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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까지 그녀를 30번 만날 수 있었다.
아네스 바르다는 1928년생이다.
2016년 42번째 영화
30. 여기 저기의 바르다 Agnes de ci de la Varda (2011) : 일상, 여성, 고양이 그리고 해변. 할망의 예술 기행
만일 감히 추천이라는 말을 꺼내서 본편을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익히 상상하는 걸작으로서의
감정적 충만이나 윤리적 각성, 시사적 정의 혹은 미장센의 탁월함 등의 식상함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같은 영화의 목록은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언제든 호명할 수 있는 리스트가 대기중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네스 바르다의 해변>을 지나왔고, 나는 그것이 그의 실질적인 장편 유작이 아닐까 추정했었고,
작년 칸은 아네스 바르다에게 일종의 공로상을 헌정했다. 그러나,그는 TV 미니시리즈로 다시 찾아왔다.
약 50분 가량의 다큐멘타리 5편으로 구성된 본편은 그간 아네스 바르다의 예술적 관심이 이곳저곳에 흩어져있고
브라질, 쿠바, 독일, 미국, 이탈리아 등의 나라를 여행하며 만나는 예술가들과의 대화는 물론이고,
그 자신의 설치 미술과 더불어 국제 비엔날레에서 만날 수 있는 현대 미술과 고전 회화를 오고간다.
이는 작년에 일독한 그의 2004년작 <이데사, 테디 베어, 그밖에 Ydessa, les ours et etc.>의 후속 확장편이다.
본편의 상당 분량이 설치 미술을 비롯한 현대 미술에 배당된 것은 독자에게도 시야의 확대를 유도한다.
여기에 본편에 불민하게도 추천을 언급한 이유가 있다. 본편은 83세 노년의 예술가가 세계를 떠돌며
어디에든 예술은 있고 그들은 모두 일상 안에서 아름다움을 추출, 창작하고 있음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네스 바르다의 길을 따라서 인류가 도달해야할 삶의 심대한 가치를 구경하게 되는 것인데,
예술은 역사 이래 언제나 그랬듯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빛임을 본편은 설파하고 있다.
여든 셋의 노년 여성이 지팡이를 짚고 세계를 떠돌며 예술가들과 민중을 만나 나눈 대화를 옮긴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의 세계 예술 기행을 따라가면서 인류가 지속해야할 근원적인 가치와 미적 성숙을 각성한다면 더할 나위가 있을까.
우선은 시간이다. 5편 모두의 서두에는 가지 치기를 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동일하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가지 치기를 통해 나뭇잎이 가렸던 빛을 되찾는 이의 근원이 아네스 바르다, 즉 예술가임은 불문가지다.
그리고 나무가 자라서 빛을 가리는 그 시간(영화는 짧음을 강조한다)이야말로 생의 소중한 순환선일 것이다.
아네스 바르다의 세계를 주행한 이라면 그의 키워드들, 자끄 드미, 고양이(감독의 영화사 시네 타마리스의 상징 문양),
해변과 더불어 전술한 바의 설치 미술과 일상성, 페미니즘 등이 본편 이곳저곳에서 언급되는 것이 반가울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본문은 본편에 대한 감상문이 아니라, 단지 아네스 바르다의 여정에 대한 동행기에 불과함을 밝힌다.
첫번째 다큐는 베를린을 방문하여 거리에 설치된 각양각색의 곰 조각상과 사람들을 포착하고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의 포스터 이미지였던 천사 조각상을 스치고 지나간다.
감독 빔 벰더스를 만나지는 않지만, 이후 마지막 5번째 다큐에 이르기까지 빈번하게 언급되는 이미지로서
후배의 작품에서 유명한 이미지를 슬쩍 스쳐가는 것은 일종의 습관적 계산이나 인간=천사에 대한 염원일 것이다.
5편의 다큐 전반에 각국에서 열리는 아네스 바르다의 회고전과 그 곳에서 만나는 평론가, 관객들과의 만남이
마치 본편의 제작 목적 중 하나로 간주될 정도로 반복되는데, 독일에서의 회고전에서 그는 자신의 영화
< 5시부터 7시까지의 끌레오 >의 포스터 요일 표기 오류를 발견하고 재미있어한다. 할망의 귀여움이란..
