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에피소드
이제영
사동 댁이 스무 살에 장손 집에 시집와 딸만 내리 셋을 낳고 칠거지악(七去之惡)의 두 번째 항목 아들을 낳지 못한 죄로 쫓겨 날 처지에 놓여 있을 때 구세주마냥 태어난 것이 그 남자다.
사회구조의 주축이 농업경제일 때 논농사를 많이 짓는 집이 그 시골 동네의 권력서열 1위였다.
그녀의 시댁이 밥술 꾀나 먹는다는 집이었기에 그 남자의 외할머니는 선이 들어왔을 때 두말 할 것도 없이 만사 오케이를 외쳤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마를 타고 전라북도 고창의 농촌 마을로 시집을 오게 되었는데 어린 시누이와 시동생까지 챙기고 농사일까지 거들면서도 힘든 내색마저 못하던 시절을 살아냈다.
그런데 귀하게 얻은 아들이 추운 겨울에 태어나 건강이 썩 좋지 못하다 3살 무렵 엉덩이에 종기가 생겨 돌팔이 의사의 손에 맡겨져 수술이 진행되었다.
그야말로 원시적으로 수술 칼을 소독 한답시고 솥에 삶아 사용했다는데 보나마나 그 후유증이 심했다.
염증으로 인해 고름이 계속 차올라 그 남자의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간호를 이어나갔다.
천지신명도 감동을 했던지 그 어린 아이는 점차 호전되어 엉덩이에 커다란 흉터를 남겼지만,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듬해 사동 댁의 시아버지가 갓 환갑을 넘긴 나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때때로 고창읍내 장이나 오일장에 다녀오시면 군것질거리를 기름종이에 싸와 아무도 몰래 며느리에게 슬쩍 전해주시던 자상한 분이셨다.
유일하게 자신의 편을 들어주시던 든든한 기둥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 후유증은 컸다.
친정집 아버지도, 남편도 과묵하기 이를 데 없었고 어떠한 위로도 받지 못할 때 시아버지 며느리 사랑은 그녀에겐 정말 천금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남편 그러니까 그 남자의 아버지는 농한기에 유행하던 화투노름에 미쳐 어렵게 일궈놓은 시아버지의 논들을 날려먹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통제 가능한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놀음쟁이들이 사냥감을 만난 듯 그녀의 남편을 꼬드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20대 중반의 철부지 남편이 전. 답을 다 말아먹으니 새경을 받고 머슴을 살던 사람들도 제 살길 찾아 나섰고 중학교에서 줄곧 1등만 하던 막내 삼촌은 학업마저 포기해야 했다.
하루아침에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시어머니와 시누이 그리고 그녀까지 힘을 합해 가까스로 지켜낸 논8마지기와 밭3마지기가 전부였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나갈 그 작은 끄나풀이 있어 밥 굶는 생활은 면했다.
그 때부터 그 남자의 어머니는 요즘 말하는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시집와 고생한 보람도 없이 유일한 자기편 시아버지의 죽음과 전 답이 많다는 것을 내세우던 재산마저 모두 잃고 나자 살아갈 희망이 사라졌던 것이다.
밥 짓는 솥에 불 때다가도, 여름이면 고추를 따다가도, 빨래를 하다가도 멍하니 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식구들은 이와 같은 현상을 질병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급기야 두통이 심해지고 매사에 의욕이 상실되어 몸 저 눕게 되자 그녀의 남편이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니게 되었는데 별 효험이 없었다.
없는 살림에 무당을 불러 굿도 하고 기력이 없으니 보약을 다려 먹이기도 하였으나 이 또한 소용없었는데 정읍의 한 가정집 노인이 침을 잘 놓는다는 소문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갔다.
머리와 목, 어깨, 등, 말목까지 커다란 침을 꽂아 넣기를 반복한 끝에 점차 호전되어 갔다.
그렇게 3개월가량을 내왕한 끝에 거의 완치되어 일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그 후 노인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는 얘길 들었다.
그러니까 그 노인의 마지막 환자가 그 남자의 어머니였기에 불행 중 큰 복을 받은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겪은 후 그 남자의 아버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열심히 일을 해 점차 가세는 살아날 수 있었지만 할아버지가 일궈놓은 재산은 회복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시골 촌구석이라도 일본어부터 배웠고 한글은 겨우 쓰고 읽는 정도에 그쳤다.
