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모슬포항
2011.11.20 모슬포항
2011.11.20 모슬포항
2011.11.20 모슬포항
2011.3.7.모슬포항
2011.5.1. 모슬포항
2011.5.1. 모슬포항
2011.7.29
2011.7.29 모슬포항.
2012.2.15 모슬포항
2012.2.15 모슬포항
2012.2.15 모슬포항.
2013.2.13 모슬포항
2013.2.13 모슬포항
2013.4.30 모슬포항.
2014.1.13
2014.1.13 제주 아크로뷰 호텔 2차분양.
2014.2,17 - 모슬포항 정비사업 추진.
2015.6.20 모슬포해수욕장.
2015.6.20 모슬포해수욕장.,하모해변 야영장
2015.6.20 모슬포해수욕장.,하모해변 야영장
2015.8.8. 모슬포해수욕장.,하모해변 야영장
2015.8.8. 모슬포해수욕장.,하모해변 야영장
2015.8.20 모슬포항.
2016.2.1 모슬포항., 방어마을 샤브샤브
2016.2.1 모슬포항., 방어마을 샤브샤브
2016.4.7 모슬포항 토요시장.
2016.5.1. 모슬포해수욕장
2016.5.1. 모슬포항 바다올레 횟집.
2016.5.30 모슬포해수욕장.,하모해변 밤마실
2016.5.30 모슬포해수욕장.,하모해변 밤마실
모슬포 하모체육공원
모슬포., 스쿠버
2016.7.17 모슬포항
2016.9.13 모슬포항.
2016.7.31
모슬포지역 어업인들의 숙원.,모슬포항 정비사업.
제주특별자치도에 따르면, 모슬포항 정비사업을 위해
올해 국비 26억원 투입 모슬포 북항에 돌제부두 90m축조.
남항과 북항에 8300㎥ 준설공사가 연말 준공목표로 3월에 착공;
세부사업 내용을 보면, 모슬포 북항에는
검조소측 및 차도선 부두측에 돌제부두
90m 축조와 준설공사 6630㎥를 추진하고,
남항에는 1684㎥의 준설공사가 이뤄진다.
그간 모슬포항은 태풍시 정온도 불량으로
어선대피 가능수역이 부족하고, 성어기시
재적어선 및 외래어선의 이용증가로 평상시
어획물 처리작업이 불편한 실정이었다.
"이번에 돌제부두가 축조되고 준설이 이뤄지면
기상악화 시 어선의 긴급대피로 어업인의 생명과
재산이 보호되고 가파도를 운항하는 여객선 출․입항
에도 큰 도움이 예상된다"고 도 관계자는 밝혔다.
한편 모슬포항을 근거지로 조업하는 어선수는
약 200척이며, 가파도~모슬포 운항 여객선 2척.
2015.9.28 모슬포항
2016.6.8 모슬포항
2016.12.1 모슬포항.
2017.4.11 모슬포항
2017.6.19 모슬포항 인근
2017.7.21 모슬포항
2017.09.01
19세기 모슬포
조선시대 - 제주 모슬포.,해금정책
.
.
1950년대 모슬포항
1940/50년대 제주
19세기 말.,제주
19세기 말.,제주
"모슬개" "모실개"라고 불리었던., 모슬포.
'모슬'은 모살(모래의 제주어)이 변한 것이고,
'개'는 포구(浦口)를 뜻하는 포(물가 浦)가 변한 것.
이는 모래가 있는 포구를 의미한다.
워낙 ,땅히 척박하다보니.,"못살포.".
남서부 해안 '암석과 암초' 천연 방파제.
조선시대 수군방호소, 중수전소가 설치.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던.,모슬포.
조선시대 모슬포는 대정의 외항 겸 어항.
오늘날 모슬포항은 관광지로 활기를 띤다.
송악산 자락에서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인다.
상모리 옛 이름은., '웃모슬개·웃모실개'
18세기 중반 '상모슬포리' 또는 '상모슬리'
19세기부터 "상모리"로 사용했으며 하모리
옛 이름은 '모슬개·모실개' '알모슬개·알모실개'
19세기부터는 '하모리'로 통일하여 지금까지 표기.
인성리와 안성리, 보성리는
모슬봉 동북쪽 중산간 마을들.
인성·안성리는 '성내' 또는 '대정골'.
18세기 중후반 대정현성
동문일대 형성된 마을 동성리.
