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서안(西安)]에서 5일(4-3)
(2024년 4월 24일∼28일)
瓦也 정유순
4-3. 병마용(兵馬俑)박물관
홍문연을 나와서는 조금 이른 점심을 하고 발걸음은 서안시 임동구[临潼区(린통구)]에 있는 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으로 이동한다. 입구에는 진시황(秦始皇)의 거대한 석상(石像)이 천하를 굽어보고 그 아래로 관람객이 장사진을 이룬다. 여권을 보여주고 입구로 들어서면 숲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관람순서는 제1관을 먼저 보고 제3관과 제2관을 둘러본다. 10여 분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병마용 전시 제1관(1호 갱) 안으로 들어가면 안에는 원형 지붕 아래로 늘어선 병마용이 대열을 갖추고 나열한다.
<병마용공원 매표소와 진시황 석상>
<병마용박물관 제1호관>
1호 갱은 면적이 총 14,260㎡이며, 창검(槍劍)을 가진 보병부대 병마용(兵馬俑) 약 6,000구와 전차 40대가 발굴되었다. 이 병마용은‘진시황의 병마용’으로 ‘진병마용(秦兵馬俑)’ 혹은 ‘진용(秦俑)’으로도 부른다. 병마용은 고분 조각의 한 형태로 사람과 말의 형상이다. 그러나 병용의 손에 쥐고 있어야 할 무기 창검(槍劍)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후에 항우(項羽)의 군사들이 아방궁(阿房宮)을 불 지르고 무기를 탈취해 갔기 때문이다.
<병마용 1호 갱 내부>
<사기(史記)>에는 진시황릉이 승상 이사(李斯)에 따라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군대 핵심 인물들은 인부들을 감독하고, 건축 시간은 39년 걸렸다. 병마용은 진시황릉과 동시에 제작되었으며 죽은 자들과 함께 부장되었다. 처음에는 실제 병사들을 순장하려 했으나 병사들과 똑같은 모양의 도용(陶俑)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병마용갱의 도용들은 키와 복장이 실제 병사와 같아서 진시황도 구분하기 어려워 도용으로 대체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병마용>
<병마용>
1974년 3월 임동구 서양촌의 한 농부가 진시황릉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을 때 몇 개의 도용(陶傭)이 발견되어, 이를 계기로 섬서성의 고고학 팀은 탐사와 시추를 통해 병마용은 이 세상에 나온다. 발굴 당시에는 도용들은 채색이 실제 인물과 같은 형태로 출토되었으나 대기에 노출되면서 채색이 사라지고 지금은 회색빛의 흙빛만 남아있다.
<발굴 당시 채색된 모습>
이보다 앞서 중국 정부는 1961년 3월 4일 진시황릉(秦始皇陵)에 가장 중점을 두고 보호하는 문화유산으로 지정(指定)하였고, 1974년 7월부터 병마용갱 발굴 작업에 착수(着手)하였다. 그리고 1987년 12월 진시황릉과 병마용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됨과 동시에 세계 제8대 불가사의(不可思議)로 선정되었다. 2009年 6月 병마용 1호 갱은 3번째로 대규모 발굴하였다.
<병마용>
인간의 순장(殉葬)은 원시 공동체가 붕괴(崩壞)되고 노예제도가 성립되면서 생긴 하나의 잔혹하고 야만적인 상장(喪葬) 제도다. 인간의 순장이 가장 성행했던 시대는 상(商)나라 시기인데, 상나라 시기의 귀족들 무덤에는 많은 순장 당한 사람들이 있다. 하남성의 은허유적지(殷墟遺蹟地)에는 이미 십여 개의 순장 묘들이 발굴되었으며, 이때 순장 당한 사람은 5천 명에 달한다.
<은허유적지 순장유물>
주(周) 왕조는 은(殷) 왕조의 폭정을 교훈 삼아 “밝은 덕으로 백성들을 보살핀다”는 기조로 주례(周禮)의 탄생과 보급은 순장을 억제하게 하였고, 결국에는 근절되었다. 춘추시대가 되자 열국(列國)들이 패자(霸者)가 되기 위해 경쟁하면서 순장은 다시 살아났으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제후들은 앞다투어 순장제도를 폐지하면서, 진나라도 헌공(獻公) 원년(BC 384년)에 순장을 금지하였고,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병마용>
이에 따라 용(俑)을 순장하는 풍습이 생겨나면서 진흙으로 만든 토용(土俑) 등이 사람을 대신하게 된다. 인간의 순장이 점차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이후, 용은 묘장의 도기, 석조, 인간의 형태를 띠며 정착되었다. 특히 이곳의 병마용은 인간을 대신하여 순장한 전형적인 형태이자 용을 이용한 순장의 극치에 달하며, 규모나 사실 묘사의 정도에서 높은 수준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시대적 상황 외에도 장인들의 지혜가 숨어 있어 보인다.
