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추천 당선자 : 정향숙 시인**
정향숙 추천 당선 작품
텅 빈 흔적 외 2편
건들장마에 자욱이 멀어진 앞산
내민 손에 숨죽인 아우성들이 눅눅히 쌓인다
상수리나무 군락 사이 젖은 비탈길
촉수를 사방으로 내뻗은 뿌리
걸터앉은 퇴적물은 밤새워 층을 쌓아
염원 담은 발자국 받아 낸다
늘어진 기운 붙잡은 맨발
낯선 울음소리 흘리며 짝 찾는 고라니
쉰내 나는 여인네들의 수다에 묻힌
강아지 작은 발자국
나발 모자 쓴 채 반쯤 묻힌 도토리의 한숨까지
기나긴 꿈 깨어 목청껏 노래하다
애달픈 생을 마친 매미의 주검
유혹하던 암칡 보랏빛 향 뿌리고
검은 상복의 조문객들이 줄을 잇는다
그루터기 명상
뒷산 기슭 굵고 곧게 뻗은 굴참나무 한 그루
도토리가 많이 달려 동네 아낙네들 모여들었고
그늘이 좋아 취나물이 번성했다
삼십여 년 만에 폭우로 계곡이 넘치고
나무들이 쓰러졌다
쓰러진 굴참나무도 베어졌다
열매를 맺어 보시하던 천 개의 손들은 숲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루터기
내 몸 버려 인간의 번뇌를 끊어주고
두툼한 껍질에는 회귀를 기원하는 흑버섯이 자랐다
가끔 새끼 고라니 고개를 빼고 웩웩거리고
멧돼지 내려와 뿌리를 팠다
가진 것 모두 내어주고
자연의 풍파를
오롯이 몸으로 받아내며
삼매에 든 그루터기에
반개한 달이 내려와 가부좌를 튼다
빗장을 풀다
가을이 가슴을 열고
내게 들어옵니다
오랜만의 해후
구멍 뚫린 마음 들킬까
여러 해 걸어 두었던 빗장
가문비 마른 잎 가루눈처럼 날리는
서리산 백련사 법당에서
큰절 한 번에 번뇌 하나 내려놓고
오래된 빗장을 풀었습니다
밤새 잠 못 이루는 풍경을
온돌방 아랫목에 들여놓아 봅니다
무성했던 옷을 벗고 움츠린
자작나무 하얀 속살을 어루만집니다
아침 공양마저 힘든 중생에게
내 몫을 내어주고 속을 비웁니다
붉은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는
그대의 품 넓은 가슴에 안겨
아팠던 세월을 묻었습니다
가을은 가랑잎처럼 가볍습니다
정향숙 당선 소감
더욱 겸허한 마음으로
갈 길이 멀기만 한데 등단 소식에 얼굴을 붉힙니다.
시 쓰기를 시작한 지 여러 해. 시를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습니다. 내게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여린 속 알맹이인 내게 든든한 겉껍질이 되어준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형제들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시 쓰기를 게을리하며 방황하는 저를 이끌어 주신 교수님과 〈율동시회 〉 문우님들. 묵묵히 옆에서 지켜주는 남편과 아들 성호. 엄마가 시를 쓰면 책을 내주겠다고 힘을 실어주는 속 깊은 딸 수연이.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 좋은 시를 쓰라는 격려와 채찍으로 생각하면서 더욱 겸허한 마음으로 노력하는 시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정향숙_서울 출생. 율동시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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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추천사
불순물 하나 없는 마음 자세
정향숙의 응모작 「텅 빈 흔적」 외 14편 중 「텅 빈 흔적」 「그루터기 명상」 「빗장을 풀다」 등 3편을 추천 당선작으로 뽑는다.
나는 신인들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항상 생 텍쥐페리가 그의 소설 『우연한 여행자』에서 말한 ‘완성’이란 말의 의미를 곱씹곤 한다. 그는 말한다. “완성이라, 함은 이제 더 첨가할 것이 없음이 아니라 더 이상 제거할 불순물이 없음을 뜻한다.”라고.
시 한 편이 그리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신인의 작품에서 완성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인으로서 최소한 그러한 마음 자세가 녹아든 작품을 원한다.
추천 당선작으로 뽑은 정향숙의 「텅 빈 흔적」은 초가을 비가 내리다 말다 한 장마가 자욱이 멀어진 날 산에서 “촉수를 사방으로 내뻗은 뿌리”와 “짝 찾는 고라니”와 여인과 함께 걷는 “강아지”와 “반쯤 묻힌 도토리”, 그리고 “매미의 주검”까지 여름의 흔적에 주시한다. 한때 꽉 찼던 산이 가을이 되어 텅 비어 가는 우주의 섭리를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애달픈 생을 마친 매미의 주검” 앞에 줄을 잇는 “검은 상복의 조문객”, 즉 개미들의 모습까지 놓치지 않는 안목은 진지한 시적 명상이 있기에 가능하다. 시인은 시에 대한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시가 되는 방향에서 시에 관하여 진지하게 명상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루터기 명상」은 한때 “굵고 곧게 뻗은 굴참나무 한 그루”가 “삽십여 년 만에 폭우로” 쓰러지고 베어져 이젠 그루터기만 남은 존재에서 굴참나무의 생명이 완전히 끊긴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아 쉬어 가는 인간의 “번뇌를 끊어주고”, “회귀를 기원하는 흑버섯”이 자라고, “만개한 달이 내려와 가부좌를” 틀게 해주는 소중한 생명체로 거듭남으로써 우주가 한 몸이며 하나의 정신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신의 시적 승화는 시인으로서 눈의 빗장을 열고 마음의 빗장을 여는 데서 가능하다. 「빗장을 풀다」가 그렇다.
「빗장을 풀다」는 시적 체험에서 얻어진 시적 인식의 결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마음속에 “여러 해 걸어두었던 빗장”을 풀어 “내게” 들어오는 “가을”과 해후하는 기쁨으로 시작하여 “내 몫을 내어주고 속을” 비워 가랑잎처럼 가벼운 “가을”의 깊은 속내로 끝내는 구성이 돋보인다. 1연과 4연의 잘 짜인 구성 속에 “서리산 백련사 법당에서/ 큰절 한 번에 번뇌 하나 내려놓고/ 오래된 빗장을” 푸는 마음과 “무성했던 옷을 벗고” 속을 비운 “하얀 속살”의 자작나무에서 신선하면서 개성적인 삶의 성찰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