서문 서쪽 일대에 마을을 서성리.
19세기 말부터 동성리를 동문과 동문 북쪽 일대
안성리, 남문, 남동쪽은 인성리 2개로 나뉘어졌다.
........................모슬포항(摹瑟浦港)..........................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국가 어항("축항(築港)", "모살개")
모슬봉(187m)과 가시악(加時岳 : 106.5m)이 항구를 등지고
있는 제주도 남서부 지역의 대표적인 항구로서, 천혜의 항구.
1971년에 1종 어항[지금의 국가 어항]으로 지정되었다.
1987년 항구 기본 시설 계획을 수립해 1991년 완공되었고
북항과 남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1876년 한·일 통어 장정
(韓·日通漁章程) 체결후 일본이 잠수기 어업을 폈던 곳이다.
1889년부터는 한·일 통어 장정을 통하여
어세(漁稅)만 내면 연안 3해리까지 조업가능
전복·소라·해삼만이 아니라 흑산호까지 캐갔다.
정기 항로가 일찍이 트여서 1918년에는
일본 오사카 항로가 개통되어 ‘함경환’ 취항.
오사카행 배가 입항하는 날은 부두가 인파로 혼잡.
1924년부터는 ‘강원환’과 ‘복목환’이
한 달에 두 차례 왕래 얼마 뒤 이들은
‘제2 군대환’과 ‘경성환’으로 교체된다.
이중 ‘제2 군대환’은
1935년부터 한달에 3차례
운항 횟수를 늘리게 된다.
모슬포항이 개발의 붐을 타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오사카 항로가 열렸으나 종선을 이용해야 했고
이마저도 썰물 때는 큰 불편을 겪을 정도로 시설이 취약.
이 때 결국 ‘비짠여’쪽으로 방파제와 선착 공사를 펴기 시작.
20세기 초에 목포까지 정기 항로가 개통되어 기선이 첫 취항.
1971년부터 '모슬포~ 가파도~마라도' 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1980년 수리 모형 실험을 실시하고
1987년 기본 시설에 대한 계획을 수립
1991년 기본 시설완공 1998년 정비계획 수립.
어선 세력의 증가와 안전한 어선정박을 위하여
2001년부터 모슬포항 건설 공사를 진행 중이다.
북항에는 서방파제[734m]와 동방파제[254m] 등
2개 방파제와 선박 접안시설 물양장[925m]이 있고,
호안의 길이는 157m, 수면적은 5만 1000㎡이다.
2001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남항에는
방파제[625m], 물양장[268m], 선양장[30m],
선착장[115m]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부두 앞에는 496m² 수산물 위판장이 있다.
수역으로 북항은 동방파제 기부 정남 방향 300m
점[해상]에서 직각으로 우측은 육지와 연결하고
좌측은 600m 떨어진 점[해상], 이점에서 정북으로
육지와 연결하는 선을 따라 형성된 공유 수면이다.
남항은 서방파제 기점에서 정북으로 해안을 따라
160m되는 지점으로부터 정남으로 600m점[해상],
이점에서 직각으로 정동으로 460m 떨어진 점[해상],
이점에서 정북으로 육지와 만나는 점을
연결하는 선내의 공유 수면이다.
육역으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1089-34 외 8필지 일대.
지방 어선 380척이 있으며,
보급 시설로 급수·급유·급빙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2005년 기준 어업 인구로 전업 인구 460명,
겸업 인구 1,720명으로 총 2,180명이다.
어업 가구로는 전업 가구 482가구,
겸업 가구 1,502가구로 총 1,984가구.
총 생산량은 2,223MT이며,
생산액은 145억 9000만원이다.
모슬포항 앞바다로부터 마라도 남쪽 바다 사이에는
방어·도미·옥돔·감성돔·삼치·우럭·전갱이 등 다양한 어족이
서식하여 예로부터 황금 어장으로 소문이 나 있다.
국내 최대의 방어 생산지이자
방어의 상품 가치가 가장 높은 곳으로
10월부터 2월까지 마라도를 중심으로
방어 어장이 형성된다. 해마다 11월 중순에는
모슬포항 일원에서 ‘최남단 방어 축제’가 열린다.
