남과 북이 스포츠를 통해 하나가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또다른 하나는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정식 정목으로 채택된 태권도의 데뷔 무대였다. 김운용은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권도 경기가 처음 열린 역사적인 날, 태권도 경기장에는 관중이 꽉 들어찼다. 대성황이었다. 관중이 외면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는데 기우였다. 사마란치 위원장을 비롯한 많은 IOC 위원이 태권도 경기장을 찾아 관전하면서 만족해 했다. 혹시라도 판정에 문제가 생길까봐 36개국에서 한명씩 국제심판을 뽑았고, 한국 국적의 외국인에게 심판을 맡기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첫날 문제가 생겼다. 한국은 8체급(남녀 4체급씩)중 4체급에서만 출전했는데 첫 경기에 나선 신준식이 결승에서 진 것이다. 처음에는 신준식이 이기고 있었으나 콜롬비아 심판이 감점을 2개나 주는 바람에 져버렸다. 명백한 한국 견제였다. 그날 저녁 숙소에 들어오니 사마란치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한국 선수가)져서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불난데 부채질인가. 기분이 언짢았는데 곧바로 "한국이 4체급을 다 먹으면 자기 종목을 자기가 넣어놓고 독점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고, 태권도 존립 자체도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사마란치의 조언이 생각났다. 한국은 나머지 3체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러시아 중국 미국 스페인 멕시코 일본 등에도 메달이 골고루 돌아갔다.'(김운용 저,'현명한 사람은 선배에게 길을 찾는다',p.257~258)
<한국 선수로 역사적인 올림픽 첫 금메달을 따낸 정재은(왼쪽)의 시드니 올림픽 결승전 경기 장면. 사진=연합뉴스>
역사적인 첫 태권도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은 한국의 여자 57㎏급 정재은에게 돌아갔다. 그는 금메달을 딴 뒤 이런 인터뷰를 남겼다고 스포츠서울이 보도했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쁘다. 국내 선발전에서 워낙 강한 상대와 겨룬데다 종주국이어서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정신적인 부담이 컸는데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외국 태권도 선수들이 크게 늘고 있어 실력이 점차 평준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종주국이라고 이들을 얕잡아보다가는 큰 코 다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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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보고가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보고갑니다~
잘봤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