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참빛학교 열린교육강좌
행복한 아이 행복한 부모 교육 강좌 3 – 발달을 알면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행동으로 아이의 존재 전체를 규정하지 마라"
강사: 진병찬 선생님
일시: 2022년 7월 6일(수) 저녁7시30분~9시30분
오늘도 여섯 분과 함께 했습니다. 처음 오신 분이 두 분 계셨습니다.
지난 1강과 2강은 ‘발달론을 공부하는 자세 혹은 마음가짐’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3강은 그러한 마음자세에 대한 단단한 다짐을 전제로, 아이의 문제적 행동에 부모나 교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내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오늘은 한 어머니의 진솔한 이야기와 그에 못지않은 진병찬 선생님의 간절하고 진심어린 이야기가 어우러지면서 참석자 모두가 감동적인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 주에는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아이들의 각기 발달단계에 따라 단계별 보호막을 깨지 않으면서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과 방법들을 제안해주신다고 합니다. 앞선 강의를 듣지 않아도 충분히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도 많이 참석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번에도 진병찬선생님의 강의 내용을 최대한 담으려다 보니, 글이 깁니다. 끝까지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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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문제행동으로 아이의 존재 전체를 규정하지 마라.
오늘도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함께 들으면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겪는 어려움은 초등 6학년인 저의 아들 때문입니다. 남자아이라 그런지 활동량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문제가 점점 심각해집니다. 아들의 그런 행동을 저는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고 아들이 저랑 안 맞는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아들은 성격이 무척 활달하여 친구가 많고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밖에서 노는 과정에서 좋지 않은 사건들을 자주 일으킵니다. 그 때문에 동네에 아들에 대한 안 좋은 소문도 나고, 아들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판이 나빠져서 저는 속이 많이 상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아들과 나누어도 아들은 잘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번 자기주장만 강하게 내세웁니다. 아들과의 관계도 나빠지고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아들이 장점도 많은 아이인데, 한두 가지 사건으로 아이에 대한 주변사람들 시선에 편견이 생기는 것 같아 마음이 많이 힘듭니다. 이런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아이에게 뭐든 하지 말라는 말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도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현장에서는 사건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이 있었으나, 글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함) 아이가 밖에서 놀면서 좀 심한 장난을 친 모양입니다. 그 장난이 도를 넘어 다른 아이들과 다툼이 생겼고, 급기야 심각한 몸싸움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다른 아이의 전화를 받고 나가서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아들은 상대에게 사과도 하고 자신의 잘못도 인정하기는 했습니다. 저는 아이를 2주 동안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학교 전체에 알려졌고, 제 아들의 그날 행동이 심각한 폭력으로 과장되어 퍼지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그 일로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담임선생님도 전화를 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 아들이 심각한 문제아로 낙인찍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들은 그 일로 학폭위나 강제전학 같은 일들이 벌어질까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저는 아들의 문제적 행동도 행동이지만, 아이에 대한 이런 나쁜 평판이 무서워 아들에게 그 화를 풀었습니다. “니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으면 그런 소리를 안 들었을 것 아니야?”라며 나무랐습니다. 제 아들은 어릴 적부터 자기 꿈이 확고해서 지금도 그 꿈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 꿈이 그런 평판 때문에 망가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고, 주변의 시선이나 평판이 아이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큽니다. 이 일로 온 가족이 힘들어하고 집안 분위기도 아주 무겁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병찬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발달과 아이를 이해할 수 있을지 좀 더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먼저, 1강과 2강을 요약해보면, 첫 번째는 걱정과 근심으로 아이를 키우면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을 기쁨과 경외심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 걱정이 진짜 아이의 문제가 맞는지, 내 기준 혹은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거기에 아이를 맞추려고 하는 게 아닌지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문제라면 내가 고치면 되고, 정말 아이의 문제라고 판단된다면 부모가 중심을 가지고 지도하면 된다는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2강 강의 후에 여러 경로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아이의 행동에 문제가 분명이 있는데, 그냥 보고만 있으면 되는 건가요? 지켜보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위 사례를 보면서도 그런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위 사례를 들으면서 초반에는 ‘이 아이가 참 멋진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밥 잘 먹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신나게 노는구나...’