제주특별자치도는 모슬포항을
수산업 기지로서 뿐만 아니라
관광 어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녹지 공간과 산책로, 조형물 등을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올레 11코스
산방식당 밀면
방어 샤브샤브
방어회
모슬포 맛집.,방어마을
모슬포 남항
모슬포 남항
모슬포
대장금이
연모의 정을 쌓아 가던 곳
모슬포 송악산 절벽
전쟁의 상흔
동굴되어 남았다
마라도 가는 길목
형제도 오늘도 다정하고
산방산빛은 은색이라오
기이하기도 하여라
서귀포 주상절리
망망한 태평양 햇빛 내려쪼여도
끝이 없어라~
長今積戀處,,장금적련처
戰爭遺傷痕,,전쟁유상흔
兄第島多情,,형제도다정
山房山光銀,,산방산광은
奇柱狀節理,,기주상절리
茫茫海無垠,,망망해무은
제주 모슬포.,해금정책.
제주 모슬포 앞바다 평균 수심은 약 15m 정도.
오늘날, 큰배가 정박할 항구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고려시대 국제무역항 중간기착지로 활기 넘치던 포구.
모슬포에서 가까운 차귀도에는
모슬포를 오가던 한중일 상선들의
난파로 인하여 많은 구전들이 전해온다.
특히, 고려시대 원나라 상선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다가 풍랑을 피하여
이곳에서 풍랑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던 곳.
조선시대 출륙금지령으로 항로가 봉쇄된.,모슬포.
육지로 나가는 관문도 '조천진 & 화북포구'로 제한.
공무에 해당하는 사람 만이 육지를 오고 갈 수 있었다.
전면금지한 조선시대.,출륙금지령.
..........................................
...........................................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국가어항.,모슬포.
제주도 남서부 대표 항구로 동쪽에는 화순포.
'모슬봉 & 가시악'(106.5m)이 감싼.,천혜의 항구.
1987년 항구 기본시설계획 수립(북항 & 남항)
1991년 '북항과 남항' 중에서 북항을 먼저 완공
북항에는 서방파제(734m)와 동방파제(254m) 등
방파제 2곳과 '선박 접안시설'물양장(925m)이 있고,
'호안의 길이는 157m, 수면적은 5만 1,000㎡' 규모이다.
2001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남항에는
방파제(625m), 물양장(268m), 선양장(30m),
선착장(115m), 부두 앞 496m² 규모.,수산물위판장.
모슬포항 앞바다로부터 마라도 남쪽 바다 사이에는
방어 도미 옥돔 감성돔 삼치 우럭 전갱이 등이 서식.
모슬포항은 연근해 어업을 위한 어업 전진기지이다.
강풍이 불 때는 동중국해에서 작업하는
어선들이 모여 들어 피난항 역할을 한다.
20세기 초, 목포까지 정기 항로가 개통.
1918년 일본 오사카 항로가 개통되어 취항.
오사카행 배가 입항하면 부두가 인파로 혼잡.
1971년부터 가파도와 마라도를 잇는 여객선.
해마다 11월 중순에는 모슬포 ‘방어축제’ 시즌.
모슬포는 국내 최대의 방어생산지.
이곳 방어의 상품 가치가 가장 높은 곳으로
10월부터 2월까지 마라도 방어어장이 형성된다.
2000년부터 해마다 개최되는.,모슬포 방어축제.
'노젓기, 풍어제, 해녀 물질' 전통해양문화 볼거리.
'장보고'를 암살하여 왕실 집권 영향력을 굳힌 통일신라.
몽고와 고려조정에 반기를 든 삼별초을 평정한 고려정부는
공도령을 내려 섬주민을 내쫓고 500년을 무인도로 남겨뒀다.
섬을 발판으로 일어날 애초 반역의 싹을 자르고,
섬을 거점으로한 해양세력을 뿌리뽑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섬 사람들의 선박 건조술과 항해술은 사라졌고,
동아시아 해상왕국 패권과 해양 권력은 일본에게 넘어갔다.
사량도 윗섬 서쪽 '수우도'에는 고씨 성씨 원주민이 처음 입도.
.
수우도 보다 훨씬 큰 사량도는 더 일찍 고씨 원주민이 입도.
제주도의 고씨가 이 섬까지 오게 된 까닭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고려 말, '삼별초의 난, 묵호의 난'을 비롯한 저항 섬이었던 제주도.
제주도 주민들이 고향을 등지고
육지 연안의 섬으로 탈출한 흔적.
조선시대 조정에서 파견한 목사와 제주 토읍들의 패악질.
