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김'시대의 '명암'과 "종언"
'거산'이란 호가 말해주듯 민주화 거목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어제 밤 서거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게
양김 시대를 이끌며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양김 시대는 막을 내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향년 88세
(이후 존칭 생략)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는
양김 시대를 빼고는
설명이 안될 정도로
양김은 우리 옆에 깊숙히 자리잡았다
양김, 잘 알려진 대로 김영삼과
김대중을 일컫는 말이다
김대중이 6년전 먼저 세상을 떠나고
김영삼이 뒤를 따랐다
그러나 정계에 입문한 것은
김영삼이 한발 앞섰다
김영삼은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1년경
장택상 국회부의장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 딪는다
그후 1954년 만 26세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헌정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란
새로운 기록을 남긴다.
자유당 이승만 정부가 전례가 없는
3선 개헌을 하는 것을 보고
장기집권의 길을 가고 있다고 판단한
김영삼은 집권당인 자유당을 탈당하고
야당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후 국회의원 당선되어 야당 대변인
으로 의정활동을 하던중
1961년 5.16. 군사 구테타를 맞았고
군사정부는 여러차례 김영삼에게 군정
참여를 요청하였으나
김영삼은 이를 끝내 거절하고만다
1963년 군정 연장 반대 집회를 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23일간 수감 되기도
하였다
5.16 군사구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7년
숙명의 라이벌인 김대중 의원
과 신민당 원내총무(현 원내대표)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 끝에
김영삼 의원은 김대중을 이기고
원내총무에 당선됨으로써
당내 지지 기반을 다질수 있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다
그후 1969년 박정희가 이승만 처럼
3선 개헌을 추진하자
김대중 의원은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하려고 총통제를 기획하고 있다고
하였고
김영삼도 3선 개헌은 장기집권의
음모라며 반대투쟁을 하다가
초산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하기전, 군사
구테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일수교 회담을 서두른다
그 이유는 경제개발을 할려고 보니
자금이 필요한데 당시 재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배상과 원조를 받아내면
그 자금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여 경제의 고속 성장을 이루어
국민들을 가난에서 해방시켜
잘살게 만들면
민주적 절차 없이 탄생한 박정희 정권의
절차적 불법성이 덮혀져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다
한일수교 회담 과정에서 야당과
학생들이 일본에게 저자세 외교니
굴욕외교니 반대가 많았지만
결국은 한일수교 기본조약을 맺고
청구권 자금과 유상 원조를 받아내
그 자금으로 경제개발 자금에 투입
하여 고속도로 등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하고
포항제철 건설 등 중화학공업 정책
을 추진한 결과,
공업화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여
1,2차 경제개발의 성공이 확실시 되자,
박정희는 그 힘으로 3선 개헌을 추진
한다.
박정희가 내세운 명분은 1,2차 경제
개발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는데
자신에게 한번더 일할 기회를 주어
마무리를 할수있게 해 달라는 취지였다
그 말은 국민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어째튼 야당은 물론 여당인 공화당 내
에서 조차 반대하고 대규모 학생시위가
있었음에도
1969년 3선개헌은 박정희가 의도했던
데로 개헌이 이루어졌다
3선 개헌이 통과되자 1971년 박정희는
세번째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되고
야당에서는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당내 경선에 뛰어들고
김대중과 이철승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가 되기 위해 경선에 뛰어들어 3파전이
되었다
1차 투표결과 김영삼이 1위, 김대중이
2위, 이철승이 3위로 과반수 득표자가
없자
결선투표를 하였으나 결선투표 전에 3위
인 이철승이 경선을 포기하면서 김대중
을 지지하였고,
그 결과, 이철승의 지지표가 김대중에게
몰리는 바람에 대번에 전세가 역전되어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되어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2강 구도를 형성하며 치열하게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야당 대통령 후보 선거과정에서 김영삼
은 김대중에게 역전패 당한 쓰라린 패배
를 당했지만
이를 깨끗하게 승복하고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위하여 전국을 돌아다니
며 김대중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하지만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제 7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 선거 개표결과 '여촌 야도' 현상과
영남과 호남의 표가 여야로 극명하게 갈렸
다
만일 그때 김영삼이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더라면 김영삼이 영남사람이기 때문
에 영남표를 잠식하고 김대중의 지지로
호남표도 휩쓸어
박정희가 3선에 실패하고 김영삼이 대통
령에 당선되었을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
이었다
어쨋튼 승리의 여신은 박정희에게
미소를 보였다
박정희는 3선 개헌의 성공으로 제 7대
대통령에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자
자신이 개정한 헌법으로는 3선이 마지
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장기집권의 길을
열기 위하여
김대중과 김영삼 후보가 예견했던 대로
연임에 제한이 없는 장기집권의 길을
열기 위하여
1972년 10월 유신이란 초헌법적인
비상조치를 발표하고(사실상 구테타)
비상계엄령으로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
민간 주요 시설에 군을 투입했으며,
헌법효력을 정지시키면서 국회를 해산
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고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유신헌법은 민주주의 토착화와 한국적
민주주의 실현이란 말로 포장은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구 집권을 위한 헌법으로
개정한 것이었다
유신헌법 내용을 보면 장기집권의 음모가
녹아 있는데, 주된 내용을 보면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던 대통령 직선제
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 제도를
만들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장충체육관
에 모여 대통령을 선출할수 있도록 하였
는데
유신헌법에 의해 처음 치러진 제 8대
대통령선거(1972.12.23)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혼자 나서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전체 대의원 2,359명
