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진첩/곽효환-
삼십 주기 기일을 며칠 앞두고 낡고 해진 아버지의 사진첩을 편다
그곳의 빛바랜 시간은 더디게 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며
때론 흐트러진 사진들 틈새로 기억의 문이 열린다
동구에는 등 굽은 늙은 느티나무와
초여름 하얀 포도송이 같은 꽃을 피우는
키 큰 오동나무, 그 너머 멀지 않은 곳에 철길이 있다
기차는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지나가고
철둑 따라 나란한 신작로에는 꽃들이 계절을 바꾸어 피었다지는데
너무도 오래 닫혀 있던 흑백사진들이
세월의 기억을 따라 아주 천천히 흘러간다
외아들을 먼저 보내고 이십여 년 넘게 한숨 속에 더 살다간
초로의 조부모, 처녀티를 미처 벗지 못한 새댁
어머니와 숙수그레한 고모들, 아직 사내인지 계집아인지
구분할 수 없는 나와 어린 누이, 아픈 갓난 아이를 안고
길을 막아 직행버스를 세운 콧수염 기른 아버지
읍내엔 새마을 운동 땐가 초가지붕 뜯어내고 얹은
슬레이트 아래 검고 붉은 간판글씨의 구거리잡화와 학성이발관
구거리잡화는 구거리수퍼가 되고, 수퍼집 딸은
시집가 아이엄마가 되고, 솜리 모자집 아들은
서울로 유학을 가고, 아들 학성이가 어느새 며느리를 들였어도
그래도 증손을 볼 때까진 끄덕 없다며
팽팽히 가죽 끈 잡아당겨 면도칼을 다듬는 이발관 할아버지
그림자 같이 달라붙어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사람들, 그 풍경들
이제 낡은 사진첩도 점점 누렇게 얼굴을 흐리고
접착면의 끈기도 무뎌져 시간을 가두어 두었던 손을 자꾸 놓아
얼마 더 지나면 아스라이 잡은 기억의 끈도 영영 놓겠지만
시간이 그림이 되어 멈추는 그 곳에서 느리게
느
리
게 살았으면,
다시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