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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스크랩 목포의 눈물
타잔김°³о♡ 추천 0 조회 95 12.11.11 20: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목포의 눈물 문일석 작시 손목인 곡 이난영 노래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깊은밤 조각달엔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에 사랑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 노래비  2005년 01월 29일
민족 ‘망향갗 이자 전라도 사람 ‘시름갗 
 
목포시 유달산 중턱. 노적봉, 삼학도, 그리고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기념비 하나가 서 있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다.
목포출신 가수 이난영(1916~1965)이 불렀기에 일명 ‘이난영 노래비’라고도 한다.
1969년에 세워진 이 노래비는 노래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는 당시 전국에서 처음이었다.

2001년 보강공사를 하면서 초기 모습과 조금 달라졌다. 우선 비석 양쪽에 스피커를 설치해 하루종일 이난영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 깊은 밤 조각들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는가/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높고 가느다란 비음(콧소리) 섞인 목소리는 늘어지듯 꺾이면서 3절까지 잘도 이어진다.

오랜 세월 불리면서 노랫말에 변화가 생겼다. 비석 한 면에는 그 변천사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표기법의 차이 말고도 눈에 띄게 달라진 내용이 있다.
1935년 취입 당시 2절의 첫 부분은 ‘삼백연(三柏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엷로 시작된다. 하지만 지금은 ‘삼백년 원한 품은’으로 바뀌어 있다.
일제의 검열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로부터 ‘삼백년’ 쯤을 거슬러 가면 임진왜란(1592~1598)이다. 결국 레코드사측은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발음이 비슷한 ‘원안풍’으로 바꿨다 한다.
‘목포의 눈물’은 노래 내용에서도 이별과 설움이지만, 그 탄생과정부터 나라 잃은 설움을 톡톡히 겪은 셈이다.
한때 호남선 기차가 종착역인 목포역에 닿으면 스피커에서 이 노래가 흘러 나왔다. 80년대에 이어 90년대에도 광주 무등경기장 야구시합에선 ‘전라민국 애국갗라는 별칭으로 불리곤 했다.
‘목포의 눈물’에 대해 목포대 고석규 교수는 “일제하 우리 민족 모두의 ‘망향갗였고 해방 후에는 설움 받는 전라도 사람들의 ‘시름갗였다. 그리고 민주투쟁의 연대에서는 장렬히 산화한 열사들에 대한 남도인의 ‘진혼갗이기도 했다”고 평한 바 있다.
망향가이자, 시름가이며, 진혼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목포의 극단 ‘갯돌’은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을 소재로 한 뮤지컬 <난영 designtimesp=24205>을 공연했다.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갯돌의 상임연출가 손재오(42)씨는 “30~40년대는 봉건을 떠나보내고, 새 사회가 열리면서 곳곳에서 갈등이 빚어졌지요. 노비로 살다가 해방된 이들의 경우 돈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등 유랑 생활을 많이 했지요. 이 노래는 그 응어리진 민족의 ‘이별의 심성’을 울렸기에 오래도록 사랑받았죠”라고 이 노래의 인기 배경을 설명했다.

‘목포의 눈물’이 전국민적 사랑을 받은 비결에는 노래에 관계된 이들의 애틋한 사연들도 한 몫 했으리라. 노랫말을 만든 이는 당시 목포의 무명시인이었던 문일석(文一石)이었다. OK레코드사의 노랫말 공모에 참여해 3000여 통의 경쟁작을 누르고 당선됐다. 하지만 이후 일제의 감시와 징용을 피해 함경남도 함흥의 산골 공사장에서 숨어살다, 결국 이질에 걸려 스물 여덟 살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래의 작곡자는 목포출신은 아니지만, ‘타향살이’로 유명한 손목인(1999년 타계)씨였다. 눈물과 이별, 설움의 가수 이난영.
‘목포의 눈물’의 주인공은 결국 이난영(李蘭影)이다. 올해는 이 노래가 나온 지 꼭 70년이자, 난영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된다.
난영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의 삶은 ‘엘레지의 여왕’으로 불리던 한 때를 제외하고는 만남과 이별, 설움과 눈물 그 자체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보통학교 4학년 때 학업을 포기하고 목포를 떠났다. 갖은 고생 끝에 악극단을 만났고, OK레코드사 이철 사장의 눈에 띄면서 본명 옥례(玉禮)를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목포의 눈물(1935년)’이 전국적인 히트를 치면서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난영은 22살 때 김해송이라는 천재적 음악가와 결혼한다. 김해송은 국내에 처음으로 뮤지컬개념을 도입했고, 국내 최초의 블루스 곡(‘다방의 푸른 꿈’)도 만들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납북된 뒤 생이별이었다. 한국사회는 수십 년 간 ‘납북인사’의 이름을 용납하지 않았다. 난영은 이후 자식들을 키우고 공부시키기 위해 다시 악극단에 서기도 했다.