이 참석한 가운데 2357명이 찬성을 하여
(반대는 한표도 없고 무효 2표가 있었음)
찬성율 99.9%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
되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렸을 뿐만 아니라 3선 개헌으로
대통령을 세번까지 할수 있도록 한것도
모자라서
대통령을 몇번 할수 있다는 조항 자체를
폐지시켜 회수에 제한 없이 무제한적으로
대통령을 할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당시 10월 유신 선포와 함께 김영삼 총재를
가택 연금시키고 국회를 해산함과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초헌법적인
조치들이 이따랐다
국내에서는 정치활동이 금지되자 김대중
은 외국으로 망명길에 오르고
외국에서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미국이나 일본 등 세계각국을 상대로
유신 독재의 부당성을 알린다
그러자 1973년 박정희의 승인하에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의 지시로
(미국무부 비밀전문 극비문서에 의함)
일본에 있던 김대중을 납치하는 이른바
김대중씨 납치사건이 발생하였고
김영삼은 1974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어
46세의 나이로 최연소 야당 총재가 되었다
1979년 두번째로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
지만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의원직에서 제명
당하고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김영삼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의원직을
제명당하기 전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회유를
하자,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하였고
1979년 8월 YH 사건 직후, 김영삼은
앞날을 예견한듯 거침없이
'이 정권은 피를 보고 머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
이다.'고 외쳤으며
김영삼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의원직을
박탈(제명)당한후인 1979년 10월
앞날을 예견한듯 '아무리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고 외쳤다
그 결과 부마항쟁이 촉발되고 10.26사태로
최 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
로 박정희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979.10.26.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의 총탄
으로 서거하자
이른바 3김씨가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으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12.12사태
를 일으켜 민주화의 봄은 또다시 안개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 이듬해 봄에 전국 각 대학교에서 안개
정국의 근원지인 신군부에 대한 반대시위
가 일어나고
산업현장에서는 노조시위가 봇물처럼
터지고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에 있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기회라고 판단하고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발표하고
김영삼은 가택연금하고 김대중, 김종필
을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를 체포
했다
김영삼은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전두환
을 향해 '날 감금할수는 있어, 힘으로'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내 양심은 전두환이 뺏지를 못해'
라는 말을 남겼다
1980.5.18.부터 광주에서 정치탄압에
항의하는 광주민주화운동(당시는 광주
사태)이 발생하자
신군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동자로
김대중을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그 이듬해 1월 대법원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으나, 최후 진술에서
김대중은 '이 땅에 민주화가 실현되면
먼저 죽은 나를 위해 정치보복이 없기
를 바란다.'고 한 진술이 국제사회에
알려지자
큰 반향을 일으켜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레이건 행정부,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
등 미국 의회는 물론
당시 교황인 요한 바오르 2세, 서독의
빌리 브란트 사민당 총재(후에 총리로
동방정책을 추진하여 독일 통일의 초석
을 닦은 인물)를 비롯한
세계 각국 지도자와 종교인, 인권단체
로부터 압력이 거세지자
김대중의 형량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
로 다시 20년 형으로 감형된후
주변 사람들을 더 이상 압박하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김대중은 망명을 받아
들여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여 미국으로
출국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김종필은 부정축재자로 낙인찍어
정치활동을 규제한후
실권이 없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을 사임시킨후 전두환이 유신헌법에
의해 장충체육관에서 제 11대 대통령
으로 선출된다
(이때도 전두환이 혼자 입후보 한후
찬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였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 재적 대의원 2,540
명중 2,525명이 출석한 가운데 2,524
명의 찬성을 얻어 당선됨)
그후 유신헌법을 제 5공화국 헌법으로
개정하여 선거인단에 의해
임기 7년의 대통령 단임제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제 5공화국 전두환 정부가 들어
서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영삼은 1981년 민주산악회
를 만들어 민주진영 인사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고
1983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 김영삼은 23일간
의 단식투쟁에 돌입하였고
1984년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약칭 민추협)
를 결성하여 김대중, 김영삼이 공동의장을
맡아 신한민주당을 창당한후
19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고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000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10. 항쟁을 거쳐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
하자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단일화에 실패하여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어부지리로 대통
령에 당선됨으로서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김영삼은 김대중이 있는한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1990년 민정당 노태우, 민주당 김영삼
공화당 김종필과 함께 3당 합당이란
승부수를 띄운다
그 과정에서 김대중과 노무현 등 민주