처음 등장하는 예술가는 크리스 마르케다. 그는 아네스 바르다보다 연장자인 1921년생으로 당해 90세였다.
애석하게도 탁월한 다큐를 남긴 작가로서 다음 해인 2012년에 작고했는데, 그는 바르다의 고양이와 더불어
자신만의 동행자이자 상징 기호로 고양이를 먼저 보낸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화면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대화는 나누고 손가락은 등장하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는 크리스 마르케의 엉뚱함은 곧 정치성으로 웅변 대체된다.
크리스 마르케의 가상 공간을 둘러본 이후 도착한 낭트다. 아시다시피 이는 남편 자끄 드미를 떠올리게한다.
1991년작 <낭트의 자코>와 더불어 자끄 드미의 작품 <롤라>, <로슈포르의 연인들>을 가족 및 늙은 배우들과
더불어 회상한다. 인상적인 것은 낭트 시에서 개최중인 자끄 드미에 대한 헌정 중의 집단 퍼포먼스 등이다.
그의 발길은 갤러리로 향하며 회화와 설치 영상 미술의 주목할만한 작품을 소개하는데, 전통적인 신화적 인간과
기억을 통한 인간 존재론의 증명 등이 기민한 발상과 각종 일상적인 부자재와 영상을 통해 구현된다.
물론, 첫번째 다큐에서 가장 반가운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후반부에 등장하는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일 것이다.
아마도 당시 영화계에서 아네스 바르다가 선배라고 말할 수 있는 혹은 존장을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가인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는 그의 부인 마리아 이자벨과 같이 등장하며 무려 102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경쾌한
예술에 대한 입장과 퍼포먼스를 선보이는데, 2015년 4월 그의 죽음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종결에서 세 사람이 같이 액자형 사진에 담겨지는데, 아네스 바르다는 세 사람 나이의 합을 276 세라고 전한다.
감독에게 직접 '현실과 고독'에 대해 질문하기도 하고, 그의 영화에 대한 평론가의 비평을 옮기기도 하지만,
독자에게 친숙한 장면은 역시 그의 작품들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이니그마> 인용이다.
전자가 감독의 작품 내부로 들어가는 작은 출구라면 후자는 감독과 그의 부인에 대한 감정적 동의라고 할 것이다.
감독의 부인 마리아 이자벨과 같이 출연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이니그마>를 첨부하면서 본편의 지향점이
선배의 이 작품과 유사하며, 자신과 자끄 드미의 시간이 선배와 그의 부인과도 같이 지속되지 못했음을 서러워하는것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감독은 일상 안에서 부부의 삶을 지속하는 예술가 부부들을 5편의 다큐 곳곳에 배치하면서
새삼스럽게 누벨바그의 동지이자 남편이었던 자끄 드미와 자신을 그들과 동지적 관계로 추억하기를 염원하는 듯 하다.
5편 중 두번째 다큐의 첫 방문지는 브라질 리오이고 그 곳에서 시네마 노부의 글라우베 로샤의 자취를 더듬는다.
바로크적 혁명 신화극인 <죽음의 안토니오>와 <검은 신, 하얀 악마>가 인용되면서 감독의 자녀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60년에 이미 마흔에 다다랐던 아네스 바르다의 정치적 시선은 브라질과 쿠바의 방문 여정에서 새삼 증명된다.
저자 거리의 토속품에서 지방의 미를 발견하고 의자를 소재로 한 각종 조형물을 지나친 이후에 아네스 바르다는
스스로 해변에 의자를 배치하고 뒷모습의 자신을 프레임에 담는다. <아네스 바르다의 해변>의 뒷 편이랄까.
언급했다시피, 해변은 그에게서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한없는 수평으로의 이분법이라는 위안임을 상기했다.
