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
빌 1:12-21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12-21 /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가 여기서 당하고 있는 수모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13) 여기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병영 안에 있는 사병들에 이르기까지도 이제는 내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 없이 감옥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4) 그리고 이처럼 내가 감옥에 갇힌 채 참고 견디는 것을 본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감옥에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 물론 개중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쓰시는 데 대한 질투심으로 덩달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두려움 없는 전도자라는 명성을 듣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에서 전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16-17)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주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쓰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에 애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잘 해내어 감옥에 갇혀 있는 내가 속상해 하고 질투하게 만들려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18) 그러나 그들의 동기야 어떻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만은 사실이니 기뻐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19) 나는 앞으로도 계속 기쁨으로 살 것입니다. ㄱ) 여러분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성령께서도 나를 도와주고 계시므로 내가 겪는 이 모든 일이 내게 결국 구원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ㄱ. 70인역 욥13:16)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부끄러움을 당할 일을 일체 하지 않고 오히려 시련을 당하고 있는 지금도 예전과 같이 언제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담대하게 말하고, 또 살든지 죽든지 어떤 순간에도 나의 존재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21) 내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기회가 된다면 죽는 것은 더 나은 기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투옥을 염려하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투옥과 죽음이 지닌 의미를 설명합니다. 로마 시위대의 감옥은 바울을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안에 있는 기쁨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까지는 가두지 못합니다.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12) 투옥 형태가 바뀌어 가택 구금의 상태에 있던 바울은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전보다 더욱 갇힌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이 복음 전파의 진전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을 담은 복음의 진전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13-18) 바울은 시위대의 감옥 안에서는 가택 연금 상태에 있을 때는 전도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것을 보고 신선한 도전을 받은 사람들이 늘어나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투옥이 복음 전파의 진전이 된 첫 번째 까닭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오기 전 빌립보교회 안에서 비중 있는 위치에 있다가 바울의 등장으로 그 위치를 잃었던 사람들에겐 바울의 투옥이 자신들이 잃었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순수하지 못하게 바울을 향한 질투와 시기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투옥이 복음 전파의 진전이 된 두 번째 까닭입니다. 복음 전파의 동기가 무엇이건 전파되는 것은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보고 매우 기뻐합니다. 그의 매임은 오히려 복음 전파의 범위를 넓혔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가두었으나, 바울을 가득 채운 생명을 담은 복음까지는 가두지 못했습니다. 복음 전파에는 후퇴가 없습니다. 땅 끝까지 전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19-21) 바울은 날마다 감옥 안에서 언제 있을지 모를 처형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가득 채운 것은 복음입니다. 바울 안에는 그리스도가 살고 계십니다(갈 2:20). 바울이 바라는 것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죽음도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삶과 죽음의 경계가 지워지고 있습니다. 경계가 무너진 그 자리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나십니다.
적용: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십니까? 그럼으로써 내 삶에서 어떤 모양으로든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까?
노자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유언비어에 흔들리지 않을 때야 비로소 수련이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거나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일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어떻게 해야 더 잘 걸어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든지 살든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던 바울처럼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과 열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
빌립보서 1:12~26 / 이수영 목사
제가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며칠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꼭 50년 전 대학교 1학년 때 일입니다. 그 당시는 굴욕적인 한일외교정상화와 월남파병을 반대하는 시위가 대학가에서 연일 그치질 않을 때였습니다. 그 시위에 참여했다가 잡혀간 것입니다. 대부분의 단순가담자들은 하루 만에 훈방되었는데 웬일인지 저는 풀어주질 않았습니다. 요주의인물로 분류되어서 법원으로 송치될 것이라고 누군가가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직전에 경찰에 몸담고 있던 먼 친척 중 한 사람이 손을 써서 이틀 후에 풀려나왔습니다. 정식 감옥은 아니었지만 그 비슷한 데서 며칠 지내보니까 참 심정이 산란해짐을 경험했습니다. 빨리 나가지 못하면 학교는 어떻게 될지, 집에 알리지도 못했는데 가족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지, 혹시 재판에 넘겨지기라도 하면 장래가 어떻게 될지 등등 걱정이 안 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학생이었으니까 망정이지 만일 가족의 생계나 크든 작든 회사나 기업을 책임진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구속상태에서의 심경이 얼마나 착잡할지 짐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몇 차례나 감옥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곳을 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또 이미 세운 교회들을 순방하며 돌보아야 하고 또 가난한 교회들에게 구호금도 전해주어야 하는 등 할 일이 많았던 바울에게 옥에 갇혀 꼼짝할 수 없는 상태는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 아니라 재판을 받고 풀려날지 아니면 처형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에서는 불안한 마음도 없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옥중에서 그가 어떤 마음의 상태에 있었는지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글 속에는 답답하다, 힘들다, 괴롭다, 불안하다, 못 견디겠다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본문 18절 끝에서 쓰기를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노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옥중에 있는 그를 기뻐하고 기뻐하게 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의 전파의 진전이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일에 진전이 있다는 것이 그를 옥중에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합니다. "형제들아" 한 것은 빌립보 교회의 남녀 성도들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당한 일"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가 투옥을 당한 것을 말합니다. 그가 옥에 갇힌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옥에 갇혀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복음 전파에 진전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세 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투옥이 새로운 전도의 장을 열어주었고 뜻하지 않았던 전도의 대상들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합니다. "시위대"라는 것은 왕궁이나 총독부에 주둔하는 호위부대를 뜻합니다. 바울의 투옥 때문에 복음이 오히려 감옥 안까지, 그 감옥이 있는 시위대 안과 그 시위대가 있는 왕궁이나 총독부 안에까지, 그리고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이 알려지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됨으로써 그가 복음을 전하러 다닐 수 없게 된 대신 복음을 들을 새로운 대상들이 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옥중에서의 사도 바울의 기쁨의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많은 이들이 바울의 투옥 때문에 오히려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봅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 사람들입니다(본문15절). 그들은 사도 바울을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사람으로 알았으며 그가 옥에 갇혀서 자기의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리라도 열심히 전도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며 나선 사람들입니다(본문 16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성령의 역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쁜 일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쓰기를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한 것입니다. 본문 15-17절을 봅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이 글에서 우리는 한편에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착한 뜻으로" 하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투기와 분쟁으로" 하고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하는 자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옥중에서도 바울이 기뻐할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늘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바울을 따르는 이들과 다른 분파를 만들어 분쟁을 일으키며 바울에 대한 교인들의 신뢰와 사랑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 틈을 타서 전도를 열심히 하여 교인들에게서 명성을 얻고 자기들의 추종세력을 키우려는 순수하지 않은 의도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이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은 감옥에 갇혀서 전도를 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믿고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본문 17절).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듯이 사도 바울은 다른 이들이 열심히 전도하는 동안에 자기는 전도를 못하고 있는 것을 괴로움으로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다른 것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만 전파된다면 전파하는 이들의 동기나 방법이 위선적이건 참되건 가리지 않고 기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8절이 그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자신이 옥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복음의 전파에 진전이 됨을 확인하고 기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들의 동기와 방도가 어떠하든지 개의치 않는 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이 감옥에서 나가든지 못나가든지, 그리고 자기가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조차도 개의치 않는다는 생각에까지 미칩니다. 그런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본문 20-26절입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그냥 살고 죽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서 중요한 일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어떻게 살며 왜 죽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무엇을 추구하느냐 하는 것만이 그에게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그것만이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본문 20절)라고 쓰고 있듯이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그 자신은 살든지 죽든지 부끄럽지 않게 예나 지금이나, 자유로울 때나 옥에 갇혀있을 때나 한결같이 온전히 담대하게 행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재판을 받아 풀려나거나 혹 처형을 당하게 되더라도 재판대에서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자기로 인해 존귀하게 여겨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살고 죽는 문제를 초월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말을 들어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본문 21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은 그의 삶의 내용이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존재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위하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만 하면 더 바랄 것 없는 삶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만을 위하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만 하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했으며 그에게서 죽음은 그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주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다"고까지 말합니다(본문 23절). 단 그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한 삶일 때 그의 죽음 또한 유익한 일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실컷 내 맘대로 살았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것하고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멀어도 너무나 먼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하며 그리스도의 말씀만 따라 살고 그만을 전하다가 죽어야 그 죽음이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뜻입니다. 살아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 산 사람에게는 죽음은 그 연합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연합의 보다 깊은 경험에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비록 자기가 훨씬 더 바라는 것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지만 살고 죽는 일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함을 분명히 합니다. 본문 22-24절입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더 바람직한 죽음을 택하기보다 아직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성도들의 유익이었습니다. 성도들의 유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바르게 받아들여서 믿음의 진보를 이루게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25-26절입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 19절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기가 풀려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석방을 주시고 조금 더 삶의 기회를 주시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의 진보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26절에서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하는데 여기서 "너희 자랑"이라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자랑이고,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다시 같이 있게 해주신다면 그것은 자기로 인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달아 알고 그것을 자랑할 줄 앎이 더 풍성해지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확실한 사명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살아도 오직 그리스도, 죽어도 오직 그리스도뿐이었던 사도 바울은 삶은 오늘까지의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살아도 나, 죽어도 오직 나뿐인 그런 삶이 우리가 바라고 실제로 추구하는 삶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것이 기쁘고,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성령께서 힘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옥 안에서 승리한 비결
빌 1:12-18 / 김서택목사
지난 번에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하던 중에 잠시 그 교회와 관계되던 한 여선교사님이 안식년을 맞이하며 본국에 돌아가기 전에 잠시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자신이 한국에서 받은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이 안식년을 통하여 주님과 더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는 그 동안 많이 기도해야 하는데도 바빠서 제대로 기도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와 오빠가 아직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들이 개인적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윤락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십 사 시간이 노출되어 있어서 자신이 매우 긴장했고 실제로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위인전을 읽을 때 그 위인전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 훌륭한 사람이 그 어려운 위기에서 취했던 용감한 행동에 대하여 감동하면서 실제로 그 사람과 나를 더욱 더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영웅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어.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기록을 읽으면서 “이것은 사도 바울같은 위인이니까 할 수 있는거야. 나같은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어”라고 단정하기 쉽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바울을 오해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을 볼 때 바울의 가장 솔직한 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의 문제로 힘들어 하기도 했으며 또 양육하던 형제들과 헤어지면서 걱정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사역자 때문에 많이 괴로워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런 부분보다 더 말하기 어려운 점도 없습니다. 자기들끼리도 하나 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무슨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합니까? 그러나 바울에게는 솔직하게 그가 잘 용납하기 어려운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도저히 옹납하기 어려웠던 현실이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오히려 받아 들여 질 뿐 아니라 감사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하여 그도 얼마나 나약한 인간의 몸과 생각을 가졌으며 그런 가운데 믿음을 사용하였을 때 얼마나 결과가 달라지게 되었는지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사실 개인적으로 사정이 더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죄수로 오게 되었을 때 하숙집 같은데 있으면서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대로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도 전하고 성경 공부도 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단지 그 집을 벗어나서 아무데나 다른 곳에 가지 못한다는 제약은 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정이 달라져서 그는 더 이상 그런 편한 상태에 있지 못하고 악명높은 시위대 감옥 안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도 그는 틈틈히 복음도 전하고 만날 사람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완전히 자유가 봉쇄당하는 본격적인 감옥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럴 때 그가 걱정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자신의 일신상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시위대 감옥 안에 들어가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재판이 빨리 결정되어버려서 그가 사형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걱정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걱정을 합니다.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미래에 대하여 걱정을 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그가 말씀을 양육하던 자들에 대해서도 걱정을 합니다. 특별히 맡겨둘 만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감옥에 들어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눈 앞에 나타나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답답하고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을 아주 힘들게 하던 경쟁적인 입장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옥 안에 있는 바울을 더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조용하게 이겨냅니다. 처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는데 한번 생각을 바꾸니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신비적인 기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아무 변화가 없는 가운데 생각의 전환만으로도 그렇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적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완전하려고 하는 경향,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만드는 자기 기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는 완벽주의,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교만과 프라이드 바로 이것이 자신의 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마지막 까지 붙들고 있던 자존심과 자기 생각을 벗어버렸을 때 그는 감옥 안에도 하나님의 찬란한 빛이 비취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고의 변화입니다.
1. 시위대 안에서 맺은 열매.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고 있는 ‘나의 당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알고 있는 일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대단히 염려하고 있던 일로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죄수 생활을 하다가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으로 이감되게 된 것을 말하는 것같습니다.
왜냐하면 13절에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으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로마에 끌려 오고 난 후 상당한 기간 죄수인기는 하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정이 바뀌어서 그는 악명 높은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으로 들어 가게 되었고 이것은 그가 육체적으로 매일 뿐 아니라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의 감옥에 달라지게 된 것은 그의 재판이 임박한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바울이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놓고 엄청나게 고민을 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바울의 사역은 여기서 끝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 그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왜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갑자기 환경이 어려워지는 것일까요?
사실 이 시위대 감옥이 바울에게 고통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를 상당히 짜증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고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숙집에 있다가 감옥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매일 밤에 쇠사슬을 차고 잠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사도에게는 엄청난 모욕이며 정신적인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시위대 안에서의 생활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3절,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으니”
그리고 12절에는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시위대 안에서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 대차대조표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시위대 감옥 안에 그에게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안은 불결했으며 그 안에서 그는 분명히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나 벼룩같은 벌레로부터 고통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무엇 보다 늘 만나던 믿음의 형제들과 만나지 못하는 상실감이 그의 마음 속에 더 손실로 다가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플러스가 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시위대 안에 있음으로 해서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몇 명의 사람들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이 시위대 안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위대 안에서 한 두 사람의 크리스챤만 얻은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가 시위대 안과 기타 여러 사람들에게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모두 지금까지 그가 전도했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가이사의 집 식구 중에서도 몇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가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시위대 감옥으로 옮겨짐으로 받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상실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가 여기게 들어오게 됨으로 얻게 된 몇 명의 크리스챤들입니다. 그는 이 두가지 대차대조표 항목을 보고서 전체적으로 ‘플러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 시위대 감옥 안에 들어오고 또 이 안에서 고통 받은 것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위해서는 더 유익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육체적인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렇게 했다면 시위대 감옥에 대하여 ‘끔찍했다’(terrible)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물론 그가 당한 고통도 항목 안에 다 집어 넣었습니다. 사람은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그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아요’라고 체면을 나타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실제적인 사람이었고 경영학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중을 자기 개인의 편의에 두지 않고 복음의 진보에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이 그의 머리 속에 명쾌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수지맞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사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갔을 때 그 원수의 나라가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가 성 밖에서 작은 움막을 하나 세우고 그 성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니느웨 성 사람들의 회개가 위선적이기를 바랐습니다. 겉으로는 회개하는 척하지만 속으로 악한 마음으로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로 망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한 벌레가 벅넝쿨을 잘라 먹는 바람에 그만 움박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뜨거운 낮의 더워에 너무나도 마음이 상했습니다. 요나는 신앙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가 손해 본 것이 무엇입니까? 박넝쿨 한 줄기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도 자기가 심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니느웨 성 안에 있는 십이만 명의 어린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숫자의 성인들과 가축들이었습니다. 그는 손해 본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의 민족주의적인 감정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엄청나게 불의한 분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분노가 대단히 의로운 것으로 느끼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한번은 제가 수련회에 갔다가 목욕탕에서 구두를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구두 잃은 것에 짜증이 났습니다. 사실 그 수련회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잃은 구두로 인하여 마음 속으로 짜증을 내고 또 나의 시간을 아까와 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했더니 말로 할 수 없는 이득이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대어를 낚는 것과 같습니다. 대체로 청년들과 함께 사박오일 정도 함께 말씀을 나누면 틀림없이 그들을 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인 대차대조표가 없기 때문에 울어야 할 때 웃고 있고 웃어야 할 때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대하여 판단할 때 얼마나 내가 편해졌느냐 혹은 어려워졌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음의 진보가 되었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되었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해야 제대로 모든 것이 보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전혀 하나님 나라에서는 의미없는 일을 위하여 일년 내내 뛰어다녔습니다. 그것으로는 아무 영혼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겨우 식구들 밥 먹여 살리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 통곡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영적인 대차대조표가 없기 때문에 모르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의 삶을 복음의 진보하는 기준에 맞추어 정리를 해 봅시다. 과연 나의 삶이 복음의 진보였는가 아니면 복음의 후퇴였는가? 아니 복음의 진보는 고사하고 내 영혼이 더 성숙하고 치료받고 온전해졌는가 아니면 더 퇴보하고 더 헤매었으며 중요한 것을 잃지는 않았는지 결산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이 시위대 안에서 적응 할 수 있었던 비결.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도 바울은 이 험악한 시위대 감옥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이 감옥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기왕 들어와야만 한다면 철저하게 적응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죄수가 감옥을 옮길 때에는 신고하는 의미에서도 많이 매를 맞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무수하게 매를 맞았다’고 말할 때 어쩌면 이 시위대 안 감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는 처음에 이 비인간적인 감옥에서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존경받는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방인의 감옥에 들어 와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여기서 복음의 진보를 나타낼 수 있었을까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그 상황에 적응시켰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 자신을 철저히 한 사람의 죄수로 처신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시위대 감옥 안에 들어가면서 그나마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자존심을 다 버리고 철저하게 그 시위대 감옥에 적응을 한 것입니다. 사람은 적응하지 않으면 절대로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특히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너무나도 잘 적응할 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감옥에 들어 갔다가 얼마 전에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오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감옥 안에서 대통령 때의 일을 잊지 못하고 그 안에서 대통령처럼 행동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조롱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교도소 안의 생활에 철저하게 적응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규칙을 잘 지키고 기꺼이 그런 생활에 자신을 맞춘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감동할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로마 군인들 중에서도 감옥을 지키는 군인이 가장 보직이 나쁜 군인일 것입니다. 그들이 하루 종일 보는 사람들은 항상 찡그리고 있으며 언제나 불만에 가득 차 있고 몇번씩 말을 해야 겨우 반응을 보일까 말까 한 죄수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노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그를 모르고 때렸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고 보니까 그는 거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사랑에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항상 여유가 있고 편안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감각이 없는 로마 군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물론 감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에게 감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몇 사람은 바울의 영향을 받았고 그와 친해져서 나중에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자리까지 가게 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바울에 대한 좋은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금방 이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죄수의 소문은 온 시위대 안에 퍼지게 되었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 죄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데 있어서 전문가가 아닙니까? 크리스챤은 어디에 가든지 처음이 가장 힘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지키려 하고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자존심이나 고집 같은 것이 있어서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단 한번 친해지고 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그 고비를 넘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의 프라이드를 버리고 상대방에게 나를 기꺼이 맞추어주는 것입니다. 일단 마음 속에 가로 놓여 있는 불신의 벽을 넘기만 하면 그때에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영적인 힘이 마음껏 발휘가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 안에 아무리 좋은 은사가 있다 하여도 남들이 나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장 현명한 사람은 처음에 사람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낮춘 후에 그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사로잡아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은 모두 유악하다는 것입니다. 달콤한 잔만이 아니라 고통의 쓴 잔도 나에게는 결국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좋은 환경만이 아니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결과도 얻지 못했을 상황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3. 다른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나타난 반응.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지속적으로 말씀으로 양육하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시위대 감옥에 들어가면서 걱정되었던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혹시 이들 중에서 너무 낙심한 나머지 신앙을 버리는 자들은 없을까 혹은 제대로 채움을 받지 못해서 거짓 교사를 따라가는 자들은 없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그의 염려와는 정반대였습니다.
14절,“형제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분명히 그들 중에는 그의 문제로 신앙에 흔들리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를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매임을 보고 더 주님을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을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을 끝까지 하나님께 맡기기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사실 말씀의 종들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양육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감옥을 옮기면서 끝까지 마음에 부담을 느끼던 자들이 있었다면 바로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나타난 결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 발로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겼더니 자기가 맡고 있었던 때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우리 안에 있는 완벽주의적인 생각이 얼마나 주님을 믿지 못하게 하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끝까지 주님을 믿지 못해서 붙들고 있는 동안 주님은 아무 것도 하시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없으면 이 형제들이 매우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제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바울같은 탁월한 말씀의 종이나 하는 것이야. 나처럼 믿은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하는 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바울이라는 사람만 믿고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감옥 안에서 외롭게 복음을 붙들고 믿음 생활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모두 다 자기 발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은 너무나도 어리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스스로 일어 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라는 사람만 믿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장 염려하던 것을 주님께 맡겼을 때 주님이 이들을 직접 양육하며 키우시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자기가 붙들고 있던 때 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맡기면 주님은 내가 하는 것보다 더 일을 잘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사역자 없이도 일을 잘 하십니다. 선교사들은 그 대표적인 경우를 중국으로 들고 있습니다. 중국에 공산당이 들어서면서 모든 선교사들은 그 선교지에서 내어 쫓기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십년이 지난 후 두껑을 열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교사 한 명 없이도 많은 놀라운 일을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안에 자기 스스로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내가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아실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들은 사용하실 뿐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것은 더욱더 하나님께서 그 영광된 일에 나를 사용해주시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 일을 하실 수 없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하나님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4.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인간적이며 솔직한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부끄럽게도 그곳에서 자신과 좋지 않는 관계에서 복음을 전하던 자들이 있었던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가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너무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성공하는 것을 보고 한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을 솔직하게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15-17절,“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여기서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단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단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고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3:2에 보면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사도는 유대주의자들을 ‘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복음을 전한 자들이 누구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언급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과 바울의 사이가 불편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사도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경쟁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는 많은 크리스챤들로 부터도 그렇게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그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직접적인 관계없이 바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바울이 좀 이상하거나 혹은 경계해야 할 사람으로 인식되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시위대 감옥 안에 갇혀 버리니까 아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눈에 있는 가시가 없어졌던 것처럼 환영하면서 더욱 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열심을 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 안에는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데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우리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은 그 동안 우리를 힘들게 하던 자가 제거되었다 이때야 말로 우리들의 세력을 넓힐 때다고 하면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다툼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순수하게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만 소개하고 그 뒤에는 전혀 양육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뒤에 “이제 저는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제 부터는 당신 집 가까운 아무 교회나 찾아가서 신앙 생활 하도록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전도하는 단체들은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러나 처음 복음을 들은 자를 바로 다른데 보내기 보다는 좀더 붙들고 양육할 필요가 있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정말 사람들에게 어떤 지식을 주입시켜서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도 전하지만 그 안에 자신의 철학이나 어떤 특별한 강조점을 부각시켜서 다른 사람은 따르지 못하게 하고 오직 자신이 집단만 추종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다툼과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자신들의 신앙 칼라가 상당히 강해서 쉽게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이며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그런데 그를 지도한 사람이 어떤 점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그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놓아버린 것입니다. 사실 요즘 제자 훈련이라고 하는 것이 쉽게 이야기 하면 자기 사람 만들기입니다. 다른 교회에서 오랫 동안 신앙 생활하던 사람을 그 교회에 교육 프로그램 안에 집어 넣어서 자기 교회의 체질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바울은 전도하면서 자기 세력을 키우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특히 선교를 하면서도 다른 교회가 이미 들어 간 지역은 들어가지 않도록 함으로 교회가 서로 경쟁하지 않고 보다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믿는 사람들이 그 지역에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게 해서 스스로 자립하게 했지 자기 세력을 확보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는 어떤 복음 전하는 자와 분명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이것이 바울을 굉장히 괴롭게 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17절에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 생각하여’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그들의 활동이 바울 자신의 사역을 무너뜨렸으며 그의 원칙을 깨트려서 상당히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때 내가 열심히 복음을 전한 곳에 다른 교파가 들어와서 주도권을 다 차지해 버린다든지 혹은 내가 열심히 전도한 캠퍼스에 다른 선교단체가 들어와서 학생들을 많이 가져 가버렸을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사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 중에서 넘기 어려운 한계가 바로 하나님께서도 나와 같은 스타일로 일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런 사적인 감정으로 봐야 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18절,“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한 동안 바울은 이 얌체같은 자들의 사역이 잘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의 마음이 편치 않고 시위대 안에 들어 옴으로 그의 모든 사역이 다 망가지는듯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이 문제만큼은 잘 용납이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감옥 안에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이 고통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생각의 변화였습니다. “반드시 나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질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 그리고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그리스도만 전해지면 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그는 그들을 용납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 순간의 생각의 전환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다 옳지는 않고 또 어떤 부분은 사실 욕심으로 하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라고 하면 영적으로 엄청나게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라고 해서 감정도 없고 미움도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들 보다도 더 민감했고 더 어떤 문제에 집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려운 가운데 싱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직 주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종은 얼마든지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얼마든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고 또 욕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대파대조표는 내가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느냐 혹은 내가 얼마나 좋은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비록 내가 고통 가운데 있게 되어도 그것이 복음의 진보가 될 수 있다면 더 유익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자기가 직접 돌볼 수 없었던 형제들을 주님께 맡겼더니 더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묘미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 가지고 갑니다. 금방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끝까지 주님께 맡깁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붙들고 있던 때 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나타내십니다. 결국 일하시는 분은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이 꼭 나의 방식으로 나를 통해서만 일하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나와 다른 종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일을 하실 수 있고 만일 그렇게 해서라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면 기뻐할 일입니다.
저는 제가 무엇에 집착하려고 할 때 마다 내 안에 성령이 고갈되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아내가 하는 말들이 나의 신경을 그슬리게 할 때 내가 아내를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내 안에 성령이 고갈되어 있고 또 내의 완벽주의병이 발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 때 제 방식으로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잘 따라 주지 않으면 미워지기고 하고 비난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형제나 자매를 나의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적으로 너무 가까워져서 인정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압살롬처럼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지옥에 간다거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도 더 진리를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온전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천사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서운 원수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한 순간에 되지 않습니다. 늘 뭉둥이로 두들겨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운 가운데도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리어
빌 1:12-14 / 안효관 목사
여러분, 키위(kiwi)라는 새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키위라는 새는 뉴질랜드에서 서식하는 새로,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뉴질랜드의 국조(國鳥)이기도 합니다. 뉴질랜드의 특산품인 과일 키위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새의 특징은 눈이 퇴화하여 거의 앞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새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날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새가 날지도 못하고 눈이 퇴화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지형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이 키위라는 새는 뉴질랜드 화산지대에 살고 있습니다. 화산지대에는 뱀과 같은 파충류가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새의 천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먹을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저 긴 부리로 땅을 여기저기 쪼기만 하면 지렁이나 곤충 같은 먹이를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날 필요가 없어 날개는 쓸모가 없게 되었고, 지금은 날개는 가졌으나 날지 못한 새가 되어버렸습니다. 긴 부리로 땅을 쪼기만 하면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먹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시력이 별로 필요가 없게 되었고, 결국 시력은 퇴화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천적도 없이 먹고살기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 키위라는 새는 엄청나게 번식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한 때는 멸종 위기 동물로 분류되었습니다. 지금은 정책적으로 보호동물로 지정되어 조금씩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형통한 삶을 소원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형통한 길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그 형통함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함인지, 아니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통함인지 말입니다.
형통의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두 번이나 요셉의 삶이 형통하였다고 - ‘하나님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 눈으로 볼 때 요셉이 전혀 형통할 때가 아닌 상황에서 형통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보디발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바로 그 때 첫 번째로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후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성실히 일한 결과 인정받아 보디발의 집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주인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습니다. 요셉은 그 유혹을 거절하게 되고, 유혹을 거절한 결과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히 갇혀 있는 요셉을 향하여 성경은 두 번째로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냥 형통한 것이 아니라 ‘범사에’ 형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어찌 형통한 것입니까? 아버지 아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형통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것이 형통한 것이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것이 형통한 것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분명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통은 다릅니다. 우리는 큰 어려움이나 고난 없이 - 별 문제 없이 평탄하게 사는 삶을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분명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론 견디기 힘든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이고, 그 길을 통과해서 가야만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그 길이 바로 형통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세상의 큰 사람으로 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래서 마마보이로 자랐다면 어떻게 애굽에 가겠습니까?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애굽에 유학이라도 시켰겠습니까? 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것도, 또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수모와 고통을 겪은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기 위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고난의 길을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극심한 고난과 연단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 과정을 거쳐야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 결과가 좋다 하더라도, 그 고난의 끝에서 엄청난 영광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기뻐하든 기뻐하지 않던 우리가 당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의 때가 지나고 나면 우리에게 반드시 영광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도리어’의 신앙입니다.
그것을 철저하게 깨달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노라.” 여기서 ‘바울이 당한 일’은 비단 한 사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일평생 겪었던 모든 일을 통해서 깨달은 진리를 말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의 일생에 아주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두 번째 선교여행을 계획한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제1차 선교여행 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소아시아 지역을 돌아보면서 교회를 더욱 굳건하게 하고 복음의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사도행전 15:36) 그래서 제2차 선교여행의 목적지는 소아시아였습니다. 그런데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을 돌아보는데 가는 곳마다 일이 풀려지지 않습니다.
그 때의 일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사도행전 16:6-7) 분명 선교와 복음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선교여행을 왔습니다. 선교여행의 목적은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바울도 왜 하나님께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아시아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꾸만 방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무시아에서 환상을 보게 됩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사도 바울 일행을 향하여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그 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시아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그토록 방해하셨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세운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계획에도 전혀 없던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세웠던 계획들이 복음 사역과 전혀 다른 무언가를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운 계획이었고, 교회를 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그 계획들이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풀려지지 않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세운 계획들이 제대로 풀려지지 않았을 때 사도 바울이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또 그것을 하나님께서 막으신다고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힘든 일을 겪었기에 마게도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마게도냐는 지금의 유럽입니다. 유럽의 관문입니다. 제2차 선교여행 때 사도 바울이 그 여정의 발길을 유럽으로 돌렸기 때문에 복음이 유럽에 전파되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해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진보입니다. 복음 전파에 진전되는 일이었습니다. 삶에 방해거리가 생겨남으로 해서 때론 고민할 수도 있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할지라도 도리어 그런 일을 통해서 자신을 마게도냐로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 우리 가운데 내가 세운 계획이 잘 풀려지지 않아서 고생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더구나 내 욕심이나 나를 위한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계획인데 자꾸만 방해꾼들이 생겨나고,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힘든 일만 계속 일어나고 있진 않습니까?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해가길 원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세운 계획보다도 더 크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내가 세운 계획이 내가 원하는 대로 풀려지지 않는다고 짜증낼 이유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통해서 더 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육체에 있는 가시’라고 불리는 질병을 고쳐달라고 한 것은 단순히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질병으로 인해 복음 전하는 일에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더 건강한 모습으로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싶은 거룩한 마음에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병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여러 곳을 다녀야 합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좋은 것도 아니고, 좋은 차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통이나 교통수단이 좋지 않은 시대에 몸이라도 건강해야 더 많은 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지 않으시고, 도리어 병든 채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말씀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건강했다면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건강했다면 더 많은 곳을 다닐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힘으로 한다고 교만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지혜나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을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두셨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몸은 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약함 속에 당신의 강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었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들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그것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그가 아덴(그리스 아테네)에 갔을 때입니다. 아테네는 헬라철학이 가장 왕성하게 일어난 곳입니다. 사도 바울도 헬라철학에 대해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헬라철학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아주 논리적으로 복음을 헬라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아덴 사람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사도행전 17:3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지식을 다 동원하여 복음을 전했는데, 결과는 조롱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멋진 논리로 복음을 전했는데, 결과는 결코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겐그리아로 내려와서는 머리를 깎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았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는 그 때 분명하게 결심했을 것입니다. ‘다시는 내 지식을 자랑하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 전하지 않기로 그는 그 때 마음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립보서 3:7-8) 그는 자신의 지식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하고 십자가만 바라보며 십자가만을 전했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알기에 십자가의 방법으로 십자가만 전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하나님께서 건강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거기에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을 알기에 병을 고쳐주시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나의 약함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충만케 되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도리어 복음이 더 놀랍게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 건강이 좋지 않아서 힘든 분 계시지요? 많은 분들이 건강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케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지 않는다면, 너무 조르지만 말고 나의 약함 속에 하나님께서 다른 능력을 주신 것이 없나 찾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그런 약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시고, 나의 약함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병을 고쳐주시는 것도 은혜이지만, 병을 고쳐주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나를 사용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건강한 모습보다도 도리어 나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하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276명을 태우고 가던 배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끌러가던 길이었습니다. 너무 큰 풍랑으로 인해 배에 실고 있던 모든 짐들을 다 바다에 던저버려야 했습니다. 얼마나 큰 풍랑이었던지, 14일 동안 해도 볼 수 없었고, 별빛 하나 볼 수 없었습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망망대해 위에서 언제 배가 난파될지 몰라 모두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여전히 풍랑은 그 기세를 꺾지 않았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성경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사도행전 27:20) 살 수 있다는 소망마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살기를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바울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어제 밤에 내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네가 반드시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설 수 있다고 말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될 줄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확신대로 그 배는 풍랑을 이겨내고 멜리데라는 섬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멜리데에서 또 한 번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불을 피워 몸을 녹히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불쏘시개로 쓰기 위해서 나무 한 묶음을 들어 불에 넣으려는 순간 독사가 사도 바울의 손을 물어버렸습니다. 그 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짜 죄인 맞구나. 풍랑 이는 바다에서 구조되긴 했지만 신이 그에게 벌을 내려 뱀에게 물려 죽게 하시는구나.”
