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의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 중, 결론 부분만을 올립니다.
서편제 담양소리 복원과 전승의 필요성
판소리를 판소리로 여기는 최후의 보루는 ‘판소리가 성음 놀음’이라는 점에 있다. 이야기가 판소리라는 장르로 변화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노래’와의 결합이었고, 연창자 간의 차별성은 바로 그 노래의 우열(愚劣)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명창의 일화는 어떻게 ‘소리’를 얻었느냐, 즉 득음(得音)과 관련되는 것으로 일관되었던 것이다. 송흥록이 맹렬의 비판을 받고 다시 공부에 열중한 것도 득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명창들이 명창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바로 ‘소리를 얻은[득음]’ 자신의 기량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신재효는 연창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요건으로 인물과 사설, 너름새, 득음을 말하였는데, 여기에서도 핵심적인 사항은 결국 득음일 수밖에 없다. 판소리의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연창자는 오로지 이 득음을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득음이 뒷받침되지 못한 경우, ‘또랑광대’나 ‘화초광대’라고 불렀던 것이다. 창작판소리를 공연하는 우리 시대의 연창자들이 제대로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그들의 소리가 득음의 경지에 이루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창작판소리에 뛰어난 명창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타나는 것이다. 창극에서 공연하는 배우의 소리에 대하여 ‘창극소리’라 하여 한 수 아래로 치는 것도 바로 그 소리에 대한 평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는 무한한 생산성을 가진 장르이다. 울고 웃는 세계의 진실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나타난 판소리는 그런 예술형태가 없었기 때문에 향유층의 많은 호응과 지지를 받아왔다. 향유층의 호응과 지지를 받으면 그 생명이 유지되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대중음악인 트로트가 왜색이라 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 것도 트로트가 향유층의 삶과 감성헤 호소하는 가사와 음악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처럼 민중들의 호응을 받은 예술 형태는 민요 외에는 없었다. 연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이나 정가류는 서민의 애환을 직접 담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서양 가곡과 같이 특정 부류에서만 애호될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판소리는 절절한 사연과 서민의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 그리고 수준 높은 예술의 성취 등의 이유로 대중들의 사랑하는 예술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예술형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판소리계소설이나 산조, 병창, 창극이 모두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면서 나타난 예술 장르이다. 그리고 판소리계소설이나 산조, 병창, 창극들은 각각 예술사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시대에 유행하는 가요를 부르는 가수들도 판소리 수련의 기반을 가졌을 때 가수로서의 수월성을 가진다고 하여, 판소리 수련이 다시 화제의 중심에 놓이기도 한다.
이처럼 이 시대의 판소리가 최후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 핵심은 결국 ‘득음’의 성취이다. 득음을 한 연창자라야 창극의 배우로 배출할 수 있고, 다른 나라의 음악과 차별화되는 이 시대의 가요 가수로도 활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득음을 위한 노력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판소리의 마지노선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득음과 관련되어 논의해야 하는 문제는 바로 ‘유파’의 중요성이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이 시대의 연창자들도 스승의 소리만을 배우지 않는다. 본래 판소리는 선생과 제자의 ‘구전심수(口傳心授)’를 통하여 전승되었다. 그래서 선생이 한 구절 부르면 제자는 이를 따라하면, 선생의 소리가 갖고 있는 높이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표는 선생의 소리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어느 정도 규격화된 유파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바탕이 확립된 다음에는 다른 소리가 가지고 있는 특성도 아우를 필요가 있게 된다. 선생을 떠나 다른 선생의 소리에 접하기 위하여 자신의 바탕이 되는 둥지를 떠나는 것이다. 서편제에 바탕을 둔 임방울이나 정광수가 동편제를 굳세게 확립하고 있는 유성준을 찾아가 배운 것처럼, 모든 연창자들은 그렇게 서로 다른 소리와의 융합을 통하여 자신의 소리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연창자를 어느 유파로 획장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서편제에 기반을 둔 임방울이나 정광수가 유성준에게 동편제의 소리를 배웠다 하여 그들의 소리 바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처음 확립된 소리 바탕은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뼈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방울이나 정광수에게 간 유성준의 소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동편제 소리가 아니다. 김세종의 <춘향가>가 그 뿌리를 내린 것은 서편제의 보성소리이다. 그래서 보성소리가 김세종의 <춘향가>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정응민에 의하여 변용된 ‘김세종의 춘향가’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신의 태반으로 작용한 바탕소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임방울은 혜성처럼 나타난 스타였고, 열광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만큼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은 명창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이는 김창환으로부터 물려받은 나주소리의 바탕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태생의 소리가 아닌 다른 집단에게 갔을 때 임방울은 엄한 질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성준에게 배운 뒤 한참 뒤에 가면 그 소리는 다신 원점으로 돌아갔기에, 선생은 왜 소리가 바뀌었느냐고 꾸중을 하였던 것이다. 