르네 마그리뜨의 의자와 중절모, 파이프를 중심으로 그래픽한 영상을 따라서 초현실주의의 화풍을 지나친 이후에
다시 설치미술을 접견하고 도착한 곳은 잉마르 베르히만의 유물 경매에 대한 소견이다. 선배의 유물이 경매로
인터넷을 통해 팔려나갔음을 들었을 때 밀려드는 예술의 소멸에 대한 어떤 스산함이 잠시 프레임을 감싼다.
특히 가장 비싸게 팔린 유품이 <제 7인의 봉인>에서의 체스말이었음을 들었을 때 그 감도가 한층 상승된다.
이를 달래주는 것은 갑작스러운 페미니즘적 만남인데, 탈모로 인해 대머리가 된 여기자와의 대화는
육체 중 머리카락이 가지는 미적 가치와 사람들의 시선 반응 다큐에 이르면 예상치 않은 유머에 이른다.
여기자가 자신과 같은 탈모증 여인들과 모임을 만들고 누드를 촬영했을 때의 당당함은 기대만큼의 위로가 된다.
여기에 추가되는 것은 잉마르 베르히만의 여정을 안내해준 여성 영화인과 그의 남편인 평론가의 사연인데,
만남과 결혼까지의 짧은 이야기가 굳이 첨부된 것은 전술한 바처럼 예술가 부부를 통한 자끄 드미 소환술일 것이다.
베니스에 도착하고 이곳저곳의 풍경 속 카메라가 잠시동안 중지되는 지점은 어느 노인 여성 걸인의 발걸음이다.
즉각적으로 키에슬롭스키의 삼색 연작 속 빈 병을 수거하여 폐기하는 여성을 연상되는데, 아네스 바르다가
이 걸음에서 꺼내고자 한 것이 정치적인 것일지 혹은 일상의 이미지인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문득 그의 나이가
이 장면에 겹쳐지는 것만은 피할 수 없다. 83세의 프랑스 여성 감독과 베니스 거리의 늙은 여성 걸인이라는 간극.
아네스 바르다의 감자 의상 퍼포먼스와 감자 영상의 설치 미술이 이에 대한 조응인지도 명확하지는 않다.
비엔날레의 여러 설치 미술을 경유한 이후 다시 천사 캔버스가 프레임에 착지하고 나면
두번째 다큐에서 가장 흥미로운 퍼포먼스인 두 예술가의 점토 무언극이 한동안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퍼포먼스가 어떤 본능이나 감성, 분노의 폭발이든 아니든 엔딩에서 구멍을 뚫어 탈출하는 쾌감은 청중에게 전달된다.
진흙을 휩싸이거나 두드리며 마치 저항이라도 하는듯한 몸부림의 끝에 희망을 부가한 것이 관습적인 도식이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때가 묻게되는 인간의 삶을 생각한다면 이같은 퍼포먼스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번째 다큐의 시작은 스위스 바젤이고, 아네스 바르다는 이 곳에 영화감독이자 감자 설치미술로 등장한다.
잠시 자끄 드미의 <롤라>를 추억하고 난 이후 도착한 곳은 그에게는 레닌그라드로 호명되는 곳이다.
역시 영화감독으로서 인터뷰를 받은 이후 그의 발길은 고전 회화로 이어지고 여기서 렘브란트를 만난다.
이는 곧 후배인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로 이어진다. 그와의 대면 인터뷰는 짧고 상찬은 동의를 얻는다.
만일 통역이 필요치 않다면 좀 더 긴 시간의 대화를 지속할 수 있었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 단 두마디의 대화였다.
이같은 여운은 아네스의 집으로 초대된 설치미술가 크리스티안 볼탕스키의 작품 세계로 다소 해소된다.
5편의 다큐에 출연한 무수한 예술가들 중에서 독자의 시선을 가장 확연하게 잡아내는 작가인 이유는
그의 작품이 인류의 상흔, 대학살이나 거대한 집단 혼령에 대한 씻김굿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질병과 억압에 의한 황망한 죽음들이 기록되어 있으니 독자는 그 중
어느 지역의 기억을 꺼내들더라도 크리스티안 볼탕스키의 슬픈 기억과 노스탤지어에 동감하게 된다.