대부분 소리 나는 대로 읽고 쓰는 정도였다.
그러나 한문공부는 천자문을 시작해 4서3경까지 공부했기에 자천 타천 동네 서기노릇을 겸했다.
그 남자의 부친은 재산을 잃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하는 일이 농사일밖에 없었기에 몸은 늘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타고난 체력이 있었던지 잘 적응하였다.
과묵한 성격에 하루에 말 몇 마디 하지 않고도 잘 살아냈다.
성격이 활발했더라면 힘든 농사일에 지치면 육자배기 가락이라도 했을 터이건만 막걸리와 담배로 시름들 달래곤 했다.
주량이 얼마 되지 않아 흡연하는 낙이 더 컷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그 남자의 할머니는 53세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되어 96세에 돌아가셨는데 손주 8남매를 거의 도맡아 키웠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엄마보다 할머니를 먼저 찾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그 남자는 할머니의 사랑을 거의 독차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어렸을 때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고모, 삼촌, 누나3명, 이렇게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는데 고모와 삼촌이 결혼해 나가게 되었으나 뒤이어 동생들이 태어났다.
안채와 사랑채에 식구들이 가득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어떻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고창 장, 무장 장, 대산 장 이렇게 오일장이 번갈아 있었으나 가장 가까운 대산 장을 주로 이용했다.
그 남자는 학교를 안가는 일요일이나 방학 때 어떡하든 아버지나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가는 날이 행복했다.
4~5km남짓 되는 신작로 길을 걸어서 다녔는데 어린나이에 다리 아프단 얘기도 없이 그저 따라나설 수 만 있어도 신나는 일이었다.
맛있는 국수도 먹고, 튀밥이며 사탕이나 과자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장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할머니는 “이 강아지가 내 장손이요” 부친은 “이놈이 내 큰아들입니다.” 라고 소개하면 꾸벅 인사를 하곤 했다.
생각할수록 정감어린 장면이며 아스라한 추억 속 한 장면이다.
겨울아이로 태어나 몸이 허약한 그 남자아이는 소소한 병치레를 달고 살았다.
그러다 중학교 때 맹장염이 발병해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해 1월 동네 아저씨 둘과 그의 부친은 아이를 업고 무릎까지 쌓인 눈길을 번갈아가며 정신없이 4km정도를 걸었다.
대산까지 가서 택시를 타고 고창읍내의 작은 병원까지 가서야 겨우 수술을 할 수 있었다.
가정집이 딸려있는 작은 병원에서의 수술은 어쩌면 모험이었는지 모른다.
약 열흘정도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는 그 병원 쪽마루아래 연탄아궁이에 밥을 지어 먹으며 병간호를 했다.
의사선생님의 부인이 물김치며 몇 가지 반찬을 환자가 먹기 좋다며 가져다준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병원이 있었는지, 또 수술시 마취의사는 어디서 왔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수술로 제거한 맹장을 작은 유리병에 담아 그의 부친은 동네 사람들에게 이것이 이놈 뱃속에서 나온 맹장이란 놈이라며 보여주었다.
그해 겨울방학은 아프다는 핑계로 방학숙제마저 설렁설렁해도 마음의 부담이 없었다.
문제는 옹색한 산길과 논둑길을 걸어 중학교를 오가는 거리가 6~7km정도 된다는 것이다.
산을 넘고 경우에 따라 작은 개울도 건너다니는 그 길이 애환이자 때로는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한 시간 반가량을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피곤해 그냥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거의 매일 그 남자아이는 일기를 쓰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날 못쓰고 넘어가면 이튼 날 한꺼번에 기록하기고 했다.
일상의 기록이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유형의 편지 형태로 자신과의 얘기를 이어갔다.
그 남자의 부친은 약골인 아들에게 영양제 같은 것을 사먹였으나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학교 성적은 수학을 제외하고 그런대로 유지해 갔다.
