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유치원에서 돌보고 있는 6살짜리 아이는 일주일에 17개 학원을 다녀요.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선 아이가 아빠보다 늦은 저녁 시간에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아이가 의외로 많습니다. 문제가 심각하지요."
24일 오후 서울 올림픽 펜싱경기장 앞 주차장에 수 많은 관광버스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버스에서 내린 한 유치원 교사는 요즘 취학전 아이들이 불쌍해서 못 보겠다며 이 같은 말을 남겼다. 그리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펜싱경기장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곳에선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사진=마치 '붉은 악마'를 연상시키 듯 붉은 옷으로 통일한 전국 국.공립 유치원 교원들과 학부모들이 24일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 모여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24일 오후 서울 올림픽 펜싱경기장 앞 주차장에 수 많은 관광버스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버스에서 내린 한 유치원 교사는 요즘 취학전 아이들이 불쌍해서 못 보겠다며 이 같은 말을 남겼다. 그리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펜싱경기장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곳에선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사진=마치 '붉은 악마'를 연상시키 듯 붉은 옷으로 통일한 전국 국.공립 유치원 교원들과 학부모들이 24일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 모여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펜싱경기장 1.2층 스탠드를 가득 메운 한국 국.공립유치원 교원연합회(회장 정혜손. 이하 연합회)소속 전국 국.공립유치원 교원과 학부모, 유아교육과 학생 등 1만여명은 이날 '유치원 공교육 바로세우기 실천 전국 국.공립 유아교육자대회'를 개최했다.
전국에서 모인 각 유아교육 관련자들은 현 유치원 교육을 규탄하고 올바른 육아교육법 제정을 촉구하는 한편, 늘어만 가는 사교육비, 열병처럼 번지고 있는 교육 이민과 조기유학, 육아교육에 대한 불신 등 육아교육 전반에 걸친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정상적인 유치원 교육으로 '아이들의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교육 바로 세우기' 실천에 국가와 온 국민이 함께 해줄 것을 호소했다.
'아이들에게 놀이터를 돌려주자'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할 전국의 국.공립 유치원 교원들이 그 곳에 모인 까닭은 단순했다.
붉은색 옷을 입은 국.공립 유치원 교원들과 학부모 등은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 만들자' '놀이터를 아이들에게 돌려주자'라고 씌어진 막대풍선을 손에 들고 흔들어 댔다.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말인가. 아이들이 놀만한 공간이 없단 말인가. 생활과 형편은 예전보다 월등히 좋아졌지만 실제 아이들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정부의 이권과 학부모의 '내 아이 제일주의'가 빚어낸 현 유아교육속에서 정작 우리 아이들은 이리 저리 끌려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 시각 대회장 밖 복도. 학부모로 보이는 한 여성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응. 엄마야. 냉장고에 있어. 그냥 꺼내 먹으면 돼. 응... 좀 늦을 거야. 꼭 밥 먹어..."
집에 두고 온 아이와 통화를 마친 그 학부모는 다시 대회장으로 들어가 다른 엄마들과 함께 주먹을 올리며 뭔가를 강력히 주장했다. 엄마와 유치원 교원들이 아이들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올바른 육아교육법 제정 ▲만5세아 무상교육비 평등지원 ▲공교육 망치는 '학원의 설립, 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제정' 철회 ▲종일반 정규전담교사 배치 ▲국.공립유치원에 환경개선비, 급식비, 차량비 지원 ▲유아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단설 유치원 증설 ▲교육행정기관에 유아교육 전담 교육전문직 배치 ▲6학급 이상 유치원 보직교사 배치 ▲겸직 원장, 원감에게 겸임수당 지급 ▲원장, 원감 승진 기회 확대
이날 오후 세 시간동안 이들이 주장한 것들이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유아교육의 현실인 듯했다.
