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너머에 / 윤선경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횡단보도에서 택시가 잠시 섰는데 열린 창문으로 옆 차의 남자가 전화로 실랑이하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아들로 보이는 남자가 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짜증을 냈다. "왜 버스를 탔어? 제대로 내릴 곳도 못 찾으면서. 차라리 걸어 다니지." 남자가 언성을 높이자 우리가 탄 택시의 기사가 조용히 창문을 올렸다. 바뀐 신호에 액셀을 밟으며 택시 기사가 말했다. "버스를 못 타면 택시를 타라 해야지."
나는 고개를 돌려 바깥을 내다봤다. 늦은 시각이라 검은 건물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남자의 목소리가 저렇게 큰 건 아버지가 말을 못 알아들어서인 것 같았다. 귀가 안 들리니까. 문득 돌아가신 지 여러 해 지난 엄마가 떠올랐다. 일흔 후반 정도일 때 엄마는 목욕탕 가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돈을 주고 등을 밀라고 했다. 요즘 젊은 여자들도 다 그런다며. 내 말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거기에 돈을 쓴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엄마는 딸이랑 같이 목욕 가고 싶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는지 모른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런 생각도 한참 지나서야 들었다. 그때는 액면 그대로 듣고 엄마는 절약해서가 아니라 돈 쓰는 습관을 바꾸지 못하는 것 같아, 생각했다.
우리 앞자리에 스무 살 남짓 아가씨 두 명이 신나게 야구를 즐기고 있었다. 큼지막한 통에 담긴 볶음 라면과 맥주를 먹고 마시며 음악에 맞춰 율동하고 노래하며. 윤기 나는 검은 머리, 빛나는 피부. 내뻗는 하얗고 오목오목한 손등에 자꾸 눈길이 갔다. 평일에 일하고 주말에 저렇게 지내면 굳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족에게 얽매여 살 필요가 있을까?
야구장에 간 게 처음이었다. 아이들 키울 때 야구장에 간 적이 없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은 후일 축구장을 찾아갔겠지만, 아이들 어릴 적에 저런 여유를 맛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등 뒤에 큼지막하게 야구선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원피스처럼 길게 늘어뜨려 입고 엄마 손에 이끌려 오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잃어버린, 놓쳐버린 시간이 생각나 부럽고 착잡했다.
갑자기 남편이 벌떡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낮은 위치에서 경기를 보고 싶었는지. 이날 낮에 나는 한화 구단의 상징색인 오렌지색을 찾아 온 집을 뒤졌다.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은 그는 등이 구부정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남편을 타자화해서 바라보게 되었다. 머리숱이 많이 빠지지 않았어도 ‘아, 저 사람이 언제 저렇게 늙었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인파에 시달리기 싫어서 우리는 9회를 남겨두고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택시 뒷자리에서 남편과 지인은 버스와 택시의 무임승차 연령이 몇 세인지 설왕설래했다. 70세인가, 65세인가? 도토리 키재기였다. 밝은 곳에 있을수록 어둠은 더 짙게 느껴졌다.
‘오베라는 남자’로 널리 알려진 프레드릭 베크만의 신작 ‘우리와 당신들’에 온 마을 사람들이 하키에 매달리는 ‘베어타운’이 등장한다. 하키 시합을 앞둔 베어타운에 전운이 감돌면 일흔, 여든 넘은 노인들이 등에 "베어타운 대 다른 모두" 글자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집 앞 흔들의자에 앉는다. 하키에 열광하는 ‘베어타운’이 떠오른 나는 ‘류현진’, ‘문동주’, ‘안치홍’이 적힌 티셔츠가 평범하게 느껴졌다. "최강한화 대 다른 모두", 최근 하이브와 어도어의 지분 분쟁으로 기자회견을 한 민희진의 어록으로 "드루와 드루와(‘들어와’의 비어)"는 어떨까? 논리보다 공감이 앞서는 법이니. 이색적인 문구로 등을 장식한 주황색 티셔츠를 상상하니 조금 즐거워졌다.
이날의 반전은 그날 밤이었다. 모처럼 통화한 아들은 초2 무렵 우리가 야구장에 갔다고 증언했다. 우리 가족은 구단에 가입했고, 나는 아들에게 배트와 글러브를 사줬다. 아들은 20년이 지났어도 이름을 기억하는 친구와 집 앞 잔디밭에서 야구를 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