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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13일 일요일 아헤스 - 부르고스 (23km)
아침 하늘에 취했다.
저녁놀 아침비, 아침놀 저녁비라는데..
구름을 쥐면 포도주가 비처럼 내릴듯한 빛깔이었다.
하늘에서 포도주가 내린다면.. 상상만으로도 흠뻑 취한다.
며칠 비가 오지 않았었는데 비가 와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알베르게를 나와 어제 축구경기를 봤던 바르에 가서 커피와 빵을 먹었다.
어제 무니씨팔 알베르게에 머물렀던 단체는 순례자도 아니었나보다.
아침을 먹고 나오는데 관광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알베르게에서 일반 관광객도 재워주나?..
바르에서 나오는데 홀리안과 헤수스가 나타났다.
그러고보니 어제 숙소에서도 바르에서도 보지도 못했었는데..
둘은 어제 버스로 부르고스에 가서 그곳에서 쇼핑도 하고
잠도 그곳에서 자고 아침버스를 타고 다시 왔다고 한다.
신발도 커플룩으로 같은 모델을 샀다고, 가볍고 좋다고 자랑질이다.
혹시.. UFO?
포도줏빛 구름이 UFO 모양으로 변해가며 따라왔다.
팽이처럼 생긴 구름이 신기했다.
부르고스까지 20km 가 조금 넘으니, 버스로는 20분에서 30분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는지.
매일 걷기만 하다보니 20km 가 넘으면 자연스레 하루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버스만 잠깐 타면 쉽게 갔다올수 있는 거리임에도 버스셔틀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겨우 전직장의 출근거리밖에 되지 않는것을.
반면에 산티아고까지의 수백km 의 거리는 짧게만 느껴진다.
브루고스까지의 구간 일부는 도로를 따라 걷는 지루한 구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이용한다고 해서,
잠깐 뤼노와도 고민을 했다.
스페인버스도 구경해 볼겸.. 하지만 결국 걷기로 했다. 아껴야지.
잠시 걸으니 선사시대유적 같은 표지가 나왔다.
멀리 유적지로 보이는 곳으로부터 스피커를 통해 투어를 알리는 듯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아침에 보았던 관광버스도 보이고..
얼마 걷다보니,
포도주빛 구름에 취했는지, UFO에 홀렸는지, 아니면 선사시대로 잠시 빠졌었나..
화살표를 잃어버렸다.
(지금 보니 위의 사진에서 전봇대에 노란 화살표가 보인다.
저 화살표를 따라 좌측으로 빠졌어야 했나본데, 우리는 그냥 도로를 따라 계속 걸었었다.)
어디서부터 까미노를 벗어난지 감도 못잡겠고..
마을에서 한참을 서성대다가 겨우 사람을 만나 길을 물을 수 있었다.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가기는 싫었고, 작은 동산을 넘어가기로 했다.
마을을 벗어나 오르막길로 들어서는데 개 한마리가 따라나섰다.
처음에는 그냥 조금 따라오다 말겠거니 했는데,
마을을 벗어나기까지 계속 따라왔다.
더 따라오면 안될것 같아 돌려보내려고 손짓을 해봤지만 못 알아 들었다.
돌을 던져 쫓기로 했다.
돌을 던지니 달려가 던진 돌을 물고왔다.
'훈련은 잘 돼 있네..'
돌을 물고 계속 따라왔다.
다시 좀 더 큰 돌멩이를 주워 던졌더니 또 달려가 물고 따라왔다.
물고 오는 것 까지는 좋은데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고 그 무거운 돌을 물고 계속 따라왔다.
'훈련이 덜 돼 있네..'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떼어놓으려고 멀리 돌을 던져보았는데.. 결국 돌을 찾아 물고 다시 따라왔다.
이자식이..
최후의 방법.
개에 대고 말했다.
"아임 프럼 코리아, 유노우? 아이 윌 이트 유!!!"
뤼노도 웃으며 거들었다.
“댓츠 라이트. 히윌 킬 유”
거들려면 스페인어로 거들것이지, 영어라 그런지 씨알도 안먹혔다.
나이든 개는 꼬리를 흔들 힘조차 없는지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전화번호가 새겨진 목걸이를 하고 있었기에 다음 마을까지 가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가볍고 작은 돌을 던져주었다.
길잃은 사람이 길잃은 개와 함께 길을 찾아 걸었다.
재미있다.
개를 키워본적은 없었다, 먹어보기는 했지만.
잠시 개와 함께 걸어보니 홀로걸을 때와도 다르고, 뤼노와 둘이 걸으때와는 또 다르다.
외롭지도 않고 재미도 있으며 든든하기까지 했다.
개를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의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개와 함께 걷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다.