아네스 바르다가 크리스티안 볼탕스키를 소환한 이유는 그의 부인 역시 설치미술가인 아네뜨 메사제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 역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거니와 일상 속 소품들과 사진을 활용한 걸개 설치물은
개념의 흔들림이라는 관점 하에서 묘한 반응을 유발한다. 두 사람의 예술가 부부에서 다시 자끄 드미가 연상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장대 설치 미술에서 프랑스 시위 군중을 삽입하는 것 역시 아네스 바르다의 정치적 관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두 설치미술가의 작품은 도무지 우리 나라의 고위층 자금세탁을 위해 책정되는 미술품으로서는
도무지 활용될 수 없는 거대함이 압도적이니 이미지가 아닌 직접 관람만이 본편에 소개된 작품에 대한 예의일 듯 싶다.
네번째 다큐의 발길은 프랑스 리용 비엔날레로 향한다. 초반부의 중점은 중국인 설치미술가들의 일상성이다.
문득 다소 촌스럽지만, 중국인 남성 큐레이터의 동 서양 구분론에 대한 반론이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미스터 단추로 불리는 수집 미술가인 미셸 자네스와의 만남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마, 얼마전 일독한 감독의
<창조물들>에서 인간의 본성을 폭발시키는 장치였던 단추가 떠올랐다. 하지만, 미셸 자네스의 단추 수집은
그같은 맥락이 아니라, 각 개인의 소중한 일상을 담아내는 상징물로 단추를 거론하고 있다.
비엔날레를 나와 도달한 곳은 그의 데뷔작이 만들어진 곳인 '라 푸앵트 쿠르트'이다.
그는 거기서 당시 영화에 조연, 단역으로 출연했던 어부들의 늙은 초상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1956년작으로 네오 리얼리즘과 모던 시네마의 얼굴 포토 제니가 잉마르 베르히만과 알랭 레네를 연상시켰던
당시 불과 스물 여덞의 아네스 바르다는 자신의 출발지에서 옛 동료들을 만나고 서로에게 나이를 각성시킨다.
영화의 한 자락이었던 선상 창술과 조금은 변해버린 현재의 선상 창술 축제를 교차시키는 이유도 동일하다.
창작의 고향을 떠나 현대 미술전에 들어섰을 때 잠시 스쳐가는 화면이지만, 독자의 시선을 끄는 작품이 있다.
자신의 각기 다른 모습을 촬영하고 그것을 두 개의 스크린에 이어 붙여서 스스로가 스스로와 대결하는 구도를
창작한 영상 설치 미술은 이른바 쌍둥이, 도플갱어 장르의 영화들의 단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일상의 소품전을 지나 도착한 곳은 화가 피에르 술라주(1919년생)이다. 막 60년에 걸친 작품 여정에 대한
회고전을 마친 노예술가의 예술적 경향이 세간의 평가대로 동양 서예와 수묵화에서 영향을 받은 얼룩그림이라면
본 다큐 단락이 왜 중국인 예술가와 큐레이터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세심한 전략을 읽어낼 수도 있다.
피에르 술라주의 작품들은 회화이면서 동시에 설치 미술인데, 오직 검은 색으로만 작업하는 그의 방식은
검은 색 안에서의 다양한 빛과 음영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을 통해 모든 것이 들어있지만 어떤 것도 포함되지 않은
충만한 상상력의 고전성을 복구하고 있다. 화가를 떠나 잠시 해변가의 시 낭송회에서 배우 장 루이 트린티냥을 만나고
그 곳의 풍경들을 일별한 이후 도착한 곳은 그물을 매만지는 어부들의 일상이다. 어부들의 생업이 달려있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손질에서 그물은 어느새 일상 속에서 하나의 미를 창조하는 오브제로서 프레임에 포착된다.
다섯번째이자 마지막 다큐는 미국 산타모니카에서 시작된다. 놀랍게도 여기서 만나게 되는 이는 잘만 킹이다.
하지만, 아네스 바르다는 그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고 그의 부인인 패트리샤 놉과 그들의 딸의 작품만을 담는다.
