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에는 2가지가 서 있다. 하나는 산이요, 하나는 장이다. 한반도의 중추 태백산맥을 관통하는 고을. 일찍이 ‘동국여지승람’에는 '정선에서 바라보는 하늘이란 마치 깊은 우물에 비치는 하늘만큼이나 좁다'며 정선의 가파른 산세를 강조했다. 이 고립무원 두메산골의 또 다른 명물은 15년 전까지만 해도 물물교환이 이뤄졌던 5일장이다. 매월 끝자리 2, 7일이면 정선 5일장에는 고랭지 기후가 키운 신토불이 산나물과 채소가 감질나게 비어져 나온다. 서울에서 차를 몰고 간다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원주, 제천, 영월을 지나야만 다다르는 산골 정선. 한나절이 부족한 이 여정을 자동차 대신 기차에 맡긴다. 기차의 흔들림은 이내 어깨를 덩실대는 정선아리랑의 장단으로 흥겹게 전해온다.
호랑이 척추를 관통하는 열차, 정선선에 오르다
아침 7시 50분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경춘선 열차는 여러 번 타봤지만 정선선에 몸을 맡기기는 처음이다. 하루에 한번 서울에서 양평, 원주, 제천까지 중앙선을 따라 내려가다 다시 영월을 거쳐 정선 아우라지역까지 다다르는 열차다. 마침 정선5일장이 열리는 날(끝자리 2, 7일)만 운행되는 특별열차에 올랐다. 읽고 싶은 책을 가득 안고 앉았지만 이내 책을 덮고야 말았다. 강원도에 다다를수록 태백산맥이 쏟아놓은 산줄기가 열차로 쏟아지기 때문이다. 마치 포효하는 호랑이가 허리를 곧추 세운 듯 산은 수직으로 서 있다. 겨우내 웅크렸던 햇살은 쩌어억 갈라져 창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한반도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국적인 ‘낯섦’과 경이로운 ‘절경’이 열차와 함께 내달린다.
정선선 열차의 즐거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영월을 지나면서부터는 이름도 생소한 간이역이 요요히 얼굴을 들이민다. 서울에서 출발해 3시간 남짓부터 ‘예미-민둥산-별여곡-선평-정선-나전-아우라지’역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다. 정선 일대의 광물을 바쁘게 실어 날랐을 기차역에는 이제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운 좋게 3분간의 승하차 시간이 주어지면 잠시 열차에서 내려 바쁘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해발고도 600m를 넘어선 민둥산역에서는 동자승의 머리처럼 까슬까슬한 민둥산이 코앞에 펼쳐진다. 열차의 마지막역인 아우라지역에서 구절역까지는 레일바이크가 운행된다. 정선의 명물 5일장에 가려면 정선역에서 내려야한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약 4시간째인 오전 11시 57분 정선군 정선읍에 다다랐다.
정선5일장, 신토불이 산나물의 유혹
정선5일장은 정선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정선읍내에서 펼쳐진다. 정선5일장 관광열차인 ‘아리아리열차’를 타면 5일장까지 연계되는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1966년 2월 17일부터 열린 장은 매달 2, 7, 12, 17, 22, 27일에 열린다. 면적 7,600㎡ 시장 거리 양편으로는 호미·쇠고랑 등 농기구를 비롯한 각종 물품을 진열한 230개 상점들이 있고 길 가운데에는 160여 개의 농산품 노점좌판들이 늘어선다. 40년 넘게 정선5일장에서 장사를 한 최정숙(71)할머니는 “31살부터 강냉이를 집에 심어가지고 쪼개지고 댕기미. 그때는 집집마다 농사지은 걸 이고 댕겼어. 장에서 농사지은 거 팔아 아들, 딸 다 가르켰어”라고 말한다. 최 할머니처럼 직접 농사를 지어 장에 나오는 상인에게는 ‘신토불이증’ 목걸이가 걸려있다.
최달순 정선읍장은 “1999년부터 정선 5일장 특별열차를 운행해 재래시장 활성화에 힘을 기울였죠. 무엇보다 정선의 자랑인 산나물과 황기 같은 특산물을 믿고 살 수 있도록 신토불이 상인 인증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힌다. 보슬보슬하게 고개를 내민 봄나물이 수놓은 시장 한가운데에서는 정선아리랑 민요마당, 전통음식 체험, 마술공연 등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된다. 산나물 향기에 취하고 전통가락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5일장의 하루가 무르익는다.
레일바이크로 맥 훑고, 정선아리랑으로 혼 담다
정선 5일장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는 정선의 맥을 훑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폐선된 구절리역부터 아우라지역까지 운행되는 레일바이크는 산, 들, 강을 돌아 정선의 마을을 한눈에 담아가는 일정이다. 편도 7.2km 레일바이크에 오르면 석탄을 나르던 철로 그대로 터널을 지나고 강을 건넌다.
아우라지역은 정선아리랑 기원설화 근거지인 정선군 북면 여랑리 아우라지나루터 인근에 있다. ‘아우라지’는 물살이 빠르고 힘차 남성성(양수)을 지닌 오대산 쪽의 ‘송천’과 물살이 느리고 젖빛인 여성성(음수)를 띤 태백산맥의 ‘골지천’이 ‘어우러진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아우라지에서 떠내려 보낸 뗏목은 영월에서 묶여지면서 커지고, 기나 긴 한강물을 따라 송파나루를 거쳐 마포나루에 다다르게 된다. 뗏목을 타고 가던 사공과 나물 캐던 이 지방 처녀가 주고받은 그리움은 정선아리랑의 중요한 노랫말을 잉태시켰다.
특히 강을 따라 흘러가 버린 바람둥이 총각사공을 연모하다 물에 빠져 죽은 여랑처녀의 한은 아우라지 나루터의 동상으로 세워졌다. 3,000여 수에 달하는 가사로 전해지는 정선아리랑은 우리나라 아리랑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신을 부르는 소리’로 평가받는 정선아리랑의 발성은 해발 1,000m 이상의 산봉우리가 즐비한 정선에서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뿜어내는 소리다. 정선까지 와서 이 소리를 놓친다면 억울할 만도 할 것. 정선 5일장 날 오후 4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정선문화예술회관에서 ‘정선아리랑극’ 상설공연이 펼쳐진다. 정선아라리 특유의 유장한 가락과 구성진 사투리가 다양한 현대 음악과 만나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내고야 만다. 인천 부평에서 ‘아리아리열차’를 타고 정선5일장을 찾은 고종숙(47)씨는 “정선아리랑극의 구수한 곡조가 가장 인상 깊었죠. 장날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얻어 가네요. 하루가 부족할 정도예요”라고 말한다. 정선의 명물을 모두 안은 채 오후 5시 49분 열차는 다시 서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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