그런데 독사에게 물려 조금 후에 죽을 줄 알았던 사도 바울이 죽지 않고 멀쩡하니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도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멜리데 섬의 추장과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만난 큰 풍랑으로 인해 276명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독사에게 물려 죽을 고비를 통해서 멜리데 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나는 안다.”
여러분, 때로 우리 인생에도 풍랑이 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원치 않는 문제 때문에 힘든 경험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고통과 힘든 상황에 우리를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힘든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풍랑 중에서 사도 바울의 권위를 높여주셨고, 독사에게 물린 사건을 통해서 멜리데 섬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신으로 추앙받은 것처럼, 우리가 당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가운데 높이 들어 존귀하게 해 주십니다.
이유 없이 달려드는 인생의 풍랑 때문에 고생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거기에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도리어 우리를 존귀하게 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기록한 글입니다. 사도 바울이 언제 어느 감옥에 있을 때에 이 글을 기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혔을 때 쓴 글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전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점점 더 나이가 들어가고 몸도 더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걱정했습니다. 또 바울이 감옥에 갇힘으로 해서 복음을 마음껏 전하지 못한 것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에서는 ‘에바브로 디도’라는 젊은 사역자를 사도 바울에게 보내 뒷바라지를 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 디도가 사도 바울을 돕다가 큰 병에 걸려 죽을 위기를 겪게 됩니다. 에바브로 디도가 죽지 않고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자 그를 다시 빌립보 교회로 돌려보내면서 이 편지를 써 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편지의 인사말과 서론을 제외하면 빌립보서 본문의 가장 첫 부분입니다. 첫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빌립보 교회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에 큰 지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이 감옥에 갇힘으로 해서 복음 전파에 진전이 있다고 말합니다. 감옥에 갇혔다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14절 말씀에 의하면 도리어 감옥에 갇힘으로 인해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것은 복음 전파에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유스런 몸이 되어야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텐데, 감옥에 갇히면 복음을 전하는데 제한을 받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힘으로 인해 도리어 복음의 역사는 놀랍게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지금까지의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신만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인 환경이 좋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마이너스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손과 발이 꽁꽁 묶여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입에 재갈이 물려져 말씀을 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내 방법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복음을 전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니더라도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환경이나 여건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환경에 있어야만 더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건강해야만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그는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감옥에 갇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이런 어려운 환경을 통해서 더욱 놀랍게 당신의 일을 하실 것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환경이나 여건이 좋아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이 힘들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더 큰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원치 않는 상황이 내 앞에 벌어지고, 지금 내 삶이 엄청난 고난의 수렁이 빠져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환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지 못한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내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힘든 삶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더욱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더욱 큰일을 위해서 자신을 때로 고통 가운데 밀어 넣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당한 일’이 내가 원치 않는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이나 그 모습을 통해서 도리어 당신의 크신 역사를 만들어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내 계획대로 일이 잘 풀려지지 않아 힘들어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건강이 좋지 않아 마음껏 일하고 싶은데 하지 못해 안타까워하지 않으십니까? 인생의 풍랑이나 갑작스럽게 닥친 고난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런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는 뉴질랜드의 키위라는 새처럼 어쩌면 영적인 시력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뵙지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날개에 힘을 잃어 영적인 자유함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한 고난 - 비록 그것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것이 ‘도리어’ 내게 유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나의 당한 일
빌 1:12-14 / 주승중 목사
I. 들어가는 말
여러분, 설 잘 지내셨습니까? 새해에도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들을 지키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여러분의 가정에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우리 모두에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제가 지나간 옛 퀴즈를 한 가지 내면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어보시고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한번은 교통사고가 나서 한 버스에 타고 있던 많은 승객들이 안타깝게 죽고 부상을 당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퀴즈입니다. 그 사고에서 희생당한 사람들 가운데 이런 억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사람은 원래는 96번 버스를 타야 되는데, 69번 버스를 96번으로 착각하고 탔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결혼식이 내일인데, 그 버스를 탔다가 안타깝게 희생된 총각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버스가 막 출발할 때 저 뒤에서 급하게 달려와 버스를 세워 겨우 버스를 탔다가 변을 당한 사람입니다. 네 번째 사람은 버스 안에서 졸다가 그만 자기가 내릴 정거장을 놓쳐서 한 정거장 더 가는 바람에 죽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들 가운데 누가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실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하는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웃기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지만, 결코 웃어만 넘길 수 없는 내용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모순과 불합리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가 하는 것을 냉소적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96번을 타야 하는데, 69번 버스를 96번으로 착각하여 탔다가 죽었다는 것, 내일 결혼식을 앞두고 행복한 삶에의 온갖 꿈과 희망이 부풀어 있는데, 그 마지막 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 이제 막 떠나는 버스를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 겨우 잡아탔는데, 하필이면 그 버스가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것, 삶이 힘들고 피곤하여 깜빡 졸다가 한 정거장 더 가는 도중에 그만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것, 정말이지 다 억울한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우스개 소리가 우스개 소리로만 끝나지 않고, 정말로 이런 비합리적인 사건들이,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성폭행하고, 부모가 아이들에게 약을 먹이고 차가운 강물에 던지는가 하면, 부모와 형제를 끔찍하게 살해하고도 조금의 반성도 없는 패륜아의 모습이 우리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 또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들이 서슴없이 행해지고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삶 속에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고 있다는데 우리의 말 못할 고민이 있습니다. 요즈음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일들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이번 설 연휴 동안에도 우리들 가운데는 기쁘고 즐거운 일 보다는 이렇게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 속상하는 일, 기가 막히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당하면서 탄식했던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속에서는 이런 질문들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왜 우리 가정이 이런 일을 계속해서 겪어야 합니까? 왜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부모에게, 자식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진실로 우리 모두에게는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이유를 몰라,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몰라 더욱 고통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때때로 너무도 억울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런 문제들을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해서 낙망하고 탄식하던 한 믿음의 조상의 고백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탄식의 소리가 아닙니다. 실망의 소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고백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귀한 깨달음의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대로 바울은 그 삶 속에서 참 많은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는 그가 당한 그 수많은 일들 속에서 한 가지 귀한 진리를 깨달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고백은 바로 “나의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이 말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이 고백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이 귀중한 진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II. 몸 말
1. 바울의 당한 일
그렇다면 먼저 바울이 당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빌립보서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나의 당한 일”이란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아무런 죄도 없이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나의 당한 일”이란 좁은 의미에서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늘 본문은 동사의 시제가 현재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법에서 현재완료형이란 과거에 시작하여 현재까지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행동을 나타낼 때 쓰는 동사의 표현법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바울이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일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로마의 감옥에 올 때까지 일어났던 모든 환난과 역경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감옥에 갇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난을 당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감옥에 갇히게 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하고 다닐 수 있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재판도 없이 2년간이나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던 바울은 아마도 마음이 참으로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하루가 아쉽고 한 시간이 아까운데 감옥에 2년씩이나 갇혀 있으니 그는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를 생각해 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황제에게 상소를 하면 당시의 법에 의해서 그는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빌립보 감옥에서 나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로 가는 길 역시 평탄치를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그가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하여 갔는데, 그만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 배가 거의 파선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 풍랑은 2주간이나 계속되었고, 구원받을 소망이 다 끓어질 정도로 아주 심한 풍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나타나 “네가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서게 될 것이고, 배에 탄 사람 중 한 사람도 다치는 사람이 없을 것인 즉 두려워하지 말라”는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과연 천사의 말대로 그들은 멜리데라고 하는 섬에 피신을 하게 되고, 마침내 로마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는 로마의 감옥에서 약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자, 그러고 보면 바울은 지금 거의 4년에서 5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 갇히거나, 혹은 온갖 고생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기간동안에 매우 답답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렇게 긴 세월동안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는 것일까?” 단 한순간이라도 더 복음을 전하여야 할 텐데 무려 5년씩이나 부자유스러운 몸으로 갇히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언제나 감옥의 문이 열릴 것인지, 아니면 그 감옥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인지, 아무런 기약도 없이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 같아 아마도 처음에는 바울도 상당히 괴로웠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그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도 확실히 모릅니다. 오히려 그가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더욱 짙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아주 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뒤늦게 자신의 지금까지 당한 일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2. 복음의 진보
바울은 그 옥살이하고 있는 것,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억울하고 한심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 그 감옥살이가 오히려 복음의 진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가 오랜 세월동안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듣고 염려하며,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가 나의 일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사실 나의 매임 때문에 오히려 복음의 놀라운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1) 복음의 진보
여기서 “진보”라는 말은 “프로코페”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나무를 찍어 가면서 앞으로 전진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로 군대에서 공병대가 앞서 나아가서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길을 놓거나 다리를 놓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바울 당시에 전 세계의 가장 막강한 군대였던 로마의 군대는 항상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공병대가 먼저 앞서 나가 장애물들을 제거하면서 도로를 닦았는데, 특별히 저들이 자랑하던 전차가 나아가는 길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뚫린 길로 로마의 전차가 행진해 들어가면 그곳이 곧 로마의 영토가 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럽에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까지 생긴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런 사실을 염두해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가 로마의 길을 잘 알지 않느냐? 저들이 계속해서 전차와 군대가 나아갈 길을 만들어 땅을 점령해 나아가듯이, 지금 너희가 걱정하고 있는 그 일 때문에, 즉 내가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오히려 복음의 대로가 열리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즉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됨으로 한번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곳에 복음을 위한 큰 길이 열리게 되었고, 복음의 새로운 영지가 확보되었다는 것입니다.
(2)새로운 영지(로마의 시위대)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새로운 영지가 어디입니까?
바울은 13절에서 그 복음의 새로운 영지가 어디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새로운 영지는 로마의 권력 중심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바울은 지금 시위대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위대란 바로 황제의 시위대, 즉 로마 황제의 경호를 맡은 친위부대를 말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로마 황제의 시위대는 엄청난 특권을 갖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유력한 집안의 자식들이었고, 로마정신에 투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호위부대이기 때문에 여기에 선발되면 급료도 두 배나 더 받고 남다른 조건에서 근무를 할 수 있었기에, 로마의 유력한 가문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시위대에 뽑히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 부대를 처음 조직한 황제가 바로 그 유명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였고, 보통 약 만 여명의 시위대 군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후기시대에 가서는 이 시위대의 권력이 막강하여져서, 오히려 황제의 힘보다도 더 세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후기에는 시위대에서 로마의 황제를 폐위시키기도 하고, 새로이 세우기도 하는 등, 그 세력이 엄청나게 확장되어 나중에는 “황제 제조기”라는 별명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들은 로마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특권을 누리는 세력들이었고, 그러기에 아무나 시위대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로마 정치의 핵심이요, 로마의 사상과 철학과 종교 즉 황제숭배를 지키는데 있어서도 철옹성 같은 벽을 쌓고 있던 로마의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 가운데 바울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매임”이란 그가 바로 그들이 지키고 있던 로마의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 그들과 함께 쇠사슬에 매이게 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매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에베소서(6:20)에서는 분명히 자기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같은 장면을 설명하고 있는 행전 28:20에도 보면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쇠사슬에 매였다고 하는 이 말씀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 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쇠사슬에 매였다고 하는 이 말에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그 로마의 정신으로 투철한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중죄수를 가둘 때에는 간수 두 사람이 죄수의 양쪽 팔에 각각 손을 같이 묶고, 그 앞에는 따로 두 명의 간수를 세워서 보초를 서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중죄인을 지키기 위해서 네 사람의 시위대 군인들이 배당이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보초는 6시간씩 하루에 네 번을 교대로 하였기 때문에 최소한 바울의 곁에는 하루에 16명의 시위대 군인들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사도행전 28장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시위대 뜰 안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후에는 한 오두막집에 연금상태로 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한 명의 시위대 군사가 그의 팔에 쇠사슬을 같이 묶고 그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기록이 바로 행전 28:1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그리하여 바울은 처음에는 시위대 감옥에서, 후에는 한 오두막집에서 연금상태로 시위대 군사들과 함께 그 손에 쇠사슬이 묶인 체로 거의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3) 바울의 전도
그렇다면, 여러분, 그 때 바울이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행전 21,22,23장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이 때 바울은 성전 안에서 결례의 예를 행하다가 성난 유대 군중들에 의해서 린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 때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로마의 천부장이 부하들을 풀어 사태를 진정시키고, 몰매를 맞고 있던 바울을 가까스로 구해냅니다. 그런데 심하게 매를 맞아 거의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바울은 오히려 천부장에게 부탁을 하여 유대인들에게 다시 이야기 할 기회를 달라고 하여,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몰매를 맞아서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 놓았더니, 겨우 일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또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이것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감옥에 갇혀서 시위대 군사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여 있을 때에 무엇을 하였을 것 같습니까? 바울에게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바로 로마의 중심부에 들어가, 그 로마를 움직이던 사람들, 로마의 정신이요, 로마의 사상을 대표하던 젊은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간수들은 바울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처지라 아마도 꼼짝없이 바울이 전하는 바 귀한 복음을 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들도 바울이 파렴치범이 아니라,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양심수와 같은 사람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평범한 죄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대로 로마의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나의 매임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 복음의 진보가 시위대안 뿐만이 아니라 “기타 모든 사람들에게도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기타 모든 사람들이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여기에는 로마의 고관 대작들과 또 한 그 당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을 다 포함합니다.
먼저 행전 28장 17절 이하를 보면, 바울이 시위대 감옥에서 밖으로 나아와 연금상태에 있을 때, 그 당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아마도 회당의 지도자들일 것)을 그곳으로 초대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말한 기타 여러 사람들 가운데는 로마의 고관대작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에도 조금의 무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쇠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동시에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로마는 로마가 인류에게 남긴 3대 유물 가운데 하나가 로마법전일 정도로 법 행정이 아주 발달하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원로원은 바울의 재판하기 위하여 새로이 등장한 신흥종교인 기독교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바울과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조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의 법정은 피고가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 법정에 선 바울이 무슨 말로 자신을 변론하였겠습니까? 그가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살려달라고 하였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아그립바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이었습니다.(행전 26장) 그 때에 바울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은 바울이 너무나 많은 학문에 그만 정신이 돌았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바울은 “나는 미친 것이 아니며,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담대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즉 자기가 지금 이렇게 결박된 것 이외에는 모두가 다 나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렇게 가이사랴 법정에서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한 바울이 로마의 법정에서는 어떠하였겠습니까? 목숨을 살려달라고 구걸을 하였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증거를 마치려 함에 있어서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행전 20:2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외친바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고백대로 그의 모든 지식과 체험을 다해 로마의 법정에서 생명을 걸고 그리스도를 변론하고 증거 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그 결과 복음이 온 시위대 안과 로마의 고관대작들에게까지 전파되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의 가장 심장부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울을 통해서 담대하게 전파되어지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때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 받는 바울의 비범한 모습을 눈여겨본 많은 귀족들이 로마의 감옥에, 또는 바울이 후에 거처하고 있던 오두막집을 찾아 왔다고 합니다. 그 옛날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처럼 로마의 고관들이 밤중에 바울에게 찾아와 그가 전하는 복음을 더욱 자세히 듣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전 16:30)고 담대히 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런 모습이 바로 행전의 마지막 두절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2년)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전 28:30-31)
결국 바울로부터 이 복음을 들은 고관들이 가정에 가서 이야기하고, 친구에게 전하고...이렇게 해서 전파된 복음이 로마의 황궁과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렇게 시위대와 로마의 고관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진 결과, 주후 64년경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대 박해 때에 이미 네로의 삼촌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을 많이 순교케 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그 어머니와 딸들이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신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격스러운 것은 우리가 이런 기록들을 세상 적인 문헌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빌립보서 마지막 장을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마지막 문안 인사를 하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로마교회 교인들) 너희에게(빌립보교회 교인들)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의 집사람 중 몇이니라”(빌 4:22)
여러분, 여기 “가이사의 집사람 중 몇”이라는 말이 누구를 지칭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이들은 바로 황제의 친척들 내지는 로마 황궁에 있던 고관대작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주후 60년경 로마의 감옥에 이르러 그곳에서 시위대 안과 로마의 높은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후, 불과 300년쯤 지나 그 거대하고 교만하던 로마제국이 나사렛 목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정복되어 버리고 맙니다. 즉 주후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그때부터 로마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 즉 기독교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오늘 설교의 가장 중요한 결론적인 부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오늘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하나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3. 나의 당한 일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
그것은 바로 “나의 당한 일”, 즉 바울이 당한 일 뒤에 숨어 있던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제 바울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고, 그는 로마 법정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때는 이제 그의 로마에서의 옥중생활도 거의 끝나가고 있는 때입니다. 그래서 지난 일들을 가만히 앉아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바울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깨달음이 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쇠사슬의 매임이 결과적으로 오히려 복음의 큰 진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바울이 처음부터 이런 하나님의 귀한 섭리를 깨달았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보통 사람들같이 그가 감옥에 갇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으면서 시위대 군인들과 로마의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황제의 법정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면서, “아, 여기에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내가 감옥에서 몇 년을 지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 때문에 거의 4,5년이라는 세월을 나로 하여금 감옥에서 보내며, 그 온갖 고생을 하도록 허락하셨구나” 바울은 바로 이런 것들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그 고통스런 환경 뒤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귀한 뜻과 섭리를 비로소 인생 말년에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걱정을 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로 이 진리를, 이 하나님의 귀한 섭리를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들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이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까지 당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에는 바로 하나님의 귀한 섭리가 깃들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당한 그 일 때문에 복음의 대로가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임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로마의 가장 중심부인 시위대안에 복음이 전파되어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가 로마서에서 고백한 귀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것을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는 유언과도 같은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이는 그가 비록 감옥에 갇히는 그런 고난과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었지만, 바로 그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전파되어지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처음에는 이 고통과 이 시련의 의미가 무엇 때문인지를 몰랐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거기에는 그런 엄청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 이 귀한 진리에 비추어 저와 여러분의 삶을 조명해 보십시다. 아마도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가운데는 오랜 기간동안 어려운 환경 가운데 처하여서 답답해하며, 실망 가운데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도무지 왜 이런 어려움이 계속되는지를 이해하지를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삶의 환경이 사방이 꽉꽉 막힌 감옥처럼 느껴져, 절망 가운데 있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 그 답답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 조금은 속상해 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내 능력과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한숨짓고 있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병든 부모님 때문에, 자식문제 때문에 속상해하며, 남편 때문에 아파하며, 일터에서의 불편한 인간관계 때문에 힘든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어려운 환경과 역경 뒤에 숨어 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입니다. 저는 믿기는 우리의 환경과 여건이 아무리 어렵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바울의 감옥에 갇힌 상황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놀라운 복음의 진보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반드시 당신의 때가 되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물론 당하고 있는 그 순간에는 모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대부분의 우리들은 어려운 그 환경과 역경 속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섭리와 뜻을 결단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몰라도 좋습니다. 지금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나의 당한 일, 내가 당하는 고난과 실패, 내가 당하는 질병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일진데, 거기에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더 높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음을 믿고 의지할 것뿐입니다. 결국에는 당신께서만이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섭리대로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 50장의 요셉의 고백을 통해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형들로부터 버림받고 온갖 고생을 했던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행한 잔인한 행위 때문에 이제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했고, 결국은 상인들에게 팔아버린 형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창 50:20) “형님들은 나를 시기해서 죽이려 하였고, 나를 팔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대비케 하시기 위해서, 당신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님들과는 다른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창 45:5-8)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대할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올 한해를 살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III. 나가는 말
오늘 본문 14절에 의하면, 그 당시 로마에 있던 성도들은(“형제 중 다수가”) 바울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는 모습을 보고는 저들도 용기백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는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그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사가 잘못되어 가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쇠사슬에 매인 상태에서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보면서, 그리고 황제의 호위병들과 로마의 고관대작들이 복음의 검 앞에 거꾸러지는 놀라운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 나의 당한 일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동안교회 여러분, 혹 문제 가운데 있습니까? 고통 속에 있습니까? 그 문제가, 그 고통이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믿음으로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고통의 사건 속에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너희가 당하는 일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과 뜻하는 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담대하게 우리의 믿음의 무릎을 세우고, 믿음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 딛읍시다.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지금 내가 당하는 사건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음을 눈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갈 길을 나아가십시다.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을 보면서 “저가 그 일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자.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자”하면서 우리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제가 아까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년에 우리 민족은 참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도 그 시련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새해벽두부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그들이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당한 일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쳤을 때, 오히려 내게 좋은 기회가 생겼다고 외치십시오. 그리고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감사하십시오. 그런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있는 연약한 사람들, 아직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섭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맞아. 저 그리스도인은 그 어려움을 극복해냈어. 저 친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겁을 내거나 변명하지도 않고 이겨냈어. 저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고 따르고 싶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보입니다.
사랑하는 동안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가운데서 이런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 이 믿음으로 승리하십시다. 그리고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이렇게 외치십시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노라”고...
“나의 당한 일이 내게도 복된 일이 되었노라”고...
“나의 당한 일이 우리 모두에게 복된 일이 되었노라”고...
“나의 당한 일이 이 민족에게도 복된 일이 되었노라”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고난은 유익합니다
빌 1:12-18 / 석원태 목사
빌립보서 1장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 이 ‘고난’을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30)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한 ‘고난’이나 ‘싸움’은 빌립보 교인들이 현장에서 직접 본 사건들이요, 현재도 듣고 있는 사건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바울이 처음 빌립보에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울 때 일어난 핍박과 현재 그가 감옥에 투옥이 되어 있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그곳에서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실을 보았습니다(행 16장). 그리고 현재는 빌립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바울을 위하여 특별연보를 해서, 교회 대표로 ‘에바브로 디도’를 감옥의 현장에까지 보내어 교회를 대신하여 수종을 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빌 2:25, 4:16~18). 지금 사도는 자신을 중심하여 일어난 일련의 환난에 대하여, 이것이 오히려 유일한 하나님의 축복의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고난과 환난은 사실상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役事)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난은 유익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Ⅰ. 믿음의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1장의 결론을 지으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이 생기면 그때부터 그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고난이 일어나고, 생기고, 따라 다닙니다. 예수 믿는 그 시간부터 세상이 예수 믿는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누가복음 6장 22절에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때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는 시간이라고 하였습니다(눅 6:22b). 요한복음 15장 18~19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예수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 받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요 17:14). 예수 믿음 때문에 오는 고난은 특별한 고난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함이요, 그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과 권능에 참예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살후 1:5). 디모데후서 2장 11~12절에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말씀하였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혀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 8:18).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오는 고난이요, 영의 싸움이요, 환난인 것입니다.
Ⅱ.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화위복’이란 ‘재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고난은 전화위복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당한 일이 무엇인가? 바로 복음 증거 때문에 투옥이 된 사실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1장에 ‘나의 매임’이라고 하였습니다. 1장 13절, 14절, 17절에 이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도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골 4:3)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엡 3:1)이라고 하였습니다. 빌레몬서에도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몬 1:9, 13)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8장 20절에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장 20절에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전화위복인가?
1.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빌립보서 1장 12절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복음의 진보’란 ‘전진’을 뜻합니다. 이 진보(prokophv)는 원래 군대(부대)의 진군을 위해 길을 개척하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전파 때문에 당한 바울의 투옥은 복음의 문을 닫는 일이 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의 문을 광활하게 여는 결과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말한 복음의 진보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투옥되어 있는 온 시위대 안의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빌 1:13~14). 여기 ‘온 시위대 안’이란 로마궁실 내에 로마황제의 근위병들이 머물고 있는 병영을 말합니다. 당시 로마황제의 근위병은 1만 5천명 내외였는데, 어떤 황제 때에는 3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부대(部隊) 안에서 2년 동안 활동에 제재를 받고 머물러야만 했습니다(행 28:30~31). 이런 경우는 비교적 자유롭고,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자유로운 면담이 허용되었습니다. 다만 바울의 손에는 쇠사슬이 매여져서 죄수 바울을 지키는 로마의 근무병사인 간수의 손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수는 근무시간에만 바울을 지키기 위하여 묶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2년이 넘도록 그를 지키기 위하여 하루에 몇 시간씩 자신과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매임 때문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성령에 감동을 받고 ‘주안에서 신뢰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저들이 온 시위대 안팎에 사실상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매일 매시간 바울이 이 복음 증거의 경험을 맛보게 될 때 마침내 ‘담대함’까지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의 축복이 된 것입니다. 빛이 있는 곳엔 어둠이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비교적 만남이 자유로웠던 시위대 안에서 이러한 바울의 복음운동이 일어날 때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운동에 동참하는 자도 생겼습니다. 반면에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려고 순전치 못한 마음(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도 생겼다고 하였습니다(빌 1:15~18). 여기에 순전치 못한 다툼(당파심)의 사람들은 사실상 유대주의자들로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원수들인지 모릅니다(빌 3:18). 그럼에도 온 시위대 안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전화위복 때문에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고 소리쳤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매임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전화위복의 내용입니다.
2. 믿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25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18절은 사실상 바울 투옥의 의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빌립보서 1장 19~26절은 바울 생사의 의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말하면 한 가지뿐인데 살든지 죽든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시종이 여일하게 담대히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빌 1:20). 그 이유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 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삶의 주체가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갈 2:20). 그는 두 사이에 끼여서 고민하는 선택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고 싶은 더 좋은 욕망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빌립보교회 교우를 생각하고, 육신에 더 머물고 싶은 욕망이라고 하였습니다(빌 1:22~23). 그런데 아직까지는 이 세상(육신)에 더 머물러 있는 것이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더 유익하다고 하는 확신에 넘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빌 1:24). 그래서 빌립보서 1장 25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공동번역에는 이 구절을 「…이런 확신 때문에 나는 살아남아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켜주고, 기쁨을 더해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투옥은 결국 자신과 빌립보 교인들에게 ‘믿음의 진보’와 ‘기쁨의 진보’를 더해주는 유익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시 빌립보서 1장 26절에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바울이 감옥에서 놓여 빌립보 교인들을 다시 만나게 될 때,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 때문에 자랑할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투옥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믿음의 진보, 그 믿음의 진보에서 나온 기쁨과 자랑이 풍성하게 되는 전화위복의 축복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의 경향교회 개척과 목회 사역 중, 우리 교회가 만난 고난과 환난이 수없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잊을 수 없는 것은 서울 역전 동자동 기독교여자 절제회관에 모일 때의 일입니다. 교회 설립 만 2주년을 맞으면서 교회건축위원회를 발족시켰습니다(1975. 5. 25).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85년 8월에 경향가든 교회당 건축추진위원회 및 실무위원을 발족시키고, 신림9동(서울대 입구 관악산 기슭)에 3500여 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그해 12월 25일에 경향가든 교회당 신축기공예배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림9동 동민들의 결사적인 반대와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여건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그때 저의 고통은 실로 컸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현재 있는 경향복지재단 성민복지관 건물을 새로 짓게 되고(1994. 5. 7), 문산 눌노리에 있는 6만평이 넘는 크고 넓은 땅을 사게 되어 수양관과 신학교 건물을 세우게 되었습니다(1989. 7. 17. 건립기공예배, 1990. 9. 11. 수양관 및 신학교 입소, 1990. 12. 21. 공사완료감사 및 성탄축하예배, 1991. 6. 20. 경향수양관 고려신학교 아카데미캠퍼스 준공감사예배). 그리고 막혀버린 경향가든 성전의 문이 열렸습니다. 1994년 8월 27일에 학원인수와 함께 현재의 새 성전 신축을 결의하게 되고, 다음해인 1995년 7월 17일에 경향교회 새 성전 건립 기공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998년 5월 16일(교회 설립 25주년)에 역사적인 경향 새 성전 입당감사예배를 드리게 됨으로 바야흐로 경향교회 강서시대의 시작과 함께 21세기 세계를 받은 세계 선교의 기지로 새 도약을 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실로 전화위복의 축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신림9동에서 당한 그 고통의 환난이 오히려 문산의 수양관과 강서의 새 시대를 맞게 하는 크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당한 고통은 개인이나 우리 육신의 문제가 결코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나라 운동(교회) 때문에 겪은 시련이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고통이고 아픔이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어 오늘에 큰 축복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기독신자에게 오는 십자가의 고난은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 때문에 오는 고난이요, 복음 증거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바로 바울은 그가 당한 투옥의 고난이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빌립보 교인들과 자신에게 복음의 진보와 믿음과 기쁨과 풍성한 감사의 자랑이 넘치게 하는(빌 1:12, 25, 26) 전화위복의 축복을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섯 가지 환난에서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근 때 죽음에서, 전쟁 때 칼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에 능하신 분입니다(욥 5:18~2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때문에 겪는 무수한 시련과 고난은, 사실상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예고하는 우리 소망과 승리의 전령사(傳令士)가 됩니다. 그래서 성도(聖徒)는 죽음의 고난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변절하지 아니하고,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재기의 불사조가 되고 맙니다(잠 24:16).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기 때문입 니다(딤전 3:15). - 아 멘 -
전도의 기쁨
빌 1:12-18 / 김동국 목사
바울은 고난과 유혹 속에서도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부르심’을 견고케 하였습니다.
