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감자 / 최연실
꽃이 피었다. 어둠을 밝히는 별꽃인양 새벽녘 즈음에 얼굴을 드러냈다.
재작년 꽃이 한창일 무렵, 평생에 딱 한 번 입는 드레스로 갈아입곤 잠자는 공주처럼 어머니가 누워 계셨다. 백설보다 희고 고운 피부, 쌍꺼풀이 없는 옴팡눈, 옥수수를 잘 먹을 치아와 매릴린 먼로보다 더 높은 코. 장의사가 백발의 머리를 한 가닥 한 가닥 정성스럽게 빗질하고 있다. 붉고 고운 동백 꽃잎을 얹어 놓은 것처럼 입술 화장하니 그제야 먼 길 떠날 채비가 끝이 났다. 바깥바람 스밀세라 자식들이 누워계신 어머니를 에워쌌다. 수순에 따라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서서 저마다 어머니의 뺨에 볼을 비볐다. 누워계신 어머니 이마에다 내 얼굴을 포개며 생전에 하지 못했던 말을 작게 읊조렸다.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 감사했고 행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했습니다.’ 그리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나니 오슬오슬 한기가 몸에서 일었다.
삼월에 심은 씨감자가 어둠 속에서 싹을 틔워 꽃이 핀 것처럼 어머니는 팔순을 넘기고도 건강했다. 동생 내외가 직장에 가고 나면 집안 이곳저곳을 손수 살피곤 했다. 단단한 땅속에서 줄줄이 걷어 올린 감자알처럼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노인 복지회관에도 다녔다. 그리 지내던 어머니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그런 일을 서너 번 겪고 나니 어린아이처럼 바깥출입에 겁을 먹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밀물처럼 어머니의 겨울이 찾아들었던 게 말이다. 나는 쇠약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어머니의 계절은 늘 늦가을에만 머물러 있을 거로 생각하고 싶었다.
평안남도 안주가 고향인 어머니는 당신의 외조모와 부모 그리고 여동생 둘, 여섯이 살았다. 당시 만주에서 독립운동 하는 외할아버지와 연락이 닿지 않자, 식솔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했는데 그때 어머니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해방이 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6·25 사변으로 학교도, 병원도, 관공서도 부산으로 옮겨 갔다. 당시 수도 국군병원에서 타이피스트로 근무했던 어머니도 병원에서 내준 군용 트럭을 타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조모를 따라 집안의 대소사를 같이 돌봐야 하는 맏딸이었으니 번듯한 혼처 자리를 한사코 마다하고 조실부모한 아버지와 결혼했고,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살림집을 자주 옮겨 다녔다. 하지만 일찍이 지병으로 예편한 아버지가 사업에 뛰어들고 그것마저 사기로 다 날리자, 힘을 보태려고 어머니는 세상과 마주했을 때, 어머니는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어머니는 미군 PX에서 나온 물건을 가져다 팔았다. 그 일은 임시변통에 불과했던 터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보험 외판원 일을 시작했다. 아침마다 서둘러 나섰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도드라진 앞니가 보일까 늘 크게 웃지 않던 어머니였으니 남에게 아쉬운 소리가 쉽지 않았으리라. 늦은 저녁이면 삼십 촉 전등불 아래 앉아 자식들의 터진 옷 솔기를 기우며 밤새 기침병을 앓는 아버지를 챙기곤 자정이 넘어서야 자리에 눕곤 했다. 어머니는 한 달 동안 보험 일을 해도 아기 주먹만 한 씨감자 한 개를 만들지 못했으니 언감생심 감자 수확을 꿈이나 꾸었을까. 보다 못한 아버지가 친지들에게 소식을 전했지만, 아버지마저도 뒷말을 잇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름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을 고객에게 설명해야 했으니 말이다. 생각하면 씨감자는 어머니, 자신이었다.
한강을 중심으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아파트 단지 안에 학교도 세워졌다. 신설된 학교는 학생 수가 턱없이 부족했던 터라 배정의 폭을 넓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며 중학교에 다녔다.