학정과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한, 제주 주민들이 도망치자
1629년 인조는 출륙금지령을 내렸고 이는 1830년까지 지속.
조선의 국력이 거의 기울어져가는 시점까지 그 정책을 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 살기로 빠져 나온.,제주 잠녀와 포작인.
조선시대 수유도와 사량도에 주민이 입도한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
일정한 거처 없이 배안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포작인.
이들은 날쌔고 사나워서 왜구도 두려워하며 피할 정도였고
중국말도 아니고 일본말도 아니고 조선말도 아닌.,제주방언.
이들은 왜구와 비슷한 옷차림.
외모로 보면, 중국인과 유사하고
생활 풍습은 조선인과 비슷하였다.
그래서, 육지인과 어울리지 못한., 포작인들.
대개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 다니던.,부랑민.
섬들을 맴돌며 전복 해초 등을 따며 어업에 종사.
이들은 배를 빨리 몰고 바다 조류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표작인들이 지참한 지도에는.,물길, 조류, 물때 까지도 표기.
조선 수군의 뱃길을 안내하여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당시 이순신을 도와 임진왜란에 큰공을 세웠던 포작인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가까스로 살아 남았던.,부녀.
사량도 '옥녀봉 전설'이 그 사실을 오늘날까지 대변해준다.
................사량도., 옥녀봉 전설................
사량도에서 임진왜란때 마누라를 잃은 홀아비와 딸.
아비는 속절없이 나이 먹어가는 딸의 장래가 걱정되었고
딸은 나이가 들어가며 엄마 잃은 아버지의 외로움을 걱정했다.
그런데, 어느날 욕정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가 겁탈하려 들자
과년한 딸은 일단 그 욕정을 누그러뜨리려고 도망치며 외친다.
'쇠가죽을 뒤집어 쓰고 (짐승처럼) 산 정상까지 오르시면.,(중략)"
그러나, 과년한 딸의 당초 바램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욕정에 못이겨 기어이 딸을 뒤쫓았고
그런 아버지를 본 딸은 옥녀봉에서 몸을 던졌단다.
뒤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 아버지는
'자신의 성기를 돌로 짓이기고 딸을 뒤따라 죽었다.' 한다.
훗날, 사량도에 입도한 주민들은 그곳을 '옥녀봉'이라 불렀다.
....................................................................................
사량도에는 웃섬과 아랫섬이 있고
그 사이로 '동강'이라는 급류가 흐른다.
두 섬 사이로 뱀처럼 굽이쳐 흐르는 바닷길.
이곳 또한 이순신 장군이 손길이 미친 곳이다.
이 사량해협 끝에 위치한 대섬은 이순신 장군이
옥포(거제) 사천포 해전때 화살을 보충했던 섬이다.
사량도는 당포(통영)로 떠나기 전 하루를 묵었던 섬.
당포해전 승리 후 당항포(고성, 진해)바다까지 장악하는
숨가쁜 여정 속 그해 8월 14일 일본 수군을 한산도에서 대파.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 '이곳 두섬은 마치 뱀이 교미하는 모습.'
물길이 뱀처럼 휘어져가니 해협을 뜻하는 “양”을 붙여.,사량도.
'물길이 좁은 목' 양으로는 노량, 명량, 칠천량, 견내량 등이 있다.
'모두 다 물길이 좁은 목' 바닷길로서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의 승전 격전지.
'임진왜란'이라는 구체적인 시기와
사량도 장소가 말해주는 옥녀봉 전설.
조선시대 근친상간은 신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그 결말은 거의 대부분
벼락을 맞고 죽는 것으로 끝난다.
조선시대 근친상간 전설의 고향.
통영의 소매물도.,남매 바위 전설,
인천 옹진.,'백아도 선단여 전설' 등.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1만8천 신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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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본섬을 비롯한 비양도. 우도·
상추자도(上楸子島)·하추자도(下楸子島)·
횡간도(橫干島)·가파도(加波島)·마라도(馬羅島)
8개 유인도와 54개 무인도로 이뤄진 제주특별자치도.
육지와 고립된 섬이었으나 국민소득의 증대와 더불어
육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지며 전국 제일의 관광지로 발전.
목포와 약 140km 떨어져 있는 제주도는 남한 면적의 1.8%.
제주도는 삼별초를 섬멸하고 1세기 동안 원나라 직속령.
원나라 '왕족이나 왕권을 위협한 신하 170 명'의 최초 유배지.