핍박과 유혹이 밀려와도 진실한 믿음을 지켜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은총이 여러분 삶에도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스티븐 코비는 자신의 저서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인생에서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올바른 길은 있다. 의미있는 인생은 속도와 능률로 얻어지는 게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존재 이유를 알고 있다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뚜껑 열린 스포츠카를 타고 다녀도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삶이요, 허탈하고 껍데기와 다름 없습니다.
단련 후 정금같이 나오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람, 사명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도 절대 지배받지 않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상황이 어려울 수록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더 높은 이상과 목적에 이끌려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분명히 알고 올바르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히는 불행한 일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감옥, 오해, 비난 등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자신만이 그 일에 책임질 수 있을 뿐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남을 헐뜯고 탓하며 자신의 잘못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책임지려 하지 않은 무심한 세태에 있습니다. 남을 탓한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설령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대신 살아 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바로 자신밖에 없습니다.
어느 공군 조종사가 비행 훈련과정을 끝내고 난 후 이야기했습니다. “처음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훈련생은 모두 58명이었습니다. 과정을 마친 후 신기종 전투기를 몰 수 있게 된 사람은 2명밖에 없습니다. 무한 경쟁 상태에서 치열한 싸움이 훈련소에서 일어났습니다. 생도들은 위기가 닥치면 교관들을 비난하고 시스템을 비판하기 일쑤였습니다.” 불만이 잦자, 편대장은 생도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했습니다.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를 찾고 있다면 먼저 거울을 들여다 보라.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만이 바로 성공과 실패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 책임은 바로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모든 훈련과정을 마치고 정식 비행할 기회가 왔습니다. 조종간을 향해 가는 그 조종사에게 편대장이 말했습니다. “이제 귀관도 자신을 책임질 때가 되었다. 행운을 비네.” 그는 조종 순간마다 편대장이 가르쳐 준 모든 것을 기억했습니다.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착륙 후 헬멧을 벗고 주변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처녀 비행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의존했던 유일한 사람,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얼굴에 입맞춤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모든 면에서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그분의 사랑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죽이기까지 핍박했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습니다. 그런 후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사도 중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도가 되게 하시고 복음 증거자로 세우셨는데, 감옥으로 보내졌다면 그곳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면 그것은 반드시 유익함도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울은 은혜를 근거로 감옥행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감옥에까지 찾아 오셔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복음의 진보’를 가져온 매임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을 입은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한 득실을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옥에 갇힘으로 인해 이방에 복음이 전해진 역사적 사실은 이득입니다.
한편으로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습니다. 특히 빌립보 사람들은 특별한 애정을 갖고 바울의 상황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손익계산을 점검한 후 당당하게 유익함을 주장했습니다. “나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그 증거로 두 가지를 들어 설명합니다. 우선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첫 번째 유익은 온 시위대 안에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시위대는 로마 친위대요, 시저의 직접 관할 내에 있는 부대입니다. 시위대의 젊은 군병들은 로마의 미래를 이끌어갈 엘리트 집단입니다. 그들은 중요한 죄수를 감시할 때 함께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아마 바울에게 그런 감시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루에 서너 번 교대할 때마다 젊은 군인들이 바울과 함께 발목에 착고를 하고 지냈던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복음 전도의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로마 군인들, 죄수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로마의 법은 바울을 묶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로마의 시위대를 착고로 채워 버렸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된 배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입니다. 바울은 경비 한푼 들이지 않고 로마에 갈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전도할 수 있도록 로마 정예 군사들도 붙여 주셨습니다. 법정에 설 때마다 바울은 자신이 갇히게 된 이유, 복음에 관한 것을 총독들과 가이사 앞에서 당당하게 변론하고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로 ‘자신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의 증거가 되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매임을 통해 얻은 두 번째 유익은 14절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예수의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환난을 겪게 되면 영적으로 침체하게 됩니다. 또 병에 걸리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성도 중에 어떤 분은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만 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치료한 후 회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 신앙생활을 못하는 겁니다. 집에 숨어 있고 가끔 목사님이 심방해 주면 그것으로 만족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분에게 복음이 찾아 왔습니다. 그것은 하 목사님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암에 걸리다니’하며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목사님은 암에 걸려도 교회를 위해 설교하고 봉사하시는데 자신도 얼른 교회에 가서 봉사해야겠다며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저도 당혹스러운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찾아와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었는지 서로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중에 갑자기 자매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고 물었습니다.
“목사님도 부부 싸움하세요?”
저는 갑작스런 질문에 어찌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시인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자매는 목회자도 부부싸움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목사님 부부도 싸우는데 우리 부부가 싸우는 건 당연한 것 아니에요?”하면서 위로 받는 눈치였습니다. 그 자매가 위로 받는 것을 보니 때로 부부싸움은 필요악인가 봅니다.
고난 속에서 ‘예수 자랑’
우리가 선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 때로 고난이 닥쳐옵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도둑처럼 찾아와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그럴 때 마음 속에는 온갖 어려움으로 가득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 합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이 어떻게 선한 싸움에서 승리했는지 아담부터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 11:36~37)
선조들의 승리는 찬란한 영광만이 아니었습니다. 피나는 고난을 통과한 후에 승리가 있었습니다. 계속 히브리서 저자는 외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우리가 고난의 때, 낙망의 때에 진정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그 묶임을 복음의 진보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육체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마음은 믿음으로 자유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고난을 당한 경험이 있다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 고난은 바울과 같이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공한 일로 칭찬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합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 칭찬을 듣는다면 오직 올바른 길을 선택한 믿음의 사람들뿐입니다.
고난이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고난이 명예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만큼 세상은 변하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 믿는 자의 자랑입니다. 바울은 “나의 매임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고 고난받는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었다”고 자랑했습니다.
은혜도 전도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
매임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도 가져다 줍니다. 어떤 형편, 정황과 싸우는 게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싸우는 게 더 힘든다는 사실을 15~18절 말씀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순전치 못한 자들은 얌체와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복음을 전한 게 아니라 교회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선교 단체를 증거한 것입니다. 순전치 못한 자들은 다툼을 갖고 경쟁적으로 복음을 증거한 자들입니다.
특히 바울이 몸담고 있는 선교 단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여러 번 맞아 가면서 동역했던 많은 무리들을 순전치 못한 자들이 꾀고 미혹해 데리고 간 것입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 아파했습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어 마음껏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는 것도 답답한데, 애써 양육한 사람들을 하나 둘씩 떼어 가는 순전치 못한 자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내면을 정리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노라.” 바울은 순전치 못한 자들마저 사랑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위에서 자신을 부르신 부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볼 줄 알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죄인도 사도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신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일을 이루시겠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시면 틀림없이 훌륭한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가 하나님의 복음 전도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는 항상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자신의 특권과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림으로써 감옥에서도 하나님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쓰고 싶은 욕망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주인공 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이라는 육체의 억압을 믿음으로 이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싶은 유혹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승리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핍박에서 강해질 뿐만 아니라 승리하여 어떤 유혹에도 진실한 마음을 지켜 하나님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은총이 삶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빌 1:12-18 / 고흥식 목사
인생길은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가는 길입니다. 내 가족도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살아 줄 수 없지만 내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붙잡고 가는 길, 그 여정이 인생 아닙니까? 그러므로 내 갈 길을 바르게 찾는 작업,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본능의 충족을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시를 외면하고 삽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살 때는 내 사명,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걸어 갈 방향을 정하고 삽니다. 이것은 믿음이 나를‘디자인’해 주는 삶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내가 어떻게 살아야 귀한 삶을 살까? 내 삶에 아름다운 믿음이 디자인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네 믿음대로 되라!”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오늘가 어떤 도모를 가지고 왔습니까? 계획된 목표가 내 생각대로는 안 되지만 주님이 말씀 위에 축복해 주시면 능히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산다고 자신의 사명을 선언할 줄 아는 귀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 몸, 가정, 환경, 자녀, 직장 일터에 대한 것을 주님이 다 붙잡아 주십니다.(마 6:33) 찬송가 345장에 보면 ‘주 하나님 늘 믿는 자 그 집이 든든하고 주 예수를 의지하니 천국이 내 것이라...저 원수들 길 막아도 나 용기 보이리니 내 주 예수 권능으로 원수를 물리치리...주 내 친구 참 위로자 늘 나를 도우시니 이 비천한 내 삶에서 주 의지하옵니다’ 주님께 내 삶을 온전히 의탁한다는 이 찬송은 바흐(Bach, Johann Sebastian)가 작곡한 것입니다. 바흐는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자신을 맡아 키워 주던 형에게도 버림받습니다. 고아처럼 자라다가 마리아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7번째 자녀를 낳는 날 아내는 아이를 낳고 죽었습니다. 다시 안나 라는 여인과 재혼하여 아들만 11명, 딸 9명을 낳지만 그 중 10명은 어려서 죽고 자녀 중에 정신박약아도 있었습니다. 노년에는 장님이 되었고 설상가상 뇌일혈로 인해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이 때 바흐는 앞은 보이지 않고 몸은 반신불수라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합니다. 이 시기에 만든 찬송곡이 모두 불후의 명작이 되었습니다. 바흐는 자신이 작곡한 모든 곡의 끝에는 ‘S.D.G’(Sola Deo Gr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라는 사인과 또 오르간 연주곡을 만든 후에는 ‘I.N.J’(In the Name of Jesus ‘예수 이름으로’)라는 사인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생이 불행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의 음악가 중 존 세바스 찬 바흐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후손들 중에서 50명의 위대한 작곡가, 음악가가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이런 신앙의 힘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름다운 인생을 디자인 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과 사명에 장미꽃을 피게 하는 것!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면 성도는 이 땅에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나님의 역사와 자취를 남기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자취입니다. 이것을 전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를 이 시간에 세워 주신 줄 믿습니다.
첫 번째, 황무지를 진보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2절). 나의 당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웠겠습니까? 사람들은 바울이 감옥에 들어간 것을 보고‘저거, 그럴 줄 알았다.
죄 때문에 들어갔지’비난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감옥에 들어간 것이 바울에게는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고통스러운 세월에 담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믿음 있는 사람은 담력을 얻게 됩니다. 흐린 날 우리가 보기에는 하늘이 우중충하지만 고도 만 피트, 삼만 피트 이상 올라가면 청청한 하늘에 태양빛만 비춥니다. 대기권을 뚫고 나가는 로켓은 영원히 우주를 도는 인공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적을 때는 서로 도토리 키재기 이지만 믿음이 강해지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생애에서 때론 고통의 황무지, 실패의 황무지, 일터의 황무지를 만나도, 오히려 복음의 진보의 기회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모세는 세계 최강국 이집트의 왕자의 신분이었으나 나이 40세 인생의 최적기에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광야로 도망가서 먹고 살려고 한 여인의 집에서 목동생활을 합니다. 40년 동안의 고통의 세월을 보낸 후 그는 200만 명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요, 구약의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기간만큼 40년 목동의 생활을 40년 기도의 생활로 바꾸었습니다. 황무지 인생을 통해서 오아시스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38세에 실업자가 되어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지만 50대에는 가장 능력 있는 대통령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한 숟가락의 꿀을 먹으려면 꿀벌은 4000번을 왕복해서 모아야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는데 8년 동안 2000번의 스케치를 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 오히려 진보가 될 줄이야!
두 번째, 황무지를 가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외적으로 내적으로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했습니다. 영원한 것, 썩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한나라는 여인이 너무 괴로웠습니다(삼상1:10). 자식이 없는 한나를 브닌나가 얼마나 괴롭히는지...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만 의지해서 결국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귀한 아들 사무엘과 5남매를 더 주셨습니다. 야곱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아버지께 축복기도를 받은 것으로 인해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외삼촌의 집에 가서 결혼도 하고 부자가 되어 이제는 근심, 걱정이 없게 되었다고 안심할 쯤 외동딸 디나가 세겜 추장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원수를 갚기 위해 세겜 추장에게 제의를 합니다. 서로 결혼을 시켜서 사돈을 맺되 하나님을 믿는 풍습에 따라 남자들이 할례를 받도록 시키고 그들이 아파서 꼼짝하지 못할 때 모두 죽여 버립니다. 원수를 갚았다고 좋아하는데 세겜과 연합하고 있는 종족들이 쳐들어옵니다. 자신의 인생이 잘못된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야곱이 깨달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벧엘로 올라가는 일이었습니다.(창35:1,3) 자신의 죄를 청산하고 자신을 정결케 합니다. 의복을 바꿉니다. 내 생에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빨리 돌아보고 정결케 해야 합니다. 옛 방식, 구습대로 살면 안 됩니다.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야곱을 추적하는 자들이 없어졌습니다(창35: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가치 있는 일은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공연히 나이가 들고 늙어지면 누구 말 한마디에 괜히 서운하고, 병이 들면 사소한 한 마디의 말에도 마음이 아픕니다. 실직을 하면 사소한 일에도 크게 절망합니다. 평상시에는 밥 한 끼 안 먹어도 괜찮은데 실직한 후에 밥 한 끼 안 먹으면 ‘내가 아무 것도 못 벌어오니까 밥도 안 주는구나’하며 가족들의 한 마디 말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참 가치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가치는 우리 하나님을 붙잡는데 있습니다. 인생의 황무지를 만나도 시시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참 가치 있는 것, 우리 하나님만 바라보고 오직 신앙으로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황무지에서 복된 미래의 목표를 보고 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황무지를 만나면 ‘내가 왜 감옥에 들어갔을까? 내가 왜 실패했을까? 내가 왜 이렇게 몹쓸 병이 들어? 왜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을 주셨을까?’한탄합니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고 방종하는 사람, 남을 원망하며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이 있고, 극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돛을 올리고 방향만 잘 잡으면 오히려 바람이 불 때 돛단배는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풍랑을 당해 좌초되지 말고 내 믿음의 돛, 기도의 돛을 올리시길 축원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고 병이 심각해지니까 주위 사람들이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바울은‘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말합니다. 오늘날 바울의 이름이 위대하게 우뚝 선 것은 복된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빛납니다.
그림자가 짙다는 말은 햇빛이 강하다는 말입니다. 무더위가 극에 달하면 가을이 곧 다가옵니다. 어둠이 지나면 새 날이 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광야를 가는 백성들을 보면, 고통스럽던 애굽을 떠나 왔지만(출3:7-8) 모세를 원망합니다(출14:10-12). 미래가 없는 사람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도 여전히 옛날 방식의 사고를 합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 복된 미래를 보는 사람은‘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저것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내일” 이라는 시간을 우리는 오늘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황무지에서 복된 미래를 보는 눈이 열리시길 바랍니다. 역경을 만날 때 불평하지 마십시오. 좌절에 빠지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으면 모든 것이 선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나의 환경을 기뻐하십시오.
환경을 초월하여 기뻐하십시오
빌 1:12-18 / 문기태 목사
사람들은 행복을 결정하는 요소중에 환경을 절대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환경이 나아지면 행복하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환경을 바꾸는데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거환경을 바꾸므로써 행복해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녀들을 위하여 교육환경을 바꾸어주면 저들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모두들 아무 문제가 없고 갈등도 없는 환경으로 바뀌어지면 완전행복을 맛보며 늘 기쁘게 살게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환경을 개선함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어진다고해서 기쁨이 넘치게 되고 행복하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저절로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세계 최대의 가전회사인 일본의 마쓰시다 그룹을 창업한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일본 최고의 기업가입니다. 무려 71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거대한 그룹입니다. 어느날 니혼게이자이 신문의 기자가 마쓰시다씨에게 물었습니다. "회장님은 남들과 무엇이 달랐기에 이처럼 71개 계열사에 종업원 13만명을 거느린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 수 있었습니까?" 마쓰시다 회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남들보다 세 가지가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첫째, 무척 가난했습니다. 둘째, 몸이 약했습니다. 세째, 머리가 남들보다 모자랐습니다." 기자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듯 갸웃거리자 웃으면서 부연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세 가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 가난했기에 어릴 때부터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등을 하며 세상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몸이 약했기에 항상 운동에 힘써 늙어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해 무식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모두 나의 스승으로 여기고 언제나 배우는 자세로 임하면서 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환경에서만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기쁨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문제가 없어지는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는 문제가 끝없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나쁜 환경에서도 기뻐하며 사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 둘러쌓여 살면서도 기쁘게 사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바꾸어 주시는 것보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환경이 바뀌어져도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게 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지혜, 기쁘게 사는 능력이 환경이 아니라 다른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좋은 환경에서 산 사람이 누구일까요? 아담과 하와입니다. 에덴동산처럼 완벽한 환경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곳에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는 행복했을까요? 진정으로 만족했을까요? 아담과 하와는 완벽하게 좋은 환경에서 살았지만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사단의 꾀임에 넘어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나쁜 환경에 던져졌으나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억제하기 힘들만큼 기쁨으로 충만하였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억울하게 고발당하여 죄가 없음에도 감옥에 들어가 미래가 불투명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기쁨이 충만했스니다. 감옥에서 기쁨이 넘쳐 빌립보교회에 보낼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빌립보서는 기쁘으로 가득찬 편지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18절에도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의 비밀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감옥밖에서 자유롭게 사는 데도 불행하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갇혀 자유를 빼앗겼는데고 행복한 것입니까? 왜 어떤 사람은 아무런 억울할 일이 없는데도 하나도 기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벌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둘러 쌓여 있을 때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1. 주안에서 살면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3)
왜 실망하고하고 근심합니까? 환경만 보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감옥의 불편함만 바라봅니다. 사업을 어렵게 만드는 부정적 요소만 바라봅니다. 질병으로 인해 고통스럽고 불편한 몸만 생각합니다. 갈등으로 인해 불편한 관계로 힘든 것만 불평합니다. 가정환경이 순탄하지 않으로 겪는 아픔만 바라봅니다. 모두가 그 황무지 같은 환경에 집착을 해 버립니다. 그것이 크게 보입니다. 손에 가시가 박히면 신경이 온통 그곳에 집중하듯이 우리 인생은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 어려움만 바라보고 생각이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각이 환경의 포로가 되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보십시오. 자신의 환경은 지금 감옥입니다. 감옥밖에서는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바울의 기쁨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13절에 있습니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말했습니다. 매임이란 감옥에 갇힌 것을 뜻합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지내나 그리스도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이라는 괴롭고 불편한 환경에 처했으나 그리스도안이라는 아름다운 환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처럼 나쁜 환경에서 지내는 처지였지만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 도다. [후렴]할렐루야 찬양 하세 내모 든죄 사함받고 주 예 수와 동행하니 그어디나 하늘 나라 3.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사실 모든 사람이 다 불리한 환경, 어려운 환경,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중심으로 바라보며 낙심합니다. 슬퍼합니다. 괴로와합니다. 심지어 가장 고귀한 신앙까지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바라보면 기쁨이 밀려옵니다. 불행한 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처할수록 그럼에도 나는 주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십시오. 늘 환경을 보고 탄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주 불평합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기적으로 건너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흘길을 가서 또 불평과 원망에 사로잡힙니다(출15:22-26). 물이 없습니다. 마라에 이르렀는데 쓴물이 나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원망합니다. 왜 그런 반응을 보였습니까? 눈앞의 환경이 어려운 것만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시며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과 완벽한 축복의 땅으로 가는 과정임을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원망 불평을 합니다. 결정적으로 가나안 땅이 눈앞에 펼쳐진 가데스 바네아광야에 섰습니다. 무수히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을 하고 거기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여전히 황무지만 보고 있습니다. 환경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근심합니다(1) 욕구불만의 포로가 됩니다.(2) 좌절하고 비판합니다(3,4) 그러나 환경을 보기보다는 그 환경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민14:8-9절을 보십시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기대를 가지며 기뻐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가 문제이지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결과를 주십니다. 그 결과는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바울은 불리한 환경이 오히려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줌을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경이, 황무지같은 환경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영적 유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기뻐해야 합니다. 역경을 만날 때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결국은 나의 유익이 된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오히려 황무지같은 환경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2. 주를 위해 살면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8)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이 일이 내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는가? 또는 손해를 가져다 주는가? 를 먼저 따집니다. 내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이 들면 속이 상하고 불행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고수하다보면 불행한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사소한 것에도 손해본 것 같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때문에 서로 먼저 양보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며 살려면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꺼이 손해를 보는 것도 감수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며 살려면 내가 먼저 희생해야 하고 내가 다 내려놓고 사랑으로 섬겨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섭섭해도, 억울해도, 손해를 보았어도 예수님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생각하고 참아야 합니다.
바울이라고 불쾌하고 섭섭한 감정이 없었겠습니까? 지금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바울을 비난하고 공격하였습니다. 바울이 갇혀서 마음대로 복음을 전할 수 없음을 알고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17) 바울을 괴롭히는 이들이 교회안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많아지면 바울을 따르는 이들보다 더 세력이 강해질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생각을 바꾸어 그리스도인이 더 많아지는 것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또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동기는 그릇되었지만 무슨 방도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생각하며 기뻐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많은 제자들이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신뢰하며 겁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늘 유약해보이고 바울을 의지하던 제자들이 바울이 갇힘으로 인해 강해졌습니다. 바울의 뒤를 이어 사역을 잘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관점을 바꾸어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것입니다. 기쁨이 더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면 불안한 일, 화나는 일, 속상한 일, 섭섭한 일, 짜증나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서 '이 일이 예수님께도 손해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 치명적인 손해가 되는가?' 하고 따져보면 기분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기분이 나쁘고 속이 상하는 일도 생각을 바꾸어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면 다 별거 아닙니다.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더 유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면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공격앞에서도 여유있게 웃을 수 있습니다. 사단이 간교하게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성도들을 이간질하고 우리의 기쁨을 도적질하려고 공격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내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면 근심을 이기고 항상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쁨을 잃어버릴 위기를 만나면 생각을 바꾸세요. 자기 유익을 앞세우며 바라보던 시각을 예수님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며 바라보는 시각으로 바꾸십시오.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던 것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면 기쁨을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더욱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난 고난을 사용하셔서 주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내가 힘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고자 어렵게 씨름하는 것을 통해 복음의 큰 진보가 되고 있습니다. 주를 먼저 생각하며 기뻐합시다.
여러분 부유해져야 행복해 질 것이라는 환상을 깨뜨려 버리십시오. 지금보다 더 좋은 자리에 앉으면 행복해 질 것이다.라는 생각도 던져 버리십시오. 좋은 옷을 걸치고, 좋은 차를 타고,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지면 훨씬 행복해 질 것이다.라는 생각은 다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당장 우리 모두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살면 늘 기쁨이 충만해지고 행복합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던져져도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살면 행복합니다. 나아가 주님을 위해 살면 행복해집니다. 나를 위해 살려고 하지 말고 주를 위해 살려고 하십시오. 주께서 나를 위하고 책임져 주십니다.
나의 당한 일과 복음의 진보
빌 1:12-21 / 이필재 목사
지금 로마에 가시면 ‘세 분수 성당’이라는 교회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곳은 바울 선생이 순교 당하던 자리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바울이 순교를 당했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교회를 건축했는데, 그 이름을 ‘세 분수 성당’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자리에 바울을 꿇어앉히고 집행관이 목을 쳤는데 떨어져나간 바울 선생의 머리가 세 번 크게 뛰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뛴 자리에서 이상하게 분수가 물을 뿜어내듯 난데없이 물줄기가 세 번이 솟아 나와서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 분수 성당’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빌립보 성경을 옥중서신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로마 옥중에서 기록해 빌립보 교우들에게 전달된 편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간다고 마음먹고 선교 여행을 떠났을 때 그 땅 끝이 로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18절을 보시면 감옥에 있는 사람이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런 말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원했던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로마로 올 수 있었는가? 사도행전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아주 마음이 급합니다. 어서 빨리 다니며 복음을 전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시켜야 되겠는데 몸은 하나이고 할 일은 많은데, 더욱 답답한 일이 생겼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서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시간을 다투는 사람이 감옥에 갇혀서 2년 동안 꼼짝 못하고 있으니 바울은 무척 속이 탔습니다. 빨리 이 감옥에서 나가 복음을 증거해야 할 텐데 나갈 수는 없고 또 밖에 나가면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게 있으니 나갈 수도 없고 안 나가자니 그렇고 내보내 주지도 않습니다.
이때 바울 선생의 머리에 아주 반짝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로마에 갈 수 있는 길이 당장 열리는 방법이 생겼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재판을 로마에 가서 받겠다고 상소를 했습니다. 지금 한국의 시민권자도 외국에 가서 죄를 졌을지라도 한국으로 와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여기서 죄를 지었지만 본국에 가서 재판 받을 수 있는 협정이 국가간에 되어 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은 지금 세계 어느 나라 시민권보다 훨씬 힘이 있던 시절입니다. 바울은 이 시민권을 몇 번 잘 사용하는 기록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난 후에 “이제 나가라!” 석방을 하니까 사도행전 16장 37절에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그럴 수 없다. 안 나가겠다.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큰소리를 한번 쳤습니다. 로마 시민권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때린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아주 벌벌 떱니다. 제발 나가달라고 막 사정을 합니다. 이유는 로마 시민권자라는 말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나는 로마 시민이므로 나에 대한 재판은 여기서 받을 필요가 없다. 로마에 가서 받겠다.” 절대 거절 못합니다. 그것을 거절했다가는 로마와 관계가 나빠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가게 됩니다.” 276명이 함께 배를 타고 로마로 가는데 죄수를 호송하는 배이기 때문에 삼엄하게 군인들이 경계를 합니다.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대장이 지휘관으로 군졸들을 거느리고 죄수들을 감시하면서 로마로 죄수 호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일단 바울의 당한 일을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그가 로마에 가고자 했던 일은 로마는 당시 세계 역사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복음으로 로마를 점령하면 세계로 확산되는 힘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만약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그가 감옥에 갇히는 고난의 역사가 없었다면 그는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로마를 이렇게 쉽게 갈 수도 없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2년이란 시간을 고민 고민 하다가 얻어낸 생각이 막 떠올라 바로 로마행으로 연결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당한 일이란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히는 죄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로 취직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요 관광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감옥으로 죄수가 되어 재판을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끌려갑니다. 그런데 그는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기쁠 것이 하나도 없고 슬픈 일만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 기쁘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의 삶의 목적 때문에 오는 기쁨입니다. 바울의 삶의 목적이 오늘 말씀 2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의 삶의 목표가 복음 전파인데 지금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업 성공이라든가 권세나 명예 위주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지금 최고의 인생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고 감옥에 가도 괜찮고 혼자 살아도 좋습니다.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그 일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최대의 성공이라고 믿고 있는 삶의 철학 때문에 지금 그것이 나에게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몇 가지 신앙 고백에 그것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방인 전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도이다.” 그렇게 자신이 고백했습니다. 유대인이 볼 때 로마 사람은 이방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이방 선교를 위해 부르신 사람이기 때문에 이방 세계에 온 것이 나의 삶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바라고 원했던 내 삶의 목표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또, “나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이다.” 자기의 인생을 그렇게 결정지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복음 전파는 나의 팔자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해진 팔자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성서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 전파 중지는 하나님의 저주를 초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삶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당한 일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밧줄에 묶여 있고 시간적 제한으로 풀어주는 죄수로 로마를 가고 있지만 그의 영혼은 너무나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기분으로 항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큰 고난이 그에게 닥치게 됩니다. 바다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로마까지 바다를 항해하려면 그 거리가 얼마인지 우리가 대략 짐작을 합니다. 더구나 그 시절의 배는 모두 바람을 이용하는 돛단배입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서 가라앉을 것 같으니까 최후 수단을 쓰는데, 배에 있는 모든 짐을 다 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만 남고 배에 있는 모든 짐을 다 바다에 버렸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성경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로마행은 좌절되고 바다에서 모두 죽고 마는 것인가?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바울이 죽음에 떨고 있는 275명에게 큰 소리로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죽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사실 그 배는 바울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당한 고난의 역사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그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생사의 앞날을 예언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정말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멜리데 섬에 무사히 다 상륙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바울의 존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들이 표류하다가 상륙한 멜리데 섬은 토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토인들이 이들의 고난을 보고 도와주려고 나뭇가지를 가지고 와서 불을 피워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276명의 죄수와 그 군졸들이 다 마을로 내려가 폭풍우 때문에 온통 비에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도록 모닥불을 피우며 도와줘 모두 불을 쬐고 있는데 그 모닥불 속에서 독사뱀 한 마리가 팍 튀어 오르더니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울을 물었습니다. 그 뱀이 어떤 뱀인지 사도행전에 토인들이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 28장 4절에 보면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그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쓰러져 죽은 줄 알았는데 바울이 태연하게 뱀을 집어서 불 속에 집어 넣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말씀에는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이라고 하는 죄수는 276명과 멜리데 섬의 토인들에게 사람이 아닌 존재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이제 바울과 함께 로마에 들어가는 276명은 모두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전도를 하기에 하나님이 이런 일을 다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로마에 들어가서 바울을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 선생이 당하는 모든 고난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들어있도록 그렇게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울이 그것을 볼 수 있는 영적 능력과 사도적 관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실패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다면 모든 고난의 삶이 선교적 의미로 변화하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왜 독사뱀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울에게 와서 물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빠진다 하여도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고난스럽게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아니하고 나에게 주시는 인생의 유익한 과정이라고 믿음을 정리하면 그 자체가 고난이 아닌 기쁨으로 변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필요한 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선교적 의미로 해석하는 능력, 그것이 오늘 말씀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유라굴로 광풍과 독사뱀에 물린 사건으로 바울 선생은 신적인 권위가 생기는가 하면 그 모두를 구원하는 선교 역사가 배 안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배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게 되었는가? 시위대와 가까운 곳에 있게 되었다고 오늘 성경말씀에 있습니다. 이 시위대란 무엇인가? 특정지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왕궁마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중국에 가면 옛날 임금님이 살던 곳을 관광지로 만든 곳이 있는데, 그 마을 전체가 한 도시로 구성이 되어 왕궁에서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말고 다른 세상에 절대로 나가지 아니해도 그 안에서 삶의 넉넉한 필요를 다 충족시킬 수 있는 소규모의 특정지구를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시위대가 바로 그런 특정지구입니다. 왜 이런 특정지구가 필요하였는가? 임금님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임금은 좋은 자리도 되지만 반대파가 많아서 언제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 요소가 항상 따라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옛날 임금님들은 이런 특정지구를 만들어서 자신이 신임할 수 있는 모든 귀족들을 거기 와서 살게 하고 자신도 안전하게 하는데 보통 시위대 안에는 로마의 1만 명에서 1만5천 명 정도의 친위대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모두 함께 모인 특정지구, 그 가까운 곳에 바울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276명의 죄수들은 바울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미 다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로마에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율리오 백부장 즉, 바울을 죄수로 감시하면서 끌고 가던 친위대 대장에게 자기 임무를 보고할 때 바울 죄수에 대한 이야기를 제일 큰 보고 자료로 말했을 것입니다. 배로 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 여기까지 백부장이 오게 된 일, 그 안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전부 소상하게 율리오가 책임상 상부에게 보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위대 안에 바울의 소문은 금방 퍼졌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냐?” 너도나도 바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아예 시위대 근처에 있게 했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도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바울이 죄수가 아닌 평민으로서 자신의 외교적 능력을 발휘해서 로마 시위대와 접촉을 시도를 했다고 합시다. 로마의 시위대가 예루살렘의 죄수를 왜 만나줍니까? 도저히 만날 수 없습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바울이 광풍을 만나지 않고 그냥 죄수 신분으로 재판을 받았다면 누가 그를 기억하라 것입니까? 바울은 변호사도 채용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이스라엘에서 로마까지 오는 배 삯도 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죄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짜로 로마까지 배 삯도 내지 않고 왔고 광풍 때문에 권위가 높아졌습니다. 바울의 소문은 로마 황제에게까지 큰 관심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시위대장이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온 나라에 금방 관심거리로 퍼져나갔습니다. “뭐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요란하냐?”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전파합니다.” “그가 전하는 예수가 도대체 누구냐? 말하게 하라!”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시위대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단 말입니다. 여기 바울 선생은 “온 시위대 안에 복음이 가득하게 되었다.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로마가 주후 313년에 결국은 기독교 진리에 굴복하여 그토록 핍박하던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하지 않습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로마에는 빈민층 못지않게 권력층이 먼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 줄을 타고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영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로의 박해 때에도 그의 삼촌과 친척들은 이미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는 그의 어머니와 딸들이 기독교인이 되어 왕궁 복음 전파에 공헌을 했습니다. 주후 313년에 로마에는 기독교인이 7퍼센트 밖에 안 되었는데, 기독교 국교 선언이 가능했던 것은 권력층이 이미 다 복음화 되었기 때문에 그 밑의 사람들은 아무 소리를 못합니다. 바울의 선교 계획에는 하나님의 관심과 인도가 세밀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그렇게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인도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똑같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와 똑같은 역사를 진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에 신앙적으로나 육신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에 대해서 편견적이고 주관적인 괴로움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시간이 급한데 감옥 안에 묶어있는 안타까울 때가 있을 수 있고, 어떤 때는 그렇게 많은 기도를 드렸는데 오히려 광풍이 밀어닥쳐 사업도 가정도 건강도 명예도 침몰위기를 만나는 듯한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대로 내 인생의 종말인가? 바다 속에 묶인 채로 빠지는가?’ 그런 절망감을 느끼는 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의 고백을 보시면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살던지 죽던지”라고 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살고 죽는 문제까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겠다는 영적 결단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 의사가 하나도 반영이 되지 아니한 현실이 나의 주변에 있다 하여도 하나님의 백성은 낙심하거나 절망은 하지 마십시오. 내 주변에 있는 이 많은 고난의 역사는 바울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선교적 의미가 나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제일 목표와 철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살든지 죽든지 가난하게 살든지 부자로 살든지 외롭게 살던지 아니면 풍성하게 살든지 어떤 경우가 닥쳐온다 하여도 나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목표에서 나의 삶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확고부동한 사도적 관찰이 내 영 가운데 있을 때 바울 선생과 같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사람이 어찌하든지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죽어도 괜찮다.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왜냐하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교적 의미가 내게 지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로마가 죄수 하나를 당하지 못하고 결국에 가서는 굴복하여 기독교 국가가 되어 지금도 교황청이 로마에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죄수는 쇠사슬에 묶여 로마 감옥의 죄수로 갔고, 유라굴로 광풍에 침몰 위기와 독사뱀에게 독침을 받아야 했던 바울,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던 것처럼” 어둡기만 한 지금의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그 결과가 하나님의 섭리론 가운데서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을 믿으면서 사도적 관찰로 여러분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피는 기쁨이 오늘 이 말씀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울 선생은 우리 육신적 잣대로 평가해서 하나도 기쁠 일이 없는데도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그랬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인데, 그것이 지금 자신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영적 능력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난을 기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내 의사로 되지 아니한 모든 부분에 대해서 날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데 성령께서 우리들 영혼을 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바울 선생과 같은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오늘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복음의 진보를 보이라
빌 1:12-21 / 민경설 목사
세상 삶의 철학은 성장과 발전과 진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한 단계 좋아지고 높아지고 하는 것이 삶, 학문의 목표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성장과 발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발전이나 진보가 당장은 유리한 것 같지만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 즉 근본적 문제에는 해답을 내리지 못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심판과 영생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전6:12) 하나님의 은혜, 예수가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이 진보되어야 한다.’ 복음의 진보는 내 속에서 예수님의 역사가가 크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1:12-1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 속에서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주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복음의 진보는 인간의 노력, 즉 전심전력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복음의 진보가 일어날 때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 안에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복음의 진보가 내 속에서 일어날 수 있지 복음의 진보가 일어날 때 축복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복음의 진보는 나는 못하고 주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일어납니다. (빌1:12)“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를 깨달은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나는 할 수 없고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증거이며 주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때로 어려운 상황을 주십니다. 욥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깨달은 것은 귀로 듣기만 하던 주님을 눈으로 뵈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복음의 진보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2. 복음의 진보는 어떤 환경도 복된 환경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빌1:14-18)“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내 속에서 복음의 진보가 일어날 때 복된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일도 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면 어떤 일이든 주님이 하시기 때문에 복된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3. 복음의 진보는 진정 나 자신의 유익입니다. (빌1:19-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 인간은 자기 뜻대로 안되면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 유익하려면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대로 되기 원해야 합니다. 예수가 나타나면 나는 죽어도 내게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슨 진보를 시키기 위해 삽니까 그곳에 인생의 해답이 있어 당신을 복되게 합니까 오직 우리에게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 안에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는 광진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신다면
빌 1:12-21 / 안효관 목사
20세의 가장 유명한 설교가 가운데 한 사람인 아이언사이드(H. A. Ironside 1876-1951)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어렸을 때에 너무 가난해서 구두방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구둣방 주인은 아주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주인은 구두 하나를 만들 때마다 아주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어린 아이언사이드가 주인에게 “주인 아저씨, 대충대충 만들지 왜 그렇게 정성을 들여 만드세요?”라고 묻자 구둣방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구두를 만드는 것이 아니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구두를 만든단다.”
