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말씀은 시편 3편입니다.
표제어가 처음으로 나오는 시편입니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O LORD, how many are my foes! How many rise up against me!
Many are saying of me, "God will not deliver him." Selah
But you are a shield around me, O LORD; you bestow glory on me and lift up my head.
To the LORD I cry aloud, and he answers me from his holy hill. Selah
I lie down and sleep; I wake again, because the LORD sustains me.
I will not fear the tens of thousands drawn up against me on every side.
Arise, O LORD! Deliver me, O my God! Strike all my enemies on the jaw; break the teeth of the wicked.
From the LORD comes deliverance. May your blessing be on your people. Selah
아들의 반역으로 도망가는 모습은 구원을 받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압살롬의 반역이라면
다윗은 이미 간음하고 살인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윗에게 대적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징계’로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이 ‘기름부음 받음’으로 대적이 일어나지만
다윗의 범죄 이후에 ‘징계’로 인하여도 대적이 일어납니다.
범죄 이전에 대적들이 일어나는 일은 기름부음 받은 자의 고난이기에
그 고난을 감당하면서 대적을 주님께서 물리치실 것을 청원하며
주께 감사의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범죄한 이후에 이런 대적들이 등장할 때에
이 시를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 탄식시가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기 이전의 일이라면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까닭모를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배경인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가면서 지은 시라고 한다면
다윗이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 다윗은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는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으니
당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간음으로 인하여 우리야가 죽고 그 아들이 죽습니다.
그런데 죄가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하셨다면 다윗에게 더 이상 다윗이 벌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면 깔끔하게
앞으로의 삶에 어려움도 없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원수가 다윗을 용서하신 것을 비방할 수 있습니다.
그 사탄이 ‘간음하고 살인한 다윗을 용서 할 수 있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신 죽는 자가 우리아이며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다윗은 자기 대신 죽는 분으로 인하여 용서받는 그 용서의 위력을 알게 됩니다.
아들이 반역하여 아버지를 죽이려고 옵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맨발로 울면서 머리를 가리고 올라갑니다.
사독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왕을 따라 가려고 하니
왕이 성읍으로 도로 메고 가라고 합니다.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겠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주의 선한 뜻대로 행하시기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자신은 버림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용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자신은 이미 간음과 살인으로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책망 때에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알고 인정을 합니다.
그때 용서를 선포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집안에서는 칼이 끊어지지 않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하고
아버지의 첩을 백주에 동침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들의 반역으로 다윗은 맨발로 울면서 감람산으로 피난 갑니다.
이때 시므이가 다윗 왕의 피난행렬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조롱합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시므이를 죽일까라고 하니 그냥 두라고 합니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합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고 여호와의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자들이 대적입니다.
다윗이 피난 가는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도움을 입지 못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방패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무런 보호자가 없이 도망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라고 합니다.
주님이 자신의 머리를 들게 하여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이런 믿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용서의 선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대적들에게 쫓겨 가지만 여호와의 용서에서 끊어진 것이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윗을 향한 조롱이 예수님께 모아지고 있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조롱한 그 조롱이 예수님께 모아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가 저렇게 저주 받아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승리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십자가로 뱀의 머리를 깨어 버림으로
대적의 이빨을 꺾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다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구원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미 믿었기에
자신이 비록 아들의 반역으로 쫓겨 가지만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다윗의 이런 환난을 보고서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자들이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신약에서도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은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18절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대적의 말에 속지 말고 십자가의 완성을 믿고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