조선시대 제주가 유배지로 등장한 시기는 연산군 폐위 이후였다.
강화도에서 위리안치 2달만에 숨을 거뒀던.,연산군.
31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도 견디기 힘들었던.,위리안치.
제주도는 '5년 이상' 유배형 또는 종신형 '유형 제 1 번지'
제주는 종신형을 선고 받은 유배자 숫자가 압도적.
광해군, 김정희를 비롯하여 200 여명이 거쳐간 적거지.
한번 들어가면, 거의 살아 나올 수 없었던 유배지.,제주도.
고려시대 남송과 무역이 활발했던.,제주 모슬포항.
제주가 원 지배 하에 있을 때까지.,국제 무역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해금정책과 공도정책으로 폐허화된.,모슬포.
해금(海禁)은 바다로 나가 외국과 통교하는 것을 금지.
해상무역, 해상교통, 어업까지도 규제하는.,해양 통제정책.
"사사로이 바다로 나가 이익을 도모하는 자를 금지하라." - 태종.
1426년 세종도 "사사로이 국경 근처에서 무역하거나
바다로 나간 자는 장(杖·곤장) 100대에 처한다."고 했다.
1445년(세종 27) 탐라는 조선에 복속되고 탐라 귀족은 평민화.
'제주도는 전라감영에 속한 제주목의 관할.'
태종 때는 바다에 나가 무역하는 것을 규제하였지만.
세종 때는 대마도 왜구를 소탕한 후, 해금정책을 선포.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하고 아예 섬을 비우는.,공도정책.
1418(세종 원년)6월 19일
삼국도체찰사 이종무의 지휘 하에
17000여명의 병럭을 227척의 병선에 나눠 싣고
조선 측에서는 거제도를 출발하여 대마도 왜구를 정벌.
명나라 해금정책에 조선이 적극 동조하는 대마도 정벌군
일본 막부정부에 사전 통보하여 동의를 받고 정벌에 나선 것.
정벌군은 대마도 왜구 근거지에 큰 타격을 가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당시 일본은 군웅이 활거하는 '정치적인 혼란기'
왜구 세력은 일본 제패를 꿈꾸던 막부 정부의 라이벌.
막부 정부는 조선의 대마도 정벌을 묵인하게 된 것이었다.
이로써 일본에 대한 회유정책이
조선의 주도 하에 실시될 수 있었고
대마도는 양국 간 외교 및 안전판 역할.
..............................
...............................
조선 초, 해금정책을 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고려 말부터 집요하게 지속된 왜구의 침입이었다.
고려의 국운이 뒤흔들릴만큼 왜구의 규모가 커졌다.
왜구는 해안가나 섬에 게릴라처럼 출몰하는데,
그때마다 정규군을 일일이 파견하기란 어려운 일.
군대가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노략질을 끝낸 왜구.
조선 정규군이 왜구가 출현한 현장에 도착하면
그때는 그 왜구가 또 다른 곳에서 출현하는 악순환.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니 뾰족한 대처방법이 없었다.
동아시아 해상왕국 신라시대에는 해적을 소탕.
사신과 상인들이 주로 해로를 통해 중국을 왕래.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사신과 상인은 육로를 고집.
신라시대 장보고는 바다를 이용해 세력을 확장하였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약 400년간 한반도에 바다는 없었다.
어민들은 출항 허가를 받아 제한구역 어장 내에서만 고기잡이.
특히, 제주도는 '고려 말~ 조선 초' 삼별초 세력의 영역.
조선은 고려 말, 삼별초 세력에게 호되게 당한 탓도 있지만
명나라의 영향으로 해금정책을 폈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많다.
명 태조가 정권 위협 요인으로 간주한 강남의 해상 세력을
견제, 탄압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편 것처럼 조선도 고려 말부터
기승을 부렸던 왜구를 물리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기 위해
고려 말, 공도정책(空島政策)을 계승하고 명나라 해금정책을 받아들였다.
조선은 육로를 통해 명이 설정한 조공 체제를
충실히 이행할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기에
명나라의 해금정책에 조선 조정에서는 적극 동조.
이후 조선왕조는 ‘해금의 시대’를 본격 개막하였다.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며 중원 문화의 야류임을 자처.
해양 저편에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야만시 여기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문화적 자폐주의에 빠져 들게 되었고
조선은 통제하기 어려운 해양정책을 싫어하여 쇄국정책.