신실한 믿음으로 사는 구둣방 주인은 구두 하나를 만들 때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기 위해서 만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만든 구두는 확실히 달라”라고 사람들이 인정해 준다면 바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언사이드는 그 구둣방 주인의 신앙과 신실함에 감동을 받고서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 우리의 말투 하나하나를 통해서 세상에서 존귀함을 받으시고자 우리를 자녀로 택하셨고, 우리에게 때를 따라 적절한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을 입은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게 저의 소원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라면 나는 사는 길을 택할 것이요, 죽는 것이 주님을 존귀케 하는 것이라면 나는 죽음의 길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바로 그런 아름다운 인생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전통적으로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서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본문 13절의 “시위대에 매여 있다.”는 언질과 4:22절에서 “가이사 집 사람 중 몇 사람이 너희에게 문안한다.”는 표현으로 보아 로마 감옥에 갇혀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비록 지금 감옥에 갇혀 있기는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기쁨은 세상에서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이라고 하는 어두운 현실적인 암담함을 뛰어넘는 - 세상의 환경이나 여건을 초월한 기쁨이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샘솟듯 솟아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4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감옥에 갇혀 자유가 박탈당하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음에도 왜 바울은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지금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서 존귀함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신다면 감옥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갈 각오가 되어 있기에, 그는 감옥이라는 어둡고 두려운 현실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내 삶의 모습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장 속에 내던져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존귀케 되신다면 그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현실 속에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현대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곡을 할 때 먼저 원고지 앞 여백에 ‘I.N.J'라고 썼다고 합니다. ‘I.N.J’는 ‘예수님의 이름으로’(In Nomine Jesu)라는 뜻의 라틴어 첫 글자입니다. 그리고 악보 끝에다는 ‘S.D.G’라고 썼습니다. ‘S.D.G’는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작곡을 시작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작곡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을 살다가 저녁 잠자리에 들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온 하루의 삶을 감사함으로 마감지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바하의 음악과 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그의 음악과 같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습니까? 그런 삶은 바하의 음악만큼이나 아름다운 삶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히는 것을 결코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본문 12절에서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을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원대한 선교의 꿈을 갖고 있는 바울이 감옥에 갇힘으로 복음전도에 차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연로한 바울이 몸이 연약한데 어떻게 감옥의 생활을 이길 수 있을까 생각하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걱정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슴 아프게 걱정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오히려 복음에 진보가 되었음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진보가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감옥에 갇힘을 통해서 오히려 복음을 전할 기회가 더욱 분명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소망은 로마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가 메시야라’고 - ‘황제 당신이 신이 아니고 내가 믿는 예수 그분이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당당하게 외칠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신다면 -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면 감옥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갈 각오가 되어 있기에 그는 감옥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14-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 너희에게 용기를 주어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구나. 비록 어떤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의 마음으로 -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찌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그 일로 인해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신다면 나는 그 일로도 기뻐하노라.”
이 말씀은 교회 일을 할 때에 서로 투기와 분쟁하는 마음으로 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빌립보 교회를 바라보니까, 비록 교회 안에 덕스럽지 못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경쟁적으로 전도를 하고, 자기의 명예와 유익을 위해서 전도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니까, 자신이 그렇게도 존귀하게 여기는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생각을 하니 그것 또한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물이나 사건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항상 부정적인 생각이나 시각으로 바라보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쓸데없는 일처럼 보이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도 비뚤어지게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남의 작은 허물 속에서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좋지 않는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던 사도 바울의 눈으로 바라보니까, 교회에 분쟁을 일으킬 정도로 경쟁적으로 전도하고 자신의 명예와 이익 때문에 전도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존귀케 되신다면’ 그것도 기뻐할 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모든 문제나 사건이나 환경이나 사람을 바라볼 때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신다면’ 나야 어찌되었든, 문제야 어찌되었든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20-21절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을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 아름다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엘리콧(Ellicott)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우리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연출하는 극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세상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박수를 치지고 하고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드라마와 같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판의 결과에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때를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시민권으로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재판이 불리하거나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황제에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하면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재판을 중지하고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 22장 이하에 보면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으려다가 로마 시민권을 가졌기에 황제 앞에서 재판 받겠다고 요청해서 예루살렘에서 수 천리나 떨어진 로마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지만, 그에게는 커다란 기대가 있었습니다.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될 때 그는 황제와 수많은 로마 귀족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담대하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 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될지 아니면 무죄가 선언될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황제와 로마 귀족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기쁩니다. 죄수의 몸인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될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죽음을 당한다 할지라도 기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를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함을 받고 계십니까? 나의 작은 삶 하나하나를 통해서, 나의 말투 하나하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존귀함을 받으십니까? 혹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알려지면 장사하는 데 손해가 될까봐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조차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행동을 더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도 예수 믿는 티를 전혀 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겠습니까? 장사할 때 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신다면 그까짓 손해쯤이야 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행동에 제약이 있다할지라도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신다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알리고 떳떳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화가 나고 분통 터지는 일을 만난다 하더라도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신다면 화를 참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존귀케 할 수 있습니까? 내가 낮아지면 됩니다. 내가 낮아지고 겸손해질 때 우리의 모습이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직장생활할 때나 친구들을 만날 때에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으로 겸손해질 때 우리를 통해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연출하는 극장’입니다.
며칠 전에 아내와 함께 금산사 옆에 있는 금산교회를 갖다 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는데 금산교회는 우리보다 배나 더 오래된 올해 100년을 맞는 교회입니다. 금산교회는 작은 시골교회이지만,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교회입니다. 100년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유명한 교회가 아니라, 100여 년 전에 지어진 ‘ㄱ’자 교회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문화재로 지정된 교회이기에 유명한 교회입니다.
‘ㄱ’자 교회의 교회당에 들어가 보았더니 세분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금산교회를 개척했던 미국인 테이트(L.B.Tate, 한국명 최의덕) 선교사의 사진과 이자익 목사님의 사진, 그리고 조덕삼 장로님의 사진입니다.
그런데 사진의 주인공들에게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테이트 선교사가 전주와 정읍을 오가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덕삼이란 분은 금산에서 마방을 하면서 그 지역뿐만 아니라 전주에까지 소문날 정도로 큰 부자였고, 집안 대대로 유교를 믿던 보수적인 가문이었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와 정읍을 오가면서 금산에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조덕삼이란 분의 마방에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조덕삼씨를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분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조덕삼씨는 자기 집 사랑채를 교회로 내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이자익이라는 마부가 있었습니다. 경남 남해의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한 이자익이라는 청년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가출했다가 조덕삼씨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와 마부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자익이라는 청년은 가난해서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무학자였지만 총명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청년도 주인을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첫 번째 세례식에서 3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조덕삼과 그 집 머슴이었던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함께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교회가 부흥해서 약 100여명이 모일 때에 교회에 장로님을 뽑게 되었는데, 조덕삼과 이자익이 후보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덕삼씨가 장로로 뽑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이도 많았고, 교회도 먼저 다녔고, 자기 집에 교회를 세웠고, 양반 가문에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자익이라는 청년은 그 조덕삼씨의 머슴이었습니다. 그 고장 출신도 아닙니다. 배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투표 결과 이자익이라는 머슴이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양반과 상놈의 계급이 엄하게 살아 있던 시대에 머슴이 양반인 주인을 제치고 장로로 피택되자 많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웅성거렸습니다. 그때 조덕삼씨가 조용히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것입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봉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자익은 젊고 지혜가 많고 열심이 있습니다. 저는 이 결정에 순종하여 이자익을 장로로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그리고는 집에서는 머슴으로 일하는 청년일지라도 교회에서는 장로님으로 극진히 대우하면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1년 후에 조덕삼씨도 장로가 되어 이자익 장로와 함께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 후 이자익 장로님의 열심과 총명함을 귀하게 여긴 조덕삼 장로님은 이자익 장로님을 평양에 있는 평양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게 했고, 그 모든 비용을 조덕삼 장로님이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5년 후에는 목사가 된 이자익 목사님을 본교회인 금산교회 담임목사님을 초빙을 했서 함께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이자익 목사님은 우리 장로교단에서 세 번(13, 33, 34대)이나 총회장을 지내셨던 유명한 분이셨고, 20여개의 교회를 개척한 복음의 일꾼이 되셨습니다.
저는 총회장을 3번이나 지낸 이자익 목사님보다 조덕삼 장로님이 훨씬 더 아름답고 향내 나는 믿음을 가지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은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예수님의 심정으로 산 분이었습니다. 자기의 머슴이 먼저 장로가 되었을 때에도 오직 교회를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고 교회를 섬겼습니다. 머슴이던 사람을 목사님으로 만들고 그분을 자기 교회의 담임목사님으로 모시고 교회를 섬기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 가슴에 오랫동안 기억되어야 할 신앙의 사표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통해서 당신이 존귀히 여김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를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영적인 갈망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드러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찌되었든지 내 이름이 드러나고 내 인격이 자랑거리가 되기를 원하는 우리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는 묵사발이 되어도 주님만이 존귀하게 되신다면 그것으로 기쁨을 삼고 사시겠습니까? 나를 통해서 주님께서 존귀하게 되신다면 죽음이라도 두렵지 않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나의 섬김을 통해 주님이 존귀하게 되신다면 기쁘게 봉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그런 내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신다면 그런 바보같은 삶일지라도 감사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존귀히 여겨 주십니다. 사무엘상 2:30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만큼, 우리가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히 여겨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했고, 그분이 존귀히 여김을 받으신다면 자신은 죽음을 당할지라도 기뻐했습니다.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도 그런 믿음으로 사셔서,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는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
빌 1:12-24 / 조상호 목사
멕시코에 지져스 가르샤라는 유명한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동료들로부터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삶을 보내던 어느 날 그에게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다. 조각을 위한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채석장에 갔는데 인부가 부족하여 그가 직접 채석장에 나가 작업을 지휘하고 인부들과 함께 돌을 나르며 일을 하던 도중, 갑자기 커다란 돌이 그의 오른손 위로 떨어진 것입니다. 겨우 돌을 들어내었지만 이미 그의 오른손은 완전히 문드러져 버렸습니다. 유명한 의사들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큰 사고였습니다. 조각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가르샤뿐 아니라 그를 아끼던 모든 사람들이 실망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현실을 원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만 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왼팔로 조각하는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꾸준히 땀을 흘리며 운명과 싸웠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오른손 대신에 왼손으로 조각하는 기술을 다시 익혔고, 결국은 오른팔로 하던 조각보다 더욱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작품을 마을 한 가운데 세우고 그 작품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 이름은 다름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였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터널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복음의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은혜 받을 만한 아무런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또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요약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극한 시련 앞에서도, 절망하고 낙심되는 상황 속에서도,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부터 18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라는 말을 쉽게 해석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기뻐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무슨 대학에 진학해야 하나, 누구와 결혼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떤 사업을 해야 하나’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저 자신도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가를 알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환경과 형편과 상관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오늘부터 매 주일 3주 동안 계속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 다음 주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라’, 그 다음 주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를 시리즈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첫 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동안 사도 바울이 지내왔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에게 기뻐하기는 커녕, 절망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불안한 환경 가운데 있었고, 둘째로 관계의 어려움이 있었고, 죽음의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가 그 장애물을 극복하고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1) 불안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라
환경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불안한 환경 가운데 기뻐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나중에는 원망까지 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도 달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불안한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는 지금 자유를 상실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13절을 보면 '나의 매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매임'의 원어의 의미는 '끈으로 묶었다', '발과 손을 족쇄로 채웠다', '올가미로 씌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자유를 상실한 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18절 하반절에 의하면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전혀 기뻐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한 술 더해서 2장18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오히려 기뻐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러면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환경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 ‘진보’란 군대의 공병대 용어로서, 장애물을 헤치고 길을 놓는다는 뜻입니다. 로마 제국 당시에 가장 중요한 전쟁 무기는 말이 끄는 전차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전차 부대가 있어도 도로가 뚫려 있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로마 제국은 무력으로 정복한 식민지를 잘 통치하고, 또 식민지에서 거두어들인 곡물들과 세금들을 로마까지 수송하기 위해 도로를 닦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 이제까지 여러 가지 장애물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지 못하던 로마까지, 복음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또 13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로마 시위대는 로마 황제의 경호를 맡은 특수 부대입니다. 당시 시위대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출신 성분이 좋고 로마 제국에 충성하는 사람으로 인정된 사람만이 시위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에서도 그들의 신분을 보장해줌으로써, 그들은 다른 로마인과 달리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위대원들은 스스로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프라이드 또한 대단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이방 종교나 사상이 시위대에는 미치지 못할 만큼 시위대원들은 안전지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바로 이 시위대 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의 주위에는 네 사람이 항상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6시간씩 4번 교대 근무를 했기 때문에, 바울은 하루에 최소한 16명의 시위대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시위대원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로마 황제의 가족에게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22절을 보면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로마 황제 집안사람들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접촉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계획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그가 감옥에 들어온 것이 우연이 아니고, 누구 때문에 혹은 재수가 없어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것’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환경의 위기 가운데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기뻐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에 집안이 너무나 어려워 학교를 다니지 못해 겨우 자기 이름만 쓸 줄 아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은행에서 수위 모집이 있음을 알고 응시를 했지만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그는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낙심천만한 그는 교회에 가서 엎드려 “하나님. 나는 어쩌다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공부를 못하여 수위 시험에도 떨어져야 합니까?”하고 통곡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내 계획은 다르다. 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곧 짐을 싸서 그리스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그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많은 돈을 모은 그는 사업을 시작하였고,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그가 중년이 넘었을 때는 금융가인 월가에서도 알아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60회 생일 파티에는 저명한 재계 인사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생일 파티에 참석하였던 한 기자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자서전을 내십시오. 선생님이야말로 자서전을 낼만한 분이십니다.“ 그러자 그가 싱긋 웃으면서 ”나는 내 이름밖에 쓸 줄을 모른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한 기자가 애석하다는 듯 ”만일 선생님께서 글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더 훌륭한 일을 하셨을까요?“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건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글을 알았더라면 나는 기껏 그리스에 있는 한 은행의 수위장이나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글을 몰라서 수위 채용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환경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환경의 위기 속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외쳤던 사도 바울의 외침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우리들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근거는 ‘주 안에서’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할지라고, 우리들이 주 안에 있다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고,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항상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과 같은 환경의 위기 가운데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관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라
인간관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문제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환경보다 더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은 견딜 수 있지만, 인간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할 때 정말 참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밥은 굶을 수 있겠지만, 남들에게 조롱당하는 것은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더 크게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랬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여기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 자’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했다고 한 것을 보면, 이단도 아니고 유대인들도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누구일까요? 바울을 경쟁상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경쟁심과 시기심 때문에 복음을 증거했던 사람들입니다. 또 16절과 17절을 보겠습니다.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여기 16절에 보면 ‘이들은’이라는 말이 나오고, 17절에는 ‘저들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울 편에서 바울의 사역을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들로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17절에 언급된 ‘저들’이 문제입니다. 저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잘 되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동안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탁월한 지도자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바울대신에 자기들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옥에 갇힌 후부터 바울에 대한 중상모략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를 핍박하는 것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리에 대해서 험담을 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때 함께 동역했던 사람들이, 함께 복음을 증거했던 사람들이 자기에게 화살을 던질 때, 바울이 받은 상처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어려울 때 자기의 마음을 이해해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중상모략을 일삼을 때, 바울이 받은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굉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십시오. 그러한 인간관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1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 말씀을 쉽게 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감옥에 있는 나를 향하여 중상모략을 한다 할지라도, 저들이 나를 향하여 비수를 던진다 할지라도, 만약 저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된다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바울은 넓은 가슴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중상모략하고 욕을 하는 사람을 향해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넓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자, 낙심하고 고민하기보다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이유를 아십니까? 서로 자기의 입장만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때, 인간관계가 삐걱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옛날에 영국 런던에는 세 분의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그리스도 교회의 F. B. 마이어 목사님인데, 책을 무척 많이 쓰신 목사님이었습니다. 또 한 분은 기독교 역사상 제일 설교를 잘 하시는 침례교회 스펄전 목사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분은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이 세 분 중에 몰간 목사님이 잠시 미국에 가서 사역을 하게 된 때가 있었습니다. 몰간 목사님과 친구 사이였던 마이어 목사님은 그 분이 미국에 있는 동안 그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몰간 목사님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웨스트민스터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을 때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몰간 목사님이 미국이 있을 때에는 기도하기가 좋았는데 서로 같은 도시에서 일하게 되니까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더군요.” 이 말의 의미는 식당 주인이 보석상 주인을 위해서 기도하기는 쉽지만,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하기란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자꾸만 마이어 목사님의 마음에 다른 목사님에 대한 시기심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스펄전 목사님처럼 설교에 인기를 얻지 못하고 몰간 목사님처럼 권위 있는 목회를 하지도 못하는 구나’라는 마음이 자꾸 생겨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마음에서 이 시기와 질투를 없애 주시옵소서.”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 시기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깊이 기도하는 마이어 목사님에게 하나님의 인자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 기도를 바꾸어라. 질투를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해라.” 주님의 음성을 들은 후부터 마이어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스펄전 목사님과 그 교회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캠벨 몰간 목사님과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축복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부터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가득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담임하는 교회의 예배에서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몰간 목사님의 교회를 축복해 주셔서 사람들이 가득 메워지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남거든 우리 교회에 보내 주시옵소서.” 그 후부터 이 세 사람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세 교회 모두 크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슬픔 많고 고통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기뻐하며 살 수 있는 비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을 품지 못하면 내가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손해가 아니라, 내가 손해입니다. 누가 밤잠을 설칩니까? 상대방이 밤잠을 설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밤잠을 설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존심을 다 버리고 우리를 품으셨던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품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다른 가정이 아닌 우리 가정이 살기 위해서라도, 주님의 아가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품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가 안 되고 아무리 해도 품을 수 없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3) 죽음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구하라
죽음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한다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음의 위기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도 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재판이 끝나면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여기 보면 “살든지 죽든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울은 삶과 죽음의 절대 절명의 위기 가운데 처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는 죽음의 위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보다 자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하게 나타나느냐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 한국에서 신앙생활 할 때, 같은 청년회에서 만난 이모라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저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이상 많은 분으로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분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정말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신학대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철야가 시작되기 2시간 전부터 교회에 나와 목이 터지라고 통성기도하며, 장로교회라서 방언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그 분은 방언으로 교회가 떠나라고 기도하며 교회에 기도의 불을 붙였습니다. 또 매 주일 오후에는 교회 근처에 있는 병원에 가서 전도를 하고, 보호자가 없는 불쌍한 환자들의 몸을 씻겨주고 위로하는 등,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아파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암 말기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제가 그 분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친구들과 함께 문병을 갔습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바싹 말라버리고 힘이 쇠잔한 기색이 완연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저에게 힘은 빠졌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허허허! 조형제, 나는 괜찮아요. 죽으면 천당이고, 살면 복음 증거하는 사람이 될 건데,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단지 내 삶에서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분은 얼마 있지 않아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만, 당시 저는 그 분의 이 고백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가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분에게는 사도 바울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21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그에게 물었습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어거스틴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 당신만을 원합니다.” 오늘 어거스틴의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 당신만을 원합니다.”라는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때문에‘ 기뻐합니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남편 사업이 잘 되기 때문에, 취직이 되었기 때문에, 남부럽지 않은 건강 때문에 등의 여러 가지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때문에‘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의 삶이 최악의 환경으로 바꿔질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으로 배신당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위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슬리 웨더헤드는 "기쁨의 반대는 슬픔이 아니라 불신앙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세상적인 시각이 아닌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항상 동행함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날마다 기쁨을 세상에 빼앗기지 아니하고, 복된 삶, 승리의 삶, 기쁨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렌즈로 바라보면
빌 1:12-14 / 조상호 목사
EX) 한 선교사가 어느 신학교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는 담대하기로 소문난 선교사였습니다. 잔뜩 기대를 하고 그 선교사의 설교를 듣던 신학생들은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선교사요, 설교자로 알려진 그 분이 우왕좌왕 횡설수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선교사님이 강단에서 내려오고 예배가 끝나자 여지 저기에서 비판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대했던 선교사님의 모습이 저 모양이란 말인가? 강단에서 설교 한편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형편없는 분이란 말인가?" 선교사가 조용히 강당을 나가자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셔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교사님께서 강단에 오르기 직전에 선교지로부터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그 전화는 아프리카에 남겨 두고 왔던 사모님과 어린 두 아들이 원주민의 피습을 받아 세 식구 모두 목숨을 잃었다는 믿지 못할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선교사님께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선교사님은 여러분에게 약속한 시간이기 때문에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소중한 말씀을 전해주신 선교사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사회자의 이 말을 듣는 순간, 강당에 일제히 침묵이 흐르면서 선교사님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안목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비판의 눈에서 존경의 눈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환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님이 설교를 하기 전이나 설교를 하고 난 후나 강당은 전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생각과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설교를 하신 선교사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비록 설교를 죽을 쑤고 내려간 선교사님이었지만, 학생들은 그를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이 패러다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마치 빨간색 선그라스를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온통 불이 난 것처럼 보이고, 검정색 선그라스를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온통 어두운 것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각과 시각을 가져야 할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살이가 힘이 들지만, 동일한 세상을 하나님의 렌즈로 바라보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봤더니 모든 것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렌즈의 중요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고통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일한 환경을 하나님의 렌즈로 바라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행하였는지 구체적으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 자신이 처한 환경을 긍정적으로 보고 그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1.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차디찬 감옥 안에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감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두 명의 간수들의 손과 같이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 밖에서는 다른 두 사람이 그를 24시간 내내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여러분들이 처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할 것입니다. 심하면 하나님을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제까지 관광하려고 소아시아 지방과 마케도니아 지방을 돌아다닌 것 아니잖아요? 나는 이제까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나를 감옥에 가두셔서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이러한 반응이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12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다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오히려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의 몸은 매여 있어도, 복음은 매여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곁에서 자기를 지키고 있는 로마 시위대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시위대들이 네 사람씩 하루 24시간동안 4교대 혹은 6교대로 돌아가면서 자기를 감시하고 있으니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자기를 감시하는 사람들은 일반 로마 병사가 아닌, 로마 황실을 경호하는 출신성분이 뛰어난 사람들로서 어느 정도 일정 기간동안 시위대 근무를 하면 로마제국의 지도급 관리로 발탁될 수도 있는 촉망받는 엘리트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바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은 비록 감옥 안에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로마 제국의 최고급 엘리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들이 생겨났습니다. (빌4:22)을 보면, 바울이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안부를 전하는데 그 가운데 가이사, 즉 로마 황제 집안의 몇 사람들도 끼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시위대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결국 로마 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 즉 왕족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상황을 긍정적인 렌즈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옥에 갇히게 한 뜻을 깨닫고 그 안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증거함으로 결국 왕족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EX) 제가 자주 소개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세일즈맨들의 능률이 오르지 않아 사장이 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사장은 귀퉁이에 까만 점 하나를 찍은 흰 수건을 세일즈맨들에게 펼쳐 보이면서 "무엇이 보이느냐"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까만 점"이 보인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자세히 보십시오.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까만 점밖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때 사장이 말하기를 "여러분! 까만 점은 이 구석에 하나밖에 없는데 왜 이 넓은 흰 바탕은 볼 줄 모릅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관점과 긍정적인 관점입니다. 부정적인 관점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열 가지 중에 좋은 것이 아홉 가지가 있고, 좋지 않은 것이 한가지가 있을 때, 그 좋지 않은 한 가지를 물고 늘어집니다. 그리고 그 좋지 않은 한 가지에 목숨걸고 난리를 칩니다. 아홉 가지의 장점을 가지고 있어도 아홉 가지의 장점은 보지도 않고 한가지의 단점을 물고 늘어집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사람은 열 가지 중에 좋은 것은 한가지이고, 좋지 않은 것이 아홉 가지일 때도 좋은 것 한가지를 보며 좋아합니다. 비록 아홉 가지의 단점이 보여도 한가지의 장점을 보며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줍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똑같은 환경과 상황을 40일 동안 가보고 온 12명의 정탐꾼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두 가지 상반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불평하고 악평했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똑같은 환경을, 똑같은 기간 동안 정탐한 그들이 왜 이렇게 정반대의 보고를 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시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10명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2명은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감옥이라는 절망의 상황에 처했지만 그곳을 하나님의 긍정적인 렌즈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과거에 시드니에서도 살고, 오클랜드에서도 살고, 더니든에서도 살고, 현재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서도 살고 있기 때문에, 저에게 종종 '어디가 가장 좋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곳이 가장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제가 그렇게 대답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제가 사는 곳에 대해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과거 시드니에서나 오클랜드에서나 더니든에서나 항상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서도 마찬가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어차피 내가 살고 있는 도시라면 그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도시라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언합니다. 또 저는 제가 속한 교회를 가장 훌륭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교만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평신도로서 24년 동안 섬겼을 때에도, 부교역자로 1년6개월 동안 섬겼을 때에도, 내가 속한 교회가 가장 훌륭한 교회라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또 담임교역자로 더니든의 조그만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에도, 비록 학생들과 어린 꼬마들을 포함해서 50명도 채 안되는 교회였지만, 더니든순복음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교회라고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크라이스트처치에서도 우리 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교회라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왜 그런줄 아십니까? 어차피 내가 속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교회로 가면 모를까 이왕에 내가 속한 교회라면 그 교회를 사랑하고 정을 붙이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울을 가도, 호주를 가도, 북섬을 가도, 남섬을 와도, 항상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도시에서 살고, 가장 훌륭한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가장 훌륭한 교회에서 봉사하고, 가장 훌륭한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만약 자기가 현재 살고 있는 도시를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분들은 지금 별로 좋지 않은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매 주일 주일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좋지 않은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 생각대로 별로 좋지 않은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은 환경에 살고 같은 교회를 다니는데 어떤 사람은 가장 좋은 도시에서 살고, 가장 좋은 교회에 다니는데 반해, 어떤 사람은 좋지 않은 도시에서 살고, 좋지 않은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렌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시각이 부정적인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렌즈로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긍정적인 렌즈로 볼 때, 바울처럼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누가 뭐라고 해도 긍정적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감옥 안에 갇히는 것과 같은 절망의 상황에 처해도 긍정적인 렌즈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종국에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주님을 믿고 주어진 환경 가운데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2.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항상 그 사람 옆에 있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항상 내 마음에 맞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만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만납니다. 바로 사도 바울의 주위에도 이와 같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사도 바울의 주위에는 투기와 분쟁을 일삼는 사람들과 순수한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증거하는 선한 일꾼들,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후자의 사람들은 16절에 의하면 바울이 하나님에 의해 세우심을 받은 것을 알고 바울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 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자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17절에 의하면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오히려 좋아하는 바울의 대적자 들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바울 대신에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름을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과 경쟁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며 바울을 시기하고 중상모략을 일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주위에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순수하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든지, 자기 유익과 자기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전하든지 어째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신은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자신이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중상모략을 당하여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중요한 일과 사소한 일들을 구별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무엇에 더 신경을 써야할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어떻습니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때문에 논쟁하고, 사소한 것에 목숨걸고 싸움을 합니다. 꼭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에서 일어난 것 같은 싸움을 합니다.