오월의 어느 날 하굣길, 그날은 유난히도 까만 단발머리 위로, 하얀 포플린 블라우스 어깨 위로,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의 꽃잎이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다. 봄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꽃잎을 쳐다보다 내 쪽으로 걸어오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림잡아 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 같았다. 여느 때 같으면 덥석 달려가 안길 나였지만, 그날따라 친구들에게 들키면 안 될 비밀을 품은 소녀처럼 고개를 숙여 버렸던 일이 내 기억 저편에 흐릿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나를 보지 못했는지 친구들 옆으로 말없이 지나갔고, 내 마음은 집으로 오는 내내 지고 온 가방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웠다.
저녁 늦도록 어머니를 기다렸다. 어둠이 그림자를 반쯤 삼켜버렸을 즈음, 어머니가 쇠고기와 양배추 한 통을 사 들고 왔다. 저녁상에는 쇠고기에 양배추 한 통을 다 넣어 자작하게 국물을 낸 일본식 전골이 올라왔다.
“당신, 고모님 댁에 다녀왔구려!”
아버지가 주발에 밥을 담아서 들고 오는 어머니를 보며 말씀하셨다.
“네, 고모님께서 일시납을 해 주셨어요.”
저녁상을 물리고도, 이부자리를 농에서 꺼내 방바닥에 펴고도, 다음 날 등교하는 내게 도시락을 건넬 때까지도 어머니는 묻지 않았다. 그저 잘 다녀오라며 등만 토닥였다.
보험 일을 하면서도 삼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결근도, 정장 한 벌을 갖추지 못한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아버지께 당신의 주장을 좀처럼 펼치는 것이,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온다. 물건을 정하게 쓰는 것은 당연했고, 고장난 것도 오래 묵혔다가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버리곤 했던 어머니다. 간신히 언문만 깨친 어머니가 아닌데도 그리 사는 게 그 당시 살아가는 여성상이라 생각하셨나 보다. 단단한 대지를 뚫고 올라와 싹을 틔운 씨감자가 가녀린 꽃대를 타고 올라 오월에 핀 꽃처럼 그리 사셨나 보다.
어머니가 가시고 난 뒤, 유품을 정리했다. 요양원에 들어가실 즈음에 정리했던 터라 남아 있는 물건은 많지 않았다. 해묵은 책장에는 아버지와 함께 찍은 액자가 길을 잃은 채 동그마니 놓여 있다. 여읠 때마다 찍은 자식들 결혼사진과 손주들의 기념사진을 모아둔 앨범과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마중 간다며 품 안에 끼고 다녔던 성경책 한 권과 찬송가에 먼지만 소복하게 쌓여 있다. 석 자짜리 농 안에는 철마다 때마다 자식들이 사다 준 새 옷들이 걸려 있다. 석인성시惜吝成屎 된다는 말을, 당신은 늘 하며 아끼느라 입지도 않고 고이 모셔둔 내복과 속옷들이 널려져 있다. 미국서 큰딸이 사 준 버버리 가방의 손잡이가 주인을 떠나보내고 축 처져 있다. 써 보지도 못한 달러가 가방 안에 고스란히 어둠에 묻혀 있다. 씨감자가 땅속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햇빛을 본다. 자식들의 손에 감자 한 알씩 쥐었다.
오월의 햇살에 감자 한 알이 외로이 방안에 앉아 싹을 틔운다.
첫댓글 글을 읽으며 어머니를 입관할 때 모습이 떠올라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었네요. 저 또한 수의 대신 모시 한복에 노리개까지 달고 저승으로 떠나는 어머니 양 볼에 내 얼굴을 비비며 마지막 인사를 해 드리고도 먼 길 가시는데 다리 아플세라 주물러드리고 입관을 주도하는 분들과 같이 어머니를 받쳐 들어 관 안에 눕혀드리고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어깨들 들썩이던 지난 시간이 떠올라...그 당시 어머니들은 거의 비슷한 삶이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가 끝난 뒤 큰누나가 집에 찾아와 어머니 유품을 정리해서 성당에 기부한다고 붙박이 옷장이며 안방 서랍장 안에 든 어머니 옷들을 꺼내는데, 거의 새 옷이나 다름없어... 그중에 어머니가 자주 입고 아끼던 옷 몇 벌은 제가 두고 본다고 누나 몰래 깨내두고 지금도 어머니가 쓰던 안방 행거와 서랍장에 들어있네요. 그 후 고인에 대한 유품 정리는 바로 하지 말고 천천히 마음이 진정된 뒤에 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한 개인의 삶의 궤적이자 역사나 다름없으니까요. 글 공감하며 뭉클했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