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도 볼 건 다 보며 산다
- 응봉, 살곶이다리, 서울숲
* 월간시 125호(2024. 6)
차용국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강변에 남산에서 툭 떨어져 나온 봉우리 하나가 있다. 비록 크기는 작고 거친 바위가 전부인 봉우리지만 정상인 응봉산정(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은 빼어나서 어느 산봉우리와 견주어도 손색없다. 이른 봄이면 중랑천 건너편,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서울숲에서 연초록 새순이 기운차게 피어나고, 응봉은 서울숲과 한강 건너편 강남의 크고 작은 빌딩을 바라보며 개나리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낸다. 응봉은 비록 덩치가 작고 키가 작아도 세상사 볼 건 다 보며 야무지게 산다.
사람들은 응봉을 ‘개나리산’이라 부른다. 사실 응봉은 암봉이기에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지 못한다. 그 열악한 생육 조건이 개나리에게는 호기가 되었다. 개나리는 다른 나무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여 산의 주인이 되었다.
개나리는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사실 응봉은 바위 땅이지만 한강과 중랑천이 앞을 탁 트고 흘러서 일출의 햇빛과 중천의 햇볕이 오래도록 비치는 양지바른 곳이다. 햇빛을 좋아하는 응봉의 개나리는 그 양지에서 2~3미터 남짓 자라서 숲을 이루고 길을 만들어 사람을 부른다. 이른 봄이 오면, 응봉은 사방으로 개나리꽃을 피우고 길을 열어 개나리축제를 연다. 개나리꽃이 필 때 응봉은 마냥 즐겁다. 세상사 어느 곳도 쓸모없는 곳 없고, 어디에도 희망 없는 곳 없다. 개나리꽃 피는 응봉은 그 체득한 진실의 기쁨을 보여주고 있다.
개나리꽃의 꽃말은 ‘희망과 기대’라고 한다. 새봄을 알리는 작지만 다부진 노란 꽃에 걸맞은 작명일 듯싶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새를 무척 좋아하는 여왕이 있었다. 여왕은 새만 무척 좋아해서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온통 새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어느 날 한 노인이 여왕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귀한 새를 가지고 찾아왔다. 여왕은 매우 기뻐하며 그 새에 빠져 살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새는 모습이 흉하게 변해갔다. 나랏일을 등한시하는 여왕과 그녀에게 아첨하며 탐욕에 눈이 먼 대신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노인이 까마귀에 색칠을 해서 여왕을 속였던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여왕은 상심한 나머지 죽고 말았는데, 여왕의 무덤에서 금빛 개나리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개나리꽃의 꽃말이 전하는 ‘희망과 기대’란 자연과 사람을 위한 균형과 조화로움이 어우러진 희망과 기대일 듯싶다.
한강과 중랑천이 그려낸 수려한 풍경을 어찌 사람들이 보고 눈으로 즐기기만 하였겠는가? 옛사람들은 이곳 응봉 일대에 응방을 두었다. 응방은 조선 시대에 사냥에 쓸 매를 사육하는 관청이다. 조선 태종과 세종도 이곳에 행차하여 매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00여 년간 조선의 왕들은 이곳에서 무려 151회에 달하는 매사냥을 했다고 전해진다. 대궐과 가까운 곳이기도 했지만, 왕실의 관심과 사랑 또한 적지 않았을 듯하다. 이 이야기는 이 봉우리가 응봉으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응봉 밑에 금호동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주철을 녹여 무쇠솥이나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이 많았다. 그래서 무수막, 무쇠막 또는 무시막이라 부르기도 했고, 수철리라고도 불렀다. 지금의 금호동金湖洞은 수철리가 한자화된 이름이다. 수철리의 '철'자를 한자로 바꿔서 '금金'이라 쓰고, '수'자를 '호湖'라 썼다. 서울의 많은 동네 이름이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릴 수 있고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 민중의 질펀한 삶의 문화가 마을 이름에 남아있으니, 편리한 대로 도식화해서 작명하는 것은 숙고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지금은 빽빽한 아파트촌 뒷길, 강둑이 교차하는 길가에서 한 사내가 홀로 무쇠망치를 들고 쓸쓸히 지키고 있다. 지금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동상에 관심이 없다.