부모가 자식 중 하나가 자기랑 잘 맞는다고 느낀다면, 그 아이가 부모의 뜻에 맞게 행동을 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잘 안 맞는다고 느끼는 아이는 반대로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안 하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밥 먹고 놀러 나간다는데 부모가 왜 막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이야기를 더 듣고 보니 엄마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감이 되지요?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이가 일으켰다는 그 ‘사건’과 아이의 건강한 삶, ‘사람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기’는 분리하여 지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폭력은 잘못된 것이고 그 아이가 일으킨 사건은 분명히 문제되는 행동입니다. 그 문제는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단호하게 지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건강한 지도는 문제된 행위에 대해 혼내는 것이지 그 아이 자체의 삶을 문제시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된 행위에 대한 지도와 아이 자체를 문제시한 지도는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예견될 수 있는 사건에서 비롯하는) 걱정과 근심으로 지도를 한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 어머니가 해 오신 것처럼) “하지마!”, “나가지마!”... 이런 것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를 통제할 뿐, 직면하는 삶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뺐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앞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더 큰 시야 속에서) 아이의 문제행동을 별개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 분리 속에서 이 문제행동은 어떻게 지도 해야 할까요?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1) ‘공감’이 먼저다.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는 발달에 관한 강의를 들어보면, 아이의 문제행동에 대처하는 지도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그렇게 시도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정말 될까요? 문제행동을 전문가가 알려주는 대로 지도하면 문제 행동이 없어질까요? 정말로 문제 행동이 해결된다면 지금 자식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들은 없겠지요. 시키는 대로 곧이곧대로 하는 것이 더 나쁜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아이의 문제행동과 마주할 때 저변에 깔려야 할 것은 ‘아이에 대한 온전한 공감’입니다. 아이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부모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그 나이 때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초6은 물론, 중2까지도 감정적인 공감이 있어야 아이가 받아들입니다.
변화는 당장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금씩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 결국 온전히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그것을 해내려면 ‘공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공감의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고 기쁨이지 않을까요? 만약 부모가 당장 변화하기를 요구한다면, 아이는 무기력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나름으로는 노력하고 있는데, 부모 눈에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아이가 느낄 때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2) 문제행동의 극복 주체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다.
이해하고 공감했다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어떤 강력한 조치가 취해져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여전히 들 것입니다.
먼저, 위 사례의 아이에 대해서 도울 방법을 생각해봅시다. 이 아이는 기본적으로 건강한 아이입니다. 보면 볼수록 멋진 아이입니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학원도 가고, 짬을 내서 친구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의 수준도 누구나 부러워할 만합니다. 동년배뿐만 아니라 동생들과도 잘 어울린다고 하셨지요. 이 자체는 아주 건강한 모습인 거 잖아요. ‘아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아이의 특정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성격과 거기서 비롯하는 모습 전체에 대해서 이해하고 격려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이 아이의 문제 행동을 이해하고 공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제행동이 맞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문제 행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도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 문제행동의 결과로 일어나는, 따돌림이나 사회적 편견 같은 어려움은 아이가 스스로 겪어내고 이겨내야 할 일이지요. (부모가 아이의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사회적 편견이라고 말한다면, 아이의 그런 행동을 조장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앞의 이야기와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아이를 발달에 따라 잘 이해하면 어떤 아이든 멋지고 귀하게 보입니다. 그렇다고 문제행동까지 그렇게 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문제행동을 따로 분리해서 바라보면 길이 보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 아이는 이미 충분히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자기 변론도 하고 나름대로 자기 노력을 하고 있을 겁니다. 편견이 너무 심해서 감당하기 어려운 억울한 이야기도 들었을 겁니다. 그것을 다 알고 있는 부모까지, 집에서까지 다시 그 부정적인 반응을 환기 시키고, 친구를 만나니까 그런 일이 생긴다고 질타하면서, 그저 문제적인 일이 안 일어나게 하는 데에만 집중한다면 아이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부모가 그렇게 할 때) 이 아이는 사태를 회피하는 길은 배울 수 있을지 몰라도 정면으로 마주해서 스스로 극복하기는 어렵게 됩니다. 가장 먼저 ‘공감’을 주고, 아이가 힘을 낼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집에서조차 그런 힘을 얻지 못하면 자기를 변호하거나, 자신이 가진 장점으로 일을 해결하는 힘이 생겨나지 않게 됩니다. 이 일의 해결의 주체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입니다. 그것을 건강하게 극복하려면 아이가 그 일을 스스로 대면하도록, 선생님의 편견도, 친구들의 따돌림도, 억울한 소문들도 아이가 부딪힐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이해하고 도와주면 용기가 생깁니다. 그 한 사람이 부모면 가장 좋습니다. 부모가 아이의 문제행동에 대처하는 길은 아이가 피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는 데에 있습니다.