여러분!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라는 풍자소설을 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난쟁이 나라에서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 수만명의 목숨이 그 전쟁으로 인하여 희생된 일이 있습니다. 왜 이 작은 사람들의 소인국에서 싸움이 나서 수만명이 비참하게 죽은 줄 아십니까? 그 싸움의 발단은 너무나도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삶은 달걀을 깨뜨려 까먹을 때, 어디를 먼저 깨뜨려 까먹느냐하는 문제로부터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달걀의 넓은 쪽을 먼저 깨뜨려서 까먹자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쪽은 좁은 쪽의 끝을 먼저 깨뜨려서 껍질을 까먹자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두 편으로 갈라져 치열한 싸움이 되었고 수만명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 이러한 걸리버 여행기에서나 나오는 코메디 같은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침을 튀겨가며 논쟁합니다. 심하면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렌즈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자기 자신이 억울하게 비판과 모략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 일은 사소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보다도 더 중요한 복음전파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하나님의 렌즈로 볼 때, 바울처럼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렌즈로 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처럼 사소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대적하고 중상과 모략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보다 중요한 복음전파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3. 죽음도 불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 안에 갇혀서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로마 황제는 악명 높은 네로였기 때문에 바울은 언제든지 사형집행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는 삶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곧 죽을 수도 있고 계속해서 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살든지 죽든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한가지 관심은 그리스도였습니다. 모든 생애의 초점이 그리스도 한 분에게 맞추어 있습니다.
EX) 영화의 고장 할리우드에서는 가끔 배우들과 영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아침 식사를 나누는 모임이 있다고 합니다. 이때에는 당대의 최고 인기 배우나 유명 인사를 초빙하여 간단한 연설을 듣는다고 합니다. 한번은 매우 아름다운 용모의 여성이 연사로 등단했습니다. 그녀는 미국의 최고 미인 열 명중의 한 사람으로 뽑힐 만큼 아름다운 영화배우였습니다. 이 여자가 마이크 앞에 나오자 박수가 요란스럽게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여러분. 나는 지금 사랑에 빠졌습니다.”장내는 이상 야릇한 흥분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도대체 그 행운을 잡은 사나이가 누굽니까.”여자는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화배우의 일도 그만두려고 합니다.”과연 그 여자는 자신의 말처럼 할리우드를 떠나서 후에는 목사의 아내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누군가가 그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당신은 할리우드의 명예와 부를 물리치고 예수님을 택하신 일에 전연 후회가 없으십니까.”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할리우드의 스타나 영국 여왕의 자리도 지금의 저와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저에게 이처럼 귀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부귀나 명예나 행복과 바꿀 수 없는 존귀하신 분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분을 높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고 사는 생사에 대한 것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주님만이 나타나고 주님만이 증거되고 주님만이 높여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 자신만을 원합니다.”또 어떤 유명한 백작이 자기 집안의 좋은 배경과 화려한 귀족 출신의 신분을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맨발로 거리를 향해 뛰쳐나갔을 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당신의 야망은 도대체 무엇이오?”그랬더니 그가 대답하기를“나의 야망은 다만 한 분. 그리스도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진젠돌프 백작입니다. 바울도 21절에서 이렇게 유명한 말을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가 감옥에서 풀려 나오게 되면 복음을 계속해서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좋다고 합니다. 반대로 감옥에서 그대로 사형을 받아 죽게되어도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되기 때문에 좋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그의 관심은 세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주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EX) 저는 99년 7월13일 자정을 기해서 저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청년수련회 첫날 저녁 시간을 마치고 Akaroa YMCA Camp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내려오다가, 운전하던 자동차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사고를 당한 후에 저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뜨거운 맛을 본 저에게 다른 무슨 소원이 더 있겠습니까? 무슨 바램이 있겠습니까? 보너스로 받은 인생인데 제가 어디에 소망을 두겠습니까? 저는 그 자동차 사고가 있은 후, 하나님의 렌즈로 저의 삶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완전히 죽음 직전까지 갔다 온 후부터 저에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솔직히 생애에 대한 애착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제가 사는 것이나 죽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소원보다도 복음전파에 대한 소원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억지로도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저절로 그러한 마음을 제게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죽음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그의 관심은 세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도 아니었습니다.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자녀도 아니었습니다. 건강도 아니었습니다. 다이어트도 아니었습니다. 오래 사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주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렌즈로 세상을 보고 계십니까? 부정적인 렌즈입니까? 아니면 긍정적인 렌즈입니까? 세상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눈으로 보십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 안에서 사형 당하여 죽을 수도 있는 절망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렌즈로 환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했고 로마 황실 중에 몇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이 인간의 눈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편협된 렌즈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렌즈로 바라보셔서 사도 바울처럼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삶의 원칙
빌립보서 1:12-26 / 이원근 목사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많은 나날을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늘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우리 성도들의 삶은 항상 기뻐하며 살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 총장을 지낸 죠나단 에드워드는 평생토록 다음과 같은 생활원리를 따라 살았다고 합니다.
①교만치 말자. ②복수하지 말자. ③범사에 감사하고 살자. ④임종에도 결코 후회치 않을 일을 하자라. 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철학이 있고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삶의 원칙은 어떠해야 할까요.
1. 복음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12-18).
바울 사도는 옥중에 갇힌 몸이지만 자신의 매임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알고 기뻐했습니다(빌 1 : 12).
복음을 전하다가 옥중에 갇혔을 때 원망이나 시비에 빠지지 않고 좌절과 낙심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고난 받음으로 도리어 복음전도에 효과가 있었음을 생각하고 기뻐했다는 것은 바울이 얼마나 복음중심으로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의 수난이 많은 형제의 용기가 되어서 더욱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빌 1 : 14). 혹자는 순전한 마음으로 혹자는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나 어찌되든지 그리스도가 전하여 짐을 기쁘시게 여기시고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자기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순전치 못한 생각에서 전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바울은 주의 복음이 전해짐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을 보면 자신이 비난을 당하고 시기와 질투를 당하여도 복음이 전해짐을 기뻐함을 그가 얼마나 복음중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9 : 16절에 말한 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으로 생각한 사도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살았고 복음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의 원칙은 복음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복음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으며 하늘의 상금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삶이 복음중심으로 살아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자신에게는 축복된 삶을 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는 큰 유익을 주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님 영광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19-21).
바울 사도는 생사고락 간에 주를 존중케 하려고 한 사람입니다(빌 1 : 20). 고전 6 : 20절에 보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가로 산 것이니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소요리문답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고전 10 : 31절에서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주님 영광 중심으로 사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 무엇인가? ①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②하나님을 제일로 경건히 섬겨야 합니다. ③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④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봉사와 섬김의 생활은 주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삶이란 주님 영광을 들어내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도는 말하기를 “현대인의 정신적인 최대의 범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일에 성실할 때 주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유익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24-26).
사도 바울은 현세의 삶보다는 내세의 삶을 더 소원하였습니다(빌 1 : 23). 그는 생도 그리스도요 죽음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으니 그의 생존이 교회에 유익하다고 여겨진 까닭에 삶을 바랐고 또한 살게 될 줄로 확신하였습니다.
바울은 개인의 유익이나 이해관계로 처신하지 아니하고 오직 교회를 위하여 도움이 되고 유익을 위해서 살았고 그와 같이 살았습니다(행 20 : 20-21).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 교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도 있고 거침돌이 되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거치는 자가 되지 않고 교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들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하고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 훼퍼는 그리스도인은 남을 위한 존재 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주님처럼 바울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 영광 받으시고 교회가 은혜롭고 자기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말 중에 사람이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 는 말을 했습니다.
일정한 나이에 다다르면 우리는 우리의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이야말로 우리의 작품입니다. 인생의 진실하게 살고 성실하게 봉사하여 복음중심, 주님영광중심, 교회중심으로 산 사람은 그 얼굴에 보람과 기쁨과 감사의 표정이 빛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성도의 삶의 원칙은 바울 사도처럼 복음중심으로 살고 주님영광 중심으로 살며 교회 유익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하나님의 평강과 상급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빌 1:12-26 / 박금호 목사
오늘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란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 잠재의식 가운데 숨어 있는 것, 쉬지 않고 기도하는 내용, 잠자리에서 막 일어나서 15분 내로 떠오르는 생각과 같은 것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 제게는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사도 바울의 그것과 같았으면 참 좋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우리를 감동하셔서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Ⅰ.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 알기 원한다
본문 12절에는 바울의 기대와 소망이 나타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사도가 당한 일이란 환란과 핍박을 받다가 지금은 옥에 갇혀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다는 것과 이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옥에 갇힌 일이 어떻게 복음의 진보가 된다는 말입니까? 13-18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옥에 갇힘으로써 간수를 비롯하여 시위대 안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일로 사도를 사랑하고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격동을 받아 복음을 더욱 열심히 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도 다툼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는 자신이 갇힌 것이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들은 물론 빌립보 교회를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사도의 진실한 심정을 보여줍니다. 우리를 더욱 감동시키는 것은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는 복음 때문에 갇혔지만, 오히려 기뻐합니다. 복음만 전파될 수 있다면, 어떠한 손해를 보더라도, 어떠한 어려움을 겪더라도, 나는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갈수록 자기개인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이 세대를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처럼 복음 전하는 것을 힘쓰고 기뻐했습니까?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이것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복음전파에 힘을 쏟아 봅시다. 우리의 삶을 불태우고, 몸을 불살라 복음의 향기가 천지에 진동하게 해봅시다.
Ⅱ.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
사도의 두 번째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20-21절 말씀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사도는 자신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살고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를 원했습니다. 소요리문답 1번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타락함으로 이 본분을 다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다면, 우리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최고 가치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세우는 목표들에 풍성한 열매가 맺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생명이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 이러한 열매의 궁극적인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자녀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업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단지 잘되는 것 그 자체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아지고 존귀케 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든 가난한 자가 되든, 건강하든 병이 들든, 자식이 공부를 잘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이 모든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성숙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죽어도 주님은 존귀케 되기를 바란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실상 행복한 사람입니다.
Ⅲ.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되기를 원한다
사도의 세 번째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26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다시 살아 나가서 당신들에게 갔을 때 나 때문에 자랑할 것이 당신들에게 있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 있음으로 인해서 복음에 유익이 되고, 교회에 도움이 된다면 더 살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을 때 너희 자랑이 나로 인해서 풍성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합니다. 즉 자신이 그 사람들을 위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 뿐만이 아니고 빌립보교회 역시도 자랑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11절). 그리고 이러한 소망을 고린도교회에도 말합니다(고후1;14).
요약한다면 사도 바울은 “나는 너희의 자랑거리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자랑거리로 살고 싶은 것, 성도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고 싶은 것, 이것은 모든 목사들의 바램입니다. 목사가 교인을 자랑하고 교인은 목사를 자랑한다면 얼마나 행복한 교회이겠습니까! 가정에서도 아내는 남편을 자랑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랑하며, 부모는 자녀를 자랑하고 자녀는 부모를 자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삶이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거리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기쁨을 안겨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저도 그렇게 되고 여러분도 그렇게 됩시다. 저는 여러분을 자랑하고, 여러분은 저를 자랑하고, 그것을 위해 서로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그래서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삶을 만들어 봅시다.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저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우리 교회가 은혜 중에서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며, 풍성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승리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내 개인의 노후문제나 자녀들의 장래문제나 개인적인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교회가 어찌하든지 잘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어떠한 일을 겪더라도 그 일로 인하여 복음이 증거되고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기로 인해서 자랑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소망도 이러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나 기쁨이 되고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됩시다. 아멘!
거룩한 기쁨
빌 1:12-26 / 김병수 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한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이 너무나 기뻐서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내건 사람이 한 명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그를 열정적으로 믿고 따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는 일과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에게 생명을 내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에게 그의 삶의 기쁨이 어떤 것이며, 그 기쁨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했으며, 그리고 그 기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삶의 거룩한 기쁨
(1) 바울 사도의 삶의 목표
먼저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는 12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알기 원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므로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는 18절의 말씀과 같이 바로 ‘복음의 진보’였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였기 때문에 이것이 이루어 질 때 바울은 기뻐할 수 있었고, 그의 삶 전체를 통하여 온전히 복음의 진보를 나타내었다면, 그의 삶은 정말로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삶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기뻐하고 자신의 처지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금 처한 상황은 로마의 감옥이었습니다. 냄새나고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고, 습기도 많고, 자유롭지 못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넉넉지 못하고, 계속 로마 병정들에게 감시를 받고 살아가는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완전히 집중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복음이 널리 전하여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정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 인생의 성적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목표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 이후에 그 목표가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때에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삶의 목표를 설정할 때 자기 자신만의 인생의 성적표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적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과목에서 다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필수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과목에서 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더욱 좋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재산을 가지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좋은 건강을 가지고, 항상 편안한 여유를 가지고, 세상의 좋은 모든 것에서 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세상 사람들은 "저 사람 참 잘 살았구나, 정말로 행복한 인생을 살았구나"라고 그 사람의 인생의 성적표에 대해서 좋게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성적표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의 성적표는 바로 하나님께서 채점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성적표를 단지 세상 사람들을 기준으로서 채점되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못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필수 과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선택과목에만 집중하고 그것만하면 되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채점하시는 인생의 성적표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과목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다른 모든 인생의 여정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은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바울 사도의 인생의 성적표
바울 사도도 이미 인생의 성적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성적표에 보면 지금 이렇게 감옥에 들어와서 힘들게 사는 것이 결코 그의 삶에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점수로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은 우리 인생 성적표의 채점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세상이 채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채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을 세상이 채점을 한 다면 바울 사도는 어떤 평가를 받았겠습니까? 아마도 낙제일 것입니다. 그 좋은 학벌 다 버리고, 그 좋은 집안 배경 다 버리고, 수 도 없이 많이 맞고, 돌도 맞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고, 아무런 재산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로 어리석은 낙제생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바울 사도는 우등생입니다. 비록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늘에 큰 상급을 쌓았으며, 복음의 진보를 위한 그의 고통은 하나님의 성적표에는 엄청난 점수로 기록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성적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세상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요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가난한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성적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위하여 복음의 진보, 복음의 증거는 우리가 반드시 이수해야 할 필수 과목입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복음의 증거자로 서는 것은 반드시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는 구별된 인생의 성적표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동일한 기준에서 인생의 성적표를 바라본다면 아마도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2. 거꾸로 사는 삶
20절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내가 살아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지 않으면 죽는 것 보다 못하고, 내가 죽어도 그리스도가 그 죽음으로 인하여 존귀히 되지 않는다면 그 죽음은 아무런 가치 없는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내어 걸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내어 걸만큼 우리의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1) 오직 예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온전히 집중되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기에는 결코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닙니다. 어쩌면 점점 세상이 발달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에는 점점 어려운 세상이 다가올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점점 더 악한 영들이 기세를 부리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하고, 유혹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궤계는 교묘합니다. 인간들에게 아주 달콤한 환상을 보여 줍니다. 점점 과학과 문명을 발달시켜 아프지도 않고, 고통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인간의 과학과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도록 세상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각 가운데 고정시켜 놓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 세상을 삶은 어떤 목사님은 ‘거꾸로 가는 삶’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가장 정확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 밖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이미 세상에게 진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완전히 집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걸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2) 예수쟁이
옛날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서 불렀던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바로 예수쟁이였습니다. 우리 말에 이 ‘쟁이’라는 말은 아주 쉽게 표현하면 ‘미쳐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볼 때에 아마도 예수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에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정말로 사도 바울과 같은 인생의 성적표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미친 예수쟁이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까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의 본능이 우리의 옛 사람이 너무 강해서 똑바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구세주로 고백하기 전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과 구세주로 고백한 자들입다.
우리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과 구세주로 고백한다고 해서 우리의 모습이 갑자기 예수님처럼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한꺼번에 어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이 필요하고 뼈를 깎는 인내과 고통의 시간을 잘 이겨내어야지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씩 더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날마다 내 자신을 쳐서, 내 본능을 쳐서, 내 하고 싶은 것, 내 육신이 원하는 것을 쳐서 하나님의 앞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금방 금방 내 속에서 튀어나와 시험에 들게 하고 좌절하고 낙심되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질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목숨을 내어 건 소명과 인내가 없다면 결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미치지 않으면 우리의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대가를 지불하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복음의 진보와, 하나님 안에 있는 연약한 자들을 향한 믿음의 진보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헌신과 소명인줄 믿습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걸어야 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주님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내어 건 결단과 헌신과 고백이 없다면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내 삶이 되어지기를 원한다는 주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기쁨은 바로 거룩한 기쁨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곧 바울의 기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기쁨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기쁨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기쁨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대로 살 때 비로소 참다운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인생의 기쁨을 얻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 기쁨을 온전히 얻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의 생명을 예수님께 내어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삶은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보기에는 실패한 인생 같아 보이지만, 인생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장 복되고 행복하게 산 인생으로 평가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후암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인생 여정을 마친 이후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을 수 있도록 분명한 삶의 목표를 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거룩한 기쁨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죽으리라
빌 1:12-26 / 박근호 목사
살아가는 것이 쉽게 느껴지지 않는 세상입니다. 왜 이리 살아갈수록 힘겨워만 지는지 모르겠습니다. IMF 이후 생존을 위한 자기 자리 찾기가 많이 어려워졌고 그에 따른 사회적 긴장과 불안감이 갈수록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개인심리에 압박감을 가중시킴으로서 자살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사회학자의 분석이 현실화되어 우리 사회 곳곳에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한 자살 소식이 적지 않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오르지 않는 성적을 비관한 학생이 자살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고생이 자살하고, 카드빚에 몰린 청년이 자살하고, 생활고에 시달린 엄마가 아이 셋을 데리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급기야 대기업의 총수가 회사 사옥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우리들은 이런 저런 토를 달지만 남의 주검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죽고 싶으면 자기나 죽지 왜 아이까지 끼고 죽느냐?... 그건 동반자살이 아닌 타살로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철없는 짓이다... 그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전쟁의 난리통 속에서도 혼잣몸으로 7남매를 먹여살렸다...' 그 경솔함과 무정함 그리고 정신력의 약함을 질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어간 여인도 할 말은 있을 겁니다. 두 아이를 둔 어느 엄마의 말입니다. "대학교 다니는 딸이 이 기사를 보고는 '죽으려면 혼자 죽지 그렇게 무책임한 엄마가 어디 있냐'고 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너는 모성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아이에게 엄마가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인가를 어떻게 아이가 알겠니?...' 했답니다. 그러면서 그 가정을 그렇게 각박한 자리로 내몬 이 사회, 아니 자신이 더 부끄럽더라는 겁니다.
비운의 그룹 총수도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을 먹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 늦은 시간 자살을 생각하며 12층 집무실로 향하는 마음이 어떠했으며 유서를 한 통 한 통 써내려 가며 몇 차례나 멈칫거렸을까요? 안경을 벗고 손목시계를 풀어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놓으면서 그는 무엇을 생각했고 누구를 떠올렸을까요?
삶이 너무도 힘들어 더 이상 탈출구가 없다고 생각되고 그래서 더 이상 주변의 복잡한 상황을 자신의 생명으로 붙잡아 맬 수가 없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최후의 유혹을 받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오늘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런 순간들이 없었습니까? 아마 한 두 번은 그런 생각을 멈칫 멈칫 하면서 여기까지 살아왔을 겁니다.
우리가 신앙의 사표로 삼는 사도 바울, 그는 어땠을까요? 그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또한 정회장처럼, 아이 엄마처럼, 그 어느 학생처럼 '이제 그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정말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낸 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살아가는 모습이 원체 정열적이라 '자살', '좌절', 등의 말은 아예 그의 사전에 있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힘주어 역설하는 사람에게 그런 문제의 소지나 갈등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희망과 정열의 사도요 불굴의 투사였던 바울도 한번쯤은, 적어도 한번쯤은 '이제 그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런 삶의 의지가 엷어지는 극단 상황을 보여주고 있고 또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어떤 자세를 취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주목하는 이 빌립보서는 유난히 '기쁨'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그의 환경이 그만큼 암울했음을 반증하는 겁니다. 바울은 지금 감금당한 생활의 불안과 초조 속에서 그의 사역 말기에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빌2:17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 여기 '관제'란 번제를 드릴 때 같이 포도주를 부어 비워 버리는 제사법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남은 생의 사명을 그렇게 견주어 비유합니다. 즉 그는 지금 감옥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본문에 스며있는 바울의 심리를 잘 읽어야 여기에 담겨있는 아이러니를 통한 풍자를 우리는 짚어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밖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가 옥에 갇혀 자유롭게 거동할 수 없는 그 때에 쾌재를 부르면서 더 신바람나게 자신들을 과시하며 일을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투옥을 이용해서 바울의 심사를 틀어놓으려는 경쟁자 또는 적대자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15절 이하의 말씀은 이런 바울의 속내를 담고 있는 겁니다. "내가 옥에 갇혀 자유롭게 거동할 수 없으니 그것을 이용해서 내 심사를 뒤틀어 놓으려는 인간들이 있는 모양인데 너무 좋아할 것들 없소. 허허... 당신들의 순수하지 못한 행동들이 결과적으로는 나를 돕고 있는 셈이지..."
전반적으로는 또 외면적으로는 복음의 진보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 내부사정은 좀 미묘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주변상황들에 대해 언급하되 약간의 꽈배기를 틀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와 경쟁관계 내지는 적대적 위치에 있는 이들이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열심을 다해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위들이 왜 바울에게 심리적 고통을 가져다주지 않았겠습니까?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듯이 바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지금 밖의 돌아가는 전체적인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열심을 내고 있는 저들의 움직임의 진짜 목적은 바울을 괴롭게 만드는 데 있었고 그들의 사역이라고 하는 것도 17절에서 보듯이 이기적 야심에 따른 것으로 상당히 불순한 동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열성적인 성격으로 오직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결혼도 포기한 외곬 인생 바울에게 이런 바깥의 상황전개는 자신이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정황이 바울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불편함과 노쇠함과 피곤함 그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바울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고통 가운데서 바울은 마음 한 구석으로 '차라리 여기서 이대로 모든 것을 마감하고 주님께 갔으면...' 하는 우회적 자살 충동을 느꼈던 겁니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정확한 지적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는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직역하면 "죽는 것이 이익이다"입니다. 이건 고대 그레꼬 로망 세계의 자살에 대한 논쟁에 자주 등장하는 슬로건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만큼 바울의 처지가 절망적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바울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실제적 자살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긴 힘들지만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자살에 대한 슬로건을 사용할 만큼 그가 죽음에의 바람을 갖고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23절의 그의 표현을 빌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죽음에의 기대감'과 '삶의 의지' 둘 사이에 '끼여' 있었습니다. 자기를 둘러싸고 압박하는 죽음과 삶을 놓고 저울질하며 그 둘 사이에서 고민했음을 본문은 진솔하게 보여줍니다.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픈 생각을 그는 '욕망'이라는 강한 어조의 단어를 사용해 표현합니다. 23절에 보면 "이 죽음에의 욕망이 남아서 사는 것보다 더 컸다"고 고백합니다. 이게 자살 충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적어도 생명정지의 갈망을 그는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어디 바울의 경우만이겠습니까? 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기며 몸과 마음을 소진했던 엘리야도 왕상 19:4절에 보면 '하나님, 내 생명을 지금 거둬가 달라'고 넋두리합니다. 모세 또한 민11:15절에 보면 백성들의 불평과 불손에 압박을 받을 때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달라'고 절규합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자신이 살아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함으로서 죽고 싶다" 심경을 렘 20:14-18절에서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명자의 심정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제 그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치열하게 소명을 좇아 일하다가 절망하고 넘어져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사도나 제자나 사역자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게 쉽지 않고, 인생을 보람되고 의미 있게 산다는 게 힘겹습니다. 좁은 문을 지나가고 좁은 길을 걸어간다는 게 어찌 쉽겠습니까? 거기서 우리는 자살 충동도 느끼고, 생명 정지의 갈망도 갖는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의 생각이 여기서 머물지 않고 한 계단 더 올라섰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꼴 저꼴 안보고 눈감음으로써 모든 걸 다 떨치고 싶다"에서 사도는 그 현실을 놓고 상황 정리에 들어갑니다. 그의 자기 정리 작업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내적으로 재확인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6절 말씀처럼 그는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움을 입은 자입니다. 복음을 변호하는 목적은 복음의 진보로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가 널리 전파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는 자신을 빚쟁이라고 부름으로서 표현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을 진 자라는 것입니다. 빚진다는 것은 대단한 압박감입니다. "빚지고는 못산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바로 그 빚쟁이 정신으로 복음의 채무자로 자기를 규정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복음의 빚을 갚아야할 그런 사람입니다.
이제 바울은 정리된 자신의 존재 이유에다가 현재 진행되는 바깥 상황을 대비시켜 봅니다. 지금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복음의 진보였습니다. 저들 속내에 신경쓰지 말고 지금 이루어지는 결과에 초점을 맞춰보면 자신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에 순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즉 자신이 두고두고 갚아야 할 산더미 같은 빚이 누군가에 의해 갚아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안에서 가이사 황실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을 갚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현실은 고통해야할 현실이 아니라 기뻐해야할 현실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의 깨달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이것을 깨달았을 때 그의 자세는 180도 전환을 이룹니다.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는 자신의 의지와 정서를 기쁨 쪽으로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적대자들의 심통에도 불구하고 자기 눈길을 복음진보의 결과 쪽으로 고착시켜 저 바닥에서부터 기쁨을 펌프질해 끌어올리려는 바울의 처절한 노력을 우리는 본문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그것을 철저하게 시행합니다.
쉐익스피어의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했지만 사도 바울은 살고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냐,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냐"가 문제였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복잡한 많은 문제들이 그의 삶 속에 얼키고 설켜 있었지만 자기 소명의 목적에 부합하는 쪽으로 상황을 발전시킴으로 그는 심적인 고통을 떨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으로서 바울은 죽음을 극복합니다. 이 자기정리가 그로 하여금 자살 충동에서, 생명정지의 욕망에서 자기 자리로 되돌아오게 합니다. 그에겐 신학적으로 몸은 이미 죽은 몸이었습니다. 일찍이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는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사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에 머무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차고 당찬 삶의 역설이 있습니다.
인생은 죽어가는 겁니다. 사는 게 죽는 겁니다. 우리는 다 자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살은 합법적 자살이요 죄가 되지 않는 적극적 자살이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죽는 겁니다. 죽고 싶으면 죽어야지요. 그러나 그냥 그렇게 죽는 게 아니라 더 지독하게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죽어야겠다는 겁니다. 사명에 죽는 것,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죽음이요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자살 충동은 '자살'을 뒤집은 '살자'로 발전하여 긍정적 소명의 열정을 회복하여 삶의 날개를 펼치게 됩니다. 보십시오. 그것은 25-26절에서 보듯이 출옥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고 또 종말론적 상급에의 소망으로까지 발전합니다. 벽이 뚫어지고 문이 되어 먼 전망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죽음에의 욕망을 달성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므로 죽는 것으로 새로운 인생의 지평을 열었던 것입니다.