해양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얻을수 있는 기회를 잃어갔다.
그대신 중국의 권위를 빌어
백성은 물론 주변국까지 통제하려는
사대주의에 빠져들며 중국에 길들여져 갔다.
작고 약한 나라는 마땅히 크고 강한 나라를 섬기고
그에 의지하여 나라의 존립을 유지하려는.,사대주의.
중국을 사대(事大)의 예(例)로 섬기는 한
당장 크게 손해볼 것 없고 겁날게 없던 조선.
한편, 일본은 명의 해금정책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일본이 '명나라 및 조선'과 교역을 하려면 바다를 통해야만 가능.
결국, 일본은 바다를 통한 불법적 교역활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명나라의 해금정책에 도전하는 것.
그리고, 명나라는 이러한 일본에 대해 강력 대응하였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는 가운데 '왜구' 해적집단이 성장.
주로 일본인들인 왜구들의 불법 행위는
점차 무력적 침탈 행위로 돌변하여 갔고
급기야 중국과 조선의 내륙까지 침공하였다.
중국 명나라(1368∼1644)를 세운 주원장은
왕조 수립 4년 뒤인 1371년 해금정책을 발표.
이 때문에 송·원나라 때
‘바다의 실크로드’를 장악했던
중국의 해상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송, 원나라는 무역으로 실리 중시 개방정책
명나라는 농업 위주의 폐쇄적인 정책을 폈다.
그리고, 조공무역 만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던 것.
이는 명나라를 사대주의로 섬기는 조선이
해금정책을 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명 태조는 정권위협 요인이었던
중국 동남의 해상 세력을 견제하고
그들을 탄압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폈다.
하지만, 해금정책이 강화되던 15세기 초
세계 항해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3대 황제였던 영락제가
환관 출신 원정대장 정화에게
대규모 해상원정을 감행토록 한 것.
정화(鄭和· : 1371~1433)
그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회에 걸쳐 명나라 대선단을 이끌고
동남아, 아프리카 케냐 등 약 30여국을 원정
명나라 등지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도자기를 주고
열대지방 보석, 동물, 광물을 교환해 이익을 얻었다.
정화가 지휘한 명나라 세력이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 앞섰다.
함대 규모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이뿐.
정화의 대 항해는
영락제와 홍희제에 이어
선덕제가 즉위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명나라는 본격적인 쇄국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쇠락.
1567년 명나라는 민간무역을 인정해 해금정책을 완화하는듯.
그러나, 1644년 청나라가 중국을 장악한 후 다시 바다를 막았다.
섬을 비워둔다는 뜻말.,‘공도’는
섬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규제.
도적떼가 섬에 숨는 것을 막는 이유도 있었다.
조선은 정기적으로 ‘수토관’을 각 섬에 파견하여
섬에 사는 주민들이 있으면 육지로 데리고 나왔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의 통상은 중국과 일본에 한정되어 있었다.
반면, 그당시 일본은 북해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교류하였고
청나라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서양 각국과도 접촉하고 있었다.
신라시대 장보고가 동남아뿐 아니라 이슬람 상인과
거래한 것과 비교하면 해양무역 측면에서 커다란 후퇴.
조선의 해금정책은 약간 기복이 있었지만 19세기 말
서구 열강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500년간 지속.
조선은 통제하기 힘든 해양 세력의 불안정성을 싫어했다.
해양 세력은 다국적 성향과
자율성·독자성이 있었기 때문.
그 결과, 조선은 해양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고 국제사회에서 고립.
조선시대 초기 지도에서는 섬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조선방역지도’에 표기된 섬은 제주도, 대마도, 진도 뿐이었다.
'동람도’에 나온 섬은 제주도, 군산도, 흑산도, 남해, 거제도, 대마도.
조선시대에는 바다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하다 보니
바다를 꺼리게 되고 바다를 장애물로 여기게 되었다.
조선은 경제, 문화적 자폐주의에 차츰 깊이 빠져들었다.
신라시대 개방정책이
조선시대에는 쇄국정책.
임진왜란(1592~1598)은 조선에 해양 문제를 일깨웠다.
조선은 일본과의 7년 전쟁 중 일방적인 열세에서 벗어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수군의 승리 덕이었기 때문.
하지만, 조선은 그 이후에도 해양 문화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해금정책을 비판하며 해양정책을
주장.
박제가(1750~1805)는 바닷길을 통한 통상을 주장하며 한탄.
