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석 자 문상 두 자 / 김잠출
까톡! 까톡! 알람에 모두 고개를 숙인다. 너나없이 손바닥을 쳐다본다. 모바일 청첩장이다. 축의금 계좌 안내에 따라 손가락 몇 번 누르면 ‘부조’라는 빚을 청산한다.
스무 남은 집이 모여 살던 고향 동네는 온통 까막눈 천지였다. 대부분 식민시대에 태어난 세대들이라 농사만 잘되면 그만이었다. 그중에 이장은 유식자였지만 글을 안다고 해도 학생부군신위라는 지방이나 겨우 쓰는 정도였다. 그래도 누구 집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이장도 덩달아 바빴다. 집집마다 지방을 부탁했고 혼사를 논하는 집안은 사주단자까지 이장의 손을 거쳐야 했다. 아이를 낳으면 작명에서 호적에 올리는 일까지 혼자 도맡아 했다. 그러니 이장 댁은 우리 마을의 행정복지센터이자 문화센터였다.
까막눈이긴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친은 까막눈으로 살다 까막눈으로 가셨고 어머니는 같은 문맹이어도 받침 없는 한글을 더듬더듬 읽고 숫자 5까지는 쓸 줄 알았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고’ 살았던 어머니는 희한하게도 내게 한글을 깨치게 한 분이고 한자에 친하여지도록 만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면서도 책도 없고 글도 모르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몸소 훈도 역할을 맡았다. 기발한 교육 방법은 독서백편의자현의 20세기 버전이었다.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어머니는 시간만 나면 신문을 가져와 “읽고 또 읽으라.”고 권했다. ‘봉숭’을 싼 신문지였다. 어머니는 동네잔치나 대소상, 동제나 나다리가 있는 날이면 어디든 달려가 당신의 노동을 부조했다. 어둑할 무렵 삽작문을 들어서는 어머니 손에는 늘 봉숭이 들려 있었고 유난스럽게 봉숭은 꼭 신문지로 싸 들고 오셨다. 어머니는 찢어진 조각이라도 귀한 신문지만큼은 절대적으로 사수했다. 냄새 밴 신문지를 펴는 순간 배고픈 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순식간에 봉숭이 사라졌다. 텅 빈 신문지를 어머니는 가지런히 폈다. 마치 그 신문지를 갖기 위해 종일 품을 판 것처럼 지면을 만지는 모습이 엄숙하고 진중했다. 다리미로 신문지를 다리거나 접힌 곳은 몇 번이나 문지르고, 찢어진 건 밥풀로 붙여 유독 글자를 살리는 데 주력했다.
“자꾸 보면 검은 글자가 눈에 들어올 거다.” 당신의 정성이 깃든 신문지를 내밀며 꼭 하신 당부였다. 봉숭을 싼 신문지는 어머니에게 작은 종교였다. 잔치 음식의 기름이 배고 찢어진 신문지를 매만지는 일은 언제나 성스러운 의식이었고 자식만큼은 신문을 빽빽이 채운 글자처럼 앞서가는 삶이길 바라는 기도를 담고 있었다. 때로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배워서 남 주나.” 하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어머니의 한글 떼기 교육은 어느새 나의 즐거운 놀이가 되어있었다. 어머니는 같은 글자를 이렇게 읽어도 잘했다, 저렇게 읽어도 잘했다고 칭찬하셨다. 그렇게 어머니를 기쁘게 하던 나의 엉터리 한글 공부는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건 글씨고 흰 것은 종이였는데 점차 글자로 눈에 들어오고 이름도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한 문장을 모두 읽고 설명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신문 읽기를 한 지 1년 반이 지날 무렵, 어머니의 창의적인 ‘무작정 읽기’ 교육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1968년 12월 5일 오전, 선생님은 칠판에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써 놓고 하교 때까지 모두 외우라고 했다. 나는 393자를 3시간 만에 암기했다. 강냉이 빵 한 판이 부상으로 주어졌다. 그날 우리 가족은 방안에 빙 둘러앉아 향긋하고 구수한 빵을 먹었다. 내가 생애 처음 받은 상이자 수입이라 잊히지 않는다.
한글을 독파한 아들은 5학년이 되어 지방을 직접 쓰겠다고 나섰다. 이장의 지방 대필에 은근히 자존심이 상해 있었던 때였다. 어머니도 미소로 인정하면서도 좀 미덥잖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첫 지방 쓰기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체본을 보고 연필로 흉내를 냈지만 처음 쓴 한자는 그림도 아니고 글씨도 아니었다. 개발새발인 한자를 본 아버지가 창피하다면서 찢어버렸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이장의 지방 대필은 계속되었다.