저는 월요일에 발생한 정회장의 죽음으로 한 주간 내내 무거운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남북을 왕래하느라 다 낡아버린 구두를 신고 인생을 마친 그가 허탈해 하며 했다는 말, "칭찬받을 일인줄 알고 신명을 다했는데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가 안팎으로 받았을 삶의 압박이란 게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제 다 소용없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살았더라면...' 이제 북핵 문제도 6자 회담을 통해 해결의 가닥이 잡히고, 남북간의 새로운 시대도 열릴 때가 되었다 싶어 '조금만 더 인내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인생을 쉽게 살지는 못합니다. 그렇기에 생 자체가 죽음에의 열망을 분출시키며 '주님, 어서 오십시오' 하고 우리로 절규하게 만들 때가 없지 않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자도 있고, 스스로의 무능에 괴로워할 때도 있고, 짓궂은 운명의 굴레가 내 삶을 조여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므로서 죽어가야 합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저는 오늘 헤르만 헷세의 시를 묵상하며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므로서 죽어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를 절망케 하소서.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미혹의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난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온갖 모욕을 겪도록 하여 주옵시고, 내가 스스로 지탱하여 나감을 돕지 마옵시고, 내가 발전하는 것도 돕지 마옵소서. 그러나 나의 자아가 송두리째 부서지거든 그때에 나에게 가르치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아 주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으려 하나 나는 오직 당신의 품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기쁨
빌 1:12-26 / 김병수 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한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이 너무나 기뻐서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내건 사람이 한 명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그를 열정적으로 믿고 따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는 일과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에게 생명을 내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에게 그의 삶의 기쁨이 어떤 것이며, 그 기쁨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했으며, 그리고 그 기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삶의 거룩한 기쁨
(1) 바울
먼저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는 12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알기 원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므로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는 18절의 말씀과 같이 바로 ‘복음의 진보’였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였기 때문에 이것이 이루어 질 때 바울은 기뻐할 수 있었고, 그의 삶 전체를 통하여 온전히 복음의 진보를 나타내었다면, 그의 삶은 정말로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삶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기뻐하고 자신의 처지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금 처한 상황은 로마의 감옥이었습니다. 냄새나고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고, 습기도 많고, 자유롭지 못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넉넉지 못하고, 계속 로마 병정들에게 감시를 받고 살아가는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완전히 집중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복음이 널리 전하여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정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 인생의 성적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목표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 이후에 그 목표가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때에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삶의 목표를 설정할 때 자기 자신만의 인생의 성적표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적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과목에서 다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필수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과목에서 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더욱 좋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재산을 가지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좋은 건강을 가지고, 항상 편안한 여유를 가지고, 세상의 좋은 모든 것에서 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세상 사람들은 "저 사람 참 잘 살았구나, 정말로 행복한 인생을 살았구나"라고 그 사람의 인생의 성적표에 대해서 좋게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성적표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의 성적표는 바로 하나님께서 채점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성적표를 단지 세상 사람들을 기준으로서 채점되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못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필수 과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선택과목에만 집중하고 그것만하면 되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채점하시는 인생의 성적표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과목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다른 모든 인생의 여정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은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바울 사도의 인생의 성적표
바울 사도도 이미 인생의 성적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성적표에 보면 지금 이렇게 감옥에 들어와서 힘들게 사는 것이 결코 그의 삶에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점수로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은 우리 인생 성적표의 채점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세상이 채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채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을 세상이 채점을 한 다면 바울 사도는 어떤 평가를 받았겠습니까? 아마도 낙제일 것입니다. 그 좋은 학벌 다 버리고, 그 좋은 집안 배경 다 버리고, 수 도 없이 많이 맞고, 돌도 맞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고, 아무런 재산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로 어리석은 낙제생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바울 사도는 우등생입니다. 비록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늘에 큰 상급을 쌓았으며, 복음의 진보를 위한 그의 고통은 하나님의 성적표에는 엄청난 점수로 기록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성적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세상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요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가난한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성적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위하여 복음의 진보, 복음의 증거는 우리가 반드시 이수해야 할 필수 과목입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복음의 증거자로 서는 것은 반드시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는 구별된 인생의 성적표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동일한 기준에서 인생의 성적표를 바라본다면 아마도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2. 거꾸로 사는 삶
20절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내가 살아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지 않으면 죽는 것 보다 못하고, 내가 죽어도 그리스도가 그 죽음으로 인하여 존귀히 되지 않는다면 그 죽음은 아무런 가치 없는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내어 걸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내어 걸만큼 우리의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1) 오직 예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온전히 집중되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기에는 결코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닙니다. 어쩌면 점점 세상이 발달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에는 점점 어려운 세상이 다가올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점점 더 악한 영들이 기세를 부리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하고, 유혹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궤계는 교묘합니다. 인간들에게 아주 달콤한 환상을 보여 줍니다. 점점 과학과 문명을 발달시켜 아프지도 않고, 고통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인간의 과학과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도록 세상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각 가운데 고정시켜 놓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 세상을 삶은 어떤 목사님은 ‘거꾸로 가는 삶’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가장 정확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 밖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이미 세상에게 진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완전히 집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걸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2) 예수쟁이
옛날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서 불렀던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바로 예수쟁이였습니다. 우리 말에 이 ‘쟁이’라는 말은 아주 쉽게 표현하면 ‘미쳐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볼 때에 아마도 예수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에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정말로 사도 바울과 같은 인생의 성적표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미친 예수쟁이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까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의 본능이 우리의 옛 사람이 너무 강해서 똑바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구세주로 고백하기 전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과 구세주로 고백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과 구세주로 고백한다고 해서 우리의 모습이 갑자기 예수님처럼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한꺼번에 어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이 필요하고 뼈를 깎는 인내과 고통의 시간을 잘 이겨내어야지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씩 더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날마다 내 자신을 쳐서, 내 본능을 쳐서, 내 하고 싶은 것, 내 육신이 원하는 것을 쳐서 하나님의 앞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금방 금방 내 속에서 튀어나와 시험에 들게 하고 좌절하고 낙심되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질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목숨을 내어 건 소명과 인내가 없다면 결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미치지 않으면 우리의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대가를 지불하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복음의 진보와, 하나님 안에 있는 연약한 자들을 향한 믿음의 진보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헌신과 소명인줄 믿습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걸어야 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주님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내어 건 결단과 헌신과 고백이 없다면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내 삶이 되어지기를 원한다는 주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기쁨은 바로 거룩한 기쁨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곧 바울의 기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기쁨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기쁨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기쁨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대로 살 때 비로소 참다운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인생의 기쁨을 얻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 기쁨을 온전히 얻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의 생명을 예수님께 내어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삶은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보기에는 실패한 인생 같아 보이지만, 인생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장 복되고 행복하게 산 인생으로 평가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후암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인생 여정을 마친 이후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을 수 있도록 분명한 삶의 목표를 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거룩한 기쁨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나 죽으나
빌 1:12-26 / 엄기호 목사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의 발길이 머무는 곳, 그곳이 어느 마을이든, 어느 도시든, 그 순간부터 그 도시와 그 마을은 바울의 영향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바울이 로마에 압송되어 들어오던 그날, 로마의 하늘에는 복음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대사, 이 작은 거인 바울만큼 세계 역사의 운명을 바꿔 놓은 사람은 없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냈던 편지입니다. 바울의 일생은 실로 숨가쁘게 살아온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수없이 채찍으로 매를 맞았고 돌로 맞았으며 여러 위험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헐벗었으며 툭하면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의 생애는 말 그대로 고통과 고생뿐이었습니다.특히 바울의 말년은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가정의 따스한 재미도 없었고, 사랑받고 줄 수 있는 아내도 없었고, 이제 몸 기댈 자식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그는,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 때문에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케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잠을 자든지, 밥을 먹든지, 감옥에 있든지, 병이 들었든지, 그의 생애는 “오직 내 안에 사는 분이 그리스도시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하다, 나의 사는 것 전부가 그리스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살아도 예수를 높이고 죽어도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만 남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가이사의 재판을 기다리는 바울은 그 판결이 어떻게 결론이 내려질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오직 복음 전파하는 일, 예수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1930년대 한국 강산을 뒤흔들며 전국 가는 곳마다 크게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던 이용도 목사는 계속되는 부흥성회 인도로 목이 쉬어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손짓 발짓하며 온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 자리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용도 목사는 “사는 것은 오직 예수다. 우리 신앙 초점은 예수다. 생시도 예수요 꿈에도 예수요 먹어도 잠을 자도 예수다.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다. 예수를 위하여 살고 예수를 위하여 죽자”,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진리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이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길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이 우리는 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가는 곳마다 말했다고 합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폐병으로 투병을 하면서도, 3년 동안 3천리 강산을 다니면서 수많은 영혼을 살리고 땀과 눈물과 피를 쏟아 수많은 생명의 마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 놓고, 1933년 10월 2일, 오후 5시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갔습니다. 그의 생애는 “짧고 굵은 생”이었습니다. 1930대 當時 일제치하에서의 암울했던 사회에, 사랑을 선포하여 희망의 바람을 불어넣었고, 움추렸던 한국교회에 회개와 기도를 선포하여, 부흥운동의 활력소가 되게 하였으며, 핍박받던 이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했든, 즉 살 수 있는 상황이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든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존귀하게 하자.
살아도 예수를 위해 살고 죽어도 예수를 위하여 죽자는 것입니다. 이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예수님에게 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일에는 어떠한 수모와 어떠한 고생과 고통을 당하여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이요 행복이요 그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7~9)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공은 주를 위하는 것으로 알고 실패는 주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는 신앙은 모든 것이 다 성공이요 축복이요 영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을 해도 주를 위하여, 실패를 해도 주를 위하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윤리적으로 흠이 없어야 훌륭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흠이 없는 사람을 쓰신 것이 아니라 흠이 많고 허물이 많고 실수를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길 때 죄를 사하시고 인정하시고 높여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14절에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구원의 하나님을 바로 알았습니다. 내 의가 아닌 주의 의로 구원을 받고 의로워진 신비를 바로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의로울 때도 주를 위하여 죄를 짓고서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실수도 많고 혈기도 많았고 자랑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이 노를 저어갈 때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시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유령이라 할 때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에 바다 위를 걷게 된 베드로는 그러나 곧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고 말았습니다. 바다에 빠지게 된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를 지르자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함께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치게 되었습니다(마 14:22). 이때에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도 예수님을 부르고 물 속에 빠져들어 가도 예수님만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공해도 예수요, 실패해도 예수만을 나타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실패해도 내 실패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나타나고 있다면 그 실패는 아주 위대한 역사와 기적으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도 성공도 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성도가 될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몸 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십자가의 마음으로 사랑과 온유와 겸손의 마음입니다. 자기가 죽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존귀케 하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승리가 있고 생명이 있으며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속담에 “향나무는 도끼가 찍어도 도끼 날에 향을 묻혀 준다”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고백처럼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이웃에 “내 안에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유익하게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죽는 것이 더욱 좋고 또한 유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삶의 마지막 가는 길이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요 예수님과 연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살아야 할 욕망도 있으니 그것은 당신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살고 죽은 것이 그리스도에게 있고 살아야 할 이유를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평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떠나신 후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도 우리를 유익하게 하셨고 죽어도 우리를 유익하게 하셨습니다.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착한 마음은 내 안에 계신 분이 그리스도일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31절로 33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아니 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내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육에 속한 인간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떠난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신령한 사람인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살고 남에게 유익을 주고 남을 성공시키려고 할 때 예수님은 내게 유익되게 하시고 나를 먼저 성공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바울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오직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는 역사가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체험을 날마다 하는 여러분 삶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진보의 기쁨
빌 1:12-26 / 윤영택 목사
지난 주일부터 주일예배 설교 본문으로 기쁨의 편지라는 별명을 가진 빌립보서를 읽고 있습니다. 기쁨의 편지를 묵상하며 한 주간 기쁜 날들을 지내셨습니까? 저도 이 말씀을 묵상하며 기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기대한 만큼 기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짧은 한 주간 동안 기쁜 일, 좋은 일, 답답한 일, 속상한 일 수 많은 일들이 교차되었습니다. 기쁘지 않았을 때는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선물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속 상하고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서있으면 다른 관계도 질서가 잡히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려지거나 틀어지면 다른 것들도 무너지는 것을 늘 깨닫습니다. 주보에 주일마다 짧은 글들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메일 통신으로 매일 아침 하나씩 다운받아 묵상하고 있는‘한 몸 기도편지’에서 오늘 말씀과 관련된 좋은 글이 있어 오늘 주보에 올렸습니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분이 ‘사람이 이웃과 평안하지 않은 이유는 자기 자신과 평안하지 않기 때문이고, 자기 자신과 평안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과 평안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평안함을 느끼는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되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얻게 되는 평안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는 짧은 해설이 곁들였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 머리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2) 라고 기원합니다. 평강을 평화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떤 평화입니까?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화입니다. 밥 잘 먹었니? 공부 잘하고? 건강은 좋아? 사업은 잘 되나? 아이들은 잘 자라고? 하고 안부를 묻는 것도 평강에 포함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평강, 평화 혹은 평안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오는 화해입니다. 죄가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면 평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만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이기 때문에 이렇게 소중합니다.
기초가 흔들리면 건물 전체가 흔들립니다. 아무리 값비싼 건축자재로 집을 지었어도 기초가 부실하면 부실공사입니다. 아무리 멋지게 내부를 치장했어도 기초가 흔들리면 그 집은 무너지고 맙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도 내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면 삼풍 아파트와 성수대교가 무너지듯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작은 시험에도 흔들리고 풍파에 휩쓸리며 내 감정과 환경에 따라 믿음이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물론 마음의 평안도 사라집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평안이 있으면 세상에서 만나는 어떤 위협과 두려움도 나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거친 바람이 불어닥치면 호수의 표면에는 풍랑이 일지만 더 깊은 물속은 요동하지 않고 고요합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 한 순간은 내가 흔들린다, 넘어간다 생각하다가도 주님이 주신 그 평안으로 말미암아 오뚜기처럼 다시 자리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평안을 잃으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무너지고 삶의 기쁨도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삶이 평안하지 못하다면 그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평안하지 못한 것은 누구때문이라고, 부모 잘못 만난 탓, 자식 탓, 형제 탓 그리고 이웃과 동료 탓 등, 다른 사람 탓하기 전에 먼저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이런 평안을 어떻게 누릴 수 있을지 오늘 읽은 말씀, 기쁨의 편지에서 또 찾아봅시다. 이 말씀에 아주 좋은 본보기가 있습니다.
1. 바울의 매임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진보’라는 단어는 앞에 적군이 가로 막고 있으며 어려운 문제와 환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진격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기쁨의 소식은 이처럼 환란 중에도 꺾이지 않고 계속 성장하는 능력입니다. 바울은 감옥생활에 건강도 부실해졌고 자유도 없는 곤란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시위대 감옥에 갇힌 바울은 죄수를 감시하는 군인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복음은 편안한 환경에서만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사방이 가로막힌 듯한 고난의 환경에서도 전파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보입니다. 바울은 이것 때문에 옥중에서도 기쁨을 누렸습니다.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는 빕립보 교우들은 옥중생활하는 바울을 염려하여 기도합니다. 목회자 바울이 어려움에 있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모양새가 맞는 것 같은데 입장이 거꾸로 되어 바울이 도리어 교인들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 교인들도 바울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몸도 건강하고 가정도 평안하며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 부모 얼굴도 세워주고, 취직도 척척 잘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도 잘 하는 그런 자랑거리가 있으면 좋지요. 이왕이면 건강하고 무슨 일을 해도 척척 이루어져야 지도자의 얼굴이 서고 교우들에게도 ‘봐라 예수 잘 믿으면 이런 복을 받는 거란다’ 하고 큰 소리 하며 여러분도 나처럼 되라고 자랑도 좀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바보처럼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에 바울의 형편이 잘 드러나지만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바울이 육체의 질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이 보입니다(고후12:7-10).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차례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치료되지 않고 여전히 그를 괴롭힙니다. 그런데 그 질병 때문에 괴로워 죽겠다고 하소연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확실히 우리와는 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바울이 정말 질병을 은혜로 여겼을까? 교인들을 안심시키려는 뜻에서 체면치레로 괜찮다고 하는 가식적인 사람이 아닐까? 의심이 들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면 비로소 이해가 되고 바울의 감사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고 수도 없이 매를 맞고 돌에 맞기도 했습니다.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번 넘겼으며 온갖 고난과 핍박을 다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누구보다 신령한 은혜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환상 중에 낙원에 이끌려 이루말할 수 없는 신비한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간증집회 강사로 나간다면 바울보다 더 멋진 간증을 할만한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랑거리가 많은 바울이 질병으로 고생하였습니다.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질병으로 고생하게 하시는 것은 ‘나로 하여금 스스로 높아지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내 육체에 아픈 가시를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육체의 질병을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약함 때문에 도리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 머물게 되었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얻은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는 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주 안에서 강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누리는 기쁨은 이런 종류의 기쁨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쁨을 잃으셨습니까? 정말 기뻐할 일이 없습니까? 만사가 괴롭고 귀찮습니까?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해봅시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먼저 체험해 봅시다. 그래야 세상이 주는 기쁨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혹은 평안을 비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잠시 있다 사라질 기쁨이나 행복, 평안이 아니라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나의 약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사람들 앞에 나의 완벽한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오지 않고 나의 약함을 드러냄으로 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처럼 도덕적으로 또는 신앙적으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감히 우러러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탄식하는 세리처럼 영혼의 병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 죄를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체험합니다. 주님은 우리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이시기 때문입니다. 환자는 건강한 몸을 자랑하러 의사 앞에 나오지 않고 질병을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고침받기 위하여 옵니다. 영혼의 질병을 감추지 않고 우리의 의사이신 주님 앞에 가능한 빨리 그리고 정직하게 보여드릴수록 더 빨리 더 깨끗이 고침을 받습니다. 치유의 기쁨, 회복의 기쁨을 얻습니다. 나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기쁨을 봅시다. 바울이 고난에 처했을 때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바울이 출옥되기 바라며 기도하고 바울이 없는 동안 더 열심히 믿음생활하며 겁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바울의 고난에 더 아픔을 주려고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거 봐라 자기 혼자 의로운체 하고 천방지축 나서더니 결국 감옥행이구나. 게다가 제 몸의 질병도 고침받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남을 위하여 무슨 선한 일을 한다고 나서는가? 이제 저 사람이 없을 때 우리가 제대로 복음을 전하자’하며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마저 기쁨으로 여깁니다. 비록 나를 시기하여 나의 약함을 고소하게 여기고 나를 괴롭게 하려는 의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결국 주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니 나는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쁨은 주의 복음을 맡은 종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복음의 주인이 누구인가 분명히 알고 있는 청지기 자세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청지기의 본분이 아닙니다. 나는 복음의 진보를 위한 도구와 통로가 될 뿐이지 내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십니다. 때로는 복음 전하는 사람의 고난으로 복음의 진보가 되게 하십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지만 오히려 자신의 매임 때문에 복음이 더 활발하게 전파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 요한이 예수님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요한아, 잘했다. 누가 감히 내 허락도 안 받고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이냐?’하지 않고 ‘아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지하여 능력을 행하고 즉시 나를 비방할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9:38-40)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 복음을 따라 살고 있다면 교파와 교단이 다르고 교회가 다르지만 복음 전파에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배척하고 금지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주의 복음이 진보되고 있다면 가로막고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껄끄러운 인간관계로 나를 싫어하고 반대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거나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은 정말 자신의 아픔을 더하게 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미움의 감정도 없었을까요? 바울의 말이 정말이라는 증거는 바로 다음 말에서 드러납니다. 바울은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더 인기를 얻고 성공했느냐 하는 문제로 시샘하고 질투할 가치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지경에 있습니다. 언제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사형수인데다 건강도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드리기로 작정한 마당에 동역자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오해와 질투가 그 열정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감옥에 갇혀 내 발로 다니며 전도하지 못하더라도 나의 매임을 위하여 염려하며 기도하고 내 대신 앞장서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들이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나를 시샘하고 내가 투옥된 것을 즐거워하며 이제는 자기들의 세상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나의 매임이 그들에게 자극과 도전이 되어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도리어 기쁘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정도로 배포가 큰 전도자였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나는 하나님의 종이요 청지기로서 충성을 다한다는 자세입니다. 내가 성령의 불쏘시개가 되어 복음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발화점이 된 것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내 얼굴이 돋보이고 내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나 자신은 존재도 없이 사라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일군의 자세가 아닐까요?
사단의 속삭임은 ‘네 존재를 알려라. 사람들이 너를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네 권리, 네 주장을 절대 굽히지 말고 포기하지 마라. 바보처럼 빼앗기고 손해보고 살지마라’ 하며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드러내라 부추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 등장하여 세례 요한보다 더 주목을 받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샘하여 세례 요한에게 투정을 부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세례를 주니 사람들이 다 그쪽으로 갑니다. 선생님이 그 사람보다 먼저 아니십니까? 나중 온 사람이 이래도 되는겁니까?’ 이런 식으로 속상함을 표현했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어떻게 지도합니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신부를 맞이하는 사람은 신랑이지만 신부를 맞아 즐거워하는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다. 그는 흥하여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8-30)
자신의 위치와 책임이 무엇인지 그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요한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잡이였고 나팔수였습니다.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세상에 알려졌다면 나의 할일은 다했다. 이제 나는 사라지고 그분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이것이 예수님의 길잡이 세례 요한이 가진 기쁨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도 이런 기쁨으로 주가 맡기신 일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내 이름이 드러나고 내 업적이 알려져야 하는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적다고 슬퍼하지 않기 바랍니다. 내가 신랑인가, 친구인가? 내가 그리스도인가, 그분의 길잡이인가? 세상에는 예수 이름 빙자하여 왕노릇 하는 목사, 선교사, 간증인들, 사이비 종교 교주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부추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져 사람들에게 높임받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 자리에 자기들이 앉아 영광을 취하는 인기인들이 복음을 흐리고 있습니다.
2.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는 사도 바울의 깨끗하고 겸손한 고백을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예수 때문에 높아지려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목숨을 내놓은 사람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나로 인하여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든지 살든지 나를 통해 예수께서 높아진다면 나는 좋습니다. 내가 사는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니 그분을 위하여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내가 지금 부름을 받아 세상을 떠난다 해도 한 점 부끄럽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모든 수고를 그치고 주님 앞에 서는 순간을 기대하며 가슴이 벅찹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4:7) 고 했던 바울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나 개인의 솔직한 소망은 힘든 세상의 일을 마치고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받으러 가고 싶습니다. 내가 죽어 이 땅을 떠나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을 생각하면 오늘이라도 나를 불러가시는 것이 나에게는 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직 살아서 여러분 곁에 있는 것이 여러분의 믿음 성장을 위하여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지 않고 더 살아야 할 것과 여러분의 믿음 성장과 기쁨을 위하여 아직은 육신으로 함께 지낼 것을 확신하고 기도합니다. 언젠가는 이 감옥으로부터 석방될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위하여 기도한 결과 석방이라는 희소식이 전해지면 여러분의 기쁨이 더 할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하게 보여줄 자랑거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진보하는 것처럼 신앙 또한 진보합니다. 생명은 자라야 정상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점점 성숙해집니다. 내 안에 복음이 들어와 생명의 씨앗이 심겨졌으면 이제 자라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교우들의 신앙성장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관제로 드린다 해도 기쁘다(2:17) 했습니다.
관제가 무엇인가 다시 설명을 드립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불태워 드릴 때 제사의 마지막 순서로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것을 관제라고 합니다. 포도주를 붓는 순간 제사가 완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진 제물은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제물은 완전히 불태워지고 포도주는 마지막 방울까지 부어졌습니다. 이제 제단 위에 남은 것은 짐승의 타는 냄새와 포도주의 향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관제로 드린다 해도 나는 기쁘다고 한 말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봉사의 제물 위에 내 피를 관제로 부어 드린다 해도 나는 기쁘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존재는 흔적도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는 성도의 기쁨은 나를 완전히 불태움에서 얻습니다. 진정한 제물 되기 원하십니까? 내 존재는 흔적도 없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나는 사라집니다. 내가 살아서 나를 드러내고 싶고 내 이름 나타내고 싶으며 내 공적 자랑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믿음과 봉사생활에 기쁨이 있다가 없다가 오락가락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내가 죽고 예수께서 살아계시면 그 기쁨이 살아 움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함께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나를 밑거름으로 내어드리는 헌신된 성도들이 주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갑니다. 내가 잘되고 성공하고 얻은 것이 아니라 나의 낮아짐과 매임과 불편함과 심지어 나의 죽음 때문에 오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진보와 기쁨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이보다 그리스도를 더 닮은 경우가 있을까요? 우리 교회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자는 것입니다. 정말로 옥스포드 한인교회 교우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도들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입술로 예수님을 흉내내는 사람이 아니라 속속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으로 날마다 변화되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 언급했던 찬송가사‘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아봅시다.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 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거저 주는 사랑인데 나는 받는 것을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을 닮은 듯하나 나의 마음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산하고 있으니 예수님 나를 도와주소서’이렇게 기도하며 한 주간 살아봅시다.
예수님 때문에 바보 소리 듣고 못났다는 소리 들으며 사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너무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는 나의 모습을 멋지게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그리고 너무 현실적이고 계산적이고 내 중심으로 살려고 욕심부리지만 않는다면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나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높아지시면 나는 기쁩니다. 내가 곁에 있음으로 다른 형제와 자매가 유익이 되고 주의 기쁜 소식을 나누는 통로가 된다면 나는 만족합니다. 주님 나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이런 소망과 기쁨으로 한 주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기쁨
빌 1:12-26 / 김병수 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한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이 너무나 기뻐서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내건 사람이 한 명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그를 열정적으로 믿고 따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는 일과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에게 생명을 내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에게 그의 삶의 기쁨이 어떤 것이며, 그 기쁨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했으며, 그리고 그 기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삶의 거룩한 기쁨
(1) 바울 사도의 삶의 목표
먼저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는 12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알기 원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므로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는 18절의 말씀과 같이 바로 ‘복음의 진보’였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였기 때문에 이것이 이루어 질 때 바울은 기뻐할 수 있었고, 그의 삶 전체를 통하여 온전히 복음의 진보를 나타내었다면, 그의 삶은 정말로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삶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기뻐하고 자신의 처지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금 처한 상황은 로마의 감옥이었습니다. 냄새나고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고, 습기도 많고, 자유롭지 못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넉넉지 못하고, 계속 로마 병정들에게 감시를 받고 살아가는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완전히 집중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복음이 널리 전하여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정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 인생의 성적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목표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 이후에 그 목표가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때에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삶의 목표를 설정할 때 자기 자신만의 인생의 성적표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적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과목에서 다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필수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과목에서 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더욱 좋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재산을 가지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좋은 건강을 가지고, 항상 편안한 여유를 가지고, 세상의 좋은 모든 것에서 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세상 사람들은 "저 사람 참 잘 살았구나, 정말로 행복한 인생을 살았구나"라고 그 사람의 인생의 성적표에 대해서 좋게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성적표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의 성적표는 바로 하나님께서 채점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성적표를 단지 세상 사람들을 기준으로서 채점되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못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필수 과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선택과목에만 집중하고 그것만하면 되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채점하시는 인생의 성적표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과목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다른 모든 인생의 여정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은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바울 사도의 인생의 성적표
바울 사도도 이미 인생의 성적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성적표에 보면 지금 이렇게 감옥에 들어와서 힘들게 사는 것이 결코 그의 삶에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점수로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은 우리 인생 성적표의 채점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세상이 채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채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을 세상이 채점을 한 다면 바울 사도는 어떤 평가를 받았겠습니까? 아마도 낙제일 것입니다. 그 좋은 학벌 다 버리고, 그 좋은 집안 배경 다 버리고, 수 도 없이 많이 맞고, 돌도 맞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고, 아무런 재산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로 어리석은 낙제생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바울 사도는 우등생입니다. 비록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늘에 큰 상급을 쌓았으며, 복음의 진보를 위한 그의 고통은 하나님의 성적표에는 엄청난 점수로 기록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성적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세상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요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가난한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성적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위하여 복음의 진보, 복음의 증거는 우리가 반드시 이수해야 할 필수 과목입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복음의 증거자로 서는 것은 반드시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는 구별된 인생의 성적표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동일한 기준에서 인생의 성적표를 바라본다면 아마도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2. 거꾸로 사는 삶
20절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내가 살아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지 않으면 죽는 것 보다 못하고, 내가 죽어도 그리스도가 그 죽음으로 인하여 존귀히 되지 않는다면 그 죽음은 아무런 가치 없는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내어 걸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내어 걸만큼 우리의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1) 오직 예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온전히 집중되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기에는 결코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닙니다. 어쩌면 점점 세상이 발달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에는 점점 어려운 세상이 다가올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점점 더 악한 영들이 기세를 부리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하고, 유혹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궤계는 교묘합니다. 인간들에게 아주 달콤한 환상을 보여 줍니다. 점점 과학과 문명을 발달시켜 아프지도 않고, 고통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인간의 과학과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도록 세상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각 가운데 고정시켜 놓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 세상을 삶은 어떤 목사님은 ‘거꾸로 가는 삶’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가장 정확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 밖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이미 세상에게 진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완전히 집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걸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2) 예수쟁이
옛날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서 불렀던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바로 예수쟁이였습니다. 우리 말에 이 ‘쟁이’라는 말은 아주 쉽게 표현하면 ‘미쳐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볼 때에 아마도 예수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에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정말로 사도 바울과 같은 인생의 성적표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미친 예수쟁이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까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의 본능이 우리의 옛 사람이 너무 강해서 똑바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구세주로 고백하기 전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과 구세주로 고백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과 구세주로 고백한다고 해서 우리의 모습이 갑자기 예수님처럼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한꺼번에 어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이 필요하고 뼈를 깎는 인내과 고통의 시간을 잘 이겨내어야지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씩 더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날마다 내 자신을 쳐서, 내 본능을 쳐서, 내 하고 싶은 것, 내 육신이 원하는 것을 쳐서 하나님의 앞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금방 금방 내 속에서 튀어나와 시험에 들게 하고 좌절하고 낙심되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질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목숨을 내어 건 소명과 인내가 없다면 결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미치지 않으면 우리의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대가를 지불하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복음의 진보와, 하나님 안에 있는 연약한 자들을 향한 믿음의 진보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헌신과 소명인줄 믿습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걸어야 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주님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내어 건 결단과 헌신과 고백이 없다면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내 삶이 되어지기를 원한다는 주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기쁨은 바로 거룩한 기쁨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곧 바울의 기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기쁨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기쁨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기쁨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대로 살 때 비로소 참다운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인생의 기쁨을 얻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 기쁨을 온전히 얻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의 생명을 예수님께 내어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삶은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보기에는 실패한 인생 같아 보이지만, 인생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장 복되고 행복하게 산 인생으로 평가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후암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인생 여정을 마친 이후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을 수 있도록 분명한 삶의 목표를 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거룩한 기쁨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나 죽으나
빌 1:12-26 / 엄기호 목사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의 발길이 머무는 곳, 그곳이 어느 마을이든, 어느 도시든, 그 순간부터 그 도시와 그 마을은 바울의 영향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바울이 로마에 압송되어 들어오던 그날, 로마의 하늘에는 복음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대사, 이 작은 거인 바울만큼 세계 역사의 운명을 바꿔 놓은 사람은 없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냈던 편지입니다. 바울의 일생은 실로 숨가쁘게 살아온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수없이 채찍으로 매를 맞았고 돌로 맞았으며 여러 위험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헐벗었으며 툭하면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의 생애는 말 그대로 고통과 고생뿐이었습니다.특히 바울의 말년은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가정의 따스한 재미도 없었고, 사랑받고 줄 수 있는 아내도 없었고, 이제 몸 기댈 자식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그는,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 때문에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케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잠을 자든지, 밥을 먹든지, 감옥에 있든지, 병이 들었든지, 그의 생애는 “오직 내 안에 사는 분이 그리스도시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하다, 나의 사는 것 전부가 그리스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살아도 예수를 높이고 죽어도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만 남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가이사의 재판을 기다리는 바울은 그 판결이 어떻게 결론이 내려질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오직 복음 전파하는 일, 예수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1930년대 한국 강산을 뒤흔들며 전국 가는 곳마다 크게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던 이용도 목사는 계속되는 부흥성회 인도로 목이 쉬어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손짓 발짓하며 온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 자리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용도 목사는 “사는 것은 오직 예수다. 우리 신앙 초점은 예수다. 생시도 예수요 꿈에도 예수요 먹어도 잠을 자도 예수다.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다. 예수를 위하여 살고 예수를 위하여 죽자”,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진리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이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길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이 우리는 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가는 곳마다 말했다고 합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폐병으로 투병을 하면서도, 3년 동안 3천리 강산을 다니면서 수많은 영혼을 살리고 땀과 눈물과 피를 쏟아 수많은 생명의 마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 놓고, 1933년 10월 2일, 오후 5시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갔습니다. 그의 생애는 “짧고 굵은 생”이었습니다. 1930대 當時 일제치하에서의 암울했던 사회에, 사랑을 선포하여 희망의 바람을 불어넣었고, 움추렸던 한국교회에 회개와 기도를 선포하여, 부흥운동의 활력소가 되게 하였으며, 핍박받던 이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했든, 즉 살 수 있는 상황이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든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존귀하게 하자.
