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화해의 문학적 효용-이숙희의 『해빙』을 읽고
2006년 12월은 기억에 남는 달이다. 도하 아시안게임에 남북한이 최초로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기도 했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처형을 당한 달이기도 하다. 나는 고3 담임을 맡고 있었는데, 경북대학교에서 수능 이후에 학생 백일장을 열었다. 딱히 글쓰기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백일장 요강을 살펴보니 일반인도 참가가 가능했다. 학생 인솔도 하고 백일장에도 참가할 겸 해서 신청을 했다. 아마도 여섯 살이었던 아들과 축구하는 내용으로 둥근 공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었던 것 같다. 발표는 며칠 후에 났는데, 몇 명의 학생이 수상자 명단에 있었다. 내심 기대하며 내 이름을 찾아보았는데, 당연히 없었다. 옆에 있던 국어 선생에게(조** 작가) 글의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더니, 일관성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글을 잘 쓸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하고 물었더니 소개해 준 곳이 대봉도서관 수필 창작대학이었다.
다음 해 2007년 3월 6일 화요일이 개강식이었는데, 신학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만 그 시간을 놓쳐버렸다. 그런데 ‘봄바람 살랑살랑 부는데, 얼른 오세요.’라는 문자가 날아왔다. 문자를 보낸 이가 바로 이숙희 발행인이었다. 그와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내 문학 인생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때 첫 강의를 하신 분이 홍억선 한국 수필 문학 관장이어서 나는 내 문학의 고향을 대봉동 수필창작대라고 생각한다.
이숙희의 『해빙』을 읽는다. 사람의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나의 문학의 시작점이 대봉도서관이었으며, 나를 부른 이가 이숙희였다면, 이숙희의 경우 직장에서 사내커플이 된 남편과 만남, 그를 통한 성모 마리아와의 만남, 그녀를 통한 무기수와의 만남은 『해빙』의 주요 소재가 된다. 해빙(解氷)이란 풀 해(解)자와 얼음 빙(氷)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얼음을 녹인다는 의미다. 도끼나 톱으로 잘라내어야 할 만큼 꽝꽝 언 얼음이 녹는 시절이 봄날의 일이고 보면, 이숙희의 글은 따뜻한 가족의 일상을 그리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삼촌과 이모들의 고난과 용서로 확장되고, 종국에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지경의 불화를 녹이는 인간애로 향한다. 고로 ‘해빙’은 ‘용서’가 되기도 하고 ‘화해’가 되는데 이는 모두 아들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기도와 일맥상통한다. 결국, 삭막함과 몰인정의 시대에 진정한 가치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가 『해빙』에 단편단편으로 실려있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의 이유는 바로 치유에 있다고도 하겠다.
「지키지 못한 약속」의 캄싼, 「오지랖」에 나오는 르엉 티용, 그리고 「봄바람」에 나오는 백수 청년들은 작가의 따뜻한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물론 “오지랖도 이제는 완전 국제적으로 떠십니다.”(46쪽) 라는 남편의 지청구도 있지만, 사실은 그도 이미 이숙희의 마음 씀씀이를 잘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국제적’이라는 말 앞에는 ‘어디에서나’라는 말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숙희도 「종신보험」, 「육천 번째의 와이셔츠」,「잔치」, 「남편의 휴가」에서 남편의 수고와 퇴직 후의 헛헛함에 대해 묘사하여 두 사람의 「사주」가 천생연분임이 틀림없겠다. 그러므로, 작가의 따뜻한 마음은 ‘해빙’과 ‘용서’로 귀결되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문학의 용도가 치유에 있다고 본다면, ‘해빙’의 구체적 형상화를 통해 작가는 ‘치유’를 본격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누군가가 글을 읽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어 상처를 치유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문학의 효용은 없다. 「아버지의 군번」에 나오는 삼촌을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겉모습에 가려진 진심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밥’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통해서 모성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그뿐만 아니라, <수필세계>의 발행인으로서 수필 문학의 미래를 걱정하는 그를 「여수의 밤」과 「가을 남자」에서 만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순서이기도 하다. 계절의 순환에 맞게 제4부는 달별로 각각에 맞는 소재를 찾아 새로운 시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발행인의 선구자적 글쓰기라 하겠다. ‘소쿠리에는 쪼글쪼글한 어머니가 앉아계십니다.’(107쪽)라는 구절은 여느 시가 표현할 수 없는 명징한 상징이 아닌가. 이로써 한 사람의 글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실로 지대하다. 사람을 바꾸니 더 그렇다.
감히 이숙희 발행인의 글을 읽고 감상문을 적어 봅니다. 이래도 되나 싶습니다. 하지만 저를 글문으로 이끌어주신 분이시니 다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적었습니다. 올 3월에 대구수필가 협회의 신입 회원 소개글에 글쓰기가 최고의 취미가 되면 좋겠다고 적었는데, 여러 선배님 보시기에 다소 성가시게 보여도 혜량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직도 읽고 적어야 할 감상문이 많은데 한편으론 걱정도 되고 한편으론 기대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