문제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문제화시키지만, 그 문제를 극복할 주체는 아이니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공감뿐입니다. 진정으로 공감받는다고 느끼면 아이들은 그 문제에 부딪히면서 나름대로 성장할 기회를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등감이나 자기비하로 가기 쉽습니다. 부모는 아이 평판 나빠지는 것을 문제로 보지 말고, 아이가 그 문제에 직면해서 극복할 수 있을 기회로 만들어주는 것이 도움이 되는 길입니다. 아이를 도우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차단하는 데에 열중할 것인지, 아이가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스스로 극복하고 성장할 계기로 삼을 수 있도록 용기를 줄 것인지... 아이에게 직면할 용기를 주는 길은 차단이나 통제가 아니라, 진정한 공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드립니다.
3) 아이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단호하고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지도하라.
위 사례와 같은 문제들은 많이 일어납니다. (사례와 반대로) 사회성이 떨어져서 친구도 못 사귀고 밖에도 나가지 않고, 학교가는 것도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의 고민은 아이가 다른 아이와 잘 어울리게 하는 것이겠지요. 그 상황을 걱정과 근심으로 보면, 아이에게 스스로 해결할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나서서 다 해주게 됩니다. 만약 이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이 해결의 주체가 아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아이가 스스로 해결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기회를 제공할 때도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부모가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런 기회를 만든다는 것을 아이가 느끼게 되면 왜곡된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을 한다거나 하는.. 부모가 걱정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것은 건강한 모습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할 때 자기가 부딪히고 자기가 의지를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봐도 아주 심각하게 여겨지는 문제들은 더 많습니다. 예를 들면, 초등도 안 들어갔는데 게임에 빠져있다거나, 스마트폰이나 유튜브 없으면 안절부절하는 아이들을 많이 봅니다. 중고등도 마찬가집니다. 게임 중독은 누가 봐도 문제지요. 심하게 중독되어서 게임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 못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아이입니다. 자기는 나쁜 뜻이 없는데 상대는 괴로운 경우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정말 의도적으로 왕따를 시키거나 괴롭히는 아이도 있지요. 남의 물건을 훔치는 아이도 종종 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떼를 쓰고 될 때까지 집요하게 부모를 괴롭히는 아이도 있습니다. 더 심하게는 가출하는 아이도 있지요. 뿐만 아니라, 요즘은 성매매사이트에 청소년들이 접근하는 일도 많이 생기고 약물에 중독되는 일탈행위도 종종 일어납니다.
이런 행동들은 고쳐야 하는 거잖아요. 분명한 문제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조차도 걱정이 미래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부모가 수습할 수 있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면 어떻게 할까를 더 걱정하는 것이지요.
누가 봐도 해서는 안 되는 문제적 행동에 대해서는 문제 행동이 일어난 때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아이 스스로 문제행동임을 인지하고 문제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한 번에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 방에 해결되는 일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자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아이는 언제나 멋지고 귀하며 좋은 아이라는 마음입니다. 그런 아이를 보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기본입니다. 잘못된 행위에 대해 그 때마다 일관되고 단호한 지도를 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이 아이가 일 년에 백 번 쯤 훔칠 테니, 이제 아흔 아홉 번 남았구나.” 이런 심정으로 아이를 보아야합니다.