다행히 그의 딸들과 아들들은 ‘김씨스터즈’와 ‘김보이스’라는 음악그룹 활동으로 미국에서 성공한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난영은 1965년 4월 서울 자신의 빈집에서 49세를 일기로 홀로 생을 마감한다.
유달산이 바라다 보이는 목포시 남양동(과거 남교동과 양동이 통합됨)에 가면 난영의 생가터가 소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그의 흉상이 있고, 벽면에 ‘목포의 눈물’ 악보가 새겨져 있다. 난영 생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이견들이 있었다. 하지만 신안문화원 최승환 사무국장은 “난영의 초등학교 학적부를 확인한 적이 있는데, 양동이 맞더라”며 현재 생가터 표지판에 씌어진 ‘죽교동 출생’은 잘못이라 지적하기도 했다.

생가터 소공원 근처에서 만난 주민들은 이난영의 이름 뒤에 ‘여사’를 붙였다. 그만큼 자부심이 대단했다.
목포시 남양동노인회 전완용(83) 회장은 “이난영 여사의 그 노래가 나오던 시절은 전부가 설움이었어. 그래서 그 노래는 지금도 부르기만 하면 눈물이 나. 혼자서는 못 부르제”라고 회상했다.

다시 목포시내 번화가로 나오면 ‘목포의 눈물’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대안동 ‘차 없는 거리’에 있는 목포음악사. 일제 때부터 시작해, 이 자리에서만 40년이 넘었다. 5년 전 타계한 이 가게 주인 박오주씨는, 1969년 당시 사재 50만원을 털어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를 만들었다. 지금은 박씨의 아내 김정수(77)씨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김씨는 레코드판이 가득한 진열장 한 구석에서 두툼한 자료집 하나를 꺼내 왔다. 노래비를 세울 당시의 언론보도와 사진, 전국에서 날아든 감사와 격려편지 등이 보관돼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축하전보도 눈에 띈다. 특히 미국에서 살던 난영의 세 딸이자 김씨스터즈의 멤버인 숙자 애자 민자씨가 박오주씨에게 보낸 감사편지에는 “자식된 도리로 감사하며, 고국에 가면 인사드리겠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국내에 혈육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지금. 난영의 묘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107 공동묘지에 ‘무연고 묘지’로 방치되고 있다. 2008년 1월이면 허가기간이 끝난다. 목포의 한 시민단체가 그 전에 묘지를 목포로 옮겨오자는 운동을 하고 있다.

목포문화연대 정태관 운영위원장은 “이난영은 목포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심성을 울린 사람이다”면서 “이제는 고향 목포와 만나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리보면 난영은 12세에 고향을 떠난 뒤 70년 넘게 유랑의 세월을 보냈다. 목포와 이별이 너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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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목포시 중앙동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구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이다.

 

 전남의 다른 지역과 달리 목포에서는 근대역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목포에 일제의 흔적이 유난히 많은 것은 1897년에 이루어진 목포 개항과 관련이 깊다.

 목포는 조선 말기까지도 무안현에 딸린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1897년 개항된 이래 식민지 거점도시로 이용되면서 급속히 성장한 항구도시다. 현재 목포 시가지의 80%는 바다를 메워 일군 땅이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 부산·원산·인천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개항하게 된다. 그러나 목포는 1897년 10월 1일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한 자주적인 개항을 한 곳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개항된 이후 이듬해인 1898년 일본인(주로 큐슈지방 사람)이 목포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당시 연산동인 목포진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일본인이 장악하고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일본이 목포를 거점도시로 키운 것은 나주 영산포에 비해 큰 배가 접안할 수 있었고 앞바다에 많은 섬이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해 최적의 항구로 조성할 수 있었기 때문. 호남에서 생산되는 쌀·목화·누에고치 등이 이곳에 집산되어 일본 고베항으로 실려 갔다.