“조선왕조 400년 간 딴 나라의 배가 한 척도 들어오지 않았다”
조선의 해금, 공도정책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도발을 이어졌다.
결국, 조선의 해양 영향력 및 군사력은 갈수록 축소되었고
조선은 섬과 바다, 연해 지역을 왜구에게 내주는 결과를 초래.
전라감영에 속한 제주도는 해금정책과 공도정책의 피해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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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도가 유배지로 되면서부터
그 이후로는 더욱 더 못살 곳이 되었던.,모슬포.
인근 대정읍 적거지로 인해 경계가 더욱 삼엄해진 것.
오늘날, 방어축제로 활기가 되살아나는., 모슬포항.
모슬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방어 문화 1번지.
방어는 쿠로시오 난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그 난류에서 잡히는 방어는 방어 문화를 낳는다.
특히, 제주도는 모슬포 중심으로 방어 잡이가 성행.
쿠로시오 난류가 모슬포에 방어 문화를 낳은 것.
방어는 한반도 남해안과 동해안에서 많아 잡히는 물고기
'5월 초~ 한여름'까지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북상하여 회유.
'늦여름~ 이듬해 봄'에 이르는 시기에 남으로 내려오다가 회유.
방어가 가장 잘 잡히는 시기는 가을에서 겨울까지.
즉, '11월~ 12월' 이때 방어가 가장 맛이 좋은.,제철.
방어는 횟감으로 인기 있는 고급어종이다.
특히, 마라도 방어가 그곳 거센 물살을 이겨내어
육질이 쫄깃거리기 때문에 모슬포를 찾는 이가 많다.
또 매해 11월에 방어축제를 열어
지역 경제 살리기에 한 몫을 한다.
Seriola quinquradiata Temmick et Schlegel.
영어 학명은 yellow tail이고, 일본 학명은 buri.
방어의 빛깔은 전체적으로 반짝이는 회색빛 강철색.
타원형 몸통, 앞 등지러미는 짧고, 뒤 등지러미는 길다.
눈과 입이 작은 편이고 꼬리는 V가 날렵하게 누운 형태.
대방어 크기는 어림잡아 1m 이상,
중방어는 60~70cm 정도에 속한다.
모슬포 근해 가파도, 마라도 등에서 잡힌다.
이 지역들이 쿠로시오 해류가 통과하는 지점.
방어가 특산물로 기록된 지역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등지 특산물 중 하나가 방어다.
이형상의『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방어를 낚시로 잡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함경도에서는 마래미, 강원도에서는 마르미.
경북에서는 사배기, 제주도에서는 (무태)방어.
'히라스'는 "젯방어"라 부르고,
방어와 비슷한 고기로는 '부시리.'
'축항편' 등은 방어와 비슷한 물고기.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한 편명(篇名)
'전어지(佃漁志)'라는 책을 조선시대 지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 3대 어보(魚譜) 중 하나.
담정, 김려(1766~1821)가 유배지 진해에서
쓴.,'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일성루(一星樓).
흑산도 유배 중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玆山魚譜)'.
방어에 대한 기록이 눈길을 끈다.
"방어(方魚)는 동해에서 나는데
관북, 관동 연안의 마을(州郡)과
영남의 영덕, 청하 이북이 자생지
머리는 크고, 몸뚱이는 길며 큰 것은 6, 7척에 달한다.
비늘은 잘아서 없는 것 같고, 등은 청흑색, 배는 조금 희다.
고깃살은 붉은 빛인데 소금에 절이면 옅은 붉은빛으로 변한다."
"동해에 사는 큰 방어는 길이가 1장(丈)이 넘으며,
둘레가 가히 십위(十圍)나 되고, 고깃살은 기름이 많아
무태방어(無泰?魚)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방어 꼬리 붉어지듯 왕실 위해 불탔도다.
불타는 듯하지만 부모공경 잘하리라'
'방어는 피로하게 되면 꼬리가 붉어진다.'고 한다.
이 시는 전란(戰亂)이 일어나자 전쟁에 나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인의 심정을 노래한 것
이 시를 지은 여인은 남편을 방어의 고생에 비유.
남편도 주왕조(周王朝) 명령으로 전쟁터로 나갔는데,
앞으로는, 왕실의 명령이 있더라도 부모님을 모시면서
다시 전쟁에 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시에 담았다.
주(註)에 '방어'는 '편어'라고도 한다.