걱정과 근심으로 아이를 혼내고 나무라는 것과 아이를 믿으면서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하는 부모 마음은 천지 차이지요. 만약 걱정과 근심으로 아이의 문제를 보는 부모라면 화가 나고 미치는 거죠. 그런데 그때 그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에는 건강한 지도가 불가능합니다.
누가 봐도 문제행동이라고 한다면, ‘단호하고 일관되게’ 지도는 해야 합니다. 그럴 때도 걱정과 근심보다는 이 아이가 잘 자랄거라는 믿음으로 문제행동이 발생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일관되고 단호하게 지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지도는 문제적 행동과 아이의 존재를 분리해서 볼 때 가능합니다. 문제적 행동을 가지고 아이 전체를 규정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부모가 아이를 기질이나 특성과 상관없이 (내 뜻대로) 아이를 바꾸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부모의 중심이 탄탄하지 않으면 문제행동을 극복하게 하려고 하는지, 아이의 삶을 완전히 비틀려고 하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는 것을 발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해하면서 그 문제행동만을 봐야지 그 아이라는 존재 자체로 보면 안 됩니다. 그러면 다른 좋은 씨앗들을 다 망가트리게 됩니다.
4) 아이는 부모와 교사의 영적 성장을 위해 온, 이미 귀한 존재다.
단호하고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이러한 지도 과정에서 부모나 교사의 고통은 엄청납니다. 걱정 근심으로 보든, 기쁨으로 보든 마찬가지로 고통이 따릅니다. 그것을 감내하면서 부모도 교사도 성장하는 것입니다. 제일 쉬운 길은 회피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이런 애가 내 애라고?, 나는 모르겠다. 니 맘대로 해라!”, 교사는 “나는 감당 못하겠다. 전학보내라!”라고 합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 포기입니다. 이럴 때는 아이도 잃고 어른도 성장은커녕 퇴보하게 됩니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발달하고 성장한다고 합니다. 슈타이너론자 혹은 발도르프학교에서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인간은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 세상에 온 것일까?”. 초등 저학년 아이들과도 이런 질문을 나눕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질문을 하게 되면 능동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스스로 찾는 인간으로 성장합니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답합니다. “인간은 영적 성장을 위해서 태어났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이 땅에 태어날 때 아이는 이미 엄청나게 영적으로 성숙한 상태로 온다고 합니다. 자신과 더불어 부모의 영적 성장을 더 이루기 위해서 부모를 선택해서 세상에 온다고 합니다.
교사도 (아이가 자기에게 배우러 온 것이 아니라) 아이가 (교사를)선택해서 온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교육에서의 큰 전환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이거나 교사인 ‘내’가 선택된 것입니다. ‘나’는 거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거부하는 순간,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이 땅에 온 이유를 잃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선택하고 선택받았는데 그것을 거부하면 영적성숙이 불가능해지는 것이지요.
슈타이너를 공부하는 사람들 안에서 하는 이야기인데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간은 누구일까? 누가 세상에 와서 영적 성장을 가장 잘하고 가는 걸까?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누구일까요? 부모만이, 특히 엄마는 최고의 영적 성장을 할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포기해도 엄마는 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던졌던 질문도 마찬가지로) “아이의 문제행동을 그대로 두고 보면 되는가?” 그대로 두고 봐도 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요. 그런데 두고 보다가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걱정과 근심 때문입니다. 아이를 영적으로 성숙한 존재로, 우리의 영적성숙을 돕는 존재로 본다면, (포기하지 않고)나를 선택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함께 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내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귀하고 기쁘게 대하는 태도와 관계 되겠지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아이에 대한 믿음, 그리고 존재의 가치로움을 가지고 있다면, 아이의 문제행동은 사소한 것일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것이 그 아이의 전체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5) 문제행동의 원인은 무엇일까?