살아도 예수를 위해 살고 죽어도 예수를 위하여 죽자는 것입니다. 이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예수님에게 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일에는 어떠한 수모와 어떠한 고생과 고통을 당하여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이요 행복이요 그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7~9)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공은 주를 위하는 것으로 알고 실패는 주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려는 신앙은 모든 것이 다 성공이요 축복이요 영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을 해도 주를 위하여, 실패를 해도 주를 위하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윤리적으로 흠이 없어야 훌륭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흠이 없는 사람을 쓰신 것이 아니라 흠이 많고 허물이 많고 실수를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길 때 죄를 사하시고 인정하시고 높여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14절에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구원의 하나님을 바로 알았습니다. 내 의가 아닌 주의 의로 구원을 받고 의로워진 신비를 바로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의로울 때도 주를 위하여 죄를 짓고서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실수도 많고 혈기도 많았고 자랑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이 노를 저어갈 때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시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유령이라 할 때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에 바다 위를 걷게 된 베드로는 그러나 곧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고 말았습니다. 바다에 빠지게 된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를 지르자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함께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치게 되었습니다(마 14:22). 이때에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도 예수님을 부르고 물 속에 빠져들어 가도 예수님만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공해도 예수요, 실패해도 예수만을 나타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실패해도 내 실패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나타나고 있다면 그 실패는 아주 위대한 역사와 기적으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도 성공도 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성도가 될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몸 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십자가의 마음으로 사랑과 온유와 겸손의 마음입니다. 자기가 죽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존귀케 하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승리가 있고 생명이 있으며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속담에 “향나무는 도끼가 찍어도 도끼 날에 향을 묻혀 준다”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고백처럼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이웃에 “내 안에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유익하게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죽는 것이 더욱 좋고 또한 유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삶의 마지막 가는 길이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요 예수님과 연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살아야 할 욕망도 있으니 그것은 당신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살고 죽은 것이 그리스도에게 있고 살아야 할 이유를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평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떠나신 후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도 우리를 유익하게 하셨고 죽어도 우리를 유익하게 하셨습니다.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착한 마음은 내 안에 계신 분이 그리스도일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31절로 33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아니 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내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육에 속한 인간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떠난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신령한 사람인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살고 남에게 유익을 주고 남을 성공시키려고 할 때 예수님은 내게 유익되게 하시고 나를 먼저 성공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바울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오직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는 역사가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체험을 날마다 하는 여러분 삶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살든지 죽든지
빌 1:18-24 / 이필재 목사
교인 가정에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시어머니께서 100세 가까이 아주 장수하셨습니다. 아마 자녀들 생각에는 어머니가 너무 오래 사신다는 말을 했고 의식도 있었습니다. 아마 모시는 며느리 입장에서는 힘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판단됩니다. 그러다가 정말 가실 때가 되어 마지막 임종을 기다리는데 정신은 아직도 말짱하셨습니다. 며느리가 옆에서 아무 말도 안했으면 좋았을 것을 설교를 해드렸습니다. “어머니! 천국 가시면 아버님도 거기 계시고 친구 분들도 거기 계시고 거기는 눈물도 고통도 아픔도 없는 언제나 좋은 시간만 보낼 수 있으시니까 어머니, 얼마나 좋으세요?” 이렇게 성경에 있는 대로 설교를 했는데 시어머니는 그 말이 좋게 안 들리고 “빨리 죽으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시어머니가 눈을 감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좋은 데를 나 혼자 가니 미안하다. 같이 가자.” 그러니 며느리가 당황스러워졌잖아요? “어머니, 저는 어머니 손자들 돌봐야 되잖아요? 그 아이들은 제가 없으면 큰일 나잖아요?” 그랬더니 “그 놈들도 다 데리고 가자.” 그래서 마지막 임종이 썰렁하게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임종하는 자를 수없이 만나고 경험합니다.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자녀들이나 본인 자신 모두 큰 상처를 받게 되므로 될 수 있는 한 말을 줄이고 아주 조심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오늘 읽은 이 성경 말씀을 써 보낸 것입니다. 로마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자를 가장 많이 죽인 악명 높은 나라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는지 아니면 거기서 끝내 죽을지 오늘 말씀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 “살든지 죽든지”라고 했습니다. 살는지 죽을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다음에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죽을 확률이 더 많음을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어 있으니” 이런 말을 했잖아요? 삶과 죽음 사이에 내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1년에 1억 이상의 사람이 죽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똑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이 사실은 가장 정확하고 당연한 진리인데도 나를 그 죽음에 포함시키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공통적 심리라고 하이테크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사도 바울은 “이 죽음의 문제는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나의 문제이다. 또 현실적인 문제이다. 나는 여기서 이대로 죽을지도 모릅니다.”라고 사랑했던 빌립보 교우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의 모든 설교는 죽음 대비 설교였습니다. 이것을 종말론적 설교라고 말합니다. “내가 가서 자리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 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열 처녀 비유 설교, 달란트 비유 설교, 감추인 보화, 모두 천국 생활 중심 설교 말씀을 그렇게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 전체는 우리 모든 인간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삶의 궁극적 목적은 이 세상이 아니고 영생을 얻어서 영원히 사는 천국을 목표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갈보리교회 나오신 모든 교우님들에게 여러분이 세상에서 살고 싶은 기간을 한번 적어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몇 살까지 살고 싶다고 적으시겠습니까? 흔히 우리가 듣는 소리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 아깝다. 그 사람 더 살아야 되는데….” 이런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그러면 아깝지 않는 나이는 몇 살인가요? 예수님은 33세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할 일을 다 했다.” “다 이루었다.” 사실 예수님보다 오래 살았으면 우리가 오래 산 것입니다. 성경에 유명한 하나님의 종들이 빨리 죽고 싶어 했던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예언자 엘리야도 로뎀 나무 아래서 여호와께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렇게 기도를 했고, 민수기 11장 15절에 보면 모세도 똑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고, 요나도 똑같이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기도에는 진정성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대가 어긋난데 대한 불만 토로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들의 그러한 기도는 듣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첫 구절을 보면 바울 사도가 감옥에 있으면서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렇게 성경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자기 말로도 죽을는지 살는지 모르는 감옥에 앉아서 뭐가 그렇게 기뻐서 반복해 가면서 기뻐하고 또한 기뻐했는가? 그러면 예수 믿는 우리들도 똑같이 그런 기쁨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인가? 지금 사도 바울이 기쁜 것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거룩한 가치관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관이 뭔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역사 속에도 죽음보다 귀한 가치관은 얼마든지 있어 왔습니다. 어떤 면에 우리 자신들도 그렇게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기 남자 교우님들은 군대에 갔다 오셨습니다. 군대 가치관은 뭡니까?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이슬같이 죽겠도다.” 우리 다 그렇게 했잖아요? 일본은 오랜 역사를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로 가치관을 정했잖아요? 그래서 세계 역사를 보면 가미가제 의식을 전수시켰잖아요? 그때 일본 청년들은 국가 제단에 젊은 피를 쏟으며 죽는 것을 최고의 가치관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20대 초반에 그 젊은 나이에 가미가제 비행기를 타고 적함에 그냥 부딪혀 죽은 겁니다. “이것이 가장 보람된 것이다.”라는 가치관 설정 때문입니다. 지금 온 세상은 자살 폭탄 테러로 불안합니다. 거의 대부분이 20대 초반의 처녀총각들이 하고 있단 말입니다. 왜 그러는가? 이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가치관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지금 바울의 기쁨은 뭔가? 자신이 있는 감옥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감옥에 자기와 같은 죄수를 지키는 군인들이 바울을 통해서 모두 다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감옥 안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득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지금 너무나도 기쁘다. 왜냐하면 내 삶에 최고 가치관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그것인데 바로 그 목표가 이 감옥 안에서 이루어졌음으로 이 감옥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 죽을지도 모르는데도 바울은 “죽음을 통해서도 그 목표가 이루어진다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죽는 것도 유익하리라.” 이러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살아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기독교 진리는 죽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33세에 돌아가시지 않고 100세까지 장수하셨다고 합시다.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예수님은 33세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돌아가셔야만 인류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에 그렇게 일찍 가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테니스가 말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사도 바울이 생긴 것이다.” 왜? 스데반을 죽이는 그 현장의 성경 말씀을 보면 누구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사도 바울만이 거기 사도행전에 밝혀져 있습니다. 자기가 죽이는 스데반의 장렬한 죽음을 바라본 사울은 그때부터 이미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죽일 때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죽어갔던 그 스데반을 생각합니다. “나도 살든지 죽든지 상관없이 내 삶을 통해서 또는 내 죽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파 된다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만약 그것 때문에 내가 죽어야 된다면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실 이 세상의 위대한 인물들은 죽은 다음에 더 많이 일하고 있습니다. 정몽주 선생은 젊은 시절에 테러를 당해 죽었습니다. 600년 지났지만 지금도 그분의 아름다운 시 한편은 모두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죽어서 일하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터에서 쓰러져 죽었지만 그의 애국심은 이 나라 모든 국민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습니다. 죽은 게 아니라 내 속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부정적 측면으로 바라보면 대단히 불행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미래 불안 속에 살아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이 미래 불안을 없애주는 방법을 지금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담대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무엇인가? 절대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절대 가치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심으로 영생을 성취하는 것으로 가르쳐주셨고, 베드로전서 1장 9절에는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1대 1로 몰래 찾아왔던 특징 있는 두 사람이 복음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최고 출생한 권력가 니고데모요, 또 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성공한 부자 청년이었습니다. 이들은 왜 몰래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했는가? 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질문한 내용 속에 그들의 마음이 잘 조명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대화가 요한복음 3장 1절에서 15절입니다. 마지막 15절에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주신 말씀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고 끝나시잖아요? 권력의 자리에서 성공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그의 심각한 인생의 고민은 “인간의 절대 가치가 무엇인가? 왜 살아야 되는가? 무엇을 위해서 나는 있는가?” 이것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밤중에 예수님을 1대 1로 만나서 “나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그 다음에 이 부자 청년은 더 큰 성공자입니다. 그는 니고데모와 같은 높은 관직에 있는 관원이면서 또한 부자라고 했습니다. 양쪽 면을 모두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젊은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젊은 청년 나이에 관원이 되었고 큰 재물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그는 그 사회에서 최고의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찾아와서 무슨 질문을 했습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두 사람의 똑같은 관심이 절대 가치 영생에 초점이 맞춰 있음이 확인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박조준 원로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총수가 말년에 한 일이 있는데 한국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직자들을 자기 사무실에 한분씩 초대해서 인생의 문제에 대한 개인 교수를 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신부님을 모셔다가 인생이라는 게 무엇이며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 것이며 어떤 때는 목사님을 모셔다가 똑같은 문제를 질문하고…. 이 부자 청년이나 니고데모와 똑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원로 목사님도 거기에 초대를 받으셨는데 그때가 마침 외국 집회가 있어서 내가 그 초대를 응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십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최고 목표가 절대 가치와 연결이 되지 않았을 때는 목표 달성 이후가 더 심각해집니다. 요즘 우리 한국에 이상한 병이 생겼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자살을 더 많이 합니다. 누구든지 그 사람과 같이 다 되고 싶어 하는 그런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왜 그럴까? 니고데모도, 부자 청년도 다 목표가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견딜 수 없는 공허함 때문에 한 밤중에 주님의 방문을 노크하고 나한테 “이것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온 세상 여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인류 역사에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던 왕세자비 다이애나는 왜 왕궁을 뛰쳐나왔는가? 일본의 왕세자비 마사코의 결혼이 발표되었을 때 일본보다 영국과 미국이 더 흥분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천왕의 부인 미찌꼬와 왕세자비 마사코 똑같이 지금 심각한 우울증 환자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얻어야 행복한 것인가? 바로 절대 가치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인간은 이 절대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공허감이 옵니다. 누가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남자가 결혼을 두 번 해서 다 실패했다고 합니다. 왜 두 번씩이나 결혼에 실패했느냐고 하니까 한번은 부인이 도망가서 실패했고 두 번째는 부인이 도망 안가서 실패라고 합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데카르트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신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신 존재의 증명이다.”
바울 사도가 선교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거지입니다. 굶주리며 핍박받고 감옥에 갇히고 돌보는 이가 없이 남루하고 잘 봐주면 동정이 가고 잘못 보면 멸시를 당합니다. 매우 잘난 사람들이 바울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고 자랑하면서 멸시했을 때 바울이 말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소. 나는 베냐민 지파 왕손 후손이오. 그 하나만 봐도 내가 당신보다 날 것 같은데? 나는 중간 할례자가 아니고 출생 8일 할례자요. 나는 전통 히브리인이오. 아브라함의 직계 혈통이오. 나는 이 나라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로 구성된 바리새파요. 학력으로 말하면 최고였고 가말리엘 문하생이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오. 이 나라 국가 최고의 권력 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원 72명 가운데 최연소 멤버십을 획득한 사람이오. 나보다 잘 난 사람 있소? 없지요? 이게 나였소. 그런데 지금은 내가 이 모든 것을 분토, 똥과 같이 여기고 있습니다. 이유는 절대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오. 그 절대 가치란 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원이오 영생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평가한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비천하고 빈약한 생활을 한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영생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그 사람은 최고로 성공하고 축복받은 사람이 되고, 반대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좋은 모든 것을 다 소유했다 하여도 예수의 복음을 모르고 영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최고의 실패자라는 가치관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설교를 생각해 보세요. 어느 농부가 남의 집에 가서 일했습니다. 서로 밭을 갈고 괭이로 땅을 팔면서 그 집에서 일을 했습니다. 남의 밭에서 일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 그 밭에 금맥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금덩어리가 나오는 밭이 아니냐?’ 그는 돌아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예수님의 비유 설교입니다. 그 설교의 뜻이 뭡니까? 절대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희생시키고 무시하고 그것 하나를 소유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았다는 것은 어떤 것도 아깝지 않게 희생시키고 바꿀 수 없는 절대 진리 하나를 붙잡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에 대해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이 뭡니까? 하나님 섬기는 것은 하나님 섬기다 죽어도 괜찮다 이겁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것을 그냥 그럭저럭 하면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그런 가치가 아니고 거기다 생명을 걸고 인생의 중심을 거기다 두어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이것이 하나님 믿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체험을 갖고 계십니까? 교회 다니면서도 신앙생활을 마지못해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어휴! 가기 싫은데 다들 가니까 할 수 없이 가고, 아까운데 체면상 헌금하고….’ 이렇게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언제 변화되느냐? 그에게 어떤 은혜 체험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완전히 바뀝니다. 과거 헛되게 살아왔던 자기 모습에 너무나도 실망을 하고 그때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뀝니다. ‘이게 뭐야? 내가 그 좋던 시절 그 능력 있던 시절에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형편없이 살아왔는가? 내가 지금까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얻으려 했던 그 많은 것들이 이렇게 무가치한 것을 이제야 알다니….’ 그때부터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견딜 수 없는 후회감과 눈물이 나지요? 그래서 우는 겁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불교 신자, 아버지는 유교 학자이고, 저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한 집안에 세 사람의 종교가 다 달랐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아버지를 예수 믿게 하는데 시간도 너무 많이 걸렸고 마음 희생도 사실 많았습니다. 제가 29살에 목사 안수를 받고 아버지한테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때 그분은 70세였습니다. “아버지! 저는 이제 내가 선택한 이 길을 위해서 평생 이 길을 갈 것이니까 그렇게 아십시오. 제가 아버지한테 한 가지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목사 되는 것을 반대 안하신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나를 쳐다보면서 눈물을 펑펑 쏟으시는 겁니다. 내 손을 잡으면서 존칭어를 썼습니다. “이 목사님! 부끄럽습니다. 내가 이제 와서 내 인생을 돌아보니 하나님 앞에 잘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떡하지요? 지난달 내가 나가는 조그만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강사 목사님이 내 방에서 일주일 계셨소.” 그러더니 몸의 상체를 벌떡 일으키시더니 나를 보고 “목사님! 부끄럽습니다. 내가 이 목사님과 같이 어린 시절에 이 가치를 발견했다면 보람 있는 삶을 살 것을 인생 말년에 부끄럽습니다.” 나한테 일어나시더니 큰 절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내가 이렇게 시시하게 보여도 아버지한테 큰 절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제 아버지 인생에 대해서 예수 안 믿고 사셨기 때문에 별로 그렇게 존경할 만한 것이 아쉬운 사람인데 저는 그 마지막 순간 하나만이 제 가슴에 남았습니다. 얼마나 회개하고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리며 그 체온 있는 손으로, 식어가는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나한테 부끄러움을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은 ‘이것 때문에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거야. 이것을 위해서는 살아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아! 하나님 믿는 것은 그럭저럭 하는 것이 아니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돼. 이것을 하다가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아.’ 오늘 말씀은 이겁니다. 이 ‘살든지 죽든지’ 이 대목을 가지고 누가 복음 성가 가스펠송을 불러서 여러분이 즐겁게 부르시죠? 우리 한번 불러볼까요? 여러분 모두 아실 겁니다. 자막으로 나옵니다.
「 “사나 죽으나”
1.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2.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후렴)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할렐루야!
바울의 선교 사역
빌 1:18-21 / 이필재 목사
그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준비해오던 선교사 파송의 날이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갈보리교회 선교 역사는 파송 역사로 발전합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나 구약 역사 모두 합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가장 훌륭하게, 가장 효과 있게 이 땅에 전한 선교사가 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바울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선교 활동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그가 친필로 남긴 13권의 바울 서신에 세밀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가장 크게 들어 쓰신 사람은 바울입니다. 본래 이 바울은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졌었습니다. 사울은 유대 나라 초대 왕의 이름으로 사울왕이 속했던 베냐민 지파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왕 개념으로 살고 싶었고 또 정치적으로 초고속 출세가도를 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이름은 로마식 이름으로 “작은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영적으로 자기 모습을 객관성 있게 바라보면서 발표한 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자신을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나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했습니다. 죄인의 자리로 평가하면 자기가 가장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최고로 죄가 많은 사람이 나다.” 이렇게 자기를 평가했고, 에베소서 3장 8절에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죄인 중에 서면 우두머리인데 성도 반열에 서면 자기는 꼴찌라는 것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 사도가 된 다음에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 모자라는 사람, 없어도 괜찮은 자로 “나 같은 사도는 없어도 괜찮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봤습니다. 죄인으로 치면 제일 가는 괴수, 성도로 따지면 꼴찌, 사도로 따지면 없어도 괜찮은 사람! 그래서 “내 이름은 바울이다. 작은 자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자가 선교에 있어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보다 하나님을 위해서 훌륭하게 살았던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2000년 역사의 설교자들이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그가 사회에서 얼마나 좋은 위치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 나라는 산헤드린이라는 법적 기구가 있었습니다. 71명의 회원이 있는데 이 기관은 유대 나라의 입법, 사법, 행정 모두를 관할하는 최고의 평의회 기관입니다. 바울은 최연소로 산헤드린 회원이 되었습니다. 또 유대인은 소년이 다섯 살이 되면 성경공부를 시작해야 됩니다. 그리고 열 살이 되면 율법을 공부해야 하고, 12살이 되면 예루살렘 유월절 행사에 참여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열세 살이 되면 ‘바로 미츠바’라는 계명의 아들이라는 자리에 가게 됩니다. 이때 가장 총명해 보이는 소년들은 랍비 학교에 보내지게 됩니다. 바울은 이 과정을 다 거친 사람입니다. 율법 학교의 교육은 두 가지 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약간의 진보적인 파를 ‘샤마이’라고 부르고, 극단 보수파를 ‘힐렐’이라고 부르는데 바울은 보수파 힐렐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 그가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이렇게 엄격한 과정을 다 거치고 그 중에서 최고의 유망주로 인정받아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입학합니다. 최고의 율법 교육기관입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최고의 수재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권을 갖게 됩니다.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을 평가하면 바울을 능가하는 실력자가 없을 만큼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예수를 믿고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배설물 분토와 같이 여기노라.” 이 분토라는 말, 배설물이라는 헬라말로 ‘버려도 아깝지 아니한’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화장실에 가셔서 볼 일을 보시고 나서 내 몸 속에서 빠져나간 그 배설물을 ‘어휴, 아까워라! 저렇게 내 몸 속에 있는 것들이 다 나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이제는 무가치해져 버린 것, 빨리 나갈수록 좋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성령의 지시를 받은 바울이 아시아 땅에서 유럽의 빌립보로 넘어가 유럽 땅에 최초로 기독교회를 세우고 그로부터 유럽 전역이 복음화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지금의 유럽 나라들이 모두다 기독교 문화유산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보다 더 큰 일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런 큰일을 할 수 있었으며 그의 선교는 힘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이것을 조명해 보는 것이 우리의 선교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바울 선교의 첫 번째 특징은 교회를 많이 창립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사역 특징 중에 교회를 창립하셨음을 우리가 조명해 보았는데, 바울 서신에서는 어떻게 그것이 나타났는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교회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교회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오늘 말씀 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래서 그는 빌립보에 가면 빌립보 교회를 세웠고, 고린도에 가면 고린도 교회를 세웠고, 에베소에 가면 에베소 교회를 세웠고, 데살로니가에 가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 골로새 교회들도 깊은 관계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는 가장 효과적이고 훌륭한 것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세워 운영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선교사역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이것이 성공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나타났듯이 예수님은 복음 전파를 위해 확실하게 하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세웠고, 또 하나는 사도를 키웠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세상의 복음의 역사는 똑같이 전개되어 왔습니다. 선교사들이 어느 나라에 가면 교회를 세우고 사역자를 키워 교회를 통해 복음이 확산되었습니다. 에베소 5장에 바울 사도께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 설명을 할 때 교회를 비유한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라고 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교회를 설명하는 신학적 기초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교회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자기 혼자서 그냥 믿으면 되는 것이지 거추장스럽게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소란스럽게 하느냐? 그냥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주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나의 신앙생활은 나 홀로 서기가 가능한가? 일 년 동안만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에 나가지 아니하고 나 혼자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일 년만 지나보면 ‘내가 언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인가?’ 흐지부지 다 소멸되고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이디어로 이 땅에 교회를 세웠고, 바울이 그것을 튼튼하게 역사화 했던 것입니다.
왜 공산국가에서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버렸는가? 간단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만 없애버리면 자연히 하나님 믿는 신앙은 소멸되어 없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회 경험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교회 세우는 일에 헌신적인 사람 복 받습니다. 반대로 교회를 어렵게 하는 사람 어려워집니다. 역사적 증거가 있습니다. 사회주의 공산국가들은 다 교회를 없애고 어렵게 했습니다. 무슨 결과가 나왔습니까? 굶어 죽는다고 아우성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2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7절에 주님은 죄지은 형제들에 대한 권면을 가르치실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말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예수님께서 교회의 권위를 정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세계 선교에 교회를 많이 세우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처음에 기독교를 박해할 때 절대적으로 노력한 것이 교회 없애기였습니다. 사도행전 8장 3절에 나옵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도 머리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잔인할 정도로 교회 없애버리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된 다음에는 ‘아! 내가 없애버리려던 교회를 수없이 세우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다.’ 정반대로 생각이 바뀌는 바울의 영적 감각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절에 “그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이렇게 교회 핍박이 정치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12장 28절로 내려가면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요한계시록 1장 20절에 “일곱 별과 일곱 금촛대를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일곱별과 일곱 금촛대”가 무슨 뜻이냐 하면 “일곱 교회니라.” 그랬습니다. 22장 16절에 가면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이대로 가면 21세기 후반은 세계가 중국 영향권에 들어가게 됩니다. 미국의 역할을 이제 중국이 하게 된다고 합니다. 금년 부시 대통령의 국정 연설에서 미국의 유일한 경쟁자는 중국이라고 공헌했습니다. 언제부터 중국이 저렇게 되어가고 있는가? 기독교가 살아나면서부터입니다. 높은 공직에 있는 요령성 종교국장을 제가 미국에 초대해서 교제를 가졌습니다. 제가 중국 선교를 잘 하기 위해 일부러 한 일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종교 국장입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해준 말이 있습니다. “중국은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중국에 5대 종교가 있는데 기독교가 가장 많이 앞서가고 빨리 확산됩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막을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날마다 팽창해 가는데 “이제 앞으로 중국은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종교국장이 그렇게 저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북한이 사는 길은 교회를 부활시키는 일이라고 백퍼센트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내가 어느 교회를 나가든지 그 교회를 위해 도움이 되십시오. 교회를 어렵게 하는 일은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또 어느 어려운 교회가 건축이나 기타 어려가지 일로 도와달라고 하면 할 수만 있다면 마음을 쓰시고 선교 많이 협조하시고 하십시오. 가장 복된 길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바울 선교의 특징은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오늘 말씀 20절에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화’가 무엇입니까? ‘살든지 죽든지’라는 말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 여러 번 스데반을 들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때려죽일 때 스데반의 기도 소리와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죽으면서 자기를 위해 기도를 하던 스데반, 자기 때문에 죽은 스데반!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 주님을 위해 얼마나 큰일을 할 것인가?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큰일을 할 사람을 내가 죽여 버렸다.’ 이렇게 영적 감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스데반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고 주님에게는 더 큰 빚을 진 사람으로 생각되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복음 전파를 위해 살든지 죽든지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내가 노력할 것이며 스데반이 평생을 통해서 할 수 있었던 그 일을 내가 대신 하는 것이다.’ 바울이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안하면 스데반보다 더 참혹하게 마땅히 처참하게 죽어야 된다.’ 이렇게 자신을 향해 채찍질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나 죽음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사역했기 때문에 그렇게 선교 역사에 놀라운 효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선교는 해도 좋고 안 해도 무방한 의미가 아닙니다. 절대적 1번 순위의 일로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때마다 스데반을 기억합니다. ‘그가 살았다면 나보다 더 훌륭한 일을 했을 터인데 나 때문에 처참히 죽어버린 스데반, 나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나도 죽어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이 해야 되는 일을 내가 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저하고 오랫동안 꽤 친분을 두텁게 가졌던 동료 목사님이 한분 계신데, 그가 혼자 미국에 와서 고생할 때 큰 교통사고를 만났습니다. 두 다리가 다 부러져서 움직일 수 없어 수술 받고 요양할 때 좀 돌봐드린 것이 인연이 되어서 친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분이 나한테 가끔가다 들려준 간증이 있습니다. 자기가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된 동기가 무엇인가? 자기는 6·25 때 소년병으로 나가서 전쟁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접전 끝에 공산군 몇 사람을 생포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잡아서 끌고 갈 시간도 없이 그냥 서로 죽이고 난리를 치는데, 뒤에서 대장이 “어떻게 끌고 갈 수 없으니 빨리 사살해서 죽여 버리라!” 명령이 떨어졌답니다. 그래서 대장 명령을 따라 공산군 몇 명을 총살시키는데 마지막 남은 어린 군인이 막 애원을 했다고 합니다. “아저씨! 저를 죽이지 말고 살려주세요. 저는 공산당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강제로 여기 끌려왔을 뿐 나는 예수 잘 믿고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나를 죽이지 말아 주세요. 만약 아저씨가 나를 살려주시면 남한 땅에서 예수 믿는 훌륭한 신자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더니 일어나서 “♬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 1절에서 4절까지 눈물 흘리며 찬송가를 부르는데 “보십시오. 나는 예수 믿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이 총을 든 국군이 예수 믿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대장은 뒤에서 “너 왜 꾸물거리느냐? 빨리 죽여라!” 명령이 떨어지니까 “에이, 모르겠다.”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군대 생활을 마치고 그는 그 장면이 꿈에도 나타나고 너무나 기억이 생생해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죽이지 마십시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이게 뭔가?’ 그래서 자기는 그 때부터 교회 나가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은혜를 받고 ‘아! 내가 못할 일을 했다. 만약 그 청년만 내가 살려주었다면 지금 남한 땅에 남아 목사가 되어서 아주 훌륭한 일을 했을 터인데 내가 전쟁터에서 무자비하게 그를 죽였다.’ 그래서 자책감이 왔답니다. ‘내가 그를 대신해서 목사가 되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해서 그 길로 열심히 예수를 믿어서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을 때도 그 말을 합니다. “아! 그를 살려주었다면 그가 주님을 위해서 훌륭하게 일을 했을 터인데 무자비하게 내가 전쟁터에서 죽여 버렸다. 하늘나라에 가면 내가 그를 어떻게 봐야 하나?” 사도 바울은 스데반이 머릿속에서 그렇게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는 스데반과 같이 주님을 위해 장렬한 순교를 당할 것이라고 각오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선교의 특징이 무엇인가? 순교자적 선교였습니다. 선교는 순교자적일 때 바울과 같은 역사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선교에 정열을 기울여야 되는 이유는 순교자 선교사들 때문에 우리는 순교 없이 평안히 예수 믿고 구원받는 영광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와 선교헌금이라도 좀 해서 그 은혜에 다소 보답하는 사는 것, 당연한 것입니다. 선교는 평생 관심 안 갖고도 구원받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보다 선교에 다소 노력하면서 사는 것이 더 훌륭한 삶이기 때문에 하자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바울 선교의 특징은 그는 유대인이면서 이방 세계 선교사였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여러 번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방 세계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민족의 영적 세계는 하나님의 구원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에게만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마저도 그런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바울 선교 때문에 세계인은 구원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계 선교는 유대인이 아닌 비유대인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교회가 그 몫을 21세기에 담당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현재 갈보리교회의 구체적 외부 선교는 오늘 삽지에 보시는 바와 같이 되었습니다. 현지인 파송이 처음에 100명으로 생각했는데 사방에서 자꾸 요청이 들어와서 금년 말까지 200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자신감 있게 결정한 이유는 제 나름대로 계산이 있습니다. 그동안 갈보리교회가 언론 20군데 언론 선교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다 끊었습니다. 한 군데도 안합니다. 그 이유는 와서 보니까 언론 선교는 다 국내인들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너무 많이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 보다 현지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경비를 줄이고, 그 다음에 선교 정열이 있는 우리 교인들이 조금 헌금을 해주고 기도를 해주면 200명의 현지 선교사 파송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해결되리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거룩한 구원에 관한 사역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는 믿음으로 우리가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파송해주는 후원 교회도 변변치 못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조금 도와줬습니다. 주머니에 선교비를 넉넉히 넣고 다닌 사람도 아닙니다. 가는데 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가장 훌륭한 선교 사역을 했고 가장 오랫동안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선교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도우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의 선교 사역을 무엇으로 평가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거룩한 목표를 세우고 침착한 기도와 성의 있는 참여를 할 때 하나님은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도와주십니다. 이제 보십시오. 갈보리교회도 생각지도 못한 형제들이 생각지도 못할 만큼의 협조자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시킨 자들이 반드시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괜히 쓸데없이 어려운 생각 하지 마세요. 바울 선교 역사에 나타난 사람들을 보시면 알게 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빌립보 교회 루디아, 알렉산더와 루포의 어머니 등 수많은 협조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그때그때마다 나타나 바울의 표현대로 한다면 자기 선교 사역을 위해 자기의 눈이라도 빼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협조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선교가 이루어졌고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까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제가 외국에서 오래 살다 한국에 와서 좀 얼떨떨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의 단위가 너무 높아서 “억, 억….” 손바닥만한 땅을 살래도 “몇 억!” 그렇게 말하고, 무슨 아파트 하나를 사려고 해도 “10억! 20억!” 억이 아니면 말이 안 되는 사회 같습니다. 하도 억 소리를 들어서 요즈음 1억, 2억은 간에 기별도 안갑니다. 요즈음은 한국의 개들도 짖는 소리고 “억 억!”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흔한 억인데, 억 헌금하는 사람은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갈보리교인 중에서도 이렇게 선교 역사를 보면서 억 헌금 하는 교인이 나올 거라고 봅니다. 가끔 신문을 보세요. 어떤 할머니가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몇 십억을 모았는데 어느 장학 재단에 모두 기부했다고 나왔습니다. 제가 이사로 있는 평택대학교도 할머니가 100억을 기증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도 세계 선교의 문을 열면서 그런 사람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의 선교 열정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은 내 평생 신앙 생활하는 동안 갈보리교회 다닐 때 선교 제일 많이 했다는 거룩하고도 영광된 이력서를 한번 남기시고, 저도 평생 목회 중에서 ‘갈보리교회 목회가 선교 사역에 내가 제일 큰 정열을 기울였다.’라고 바울 사도의 이력서와 같이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저희들이 오늘 시작하려 합니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축복하여 주시고 이 일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계획하신 많은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빌 1:19-21 / 이윤재 목사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첫 주입니다. 장마와 폭우로 힘들었던 여름을 지낸 우리 모두에게 이번 가을은 행복하고 풍성한 가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번 가을이 좋은 가을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까? 어떤 기독교 잡지에 “불행해지고 싶거든”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사람이 불행해지고 싶거든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작은 일에 신경쓰라. 둘째 인생을 넓게 보지 말고 당장의 일만 생각하라. 셋째 걱정을 많이 하라. 넷째 완전주의자가 되라. 자기 일이나 남이 한 일이나 완전하다고 생각될 때 까지는 절대 만족하지 말라. 다섯째 스스로 옳다고 여겨라. 이 세상에 옳은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하라. 여섯째 결코 남을 믿지 말라. 남을 받아들일 때는 그의 약점들을 충분히 살펴라. 일곱째 언제나 남과 비교하고 경쟁심의 끈을 놓치 말라. 여덟째 돈이 생기면 무조건 주머니에 우겨 넣고 절대 꺼내지 말라. 저하고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불행의 원인을 요즘 말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만 아는 사람입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사는 사람입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생각하고 살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평안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평안할 수 있을까요? 고든 맥도날드는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란 책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합니다. 쫓겨다니는 사람과 부름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쫓겨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자기 힘으로, 자기가 정한 성공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 경우 어느 정도 성취도 하고 성공도 하지만 넘어지면 일으켜 줄 사람이 없습니다. 성공지향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뭘 하나 이루면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늘 바쁘고 쫓깁니다.