슬프게도 잘만 킹은 다음 해인 2012년에 사망했는데, 본편 속 그의 모습은 생동감이 넘치는 그의 성애물과 같다.
소위 소박한 예술로서 호명되는 본편 속 패트리샤 놉과 사라진 어느 화가의 작품은 단순한 구성 속에서 신화와
일상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아네스 바르다가 마지막 단락에서 언급하려는 비주류 예술의 일환이기도 하다.
주류 비엔날레나 뉴욕 시장에서 호명되지 않고 사라진 소박한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기억하는 과정은 결국
거리의 그래피티와 폭력 하에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적은 벽에 대한 흑인 미망인과의 대화로 이어진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이어지는 여정은 천사 이미지의 재등장으로서 수태 고지와 피에타에 집중된다.
오른쪽과 왼쪽에서 등장하는 천사와 피에타의 다양한 형상에서 아네스 바르다는 미국의 그래피티를 위로한다.
이어지는 장소가 멕시코이며 이 곳에서 카메라가 빈민, 상인들을 오랫동안 등장시키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피에타 회화에서 등장했던 해골의 종교성이 멕시코에서는 축제의 유희로서 완화되면서 이어지는데, 이같은
죽음의 이미지가 늙음으로 확장되어 다시 생명으로 상승되는 지점에 멕시코 감독 카를로스 레이가다스가 출연한다.
후배의 작품 중 데뷔작인 <하폰>에서의 특이한 성관계 장면을 인용하면서 감독과의 대화도 담는다.
의외로 그의 작품 세계보다는 삶의 이력이나 부인과 자녀들과의 가족 모습을 반영한 것도 생의 경이라는 맥락일까.
프리다 칼로의 생가와 친숙한 작품들에 대한 시선들이 추가된 이유 중 첫번째가 색의 향연이라는 점도 추가될 수 있다.
후배 감독과의 짧은 만남이 지나가면 다시 멕시코 시장으로 들어오고 최근 개봉한 <007 스펙터>의 오프닝이 연상되는
해골을 응용한 멕시코 장식품들에 대한 해학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곧이어 어두운 유럽 회화와 설치미술의 해골에
대한 소개가 접합된다. 그 중 세번째 다큐에 등장했던 아네뜨 메사제의 해골 설치 미술은 의미심장하다.
장갑과 볼펜이라는 소재가 배치에 의해 의외의 해골로 구성된 작품은 촉감과 기록을 통한 죽음이라는 인간을 증언한다.
5부작 다큐멘타리의 엔딩에서 전통적인 여성 육체 조각상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조금전까지 등장했던 죽음 이미지로부터
부드러운 곡선미를 통해 생명의 약동을 전하려는 의지일 수 있지만, 다소 작은 분량이라 전달력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아닌게 아니라, 본편의 출연 이후에 작고한 크리스 마르케,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 잘만 킹 등은 물론이고 수회 반복해서
등장하는 먼저 작고한 남편 자끄 드미의 초상과 영화로 전달되는 죽음 분위기는 의도와는 달리 현대 미술과 일상, 사랑에
대한 노감독의 활발한 여정을 다소 어둑어둑한 정서로 접어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한 시선으로 동행한
아네스 바르다의 예술 찬미는 독자로 하여금 삶의 가치를 새삼 인식하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는 반문하게 한다.
아직 한글 자막으로 번역되지 않은 아네스 바르다의 작품이 더 있고, 2015년에도 단편을 연출했지만,
왠지 이 TV 시리즈 다큐야말로 그녀의 유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근심을 지울 수 없다. 개인적으로 그의 진정한 유작은
여전히 <아네스 바르다의 해변>이지만, 예술을 뒤돌아보고 구성하는 그의 상상력은 본편에서도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다.
나는 당신에게 본편을 삶이라는 좌표 하에서 추천하고 싶다.
<여기 저기의 바르다>는 정중동의 행보 속에서 예술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미학의 다큐멘타리이며
그 안에서 예술의 근원으로 박동하는 일상과 민중의 삶에 대한 시선을 지속하는 해변들의 공동체 여행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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