 

 나라 잃은 고통이 눈 부릅뜨게 만드는 사진자료들, 목포근대역사관

 목포는 근대문화유적 박물관이다. 온금동, 일본인 골목, 오거리 등에는 목포의 근대사를 만날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목포는 근대문화유적 박물관이다. 온금동, 일본인 골목, 오거리 등에는 목포의 근대사를 만날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목포 중앙동 2가에 고 이난영 씨의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오는 곳이 있다. 1920년 6월에 문을 연 구 동양척식주식회사(척식회사)는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독점하기 위해 설립한 곳이다. 1930년대에 유행했던 가요 ‘목포의 눈물’에 등장하는 목포의 설움. 근원지가 바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다.

 

 현재 목포시 중앙동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구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이다. 1920년께 세워진 것으로 가슴 아픈 역사를 되새기기 위해 목포시가 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토지와 농산물 등 경제수탈을 위해 세운 국책회사이자 착취기관이다.

 척식(拓殖)이란 ‘식민지 개척’을 말한다.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모두 남의 나라 토지와 자본을 수탈하고 경영하고 장악하기 위해 만든 식민회사다.

 

 일본은 1908년 서울(경성)에 동척 본점을 세우고, 부산·목포·이리·대전·대구·원산·평양·사리원 등 전국 주요 농업지역과 교통 요충지에 지점을 설치했다.

 전국 아홉 곳의 동척 본·지점 중 부산과 목포지점 건물이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목포지점은 사리원지점과 함께 가장 중요시했던 지점으로 규모 면에서 부산보다 더 크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당시의 공공시설물로써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은 1920년께 건축한 르네상스식 2층 건물이다. 건물 대리석벽 곳곳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 해 따위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목포근대역사관 전시실 1층에는 목포항 개항 전후의 모습을 담은 사진 등 80여 점이 있다. 목포항 전경과 유달산 주변의 주택가 모습, 일본 사람들이 활보하는 거리 모습 사진들이다.

 유달산 주변 사진을 살펴보면 큰 길에는 큼지막하게 일본인 주택가가 형성돼 있고 조선인들의 집은 유달산 산비탈에 초가집으로 형성돼 있다. 또한 목화밭이 펼쳐진 사진이 많아 당시 면화 재배가 대규모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1층에는 당시 동양척신회사가 쓰던 대형 금고도 있다. 광복 뒤엔 해군 헌병대의 유치장으로도 사용됐을 정도로 철문을 달고 있는 방이다.

 전시실 2층에는 ‘조선왕조 최후의 모습’, ‘빼앗긴 조국, 침략자 일본’ 등 일제의 침략과 수탈의 상징적 사진 90여 점이 전시돼 있다.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는 한복 차림의 여성들, 일제의 잔혹한 고문, 처형, 생체실험, 강제로 끌려간 군대위안부들 모습,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된, 재일 조선인들의 산더미처럼 쌓인 주검들, 밧줄에 묶인 채 총살되는 항일의병·독립군들의 모습 사진 등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전개와 함께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의 고통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 수 있다.

 1층 별실에는 9점의 사진이 전시돼 있는데 특별히 관람을 원하는 사람에게만 사진을 보여준다.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담긴 사진자료로 너무 잔인해 따로 모아둔 것이다.

 

 구 목포일본영사관과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목포시 대의동2가에 있는 구 목포일본영사관(사적289호)은 1900년 러시아 건축가에 의해 완공된 목포 최초의 서구식 건물이다.

 목포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고 큰 건물이다.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로 해방 이후 1914년부터 목포부청사, 1974년부터 목포시립도서관, 1990년부터 2009년까지 목포 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비탈 위에 위압적인 자세로 서 있는 건물 뒤 산 밑엔 일제가 40년대 초 미군 공습에 대비해 파놓은, 82m 길이의 방공호가 있다. 구 목포일본영사관 건물 앞에는 소박한 얼굴의 조선시대 선정비 두 개가 있다. 원래는 만호진 터에 세워졌던 것으로, 일제가 영사관 뒤뜰에 묻은 것을 광복 뒤 발견해 현 위치에 세워둔 것이다.

