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까락 / 임석재
윤기 흐르는 뽀얀 속살이 아름답다. 길쭉한 모양의 너비와 길이가 황금분할이다. 밥을 한 술 떠먹는다. 그냥 꼭꼭 씹어 쌀의 밍밍하고 슴슴한 맛을 느낀다. 이 쌀은 간척지 쌀이다. 갈수록 입이 가져서 곱고 차진 쌀을 선호하게 된다. 양념이 된 반찬과 섞이기 전에 미리 강밥의 맛을 천천히 음미해 본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올라온다. 단맛으로 변한 밥을 넘긴다. 목 넘김이 부드럽다.
밥은 쌀과 물과 불의 어울림이다. 예전 등산을 자주 다닐 때 산에서도 취사가 가능했다. 코펠에 밥을 안치면 물을 붓고 그 양을 가늠해야 한다. 나의 기준은 하나다. 손등에 물이 살짝 잠길 정도로 물을 붓는다. 지금도 간혹 압력밥솥에 안칠 때도 옆에 그려진 눈금보다 나의 손이 기준이다.
불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점점 강한 불로 하되 가장 중요한 것은 밥물이 끓인 후 뜸을 들이는 일이다. 불을 그대로 두면 바싹 타들어 가고 만다. 최대한 줄이고 약한 불로 뜸을 들여야 한다. 부뚜막에서는 불붙은 장작을 꺼내고 숯불로 뭉근하게 열을 가한다. 햐얀 김을 내며 넘친 밥물을 행주로 훔치면 무쇠솥은 반짝반짝 검은 윤기가 흐르고 밥 익은 고소한 냄새가 정지문 틈새로 안방까지 스며들곤 했다. 밥 익는 냄새만으로도 집안의 공기는 다숩고 행복해진다.
밥을 풀 때 주의해야 할 일은 까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쌀을 씻을 때 조리로 걸러내지만, 행여 사무쳐 들어간 까락은 밥을 풀 때 다시 한번 거른다. 밥을 귀히 여겨서 까락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까서 먹고 까끄라기만 뱉어냈다.
밥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있다. 토스터같이 벌겋게 달아오른 니크롬 열선이 금세 톡하고 식빵을 토해내는 성급함이 없다. 또 끓는 물에 쓸어 넣어 휘휘 젓다가 익혀 나오는 국수와는 그 깊은 맛이 다르다. 쌀이 원래 오랜 노동과 정성의 결과인 것은 상형 문자 미米를 보아도 잘 나타나 있다. 팔십팔번의 손길이 닿아야 비로소 한톨의 벼가 여문다. 쌀이 변하면 분糞이 되는 것도 쌀의 또 다른 모습이니 그리 혐오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정작 깨끗해야 할 것은 우리의 욕심과 어리석음에 눈먼 마음이 아닐까 싶다.
외조부는 본가와 떨어져 한길 건너 상구정上丘頂 초옥에 머무르셨다. 문중의 대소사나 유림儒林 행사 외에는 거의 바깥출입이 없으셨고, 우리 모두 집안의 어르신을 어려워했다. 매 끼니 이모가 바구니에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담아 머리에 이고 가서 상을 차려드렸다. 개다리소반 옆에는 빈 종지가 있었다. 생선 가시나 뼈, 이물질 등을 뱉는 그릇이다.
기억에 새로운 것은 밥멍덕이다. 십여 분 남짓 걸어가야 하는 사이에도 밥이 식지 않도록 밥멍덕을 푹 씌워서 가져갔다. 옛 여인들은 자투리 천 조각을 모아두었다가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꿰매서 밥멍덕을 만들었다. 주로 오방색을 고루 섞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냈다. 꼭지에 끈을 만들어 잡기 쉽게 하면서도 옆으로 늘어트려 둥근 원통에 살짝 변화를 주는 멋스러움을 나타냈다. 밑이 터지고 원통형으로 만든 밥멍덕은 평소에도 아랫목 이불속에서 밥의 온기를 보전했다. ‘찬밥 신세’라는 말이 있듯이 찬밥은 하찮은 사물로 인식해 극히 경계했다.
뽀얀 쌀밥을 바라보며 만일에 거기에 한 개의 까락이 섞여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본다. 까락은 껍질의 작은 털이 가시 모양으로 박혀 있어 밀어낼수록 안으로 파고든다. 원래 까락은 외부의 적을 막고 수분受粉을 돕고 가뭄을 견디는 역할을 해왔다. 벼의 야생성이다. 사람도 누구에게나 야성野性은 있다. 생존과 진화를 위해 꼭 필요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규율과 규범에 벗어나지 않는 절제가 필요하다. 나의 마음속에도 도정搗精되지 않은 까락이 분별없이 나올 때가 많다. 바쁜 일도 없으면서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증, 나는 하기 싫으면서도 남이 열심히 하면 괜히 일어나는 질투심, 아무 관계나 주고받음이 없는데도 싫어하고 가까이하지 않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떨치기 어려운 것은 상대의 허물뿐만 아니라 나의 잘못에 대한 자괴감을 마음에 담아두고 곱씹는 것이다. 마음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까락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도 까락은 있다. 무슨 일이든지 부정적인 생각과 말이 앞선다. 칭찬보다는 고집과 욕심이 남의 생각과 말을 밀어낸다. 여럿이 상의를 할 때는 꼭 자기 의견으로 결정되도록 한다. 오랜 세월 얽힌 지연과 학연으로 내칠 수도 없다. 사람들 속에 까끄라기다.
끓인 밥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있다. 대학교 1학년 생이었던 철없던 젊은 시절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중·고등학교 동기였던 친구 셋이서 뭉쳐 다녔다. 교정의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하는 일 없이 우체국 사거리를 기웃거리며 화교학교가 있던 다가동多佳洞까지 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냥 사람 구경이었다. 밥때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맞벌이로 부모가 집을 비우는 친구의 집으로 간다. 집안일을 돕느라고 와있는 점례는 으레 밥을 끓여 적지만 세 그릇으로 불려서 내놓았다. 허기진 배는 밥과 뽀얀 밥물까지 깨끗이 비워냈다. 가르마 탄 머리를 양갈래로 단정하게 묶은 점례의 앳된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마 자기 몫도 덜어서 끓였을 그녀의 마음이 아름답고 고맙다.
식욕은 살아가기 위한 동물적 본능이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락이다. 살아가는 모든 힘의 근원은 밥심이다. 이제 생활이 풍족하여 밥의 귀함을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분명히 생활의 여유는 많아졌지만, 눈을 조금만 돌리면 아직도 기아에 벗어나지 못한 가난한 나라와 사람이 많다. 그 옛날 쌀 한 톨이 아까워 까락도 까먹고 쉰밥도 물에 씻어 먹던 그날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뜨거운 햇볕이 비추고 바람이 불어온다. 때맞추어 비가 내린다. 논에 엎드려 맨손으로 땅을 훑으며 지심을 매는 농부의 땀방울이 벼포기 속으로 떨어진다. 밥 한 그릇에 빛과 비와 땀이 서리서리 엉켜 있음을 들여다본다.
첫댓글
까락 같은 존재도 삶의 일부분이니 그 자체가 소중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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