<병마용>
붐비는 인파에 떠밀려 제1관을 나와 제3관(3호 갱)으로 이동한다. 3호 갱은 1976년에 발굴되었으며 면적이 520㎡이다. 3호 갱은 병마용의 지휘부로 추정된다. 병용은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을 병사보다 크게 만들었다. 병사들의 특징이 잘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모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마용 제3관(3호 갱)>
3호 갱에서는 장군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步兵俑) 64건, 마용(馬俑) 4건이, 진용(秦俑) 78건, 전차(戰車) 1대가 출토되었다. 병마용은 전사, 전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한 4개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개의 전차, 520점의 말이 있다고 추정하며, 아직도 발굴하지 않은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
<3호 갱 내부>
병마용갱은 진시황 장례에 사용한 테라코타(terracotta)이다. 병마용의 존재는 진시황제의 강력했던 권력을 상징한다. 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 되었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가 있어 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한 것이다.
<3호 갱 내부>
다리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로 같은 틀을 사용하여 대량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립을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을 맞춘 뒤 다음 과정으로 넘겨주는 생산 공정에 따른 조립 라인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기와의 생산과 같은 일상생활 용품의 제작에서도 이러한 생산 라인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병마용은 얼굴 부위의 채색으로 보아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등신(等身)대로 제작되었다.
<마용(馬俑)>
다시 발길은 제2관(2호 갱)으로 향한다. 2호 갱 안에는 기병과 근위대의 용병(俑兵)이 묻혀 있다. 그래서 바닥이 울퉁불퉁한 흙으로 덮여있고, 깊이 파낸 흔적만 남아있어 발굴을 중단된 상태 같다. 이는 1호 갱과 3호 갱을 발굴할 때 채색된 병마용이 색이 바래는 현상을 보고 작업을 신중히 하는 것 같다. 주변의 유리관 안에는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여러 병용(兵俑)을 직분에 맞게 자세를 취하여 전시하고 있다.
<병마용 제2관(2호 갱)>
첫 번째 만나는 병사는 노궁수(弩弓手)다. 오른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땅에 대고 왼쪽 다리를 구부린 다음 왼쪽 팔굼치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 고정한 다음에 오른손으로 석궁을 드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병용은 병마용 중 가장 완벽한 형태로 발굴되었는데, 이는 지붕이 무너져 내려올 때 서 있던 병마용들이 먼저 타격을 입어 운 좋게 손상을 피할 수 있었다.
<노궁수(弩弓手)용>
두 번째 만나는 병사는 2호 갱에서 발견된 일곱 명의 장군 중 한 명이다. 이 장군의 키와 복장 등은 그의 높은 계급을 나타낸다. 화려한 물고기 비늘 갑옷 아래에 이중으로 겹친 옷을 입고 턱 아래에 리본으로 묶은 높은 모자를 쓰고 있다. 갑옷을 장식하기 위해 리본으로 만든 8개의 매듭이 있으며, 앞판과 뒷면에 각 3개, 어깨에 각 1개의 매듭이 있다.
<고위급 장군용>
세 번째는 중간급 병사다. 이중으로 겹친 납작한 모자와 앞코가 네모난 신발을 신고 있다. 갑옷 아래의 겉옷은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이며, 중급장교의 갑옷은 가슴만 가리는 갑옷과 가슴과 등을 가리는 갑옷이 모두 있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중간급 병사용>
네 번째는 고삐를 쥔 기병과 말(馬)이다. 2호 갱에서 116명이 말을 탄 채 발견된 것 중 하나이다. 기병(騎兵)은 무릎길이의 갑옷과 갑옷 조끼, 꽉 끼는 바지를 입었다. 띠가 달린 허리 아래에는 주름이 가득한 겉옷이 있고, 턱 아래에는 작고 단단한 모자가 고정되어 있으며, 한 손에 고삐를 다른 손에 활을 들고 있다.
<고삐를 쥔 기병과 말(馬)용>
다섯 번째로는 활을 쏘는 궁수(弓手)다. 비무장 전투복을 입은 보병의 한 종류로 2호 갱에서 출토되었다. 뒷발에 힘을 주고 오른발을 앞으로 내어 몸의 방향을 잡은 다음 왼손은 활의 아랫부분을 잡고, 오른손은 시위를 잡아 활을 쏘기 위한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다. 2호 갱에서는 172구의 서 있는 궁수가 발견되었다.
<궁수(弓手)용>
https://blog.naver.com/waya555/223433516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