국.공립유치원 교원들 "公교육이 空교육 될 판"
이날 대회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래 연합회가 처음으로 개최하는 최대 규모의 유아교육자 대회로 최근 들어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조기교육열풍의 사회적 흐름에 대한 각성 및 만5세아 무상교육비 지원 문제 추진과정에서의 정부 태도에 대한 비판과 강한 불신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정혜손 연합회 회장(서울 명일유치원감)은 대회사를 통해 "잘못된 조기교육의 열풍으로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고시생 뺨치는 혹독한 공부전쟁을 치루며 병들어 가고 있다"고 말하고 "유치원 공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평등한 국가정책의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유아 혀 밑의 연결 부위인 '설소대'를 자르는 이비인후과 수술이 유행하고 무조건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부모들 탓에 12가지를 한꺼번에 배우는 우리의 아이들은 피기도 전에 파김치가 된다"며 잘못된 현 유아정책을 비난했다.
이 대회에 모인 각계 각층의 여성들도 저마다 볼멘 목소리를 높이며 현 유아정책의 병패를 성토했다
김부운 진천상산초등병설유치원 겸직원장은 "국.공립 유치원 수업료 전액이라고 해봤자 5천원 내지 3만원 지원으로, 10만원 지원인 사립유치원과 어린이집의 경쟁에서 과연 얼마만큼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당면한 유치원 교육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조속히 해결해 줄 것"을 교육인적자원부와 정부에 요구했다.
김경희 경산시 남성초등병설유치원 교원은 "유치원을 다니고 싶어서 40분이나 논둑길을 걸어 다니는 아이가 뱀에게 물려 생명을 잃을 뻔한 일이 있었다"면서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턱이 없는 정부의 안일한 사고방식을 질타하고 "전국 국.공립유치원에 유아들이 안전하게 등.하원할 수 있는 차량지원비와 급식비를 즉각 지원해달라"고 호소했다.
학부모대표로 참석한 대전관저초등병설유치원 정귀옥 학부모는 "잘못된 조기교육의 현실에서 진정한 교육의 실체를 망각하고 우왕좌왕하며 혼란스러워 하는 학부모들에게 올바른 육아교육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준비된 교육환경을 만들기 위해 법적인 제도와 만5세아의 평등교육비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각 유치원에서 제작한 수십개의 현수막과 어깨띠를 두르고 이번 대회에 참가한 이들은 ▲사교육으로 지쳐있는 아이들에게 놀이터를 돌려주자 ▲올바른 유아교육법 조속히 제정하라 ▲만5세아 무상교육비 평등 지원하라 등 13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정상적인 유치원 교육으로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우리 유아교육자들이 모이는 것이다. 유아교육자대회를 통해 공교육을 확립하고 회원들간의 결속력을 다짐으로써 유아교육을 선도해나갈 초석을 마련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채택된 결의문을 청와대, 교육인적자원부, 국회교육위원회에 전달해 공교육을 살리는데 국가적인 차원에서 모두 동참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또 조기교육 열풍에 쓰러지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선 학부모들의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이런 학부모들을 위해 다양한 내용의 유아교육 현안문제 중심의 학부모연수 및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 유아교육 현안에 대한 건의와 서명운동도 함께 전개해 나갈 방침이다."
정부 부처 갈등에 표류하는 유아교육
현 정부 출범과 함께 100대 개혁과제로 꼽힌 유아교육법 제정문제가 지난 4년간 소모적인 논쟁만 거듭하며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 지난 1997년 유아교육법안이 발의된 때로 치면 무려 5년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는 셈이다.
현재 0-5세까지 유아를 담당하고 있는 어린이집은 보건복지부가, 3-5세까지 유아를 담당하고 있는 유치원은 교육인적자원부가 관할하고 있어 중복 행정이 이루어 지고 있다. 동일 연령대의 유아를 두고 두 부처가 별도의 정책과 시설확충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학부모가 원하는 파행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정작 아이들에게는 불필요한 투자가 속출하기도 한다.
또, 유아교육법안이 통과될 경우, 만 3-5세 유아대상의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통합된 '유아학교'가 탄생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통합되지 못하는 학원, 어린이집의 생존권과 관할권을 문제를 두고 보건복지부와 교육인적자원부가 갈등을 빚을 소지가 다분하다.
결국, 정부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야 할 구실을 찾는 정부 부처간의 갈등속에 진정한 유아교육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경쟁심리, 강박관념에 사로 잡힌 학부모들까지 어른의 잣대를 휘두르고 있어 정작 아이들은 '취학전 고시생'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