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214
칠성바위가 있는 평다리 마을
무안읍 용월3리 평월 마을
龍月里는 무안읍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평산 아래에 있다. 동북쪽으로는 함평군 엄다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앞으로는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본래 무안군 외읍면의 지역인데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약곡리 보평리 평월리 용암리 양동리를 합하여 무안읍에 편입되었다. 용암과 평월의 이름을 따서 용월리라 했다. 현재는 노동-약곡과 상동 평월 마을로 이루어졌다.
평교에서 평월로
平月은 용월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국도 1호선의 무안과 함평의 경계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어들면 만나는 마을이다. 원래의 지명은 평다리[平橋]였다. 주민들은 왜 평다리라고 불렀는지 유래는 모르지만 영성정씨 족보나 1789년에 나온 자료 호구총수를 보면 평교로 나온다. 이는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마을유래지에 나온 바대로 ‘예전에는 마을이 포구로서 상동과 노동을 연결하는 관문이었고 내륙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해서 평다리[平橋]라 불렀다’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무안천은 조선시대에는 바닷물이 들어왔던 지역이다. 마을에서 현청이 있는 읍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안천을 건너야 되는데 이때 건너는 다리가 평다리여서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불렀으리라 여겨진다. 지금도 국도 1호선의 무안과 함평의 경계지점에서 마을로 들어오는데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 이름이 평다리이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이름인 평월로 바뀐다. 평교에서 평월로 이름이 바뀌어진 것은 다른 지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본이 자기들 쓰기 편할 대로 마을 이름을 바꾼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청계의 龜老洞이 九老洞으로, 삼향의 大雁洞이 大安洞으로 변했듯이 ‘평다리’라고 불렀던 마을 이름을 일본인들의 발음대로 ‘평달’로 생각해 ‘달’을 음차하여 月로 표시하면서 평월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문헌에 평교라는 지명이 없어지고 平月로 나온 것은 1912년의 자료부터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平月이라 한 것은 마을 뒤에 있는 달바위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압해정씨(영성정씨로 부르기도 한다) 정세화이다. 丁世華(1556-1607, 자-君實. 어모장군도총부도사 역임)는 조선 중종 대에 부사를 지냈던 丁克淳(1468 - 1544. 자-가신)의 증손이다. 정극순은 경기도 광주 두모포에 살았으나 혼탁한 정쟁을 피해 공수산(현재 남산) 아래 동문 밖에 터를 잡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한 선비이다. 증손 世華 대에 이르러 임진왜란을 면성면 마기곡에서 피하였다가 임란 이후 상동으로 옮겼다. 그러다 터를 정하지 못한 입향조가 현몽을 받아 현재의 터로 옮긴 것이다.
평제역이 있었던 마을
이 마을은 큰마을 새터(작은 마을) 산지촌으로 이루어졌다. 모두 큰 마을에서 분가한 마을로 압해정씨 집성촌이다. 마을 뒤에는 청룡산이 있고 뒷매와 정문등 그리고 앞뫼로 둘러싸여 있다. 뿐만 아니라 100여년이 넘은 팽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예전에는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마을이다. 하지만 지금은 앞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 무안 나들목 길이 나 있으며 뒤로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소음과 어수선한 느낌을 준다.
조선시대 이 마을은 평제원(平梯院)이라 부르는 역참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역사서에도 평제원이 나오는데 ‘현에서 북쪽으로 8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도 예전에 역마을이라는 지명이 있었으며 큰마을에서 작은마을로 넘어가는 능성이를 역마등이라 하고 주막등이란 지명도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말을 먹이는 마싯골이 있었다. 모싯골이라고도 한다. 말들의 먹이통으로 여겨지는 구수 맛골도 있다.
청룡산 옆에 굴바위산이 있는데 현재 석산 개발이 되어 있는 산이다. 이 산은 사람이 들어 다닐 수 있는 굴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의 구박골이라 부르는 곳에 용샘이 있다. 용샘은 물이 좋아 피부병과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 해서 널리 알려진 샘물이다. 또한 아무리 가물러도 물이 마르지 않으며 비가 많이 와도 늘 일정한 수량을 갖고 있는 물이다. 이 샘이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면서 훼손되어 버렸으나 지금도 물은 조금씩 나오고 있다.
상동에서 마을을 지나 함평의 학다리로 가는 길목에 각시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기원이나 소원을 들어주는 바위로 주민들이 정성스레 치성을 들여왔던 바위이기도 하다. 실지로 이 마을에서 장군이 나왔는데 그 사람 어머니의 말을 들어보면 이 바위에서 애기를 팔았기 때문에 신령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팔다’라는 어휘는 특별한 치성을 드렸다는 의미다. 각시 바위의 중간에는 정화수나 제물을 올릴 수 있게 홈이 파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길을 넓히면서 이 바위도 길에 묻혀졌다.
마을회관 옆에 평월재 평교단 효자각 등 압해정씨 가문에 관련된 건축물 들이 들어서 있다. 평월재는 1989년에 세운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븡의 형태다. 평교단은 삼문이 있으며 입향조의 선대인 정극순의 가묘가 있는 단을 모시고 있다. 효자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한 건물로 안에는 정려 현판이 걸려 있다.
칠성바위가 있다
효자각의 주인공은 입향조의 백부인 정 찬이다. 정 찬은 정극순의 손자로 1533년에 태어났다. 정 찬은 천성이 유순하고 재질이 과인하여 효행이 하늘을 감동시켰다. 어머니께서 병석에 눕자 매일 변을 맛 볼 정도로 지극한 효성을 보인 것이다. 해서 당시 사림이 국가에 천양(闡揚)하여 국가에서 정려를 명한 것이다. 효자각은 명종 7년 창건 후 1920년경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다. 2004년 오래 되어 무너져 버린 효자각을 2005년 새롭게 중건하는 등 지금까지 5번을 중수 했다. 내부에 정려편액 1기가 있다.
마을 뒤에 칠성바위라 부르는 고인돌 群이 있다. 울타리 안에 6개 그리고 울타리 밖에 한 개가 있는데 주민들은 이 한 개의 바위를 달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칠성바위라 해서 별의 모양을 따서 배치해 놓았는가 보았더니 그것은 아니고 2줄로 배열되어 있었다. 제일 큰 바위를 재보니 260 × 285의 길이를 갖고 있다. 칠성바위가 놓여있는 주변은 지반이 모두 바위였다.
장승백이가 있다. 현재 서해안고속도로 무안 나들목에서 무안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주막과 여러 채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3기의 입석이 있어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으나 현재는 없다. 살맥이독이라고 불리는 이 입석은 마을에 호열자 홍역 천연두 염병 등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 두 기의 입석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한 기도 없다. 예전에는 당산제를 지낸 후 줄다리기를 하여 줄을 입석에 감았다 하나 현재는 당산제도 지내지 않고 있다.
마을 앞들을 평월평 또는 평월들이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