말이 통하지는 않지만(어차피 사람과도 안통함) 서로 의지가 된다는 교감을 느꼈다.
길도 모르면서 개는 우리를 앞서가다가 우리를 기다리기도 하고,
뒤쳐져 멀어지면 다시 따라오기도 하며 같이 걸었다.
동산위에 올라가니 길이 보였고, 멀리 홀리안과 헤수스가 보였고 마을도 보였다.
그래, 마을까지만 가면 주인을 찾아줄 수 있겠구나.
위의 유명한 '벽화'가 있는 마을이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내마음을 잘 표현해주었는지..
반대로 집에서 편하게 쉬고 있으면 무거운 배낭을 짊어졌던 내가 그리워진다.
그래서 왔다리 갔다리 한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이게 무슨 사서고생인가..’ 했다가,
무거운 배낭을 맬지언정 까미노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헤수스 마을주민 홀리안(개뒤에) 뤼노
마을사람의 도움으로 전화를 걸자 5분도 안되어 개주인이 찾아왔다.
종종 벌어지는 일인지,
개주인은 그렇게 반가워하지는 않았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금방 개를 차에 태우고 떠났다.
우리만의 이름이라도 지어 불러줄걸..
지금 이름을 지어준다면 '해피'
잠시동안이나마 함께 걸으며 또다른 행복감을 맛보았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하고 따뜻한 개같은 행복감.
해피와 이별을 하고 마을을 떠나 1시간여를 걸어 작은 놀이터에 도착했다.
뤼노와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곧이어 홀리안과 헤수스가 도착해 점심을 만들어 먹었다.
홀리안 헤수스 뤼노 나
미끄럼틀도 타고 오도바이도 타고..
헤수스가 제일 신나고 재미있어 했다.
어느덧 부르고스에 접어들었다.
초입에 들어서자 클래식카들이 지나간다.
아마 클래식카 동호회의 번개가 있었나보다.
우리들에게 손도 흔들어준다.
유럽에 와서보니 쎄아트나 씨트로앵같은,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브랜드의 자동차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올드카까지 보게되니 눈이 호강을 한다.
현대, 기아자동차도 생각보다 많았다.
뤼노가 우리를 환영하는 카퍼레이드라고 했다.
헤수스 뤼노
부르고스는 아주 큰 도시였다.
도시초입부터 중심지까지 걷는데도 한참 걸렸다.
그래서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구나.
시내에 접어들자 휘노가 현금 인출기에서 돈을 뽑았다.
좋겠다.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뽑아쓰니.
반면에 나는 여행경비를 몽땅 현금으로 가지고 다녔다.
인출수수료도 아까웠고, 또 현금인출기의 유무와 사용방법에 대해서도 몰라
경비 전액을 유로화로 환전해서 그냥 목걸이 지갑에 넣고 다녔던 것이다.
그나마 조금 무뎌져서 다행이지 처음에는 여간 신경이 많이 쓰인게 아니었다.
부르고스 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베르게는 바로 성당 근처에 있었다.
씨그릿과 오바츠가 먼저 와 있었다.
우리는 부르고스의 시내를 관통해서 걸어왔지만,
씨그릿과 오바츠는 강을 따라난 길을 걸었다면서 아주 예뻤다고 했다.
아주 현대적으로 꾸며진 무니시팔알베르게이다.
뤼노에게 '잃어버린 일기장'을 찾을 수 있도록 호스피탈레로에게 물어봐달라고 했다.
혹시 숙소간에 연락망이라던가 택배같은게 있는지도 포함해서.
그러나 호스피탈레로는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다.
씨그릿도 ' 히 저스트 씻트 데어' 라며
모두들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는 사람' 이라며 불만이었다.
일기장은 포기하고 짐을 풀고 부르고스를 둘러보러 나왔다.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축물이다.
성당은 원래 입장료를 받는 모양이었지만,
오늘은 일요일이라 7시에 미사가 있으므로 그때는 무료라고 뤼노가 알려주었다.
큰 도시이지만 현대식 건물보다 오래된 건물이 많은 게 참 멋진 도시다.
어딘가에 순례자상이 있다며 찾아다니다가 스페인그룹과 만났다.
오늘 하루종일 보지 못하다가 알베르게에서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만큼 반가웠다.
기념사진 한방.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야경도 근사했다.
아마 씨그릿과 오바츠가 따라 걸어왔다는 그 강일 것이다.
부르고스 시내를 거닐고 있는데 한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며 가두행진을 하고 있었다.
뭔가 했더니 경제적 문제로 인한 데모라고 뤼노가 설명해줬다.
이번 까미노에 카메라를 안가지고온 뤼노는 '씨드'상 사진을 꼭 보내 달라고 했다.