“우주 만물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저마다 만들어진 이유가 있고, 그 숙명과도 같은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내며 주어진 일을 하게 된다.”는 부친의 말은 그 남자 삶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의 부친은 거의 말이 없는 성격인데 어느 날 고창 장에 다녀오며 술이 건아해져 돌아 왔는데 그 상기된 얼굴로 그 남자를 앉혀놓고 넋두리처럼 하셨던 얘기다.
사실 그 당시에는 왜 이런 말을 하시는지, 또한 뭘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일기장에 적어놓고 1983년1월 입대를 앞두고 소지품을 정리하다 문제의 이 글귀를 다시 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폭압에 온 몸으로 저항하던 시절이었다.
쫓기다시피 입대를 하면서 다시 읽어 봤을 때 참으로 많은 생각의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었다.
군 생활에 잘 적응하여 건강한 모습으로 제대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아버지께 보여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글귀가 아니었더라면 체력적인 한계와 모순투성이의 군대조직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남자는 고등학교를 군산으로 진학하면서 고창을 떠나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한다기에 기대를 하고 진학했는데 생각과는 정 반대로 집단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체육교사가 기숙사 사감을 겸하고 있었는데 매우 강압적인 지도를 했으며 선배들의 폭력까지 더해지자 기숙사를 뛰쳐나와 하숙생활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로인해 그의 부친은 좀 더 많은 돈을 지출하게 되었기에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때로는 하숙비 대신 쌀 포대를 하숙집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 남자는 고교시절 그의 가족들이 어떤 고생을 하여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잘 알고 있기에 때때로 화가 났다.
힘들게 농사지어 돈으로 환산하는 그 과정도 그렇고, 자연재해에 대해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농사일의 대가는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활은 할 수 있었으나 삶의 질은 형편없었기에 늘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에 힘들어 했다.
이런 생각은 중학교시절에도 간혹 반발심을 일으켰다.
중학교 2학년 때 춘계수학여행을 가야 하는데 부친께 돈 얘기를 하는 것이 싫어 그만 여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여행 가는 날 생각을 같이한 다른 3명의 친구들과 고창읍내 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국수로 배를 채우고 한 녀석이 막걸리를 사서 모양성에 들어가 한 번 먹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소심한 그 남자아이도 그날은 별 생각 없이 동의했다.
막걸리는 농가의 일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료수 같은 술이었기에 별 거부반응이 없었다.
성 안은 사람들도 많지 않아 비교적 조용했다.
막걸리 한 병과 새우깡2봉지를 들고 성안 대나무밭에 들어가 네놈이 나란히 앉아 한 모금씩 병나발을 불었다.
한 두 모금씩 마셨지만 모두 얼굴이 달아올라 서로 상대방의 빨개진 얼굴을 바라보며 웃고 떠들어댔다.
당시에 성안에 고창여고가 있었는데 교정이 정말 아름답게 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지 차츰 흥이 가라앉아 갈 무렵 카메라를 든 어떤 남자분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다짜고짜 너희들 어느 학교에 다니기에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느냐며 꾸짖더니 명찰을 보고 학교에 연락해야겠다고 한다.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였는지 그 남자아이는 용기를 내어 자초지종을 제법 설득력 있게 얘기했다.
수학여행 경비를 내지 못해 여행을 못간 맘도 달랠 겸 성안 구경이나 하자고 의기투합해 왔음을 진지하게 전달했다.
그 아저씨는 고창여고 선생님이라 하셨는데 아이들의 얘길 듣고 맘이 쓰였는지 나란히 세워놓고 사진촬영을 해주었다.
“이것도 먼 훗날 좋은 추억이 될 것이며 너희들은 나를 만난 것이 행운인줄 알거다.” 하셨다.
며칠 후 사진이 동봉된 우편물이 학교에 도착했고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호출했다.
영문도 모르고 불려간 자리에서 담임은 사진을 꺼내 보이며 니들 어떻게 된 것이야?
왜 고창여고 선생님이 이런 사진을 보내왔냐며 묻는 질문에 회초리는 들어있지 않았다.
아마 사진과 함께 그날의 분위기를 몇 자 적어 동봉했을 것이다.
수학여행은 못 갔지만 그에 못지않은 좋은 추억을 만들었으니 사진 잘 간직 하렴.