중학교 2학년에 구원자를 만났다. 한문이라기보다 한자를 배우던 시절, 한문 선생님은 붓글씨로 차트를 만들어 수업하거나 생활 한자를 가르친 실사구시 파였다. ‘顯考學生府君神位’ ‘顯妣孺人密陽朴氏神位’ 를 세로로 써 교본으로 나눠줬는데 절치부심하던 나는 이를 즉각 활용했다.
할머니 제삿날, 어머니가 장날에 미리 구해 놓은 한지를 잘라 볼펜으로 한 획 한 자씩 힘주어 써나갔다. 그리도 두려울 수 없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는지 신주 대신 모셨다. 그림 그리듯이 흉내를 낸 것이지만 가족 모두 흡족해했다. 이로부터 한문의 매력에 푹 빠졌으니 일기도 한자로 끼적이고 이름도 주소도 한자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생각하면 지금 고서를 읽거나 쓰는 등 한문에 친숙하도록 이끈 힘은 ‘학생부군신위’ 여섯 글자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능력을 다소 높게 평가하며 자랑하기 시작했다. “인자사 우리 집도 한자로 지방 쓴다.”라며 들으랍시고 혼잣말하거나 “00집 제사에 지방이나 축문 써줄 수 있나?”라며 글 빚처럼 주문받아 오기도 했다.
대학교 방학 때 집에 가니 아버지가 혼사에 낼 축의금 봉투를 찾았다. 편지 봉투를 한 묶음 사서 경우에 맞는 문구를 써 전화번호부 책에 넣어 뒀는데 한자를 모르니 헷갈린 것이다.
‘祝 華婚’ 세 글자가 적힌 봉투를 드렸다. 그러면서 “祝 華婚은 결혼식용이고 賻儀라 적힌 봉투는 문상용.”이라고 설명했다. 옆에서 어머니가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결·혼·식은 세 글자고 문·상은 두 글자니까 딱 맞네.”
부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근동의 경조사에 예를 갖췄고 정성을 다하는 동안 한 번도 봉투를 혼동한 적이 없었다. 세 글자와 두 글자를 구분하는 일은 그리 무리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청첩장이나 부고장이 사라졌다. 경조사에 굳이 걸음 하지 않아도 욕먹지 않는다. 팬데믹 초기엔 두려웠지만 어느새 완전히 적응됐다. 그래도 부조나 상조 의무를 다하는 미풍양속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언젠가 회수하는 사적 보험이거니 하면 맘 편하다.
까톡! 까톡! 오늘도 오만때만 까톡이 울린다. 부모님이 계시면 청첩장은 ‘까·까·톡’, 부고는 ‘까·톡‘ 두 번 울리도록 설정해 드렸을까.
사랑도 문자로 하고 이별도 까톡거리는 시대, 모바일 청첩장이 더 이상 낯설지는 않다. 그냥 무덤덤하다.
첫댓글 ㅎㅎ 이름도 독특하고, 글도 독특하여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이 어렴풋이 떠올라 하늘에 계신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60년대 중반이죠. 우리 집 안방 윗목에는 소나무를 켜서 검은 물을 들인 제법 커다란 칠판이 늘 걸려있었는데(아주 어린 시절이라 용도를 모름) 훗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엄마가 말하기를 그게 칠판이었다고. 칠판은 우리 큰형이 마을 어르신들에게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쳤다고. 어머니도 그때 배우셨다고 하더라구요. 아버지는 어려서 할아버지가 한학을 가르쳤는데, 큰아버지와 달리 공부는 뒷전이고 도반들과 어울려 놀기만 했다고.ㅋㅋ(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 그래서 저의 어머니도 그때 초등학교 저학년처럼 글을 읽게 되었는데, 지금도 후회되는 일이 왜 좀 더 심화과정을 가르쳐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엄닌 아버지가 오일장에서 사다 준 고전 소설(옥단춘전, 춘향뎐 등) 같은 책을 어렵게 읽으셨거든요. 지금처럼 글씨나 크나. 띄어쓰기도 안 된 책을 침침한 눈으로 읽는다고 고생하시고. 학교에는 전래동화 같은 글자도 크고 읽이 편한 책도 많았는데. 내가 성장해서도 왜 재밌고 좋은 책을 보여드리지 못했는지 두고두고 마음이 아픕니다.
선생님은 효자셨네요. 어머니는 고전소설을 읽으셨네요. 우리 어머니는 가나다라 정도만 읽다가 포기하셨는데... 지나면 다 후회되는 일만 생각이 나니~
어머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따스한 글을 잘읽었습니다.
나이들수록 돌아가신 어머니와 추억만 새록새록하니 이것도 과히 좋은 현상은 아닌듯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게 없다던 힘든 시절의 어머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