'그 모양은 편평하고 배에 기름이 있다.'
'제주도효제문자도'에 보면 방어로 추정되는 물고기.
19세기 성행했던 '문자도'는 지방 화공이 그린.,민화.
주로 '효제충신예의염치' 글자를 장식하는
보조 수단으로 각종 이미지를 병풍에 그린 것.
'제주도효제문자도' 특징은 해양문화를 반영한 것.
그러다보니
도미, 갈치, 우럭 등
물고기가 자주 그려진다.
3단으로 구성된.,병풍.
상단에는 새나 나무, 혹은 줄기 식물을 그리고
중단에는 문자와 새나 획 처리를 장식한 물고기
하단에는 바닷물고기를 형상화하여 그려 넣었다.
이때 방어로 추정되는 물고기도 문자도에 그려진다.
문자도 그림은 사실성을 보이나 묘사의 정확도가 부족.
'의례용 병풍'이라는 특성 때문에 상징성을 띄기도 한다.
방어는 제사 때 적(炙)을 만들어 조상을 위해 제삿상에 올린다.
이런 점에서 보면, 조상을 모시기 위해 병풍에 방어를 그렸던듯.
<제주효제문자도> 방어는 입에 큰 말풍선 같이 큰숨을 쉬는 모습.
긴 타원형 모양의 몸에 잔 비늘을 그렸고,
눈과 입은 작게, 등지러미 배지느러미는 3개씩.
꼬리지느러미는 날렵한 방어 지느러미와 닮았다.
방어회, 방어적, 방어국, 방어김치조림.
방어회는 두껍개 썰어 신김치에 싸서 먹는다.
방어적은 방어를 넓이와 두께 2cm 정도,
길이는 5~6cm 정도, 20cm 가량의 대꼬지에
예닐곱 점을 끼워서 양념을 해서 지져서 만든다.
방어국은 머리나 회를 뜨고 남은 고깃뼈, 그리고 내장에
무를 채로 썰어 소금으로 간을 맞춰, 잘 끓인 국을 말한다.
방어김치조림은 방어 머리에 신김치를 덮어 약한 불에 조림,
방어의 머리는 신김치와 잘 어울리는데,.
기름진 방어의 맛을 새콤하면서 단백한 맛.
겨울철 모슬포 어부들의 집에서 별미로 먹는다.
고등어 김치조림의 원조는 방어김치조림이다.
방어가 짧은 기간에만 잡히는 어종이기 때문에
방어대용으로 고등어김치 조림이 탄생하게 된 것.
방어 살을 한쪽씩 통째로 발라내어 방어적 할 때
우선 방어를 일정한 두께로 줄처럼 길게 자르는데
꼬리 부분은 방어가 분리되지 않도록 붙은 채로 놔둔다.
소금을 약간 뿌리고 꼬리 쪽으로 묶어 장대에 건다.
바람에 방어 가닥들이 흔들리면서 천천히 말라가는데
하루 정도면 겉만 살짝 마르는데 이것이 '방어 시둘른다'
겉만 마른 방어를 장대에서 내려서
붙어있는 방어 가닥을 일정한 크기로
장만하여 보관했다가 튀겨 먹거나 구워먹는다.
지금도 모슬포에서는
말린 방어가 겨울철 별미.
오래도록 그리워할 이별이 있다면
모슬포 같은 서글픈 이름으로 간직하리.
떠날때 슬퍼지는 제주도의 작은 포구 모슬포.
'몹쓸~' 뱃고동처럼 길게 내 뱉으면
자꾸만 몹쓸 여자라는 말이 떠오르고
비내리는 모슬포 가을밤도 생각 나겠지.
그러나, 다시 만나 사랑할게 있다면
나는 그 여자를 다시 만나는 대신에.,
모슬포 풍경을 만나 오래도록 사랑하겠네
사랑의 끝이란 아득한 낭떨어지를 가져오고
저렇게 숭숭 뚫린 구멍이 가슴에 생긴다는 걸
여기 방목하는 조랑말처럼 고개 끄덕이며 살겠네.
살면서 떠나간 여자를 그리워 하는건
마라도 같은 섬하나 아프게 거느린다는 걸
온몸 뒤집는 저 파도처럼 넓게 깨닳으며 늙어가겠네.
창밖의 비바람과 함께 할 사람이 없어
더욱 서글퍼지는 이 모슬포의 작은 찻집. '景(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