중3이 되었을 때 학교에서 작은 기숙사를 만들어 25명가량을 합숙시켰는데 다행히 그 남자아이는 그 안에 들어가게 되면서 머나먼 통학 길에서 해방되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거나 밤에도 보충수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나 놀고 까부는 시간도 늘어났다.
군산의 고등학교로 입학시험을 보러갈 때 교감선생님이 인솔해 갔었는데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시험당일 학교로 출발해 걸어가는데 갑자기 교감선생님이 뛰어가 어떤 여성분의 길을 가로막고 제지한 후 학생들을 먼저 지나가게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험 보러가는 아이들 앞을 여자가 가로 질러가면 부정을 타 혹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음을 말이다.
만약, 그 사실을 여성분이 알았더라면 얼마나 기분 나빴을까....오늘날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고발당했을지 모른다.
1970년대 후반의 사회상 일부가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조심스럽게 고사장으로 가서였는지 전원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던 것이다.
1979년10월 그 남자의 고등학교에서 가을 소풍을 군산 어딘가로 가던 날이었다.
당시에는 교련복을 입고 고등학교에서도 군사훈련의 일부를 받던 시절이다.
박정희 정권이 북한의 김일성 정권과 정면으로 대결하던 시기였으니 누군가가 고안해 냈을 것이다.
남학생들은 집총훈련을 여학생들은 간호훈련을 했던 것이다.
소풍이란 것도 교련복을 입고 행군형태로 목적지까지 걸어가고 걸어오는 것이었는데 학교에 복귀할 무렵 박정희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묘한 장면 하나가 포착되었는데 기숙사 감독관이자 체육선생인 모 교사가 운동장 한 가운데서 털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던 모습이었다.
아이들에게 한없이 매섭기만 했던 그 선생님이 보여주는 행동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몇 일간 라디오에서는 지루한 음악만 흘러 나왔다.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나보다 했지만 그것은 정말 크나큰 오산이었다.
최고의 권좌에 오르기 위해 광주의 젊은 피를 재물로 삼은 전두환 정권이 탄생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군인권력이 끝나는 줄 알았던 국민들이 어쩌면 우매했는지 모른다.
광주의 저항은 그야말로 처참하게 깨졌다. 피로 얼룩진 목숨들이 죽어나가며 전두환 정권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광경이 전해지고 회자될 시 그 남자가 대학에 입학했으니 자연스럽게 불의에 항거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이념이나 정치적인 성향을 갖고 임하게 된 것은 아니고 다만, 부당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 남자의 학생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학년까지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학점은 형편없었다.
그리고 군대를 입대하게 되었고 27개월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복학하게 되었지만 캠퍼스의 풍경은 달라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분위기는 고조되어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이념동아리 외 단과대별로도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다.
이른바 간부들이 끌려가고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자 밀리고 밀려 어쩌다보니 그 남자가 조직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학생처장은 경찰과 한 통속이었기에 그 남자에 대한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경찰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순은 간단했다.
그 남자의 아버지가 농사짓는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면단위 지서장에게 명령이 하달되면 그 지서장은 마을을 찾아가 당신의 아들이 용공분자가 되어 이대로 가면 퇴학을 당하게 생겼다는 엄포를 놓으면 그만이었다.
어느 날 허름한 옷차림 그대로 학과장 사무실까지 동네 아저씨 한 분과 함께 그 남자의 부친이 택시를 타고 와 있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교내방송을 통해 그 남자를 불렀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겨 부친이 학과장실에 와 계신다는 내용이었기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남자는 그곳에서 정말 토악질이 날 정도의 못마땅한 광경을 목격했다.
학과장과 교내 사복경찰이 거만하게 앉아있고 그 남자의 부친과 동네아저씨는 무릎만 꿇지 않았지 엉거주춤 빌다시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는 그 광경에 무너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가 수모를 당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입학했을 때 한 학기 등록금정도의 성적장학금50만원을 받아 전달해 드리니 당시 그의 부친은 얼굴가득 미소가 번졌었다.
허접한 지방대학이었지만 자식으로 인해 기쁨을 누린다는 감동이 배어있는 표정이었다.