유명한 장군같았는데 동상의 위용이 대단했다.
망토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진격하는 모습이 역동적이었다.
대충 부르고스시내를 둘러보고 성당으로 향했다.
7시가 다되어 성당으로 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뤼노의 미사는 진지했다.
뤼노는 미사 후반부의 포도주와 전병(?)을 먹는 의식까지 참석했다.
나는 미사를 핑계로 성당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정말 화려하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미사에 임하고 있어서 조금 찔리기는 했다.
그저 관광객들로 붐비는 도시로 여겼는데,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보니 또 다른 느낌이다.
왠일로 뤼노가 오늘은 선뜻 저녁을 사먹자고 했다.
골목마다 식당이 즐비했는데, 밖에 놓인 메뉴판을 보고 적당한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TV에서는 축구경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식당 안쪽의 한가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뤼노가 "유아 마이 게스트!" 라고 했다.
“?”
내가 자기 손님이라니..
이게 영어시간에 배웠던 표현같은데..
뭔소린가 하고 잠깐 궁금해하다가 여종업원이 와서 메뉴판을 펼쳐 보였다.
이렇게 먹는것도 처음이지만
스페인어를 모르니 뤼노가 일일이 설명을 해주고 대신 주문을 했다.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던 차에 마늘이 들어간 스프가 있다길래
그걸 전채로 주문하고 메인으로는 닭고기 스테이크를 골랐다.
뤼노는 아스파라거스샐러드를 전채로 주문했다.
그리고 비노띤또(적포도주).
순대국 또는 곰탕 비스므레한 스프가 나왔다.
'아스파라거스는 콩나물에 많이 들어있다는
숙취에 좋다는 물질 아닌가?' 했는데 (그건 아스파라긴산)
조금 마르고 길쭉한 드릅비슷하게 생긴 채소다.
뤼노가 자기것과 비교를 했다.
'그게 더 맛있어보이는데.., 음 냄새도 좋아'
돼지 비계같은 것들이 둥둥 떠다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빵을 찢어 넣은 것이다.
'우와 정말 맛있는걸' 구수하고 따뜻한 스프가 정말 좋았다.
따뜻한스프와 포도주, 추위와 피로가 싹 가셔버렸다.
얼마만에 먹어보는 국물다운 국물인지..
내가 숟가락을 쪽쪽 빨아대며 먹다남긴 스프를 가리키며
'캔 아이 테이크 잇?' 이라고 했던가
하여튼 '먹어도 돼?' 라고 뤼노가 물어 보았다.
그리고는 몇 수저 뜨더니 기어코 스프사발을 통째로 들이켰다.
'프랑스스타일이야, 이게?'
잠시 주위를 살폈다. 누가 볼까봐.
이어 나온 닭 스테이크도 좋았지만 스프는 정말 최고였다.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아쉽다.
아직도 음식에 사진기를 들이대기가 어색하다.
더 아쉬워봐야..
저녁을 먹으며 뤼노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이번 까미노는 여자친구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자친구는 결혼을 하자고 하는데 뤼노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고 했다.
일종의 '도피성 까미노'라고 해야 할까.
여기 또 불안한, 흔들리는 불혹에 가까운 사람이 있구나.
가끔 내 휴대폰을 빌려가는 것도
여자친구로부터의 메일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단다.
그리고 은행을 그만둔지도 1년여가 지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백수의 심정은 백수가 잘 안다고,
나도 한때 아니, 가끔 그렇게 백수로 지내보아서
그동안의 검소함(?)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었다.
연배도 비슷하고, 백수에다가 도피성도 비슷했으며,
어른이지만 흔들린다는게 동질감이 느껴졌고,
또 속내를 털어주니, 뤼노가 좀 더 편해졌다.
아니, 나 같아서 측은해졌다.
뤼노의 마음이 정해지는 순간, 그의 이번 까미노도 끝난다.
뤼노가 없는 까미노는 어떨까.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내니,
뤼노가 만류하며 "유 아 마이 게스트 투나잇!' 했다.
아! 이제 알겠다.
'유아 마이 게스트' 는 말하자면 '오늘은 내가 쏜다' 인 것이다.
짠돌이 뤼노가!
뤼노가 밥값을 모두 계산하고,
더불어 웨이트리스가 찬절했다며 약간의 팁까지 얹어 놓았다.
그 순간 뤼노가 정말 멋진 프랑스인으로 보였다.
이날 왜 뤼노가 저녁을 쐈을까?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식사도 아니었고..
미사를 보다가 계시를 받았나..
아마 언제 끝낼지 모르는 자신의 까미노에서
유럽에 처음 온 동양인 까미노 친구에게 베푼 작은 우정이었겠지.
그날 메뉴 델 디아는 정말 달디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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