오월에 중랑천 변에 들어서면, 금계국 노란 꽃잎이 훈풍에 한들거리는데, 그 몸짓은 급하지 않고 각지지 않아서 오래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다리 건너 한 꼭지 돌아선 두물머리 끝 너머 푸른 한강은 노란빛이 스며들어 영롱하게 반짝인다.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햇빛이 반짝이는 윤슬의 물결은 맑고 속이 깊어서 내 흐리고 찌든 눈으로는 다 가늠할 수 없다.
살곶이다리 앞에서 잠시 멈추어 쉰다. 이 다리는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곳에 축성한 옛날 돌다리다. 지금의 행당동과 성수동을 연결하는 다리인데, 토목공학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세종 때 공사를 시작했지만 중랑천 강폭이 넓어서 교기橋基만 세우고 중지했다가 성종 때 다시 공사해 완성했다. 기둥을 네 줄로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린 투박한 돌다리였지만 말과 수레를 끌고 건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길목의 다리였다.
그런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지으면서 이 다리의 석재를 가져다 썼다. 그는 어찌하여 만백성이 건너다니는 다리를 뜯어 궁궐 석재로 썼단 말인가. 백성의 길을 허물어 왕실의 궁을 만든 닫힌 세상의 고립된 신념이 무섭고 놀랍다. 국가건 기업이건 지도자가 국민과 조직구성원을 깔보고,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근 채 권력 유지에 골몰할 때 그 조직은 망한다. 대원군 때 버려진 다리는 현대에 와서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을 허물어 석재를 다시 가져와 세울 수도 없는 일이니, 지금 살곶이다리는 반은 옛 다리요, 반은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로 남아있다.
오월의 햇살처럼 서울숲은 젊어서 신록의 기운이 넘쳐난다. 꽃은 벌과 나비를 부르고 사람을 호객한다. ‘꿀벌정원’의 메리골드는 순결했고, 크고 작은 연못에서 노랑꽃창포는 우아한 마음의 본성을 살포시 드러낸다. ‘갤러리정원’의 넝쿨장미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타올랐고, 콘크리트 폐건물 기둥에 착 달라붙어 기어이 기어오르는 푸른 담쟁이의 거친 숨결은 눈물겨웠다.
살면서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그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돌아보면 무지하고 심약한 두려움을 그럴 듯이 포장한 부끄러운 시절의 넋두리였다. 어쩌면 홀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고 걸을 수 없는 불안과 허세의 몸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진정 내게 부족했던 것은, 내 안에 홀로 걸어갈 용기와 의지를 다지는 일이었는데, 그것을 밖에서 찾고 채우려 했으니, 내 안에 빈터는 늘 채워지지 않는 바람으로 허허로웠다.
고독과 우울로 치장된 관계의 소음 대로를 벗어나 홀로 걷는 길은 자유로웠다. 홀로 걷는 길은 여백이 넓어서 시야와 생각을 방해할만한 장해물이 없고, 그 여백에 뿌릴 언어의 물감을 고르는 수고와 그것으로 채색할 그림의 구도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숲의 나무와 나뭇잎과 꽃은 스스로 제자리에서 제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것으로 숲 전체를 하나의 풍경에 끌어들여서 생동하는 화폭을 펼치면, 오월의 햇살은 그 초록의 나뭇잎에 부딪혀 튕겨 나가면서 빛났고, 나뭇잎과 꽃잎 사이사이로 스며들면서 음양의 보색을 배합하면서 은근했다.
해가 구름과 구름을 건너뛰며 숨바꼭질한다. 흐린 하늘에서 흐린 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분다. 비가 올려나? 봄비! 봄비가 봄꽃만큼 반가운 것은 비 지나간 서울의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장군이 물러난 자리에 연례행사처럼 온갖 심통 다 부리며 달라붙는 미세먼지에 서울 하늘은 대항할만한 마땅한 묘책도 없이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가?
어서 오시게 귀한 손님이여! 오신 김에 실컷 쏟아붓고 가시게나. 비온 후 맑은 서울의 속살을 볼 수 있겠지. 하늘이 맑아지면 덩달아 꼴사나운 작자들이 토해내는 정치적 비말과 고물가에 찌든 경제적 어려움에 상처받은 울분과 심란해진 우리네 마음도 밝아지겠지.
갑자기 진눈깨비가 우두두둑 때리고 있지만, 이미 중랑천을 넘어온 봄빛을 막을 수는 없다. 성질 급한 이름 모를 꽃들과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우리네 삶도 봄꽃처럼 활짝 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