그 남자는 그 이후로 부친을 기쁘게 해드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가슴으로부터 전의를 상실하고 학생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서울의 큰누나 집으로 무작정 올라왔다.
동료나 후배들에게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잠적한 것이다.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든 말든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학과에서 같이 주도했던 친구의 아버지는 당시 도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핸드마이크를 들고 대열을 이끌고 있는 사진을 경찰이 채집해 그 친구의 아버지를 협박했었기에 그 역시 소극적으로 변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졸업식 만찬 때 학과장이 그 남자와 그의 친구를 호명하며 니들은 나 때문에 무사히 졸업하는 줄 알지?
정말 어이없는 말투였지만 종적을 감췄다 졸업식장에 나타난 자신이 부끄러워 반박도 못했다.
모순덩어리로 보였던 사회현상에 용기 있게 나섰던 젊은 날의 행동들이 무슨 소용 있었던가?
무정한 세월의 수레바퀴 아래로 모두 녹아들어 흔적도 없지만, 당시의 숱한 사건들이 수채화처럼 그의 가슴속에 남아 아른거린다.
1935년생 그 남자의 부친이 며칠 전 2023년6월초 고창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길 건너 새 고창 장례식장에 빈소를 마련해 상을 치렀다.
불과 일주일 전 병문안을 다녀가며 또 오겠다며 돌아섰는데 결국 말 한 마디 더 듣지 못하고 운명하시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제 그는 자신을 낳고 보살피며 한시도 맘 놓지 못하며 지켜주시던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까지 모두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남자의 부친은 선산에 모셔둔 조상들의 묘까지 모두 파묘해 화장한 다음 가족납골당을 만들어 놓았다.
이유는 명확하다. 객지에 나가있는 자식들이, 특히 그 남자가 제때 벌초하는 것도 힘들 것이고 그로인해 불란 이 생길 수 있으니 사전에 방지해 두는 차원이었다.
바로 그 가족 납골당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나란히 안치된 것이다.
지구상의 모래알보다 더 많다는 별들이 가득한 우주.
인간의 눈으로 별을 관찰하다 수명이 다해 눈을 감으면
한 사람의 우주도 소멸한다.
별들의 수명에 비하면 찰라 적인 삶의 시간.
사랑하는 부친이 명을 다해 이승을 떠나시니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데
영원한 이별의 아픔이 장대높이로 솟아올라
뚝뚝 슬픈 눈물방울들이 자꾸만 비집고 나온다.
지나온 시간의 추억들이 반짝이는 구슬처럼 빛나건만
장막 뒤로 별빛이 사위어 가니
가슴속 슬픔덩어리들이 벽돌이 되어 차곡차곡 쌓인다.
그 남자가 영정 사진 앞에 꿇어앉아 되 뇌인 감정이다.
인간은 후회를 먹고사는 동물이던가.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부친이 즐겨 드시던 선운사 길목에 있는 장어구이 집 한 번이라도 더 다녀왔더라면 회한이 덜 했을 것이다.
그 남자의 할머니와 양친 모두가 죽음의 과정을 피하지 못하고 멀리 멀리 사라져 갔기에 이제는 자신의 차례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삶의 궤적이 갈지자 모양으로 형편없지만 남은 혈육과 친구들 사이에서 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남기위해 노력해야 함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1961년 겨울 어느 날 전라북도 고창의 산하는 그 남자의 생이 시작할 수 있게 문을 열어 주었고 고향을 떠나 객지에 나와 있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넉넉히 품어주고 있다.
부모님을 여읜 그 남자는 이제 “고창”이라는 지명만 매스컴에 등장해도 울컥 눈시울이 붉어진다.
첫댓글 그에게서 고창은 그리움 돌아가야할 곳입니다.
그 남자의 고향
고창이 사람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간직되길
바란답니다.^^
그 남자의 어려운 한 시대를 잘 읽었습니다.
남의 인생을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어머니 중심으로 전기를 써놨습니다.
그 남자가 태어나 자란 고창
고창의 숨결이 그리웠나 봅니다.
[그 남자의 에피소드]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고창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겨~~
누구나 자신의 부모님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한 켠에 비상등마냥 깜빡이고 있을 것입니다.
읽어주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