인사로부터 야합이란 비난을 받았지만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
에 들어가야 한다며 이를 일축하였다
그 결과 김영삼은 민자당인 여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민주당 김대중,
통일국민당 정주영 등과 겨루어
1992년 제 1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
김영삼은 제 14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전격적으로 공개
하고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하는 한편
1993년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1993년 5월 군부내의 사조직인 하나회
를 해체하여 군사 구테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하나회를 숙정하면서 군부가 반발하자
김영삼은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수
밖에 없다'며 이를 일축하였다
같은해 8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여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함과 동시에
부패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노력을
하였다
1995년에는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총재가 되었고
부동산 실명제를 실시하여 부동산
거래를 투명하게 만들었고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던 일제 식민지 지배
의 총본산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군사 구테타를 일으키고 부정축재를
한 혐의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임기말 한보 사태로 측근들과 차남
김현철이 줄줄이 구속되고
단군이래 처음으로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여 IMF 지배체제로 들어가자
임기초반에 90%대의 국민 지지도가
곤두박질 치기 시작하여
임기말에는 한자리 숫자인 8%까지
떨어지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국민지지도가 바닥에 이른
상태에서 김영삼은 제 15대 대통령
인 김대중에게 1998.2.25. 정권을
이양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상도동
으로 돌아가 전직 대통령이 되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군정을 종식시킨
최초의 문민 대통령으로서
김영삼은 제 14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전격적으로 공개
하고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한 후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부정부패
를 근절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제를 실시
하여 투명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
려고 노력하였고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일제의
잔재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군사 구테타를 일으키고 부정축재를
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는 등
대한민국의 정의의 실현과 역사 바로
세우기, 금융실명제 등으로 건강한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등 많은 업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 말기에
터진 한보사태로 측근들과 차남 김현철
이 구속되고
이어서 단군이래 처음이라는 IMF 사태
(정확한 표현은 IMF 구제 금융신청로
IMF의 경제지배를 받음)를 불러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되고 경제
가 어렵게 되자, 그토록 뛰어난 업적도
순식간에 덮혀져 무거운 발걸음으로
상도동을 향해 돌아갔다는 점이 너무나
아쉽다
물론 IMF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고
대통령 혼자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어째튼 김영삼 정부 말기에 터졌고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큰 권력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나랏일에 대해 무한 책임과 최종 책임
을 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받아들여
야 할것이다
YS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소유하였고
간결하고 핵심을 찌르는 화법과
거침없는 화법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며
승부사적 기질을 가지고 특유의 돌파력과
정공법으로 난관을 극복해온 민주적 지도자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하는 과정에서는
협력자이었고
민주화로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지자
경쟁자로 바뀌었으며
IMF 사태가 일어나자 YS는 자신이 혼자
독박을 썼다고 생각했는지
김대중 전 대통령 임기중에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독설을 퍼붙기도 했으나
임기후 김대중이 병원에 입원중에는
문병을 가서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떠나기전 자신의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
하고,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통합과
화합'이란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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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올리려고 노력하였고
그 토대위에서 나의 주관적인 견해를
덧붙였음을 밝힌다
2015. 11.23. 늦은 밤 연수동 집에서
지평 박 충진 올림
첫댓글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양김 시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디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우리 헌정사에 남긴
족적은 역사가에 맡기면서
우선 옷깃을 여미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견 보기에는
부잣집 귀공자같이 생겼지만
그가 걸어온 정치역정에서 행적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을 위해 옳다고 판단되면
뛰어난 정치적인 감각으로 용기있게
무서운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돌파해
나가는 모습은
우리 정치인 중에 그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신념이 강한 지도자라 하겠다
일례로 김영삼은 군사구테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민주화를 완성하기 위하여
하나회를 숙정하면서 군부가 반발하자
김영삼은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수
밖에 없다'는 거침없는 말을 남겼다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 임기중에도 시중에
'YS는 아무도 못말려'라는 책자가 나올정도로
신념이 강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영결식엔 흰눈도 흩날리네요~^^
또다른 출발이 시작되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