게임중독, 절도, 괴롭힘, 떼쓰기, 위험한 행동(성매매, 약물, 자해 등)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겠지요. 특정 문제행동에는 원인이 존재해서 전문적인 치료나 상담을 받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또한, 걱정보다는 기쁨으로 한다면 아이의 영혼을 살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가 말하는 (문제행동의) 원인은, (지난주에 말했던 발달단계별) 보호막을 앞서서 깼기 때문입니다. 식당에서 서너 살 아이가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장면을 자주 봅니다. 그 시기에는 생명체 탄생을 위해서 보호막을 잘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지성의 힘으로 다 깨고 있는 것이지요. 예닐곱 살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중2까지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학조차도, 가르쳐야 한다면 상상력과 감성으로 접근해야 보호막이 깨지지 않습니다.
아이를 온전하게 귀한 존재로, 부모인 나도 온전하게 귀한 존재라는 것을 살려낼 수 있는 것이 발달론을 공부하는 이유여야 합니다. 현재를 평화롭게, 아이와의 만남을 경이로음으로.. 이런 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예전에 그렇게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발달론을 알고, 우리 아이의 변화가 그래서 그렇구나... 이런 것을 이해하는 기쁨을 느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아이에게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믿기보다는 참고하면 될 일입니다. 발달론 공부가 지금 여기서 나에게 기쁨과 희망을 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제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이 있으시면 해주세요,
<질문>
제 아이들은 둘 다 성인입니다. 그런데 작은 아이에 대한 작은 걱정이 있습니다. 저는 좀 넓게 사귀는 편이고, 작은 아이는 아주 소수정예로 사람을 만나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아는 사람도 적어지면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결국은 인간관계가 튼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아이가 너무 소수사람과 관계 맺으며 살다가 그 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할지, 회복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걱정이 됩니다.
부모의 기대가 있을 것이고 아이가 부모에게 거는 기대가 있을 것인데, 어느 지점에서 만나야 서로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저대로 제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있으니까 어떤 것이든 중간은 해야되지 않나..하는 생각이 좀 크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인기에 있는 아이에게도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을 기뻐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그것이 꼭 사회가 원하는 기준선이 아니라 하더라도,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병찬 선생님 답변>
저는 법륜스님의 교육 관련 즉문즉설을 가끔 봅니다. 그분은 발달론을 읽지 않았을 텐데도 거기에 가깝게 표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자아체가 완성된 단계(21세) 이후로는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게 아니라, ‘자아’와 ‘자아’가 만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자아체가 완성된 후에는 부모 역할, 이런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성인으로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 이전까지 발달단계에 따른 보호막 안에서 잘 성장하는 것은 성인이 된 후, 직면하는 삶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립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 성인이 되어서도 자립하지 못할까요? (성인이 되면 이제 지켜야 할) 보호막도 없는데, 자꾸 부모가 보호막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대처해야 할 일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부모 마음에, 아이가 이런 길을 가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을 많이들 합니다. 혹은 부모의 가치관에 따라 아이도 살아가길 바라기도 합니다.
아이가 큰 시련을 겪으면 더 크게 성장할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스무 살이 넘으면 놓아주어야 합니다. 그 이후로는 부모의 욕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아이가 스스로 성장해 갑니다.
슈타이너의 발달론에 따르면 인간은 63세까지도 성장한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엄청난 일이라고 보더라도 나는 평화로운 상태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아이의 자립만이 문제가 아니라, 어른도 자립해야 합니다. 어른이 그러하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큰일을 겪어 어쩔 줄 몰라 할 때, 부모가 (한술 더 뜨기 보다) 그럴 수 있다고, 너는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부모가 되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 품은 가지고 있어야 아이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재미있겠지요. 발달이든, 기질이든, 아이를 가르치고 교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우고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공부라면 의미있고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다음 주는, 마지막 강의입니다. 발달론을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기존의 교육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막을 자꾸만 깨고 있습니다. 다음주에는 보호막을 깨지 않으면서 자기 결대로 자라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항들을 발달단계별로 조금 구체적으로 제안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