 

 현재 목포문화원으로 쓰이고 있는 상락동1가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등록문화재 제29호)은 1929년에 건립된 건물로 일제 때 호남인들이 힘을 모아 설립한 순수 민족자본 은행이었다.

정문 머리 위 돌에 새겨진 ‘… 목포지점’(木浦支店)이란 한문 글자 가운데 ‘浦’ 자의 맨 위 1획이 빠져 있다. 이는 설립자인 현준호가 ‘목포지점이 번창하면 그때 찍겠다’(또는 일제로부터 독립을 이루면 찍겠다)며 일부러 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이난영 공원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목포시 산정동에 있는 삼학도에는 ‘목포의 눈물’의 가수 고(故) 이난영(1916~1965 )을 기르는 공원이 있다.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등 노래비와 백일홍 나무 밑에 유골을 묻은 그의 수목장이 이 공원에 있다.

 이난영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활동했던 가수. 눈물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시대, 그의 노래는 고향에 뿌리박지 못하고 낯선 땅을 헤매며 고생해야 했던 사람들의 애환을 달랬다. 무력한 현실에 끌려 다녀야만 했던 사람들의 탄식과 눈물을 그의 노래가 다독여줬다.

 

 국민가요가 된 ‘목포의 눈물’ 노랫말은 무명시인이던 문일석에 의해 태어났다. 1934년 일제의 탄압 속에 우리 민족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OK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 애향가요 가사 현상공모에서 1등으로 당선한 작품이다.

 원래의 제목은 ‘목포의 노래’였다. 그러나 OK레코드사 사장 이철은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작곡을 의뢰했고, 목포 출신의 가수 이난영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음반은 발매되자마자 대히트였고 가요의 전성기를 연다.

 가수 이난영은 뒤이어 발표한 ‘목포는 항구다’에 힘입어 우리나라 최고 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울어라 문풍지’ ‘다방의 푸른 꿈’ 등 그의 노래는 널리 애창되며 많은 사람들의 흥겨울 일 없는 세상살이를 위로한다.

 

 노래가 태어날 때부터 시대와 함께 해서일까. 단순한 이별과 슬픔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닌 ‘목포의 눈물’은 군사독재 상황과 맞물리면서 또 한번 그 시대성을 발휘한다. 전라도 사람들의 한과 분노를 대변하고 공동체 의식을 집결시키는 노래이기도 했던 것이다.

 80년대 서울이나 광주의 프로야구경기장에서는 해태타이거즈의 응원가가 되기도 하고 시위현장에서는 단결과 투쟁의 노래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목포의 눈물은 ‘목포의 애국가’라고도 한다.

 

 ‘목포의 눈물’은 일제하 우리 민족 모두의 ‘망향가’였고 해방 후에는 설움 받는 전라도 사람들의 ‘시름가’였고 민주투쟁의 연대에는 장렬히 산화한 열사들에 대한 남도인의 ‘진혼가’이기도 한 것이다.

 목포 유달산에도 이난영을 기리는 노래비가 하나 있다. ‘목포의 눈물’ 노랫말을 음반 취임 당시와 현재 불리고 있는 노랫말을 함께 돌에 새겨 놓았는데 목포악기점을 운영하던 박오주씨가 사재를 털어 세운 노래비다. 1965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이난영이 생을 마감하자, 박오주씨는 4년 뒤 그의 죽음을 위로하고 그의 노래가 영원하기를 바라며 노래비를 세웠다. 전국 최초로 세워진 노래비였다. 김창헌

 김창헌 님은 한 때 ‘광주드림’과 문화잡지 ‘전라도닷컴’ 기자로 일했습니다. 전라도 5일장 취재를 가면, 마실 나간 할머니의 난전을 대신 지키며 장사를 하기도 하는 ‘개성있는’ 기자였던 그는 지금도 여전히 자유기고가로 펜과 카메라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난영 공원에 있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  

목포근대역사관 1층에는 당시 동양척신회사가 쓰던 대형 금고도 있다.  

목포일본영사관은 1900년 목포 최초의 서구식 건물로 목포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목포일본영사관에는 일제가 40년대 초 미군 공습에 대비해 파놓은, 82m 길이의 방공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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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는 항구다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 이난영 노래

 

1.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2.유달산 잔디 우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3.여수로 떠나갈까 제주로 갈까
비젖은 선창 머리 돛대들 달고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이별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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