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잔에 흰 눈을 담는다
파릉巴陵이라는 선사가 있었다. 그에게 한 스님이 찾아와서
"선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파릉은 짤막하게
"은잔에 눈을 담는다(은완리성설銀椀裏盛雪)"라고 대답했다.
흰 은잔과 흰 눈은 전혀 다르다.
그러면서도 둘 다 흰색이기 때문에 하나로 보이기도 한다.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선종의 본질을 말한다. 또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도 있다.
은은 흰색이다. 한 점 티 없이 곱게 닦은 은잔에 청결한 흰 눈을
수북하게 담는다. 이런 때의 은잔이나 눈은 청정淸淨을 상징한다.
그것은 부정不淨에 대립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은잔에 눈을 담는다는 것은 부정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그것은 참다운 청정이 아니다. 그래서 『벽암록』의
원오선사圓悟禪師는 '칠화팔열七花八裂'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산산조각을 내라는 것으로,
곧 부정에 대립되는 청정이라는 개념마저 없애버리라는 뜻이다.
흰색을 부정하기 위해 검정색이나 다른 색을 쓴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인식에서 나온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흰색으로 흰색을 부정한다면, 다시 말해 부정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바로 파릉의 물음이자 대답이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백마입노화白馬入盧化'라는 말이 『벽암록』에 나온다.
갈꽃은 흰 꽃이다. 그런 흰 꽃더미 속으로
흰 말이 들어간다면 같은 흰색이라서 분간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흰 갈꽃이나 흰 말은 같다.
그러나 말은 어디가지나 말이며, 꽃은 어디가지나 꽃이므로 전혀 같지 않다.
이처럼 같으면서도 같지 않고, 같지 않으면서도 같은 것이 인간이요,
세상이다. 나를 닮은 사람은 많다.
그렇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나일 뿐, 결코 남과 같아질 수는 없다.
나는 오로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명월장로明月藏鷺'라는 말고 있다. 밝은 달 속에 백로를 감춘다는 뜻이다.
나의 선어 99 홍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