어느 지역에 가면 임방울의 소리가 호응을 받았고, 또 어느 지역에 가면 김연수의 소리를 환영하였다. 김창룡이 소리를 하면 남도소리를 태생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질적으로 들렸기에 킥킥거리며 웃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비웃음만으로 김창룡의 소리를 대한다면, 이는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대극점에 다른 소리가 있어 자신들의 소리는 존재 이유를 갖기 때문이다. 김창룡도 자신의 소리를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송만갑의 경우와 같이 서편의 소리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한다. 목포 지역에 가면 청중들은 이동백은 내려가고 송만갑이 올라오라며 소리쳤다고 한다. 송만갑은 가문의 소리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서편의 소리를 받아들였다. 송만갑은 자신의 집안소리를 벗어나 서편제와의 융합을 꾀하였다 하여 그 엄청난 ‘송문(宋門)소리’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바탕소리는 송문의 소리인 동편제였고, 그래서 우리 시대에 대(代)가 끊어진 동편소리는 송만갑의 소리를 통하여 그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동백은 자신의 소리를 고수하였고, 그리고 전승이 단절되었다. 모든 존재는 이처럼 융합하고 변화하면서 생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 변화의 단초가 되기 위해서도 기본의 소리는 존재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날치의 소리, 그리고 이를 계승한 박동실의 소리가 그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이다. 어느 하나로 단순화 되었을 때, 그 존재는 죽은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중고제의 소리가 판소리 초기를 장식하였지만 전승의 기회가 차단되면서 사라졌다. 그 단절의 시간이 오래 되면서 이 지역에서 소리꾼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미 호남의 소리로 변한 판소리를 배우기 위하여 이 지역 출신의 연창자들이 자신의 어투나 언어 습관을 바꾸는 힘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태생의 소리를 교육하는 선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치 서양음악의 환경 속에서 자란 한국인들이 본래 향유하던 음악을 낯설게 되어 접근하기 어려운 음악이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중고제의 복원은 중고제 문화를 내포하고 있는 내포제라는 음악문화의 존재 때문에 그나마 복원할 수 있는 언덕을 가지고 있다. 충청도 지역의 활발한 음악문화는 본래 가지고 있던 판소리의 복원을 위한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중고제 복원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그 중심에 서 있는 박성환은 이동백으로부터 <적벽가>를 배운 정광수에게서 중고제의 판소리를 배웠다. 그러나 정광수의 <적벽가>가 이동백의 그것을 제대로 이어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태생의 소리가 정창업으로부터 이어지는 서편제의 정광수가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는 중고제의 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성환은 미흡한 부분은 이동백이 남긴 유성기 음반의 소리를 통하여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이날치에게서 그 근거를 찾는 담양소리는 <심청가>와, 한승호에게서 단절된 <적벽가> 등이 남아 있어 중고제의 복원보다 더 용이하다고 할 수도 있다. 특히 박동실이라는 존재와 이를 계승한 한애순과 장월중선의 교육이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점은 복원의 큰 강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면과 함께 복원을 가로막는 부정적인 요소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판소리 전승의 중심에 있었던 담양소리는 역사적 지역적 이유에서 소외를 받아 왔다. 그 결과 담양소리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문화의 존재가 미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화려했던 과거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데도 담양을 근거로 하는 음악인들이 담양과의 인연이나 복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지역의 주민이나 행정기관이 담양소리를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담양소리의 구체적 실상은 이날치로부터 박동실로 이어지는 명창들의 활동을 통하여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같이 담양소리의 핵심적 인물들과 인척관계를 맺거나 사승관계로 얽혀있는 명창들을 통하여 담양소리는 그 모습을 판소리의 흐름 곳곳에 깊이 각인시키고 있다. 또한 현재의 판소리를 가능하게 했던 굳은 바탕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 역사적인 이유에서 소외되었던 원상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6.25가 나자 박동실은 자신의 예술적 실현의 장소를 남한이 아니라 북한으로 선택하였다. 박동실의 선택은 담양소리의 위축을 가져왔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담양소리는 저 멀리 북한 지역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박동실은 북한으로 가서 새로운 예술의 창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공연하는 민족가극이나 혁명가극에는 박동실 속에 포함된 담양소리의 흔적들이 배어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박동실을 통하여 우리는 구체적인 담양소리의 실상과, 그것이 가지는 민족사적 의미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남북한의 예술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이 담양소리는 서로의 소통을 돕는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담양소리의 복원과 발전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를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