그러나 부름받고 사는 사람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주인이 인도하고 나는 따라 갑니다. 주인이 쉬면 나도 쉬고 주인이 일하면 나도 일합니다. 일의 목표도 주인이요 일을 통해 얻은 결과도 주인의 것이니 나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잘하면 칭찬받지만 못해도 괜찮습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래서 평안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합니까? 쫓기면 삽니까? 부름받고 삽니까?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입니까? 하나님이 주인입니까?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첫주에 우리 인생의 목표와 자세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20절 보실까요?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사도 바울이 이 빌립보서를 쓴 것은 로마의 감옥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은 가운데 감옥에 두 번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이스라엘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부 감옥이고 또 하나는 로마에 있는 감옥이었습니다.
로마의 감옥은 주후 59년에서 61년, 약 2년간 있었는 데 바울이 주후 64년, 네로에 의해 순교당하기 3-4년전입니다. 우리같으면 죽기 3-4년전,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음산한 지하 감방에서 살기에 급급했을 텐데 사도 바울은 성경을 쓴 것입니다. 그 성경을 옥중서신이라고 하고 에배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4권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그 썰렁한 로마의 감옥에서 당당하게 생존하게 했을까? 바울은 어떤 삶의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있었길레 죽음을 앞두고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그 삶의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울이 마음속에 둔 삶의 분명한 목표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그것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였습니다. 20절 뒷부분입니다. 빌1:20,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그 감옥도 요즘의 감옥이 아닙니다. 작년인가 어느 교도소로 심방간 적이 있었습니다.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T.V도 있고 선풍기도 있다고 했습니다. 1인용 침대에 마치 학교 기숙사같았습니다. 옛날에는 처벌에 목적을 두었다면 지금은 교화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환경도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법무부가 공식적으로 낸 사진입니다(사진1). 물론 죄수에게는 힘든 곳입니다. 그러나 2천년전의 상황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이 변화된 것도 사실입니다. 옛날 로마의 감옥과 비슷한 감옥이 빌립보 에 있습니다(사진2). 땅을 파고 거기에 창살 몇 개 대고 지붕을 얹었습니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벌레들이 기어다닙니다. 바울이 이런 감옥에서 살았을 뿐 아니라 성경을 썻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도대체 바울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것입니다. 상황이 좋았던 것도 아닙니다. 내일 모레 석방된다는 기대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딱 한 가지가 그를 움직였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 분명한 목표가 그를 움직였습니다. “이는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 믿음이 그를 지탱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을 붙잡는 힘은 분명한 삶의 목표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에게 삶은 아주 관대합니다. 그러나 살아야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 삶은 매우 무자비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한대로 누구든지 살 이유를 발견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는 이유를 예수님께 두겠습니까?
오늘 말씀 다시 보십시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 아니하고”.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 아니하고”. “아무 일에든지”입니다. “In everything”,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중심입니까? 어떻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예수님의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요 목적입니까? 대학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기 저기서 취직시험도 보고 있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얼마나 피곤합니까? 정말 몰라서 그렇지 시험만큼 힘든 것도 없습니다. 저도 어렵게 대학 시험을 보고 한때는 공무원 시험도 준비해봐서 압니다. 정말 할 수만 있으면 그만 두고 싶은 것이 시험입니다. 그때 예수님을 바라 봅니까? 예수님이 시험보는 이유이고 목적입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간신히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까다로운 상관을 만나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회사를 그만 둘까를 말까를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그때 누가 떠오릅니까? 부모님입니까? 사장입니까? 친구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떠오른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어느날 가정에서 사소한 일로 아내와 다퉜습니다. 화가 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다시는 집에 들어오나 봐라“. 큰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가자 갈 데가 없습니다. 혼자 거리를 걷다가 어느 전봇대 앞에 섰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두 개의 네온싸인이 보입니다. 하나는 술집 네온사인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십자가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그때 누구를 생각합니까? 그때 예수님이 떠오른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떠오르면 희망이 있습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하루에도 수백번씩 직장을 그만 두고 싶습니다. 잔소리 많은 상관, 작은 일로도 트집잡는 동료, 일에 대한 중압감으로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아예 직장을 안 나갈 마음으로 며칠 직장을 무단 결석했습니다. 그때 누가 생각납니까? 그래도 직장생활해야 하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당신의 그 직장과 예수님은 무슨 관계에 있습니까? 20절, 빌1:20, “아무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나니”. “아무 일이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in everything,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담대해 집니다. 모든 용기가 거기서 나옵니다.
영적인 생활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단계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사는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습니다. 아예 예수님이 나 대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21절입니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한번 세 가지를 비교해 보십시오(도표)
나는 예수님 위해 산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산다. 나는 예수님으로 산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합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장합니다. 그러나 모든 무거운 짐과 교만의 출처가 바로 이 믿음에서 옵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산다“ 이 경우의 주인공은 명백히 나입니다. 내가 잘하면 예수님도 잘되고 내가 못하면 예수님도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의 사람들은 대개 열심입니다. 봉사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많이 하기는 하는 데 늘 피곤합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어쩌다 한번 잘못하면 죄책감까지 느낍니다. 저도 오랫동안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고 내가 주님을 위해 목회하고 내가 주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장하기는 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늘 판단의 기준이 나였습니다. 어쩌다 못하면 “주님, 내가 뭐라고 했어요? 안된다고 했잖아요?” 하고 낙심합니다. 어쩌다 잘되면 “주님, 보세요. 내가 했잖아요. 괜찮지 않아요?” 하고 우쭐댑니다. 그런데 빌1:21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사는 주체가 내가 아닙니다. 주님이 삽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 삽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해,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는 것이 쉬어졌습니다. 그때부터 목회도 쉬어졌습니다. 나 대신 주님이 하기 때문입니다. 20절,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 아니하고”. 여러분도 “아무 일에든지”, “어떤 경우든지”,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삶의 이유도 삼겠습니까?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여러분안에 여려분 대신 사시는 주님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 분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게 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여러분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담대히 사는 법
바울의 삶은 철저히 예수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그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한 가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20절 중간을 보시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했습니다. 다같이 “담대하여”. “담대하다”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파레시아”입니다. 이 말은 “용기”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담대하게 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용기가 있어야 사람은 담대합니다. 그러면 어떤 용기입니까? 두 가지 용기입니다. 하나는 도덕적 용기요 다른 하나는 신앙적 용기입니다. 도덕적 용기는 떳떳할 때 오는 용기입니다. 남에게 내가 구린 것이 없으면 떳떳합니다. 정치가들이 뇌물 안먹고 기업가들이 탈세 안하면 떳떳합니다. 그러나 도덕적 용기보다 더 큰 것이 신앙적 용기입니다. 신앙적 용기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용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살기로 마음먹는 사람이 아니라 죽기로 마음먹는 사람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무서운 사람들은 왕들이 아니라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순교자는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해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배자들은 살아서 말하고 순교자는 죽어서도 말합니다. 지배자들은 살아 있을 때만 지배하지만 순교자는 죽어서도 지배합니다. 루마니아의 기독교 지도자 요시프 톤이 차우세스쿠 독재 정권하에서 비밀경찰에게 붙잡혀 목숨의 위협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최대 무기는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최대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 정말 세상이 어떻게 해 볼 수 없이 무서운 사람들이 죽기로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순교는 무엇일까요? 요즘 저는 “우상”에 대하여 많이 묵상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싶이 우상은 깎아만든 나무거나 돌조각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면 우상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밖에 있는 우상보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이 훨씬 무섭고 어렵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 모두 우상입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유명한 선교사 마펫트(Moffat)박사가 한국의 모든 선교를 마치고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그를 위해 동상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때 유명한 최 권능 목사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마포삼열 박사를 존경합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은인이며 나의 신앙의 선배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 분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마포삼열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동상을 세우면 사람들은 그를 통해 일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기 보다 그를 더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마포삼열의 동상을 세운다면 나는 도끼로 동상을 부술 것입니다" 결국 최권능목사의 충정을 이해한 사람들은 마포삼열의 기념관만 세우고 동상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이 우려했던 것은 눈에 보이는 동상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우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우상이 있습니다. 이 우상을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됩니다.
제가 이번에 65세 자원은퇴를 발표했습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까 싸움은 대상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라는 것도 아니라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저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 자신에게 큰 우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챨스 스윈돌 목사님이 <모세>라는 책을 썻는 데 하나님이 모세를 광야 40년동안 방황하게 함으로 모세안에 있는 몇 가지 우상을 내려 놓게 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유명”이라는 우상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끊임없이 주목받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왕궁 출입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오늘 왕궁의 일정을 묻는 인터뷰부터 시작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광야로 내보내 “무명”의 훈련을 하게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애굽의 왕자가 하루 아침에 쫓겨나 아무 것도 아닌 자, 가난한 목동, 호렙산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 세월이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유명인사가 하루 아침에 무명인사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쁨”의 우상입니다. 모세는 유명인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바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로 내쫓겨 한가할뿐 아니라 아주 무료하고 외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왕궁에서는 아침에 비서가 출근하여 하루 일정을 빼곡히 보고하고 하루 하루 바쁜 일상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아예 뉴스에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세상에 힘든 것이 외로움입니다. 셋째는 “편안함”이라는 우상입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얼마나 한 편안한 생활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광야로 쫓겨나 아주 불편한 생활로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광야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어느 것 하나 불편한 것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세가 하나님의 광야 학교에 경험한 훈련내용이었다는 것입니다. 훈련의 내용은 한마디로 자기 안에 있는 우상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유명”이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무명”으로, “바쁨”이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외로움”으로, “편안함”이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불편함”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훈련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전도단의 오대원 목사님이 쓰신 글에 “사람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은 숨겨지는 것이요 잊혀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드러내기를 원하는 데 “사람들에 잊혀지는 것, 사람들이 선망하는 무대에서 내려와 무대뒤로 숨겨지는 것”을 무서워 하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중 세습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세습할까? 아주 분명한 이유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다 없는 사람은 세습이 불가능합니다. 세습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중에는 더러 이해가 되는 이유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그들이 무서워 하는 것은 교회가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게서 자신들이 잊혀지지는 것이 아닐까?” 교회 강단이 화려한 무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설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에 서지 못하고 무대뒤로 숨겨지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닌가?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거나 떠나보내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내려 놓아야 합니다. 떠나는 사람은 직분을 내려놓을 뿐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우상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교인들에게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거나 교인들의 찬사와 존경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우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유명인사에서 스스로 무명인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 틈속에서 외로울 틈이 없던 상태에서 이제는 충분히 외로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말만 하면 다 알아서 해주는 편리함에서 얼마든지 불편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보내는 사람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 목사님이 최고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목사님이 아니면 이 교회는 어떻게 되나?”하고 생각한다면 그동안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목회자를 믿은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최고야. 어디 가서 그 설교를 듣는가” 하는 생각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목사님 떠나면 나도 떠날거야” 하는 생각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목사를 우상으로 섬겼던 것으로 하나님도 기쁘게 하지 않고 떠나는 목사님에게도 슬픔을 주는 것입니다.
떠나는 사람은 마음속에 우상을 내려 놓아야 담대합니다. 보내는 교인들은 “목사님 잘 가세요. 이제 우리가 교회를 지킬께요” 해야 담대합니다. 각자 속에 있는 우상을 내려 놓아야 담대합니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떠나도 예수님만 남고 보내도 예수님만 남아야 합니다. 빌1:20,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나니”. 온전히 담대하세요. 저도 담대하겠습니다. 저도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 때문에 담대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담대하세요. 다른 것 때문에 담대하지 말고 예수님 때문에 담대하세요. 우리 모두 “주여, 주님만 홀로 존귀히 여기시옵소서”라는 믿음으로 하나됩시다.
몸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라
바울의 신앙고백의 또 하나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통해 존귀히 되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몸을 통해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다시 20절 보면 빌1:20,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나니”. 다같이 “내 몸에서”. 바울이 주님을 존귀히 여길 때는 그것을 몸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는 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갈2:20의 한 가운데 있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이 말씀은 갈2:20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 말씀 앞에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 뒤에는 이제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 한복판에 “육체”가 있습니다. 앞부분이 우리가 사는 이유라면 뒷 부분은 우리가 사는 목적입니다. 그 가운데 “육체”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육체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우리 육체와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실 때 우리 육체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 때 우리 육체안에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육체가 있고 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도 육체안에서, 예수님이 사는 것도 육체안에서,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도 육체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육체는 예수님이 우리안에 사는 공간이요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는 통로입니다.
육체는 죽으면 남게될 한 줌의 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머무는 성전입니다. 고후4:11이 중요합니다.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우리 죽을 육체”, 죽음은 분명 육체의 한계요 숙명입니다. 그러나 그 죽을 육체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잘 깨지고 부숴집니다. 그런데 그 안에 보화가 있습니다. 질그릇안에 있는 보화입니다. 우리가 질그릇이라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그릇이기 때문에 더욱 주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우리는 질그릇 같아서 문제가 아니라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몰라서 문제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금강석이 되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질그릇을 보화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가 보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보화를 담는 것입니다. 옛날 용문산기도원에서 평생 기도하고 살았는 데도 말한마디 잘못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혀를 잘라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용기는 가상하나 그는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보화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보화를 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잘 보화가 안된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 속에 예수님이 없는 것으로 슬퍼하십시오.
우리 평생 몸으로 예배합시다. 집에서 T,V로 설교듣는 것은 몸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드려야 산 제사입니다. 몸으로 기도합시다.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수하고 옷을 입고 새벽에 나와야 기도입니다. 금요일 몸이 나와야 기도입니다. 몸으로 봉사합시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봉사아닙니다. 우리 몸을 그대로 두면 죽을 육체입니다. 몸을 움직여 주님께 나오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선교도 몸으로 해야 합니다. 앉아서 선교 선교한다고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준비하고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건강하십시오. 그러다 때가 되면 우리는 둘 중의 하나로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 대부분 몸이 약하거나 병들어 하나님께 갈 것입니다. 그때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아름다운 몸을 주셔서 70년 80년, 90년 쓰다가 하나님께 갑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중에는 특별하게 하나님께 순교의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경기도 용인에 가면 한국선교 백주년 순교자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 3층을 올라가면 그곳에 한국에서 순교한 외국인 선교사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순교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순교자 사진 마지막에는 사진박스가 하나 있는데 사진이 없습니다. 대신 거울이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하고 들어가 보면 자기 어얼굴이 보입니다. 그 밑에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주를 위해 죽을 때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일지 모르나 한 가지 결심합시다. “하나님, 우리의 삶이 얼마인지 모르나 주님 오라고 부르실 때까지 이 몸으로 주님만 존귀하게 하옵소서. 이 몸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선교하게 하옵소서. 때가 되어 주님 부르실 때 오로지 내 몸에서 주님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첫 주입니다. 장마와 폭우로 힘들었던 여름을 지낸 우리 모두에게 이번 가을은 행복하고 풍성한 가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번 가을이 좋은 가을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까? 어떤 기독교 잡지에 “불행해지고 싶거든”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사람이 불행해지고 싶거든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작은 일에 신경쓰라. 둘째 인생을 넓게 보지 말고 당장의 일만 생각하라. 셋째 걱정을 많이 하라. 넷째 완전주의자가 되라. 자기 일이나 남이 한 일이나 완전하다고 생각될 때 까지는 절대 만족하지 말라. 다섯째 스스로 옳다고 여겨라. 이 세상에 옳은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하라. 여섯째 결코 남을 믿지 말라. 남을 받아들일 때는 그의 약점들을 충분히 살펴라. 일곱째 언제나 남과 비교하고 경쟁심의 끈을 놓치 말라. 여덟째 돈이 생기면 무조건 주머니에 우겨 넣고 절대 꺼내지 말라. 저하고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불행의 원인을 요즘 말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만 아는 사람입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사는 사람입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생각하고 살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평안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평안할 수 있을까요? 고든 맥도날드는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란 책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합니다. 쫓겨다니는 사람과 부름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쫓겨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자기 힘으로, 자기가 정한 성공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 경우 어느 정도 성취도 하고 성공도 하지만 넘어지면 일으켜 줄 사람이 없습니다. 성공지향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뭘 하나 이루면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늘 바쁘고 쫓깁니다.
그러나 부름받고 사는 사람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주인이 인도하고 나는 따라 갑니다. 주인이 쉬면 나도 쉬고 주인이 일하면 나도 일합니다. 일의 목표도 주인이요 일을 통해 얻은 결과도 주인의 것이니 나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잘하면 칭찬받지만 못해도 괜찮습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래서 평안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합니까? 쫓기면 삽니까? 부름받고 삽니까?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입니까? 하나님이 주인입니까?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첫주에 우리 인생의 목표와 자세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20절 보실까요?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사도 바울이 이 빌립보서를 쓴 것은 로마의 감옥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은 가운데 감옥에 두 번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이스라엘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부 감옥이고 또 하나는 로마에 있는 감옥이었습니다.
로마의 감옥은 주후 59년에서 61년, 약 2년간 있었는 데 바울이 주후 64년, 네로에 의해 순교당하기 3-4년전입니다. 우리같으면 죽기 3-4년전,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음산한 지하 감방에서 살기에 급급했을 텐데 사도 바울은 성경을 쓴 것입니다. 그 성경을 옥중서신이라고 하고 에배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4권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그 썰렁한 로마의 감옥에서 당당하게 생존하게 했을까? 바울은 어떤 삶의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있었길레 죽음을 앞두고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그 삶의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울이 마음속에 둔 삶의 분명한 목표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그것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였습니다. 20절 뒷부분입니다. 빌1:20,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그 감옥도 요즘의 감옥이 아닙니다. 작년인가 어느 교도소로 심방간 적이 있었습니다.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T.V도 있고 선풍기도 있다고 했습니다. 1인용 침대에 마치 학교 기숙사같았습니다. 옛날에는 처벌에 목적을 두었다면 지금은 교화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환경도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법무부가 공식적으로 낸 사진입니다(사진1). 물론 죄수에게는 힘든 곳입니다. 그러나 2천년전의 상황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이 변화된 것도 사실입니다. 옛날 로마의 감옥과 비슷한 감옥이 빌립보 에 있습니다(사진2). 땅을 파고 거기에 창살 몇 개 대고 지붕을 얹었습니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벌레들이 기어다닙니다. 바울이 이런 감옥에서 살았을 뿐 아니라 성경을 썻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도대체 바울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것입니다. 상황이 좋았던 것도 아닙니다. 내일 모레 석방된다는 기대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딱 한 가지가 그를 움직였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 분명한 목표가 그를 움직였습니다. “이는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 믿음이 그를 지탱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을 붙잡는 힘은 분명한 삶의 목표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에게 삶은 아주 관대합니다. 그러나 살아야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 삶은 매우 무자비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한대로 누구든지 살 이유를 발견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는 이유를 예수님께 두겠습니까?
오늘 말씀 다시 보십시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 아니하고”.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 아니하고”. “아무 일에든지”입니다. “In everything”,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중심입니까? 어떻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예수님의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요 목적입니까? 대학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기 저기서 취직시험도 보고 있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얼마나 피곤합니까? 정말 몰라서 그렇지 시험만큼 힘든 것도 없습니다. 저도 어렵게 대학 시험을 보고 한때는 공무원 시험도 준비해봐서 압니다. 정말 할 수만 있으면 그만 두고 싶은 것이 시험입니다. 그때 예수님을 바라 봅니까? 예수님이 시험보는 이유이고 목적입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간신히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까다로운 상관을 만나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회사를 그만 둘까를 말까를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그때 누가 떠오릅니까? 부모님입니까? 사장입니까? 친구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떠오른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어느날 가정에서 사소한 일로 아내와 다퉜습니다. 화가 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다시는 집에 들어오나 봐라“. 큰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가자 갈 데가 없습니다. 혼자 거리를 걷다가 어느 전봇대 앞에 섰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두 개의 네온싸인이 보입니다. 하나는 술집 네온사인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십자가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그때 누구를 생각합니까? 그때 예수님이 떠오른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떠오르면 희망이 있습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하루에도 수백번씩 직장을 그만 두고 싶습니다. 잔소리 많은 상관, 작은 일로도 트집잡는 동료, 일에 대한 중압감으로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아예 직장을 안 나갈 마음으로 며칠 직장을 무단 결석했습니다. 그때 누가 생각납니까? 그래도 직장생활해야 하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당신의 그 직장과 예수님은 무슨 관계에 있습니까? 20절, 빌1:20, “아무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나니”. “아무 일이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in everything,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담대해 집니다. 모든 용기가 거기서 나옵니다.
영적인 생활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단계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사는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습니다. 아예 예수님이 나 대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21절입니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한번 세 가지를 비교해 보십시오(도표)
나는 예수님 위해 산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산다. 나는 예수님으로 산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합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장합니다. 그러나 모든 무거운 짐과 교만의 출처가 바로 이 믿음에서 옵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산다“ 이 경우의 주인공은 명백히 나입니다. 내가 잘하면 예수님도 잘되고 내가 못하면 예수님도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의 사람들은 대개 열심입니다. 봉사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많이 하기는 하는 데 늘 피곤합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어쩌다 한번 잘못하면 죄책감까지 느낍니다. 저도 오랫동안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고 내가 주님을 위해 목회하고 내가 주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장하기는 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늘 판단의 기준이 나였습니다. 어쩌다 못하면 “주님, 내가 뭐라고 했어요? 안된다고 했잖아요?” 하고 낙심합니다. 어쩌다 잘되면 “주님, 보세요. 내가 했잖아요. 괜찮지 않아요?” 하고 우쭐댑니다. 그런데 빌1:21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사는 주체가 내가 아닙니다. 주님이 삽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 삽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해,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는 것이 쉬어졌습니다. 그때부터 목회도 쉬어졌습니다. 나 대신 주님이 하기 때문입니다. 20절,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 아니하고”. 여러분도 “아무 일에든지”, “어떤 경우든지”,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삶의 이유도 삼겠습니까?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여러분안에 여려분 대신 사시는 주님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 분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게 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여러분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담대히 사는 법
바울의 삶은 철저히 예수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그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한 가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20절 중간을 보시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했습니다. 다같이 “담대하여”. “담대하다”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파레시아”입니다. 이 말은 “용기”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담대하게 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용기가 있어야 사람은 담대합니다. 그러면 어떤 용기입니까? 두 가지 용기입니다. 하나는 도덕적 용기요 다른 하나는 신앙적 용기입니다. 도덕적 용기는 떳떳할 때 오는 용기입니다. 남에게 내가 구린 것이 없으면 떳떳합니다. 정치가들이 뇌물 안먹고 기업가들이 탈세 안하면 떳떳합니다. 그러나 도덕적 용기보다 더 큰 것이 신앙적 용기입니다. 신앙적 용기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용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살기로 마음먹는 사람이 아니라 죽기로 마음먹는 사람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무서운 사람들은 왕들이 아니라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순교자는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해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배자들은 살아서 말하고 순교자는 죽어서도 말합니다. 지배자들은 살아 있을 때만 지배하지만 순교자는 죽어서도 지배합니다. 루마니아의 기독교 지도자 요시프 톤이 차우세스쿠 독재 정권하에서 비밀경찰에게 붙잡혀 목숨의 위협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최대 무기는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최대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 정말 세상이 어떻게 해 볼 수 없이 무서운 사람들이 죽기로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순교는 무엇일까요? 요즘 저는 “우상”에 대하여 많이 묵상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싶이 우상은 깎아만든 나무거나 돌조각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면 우상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밖에 있는 우상보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이 훨씬 무섭고 어렵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 모두 우상입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유명한 선교사 마펫트(Moffat)박사가 한국의 모든 선교를 마치고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그를 위해 동상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때 유명한 최 권능 목사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마포삼열 박사를 존경합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은인이며 나의 신앙의 선배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 분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마포삼열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동상을 세우면 사람들은 그를 통해 일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기 보다 그를 더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마포삼열의 동상을 세운다면 나는 도끼로 동상을 부술 것입니다" 결국 최권능목사의 충정을 이해한 사람들은 마포삼열의 기념관만 세우고 동상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이 우려했던 것은 눈에 보이는 동상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우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우상이 있습니다. 이 우상을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됩니다.
제가 이번에 65세 자원은퇴를 발표했습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까 싸움은 대상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라는 것도 아니라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저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 자신에게 큰 우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챨스 스윈돌 목사님이 <모세>라는 책을 썻는 데 하나님이 모세를 광야 40년동안 방황하게 함으로 모세안에 있는 몇 가지 우상을 내려 놓게 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유명”이라는 우상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끊임없이 주목받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왕궁 출입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오늘 왕궁의 일정을 묻는 인터뷰부터 시작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광야로 내보내 “무명”의 훈련을 하게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애굽의 왕자가 하루 아침에 쫓겨나 아무 것도 아닌 자, 가난한 목동, 호렙산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 세월이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유명인사가 하루 아침에 무명인사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쁨”의 우상입니다. 모세는 유명인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바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로 내쫓겨 한가할뿐 아니라 아주 무료하고 외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왕궁에서는 아침에 비서가 출근하여 하루 일정을 빼곡히 보고하고 하루 하루 바쁜 일상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아예 뉴스에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세상에 힘든 것이 외로움입니다. 셋째는 “편안함”이라는 우상입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얼마나 한 편안한 생활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광야로 쫓겨나 아주 불편한 생활로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광야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어느 것 하나 불편한 것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세가 하나님의 광야 학교에 경험한 훈련내용이었다는 것입니다. 훈련의 내용은 한마디로 자기 안에 있는 우상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유명”이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무명”으로, “바쁨”이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외로움”으로, “편안함”이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불편함”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훈련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전도단의 오대원 목사님이 쓰신 글에 “사람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은 숨겨지는 것이요 잊혀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자기를 나타내고, 드러내기를 원하는 데 “사람들에 잊혀지는 것, 사람들이 선망하는 무대에서 내려와 무대뒤로 숨겨지는 것”을 무서워 하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중 세습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세습할까? 아주 분명한 이유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다 없는 사람은 세습이 불가능합니다. 세습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중에는 더러 이해가 되는 이유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그들이 무서워 하는 것은 교회가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게서 자신들이 잊혀지지는 것이 아닐까?” 교회 강단이 화려한 무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설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에 서지 못하고 무대뒤로 숨겨지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닌가?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거나 떠나보내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내려 놓아야 합니다. 떠나는 사람은 직분을 내려놓을 뿐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우상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교인들에게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거나 교인들의 찬사와 존경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우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유명인사에서 스스로 무명인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 틈속에서 외로울 틈이 없던 상태에서 이제는 충분히 외로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말만 하면 다 알아서 해주는 편리함에서 얼마든지 불편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보내는 사람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 목사님이 최고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목사님이 아니면 이 교회는 어떻게 되나?”하고 생각한다면 그동안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목회자를 믿은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최고야. 어디 가서 그 설교를 듣는가” 하는 생각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목사님 떠나면 나도 떠날거야” 하는 생각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목사를 우상으로 섬겼던 것으로 하나님도 기쁘게 하지 않고 떠나는 목사님에게도 슬픔을 주는 것입니다.
떠나는 사람은 마음속에 우상을 내려 놓아야 담대합니다. 보내는 교인들은 “목사님 잘 가세요. 이제 우리가 교회를 지킬께요” 해야 담대합니다. 각자 속에 있는 우상을 내려 놓아야 담대합니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떠나도 예수님만 남고 보내도 예수님만 남아야 합니다. 빌1:20,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나니”. 온전히 담대하세요. 저도 담대하겠습니다. 저도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 때문에 담대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담대하세요. 다른 것 때문에 담대하지 말고 예수님 때문에 담대하세요. 우리 모두 “주여, 주님만 홀로 존귀히 여기시옵소서”라는 믿음으로 하나됩시다.
몸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라
바울의 신앙고백의 또 하나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통해 존귀히 되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몸을 통해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다시 20절 보면 빌1:20,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나니”. 다같이 “내 몸에서”. 바울이 주님을 존귀히 여길 때는 그것을 몸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는 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갈2:20의 한 가운데 있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이 말씀은 갈2:20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 말씀 앞에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 뒤에는 이제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 한복판에 “육체”가 있습니다. 앞부분이 우리가 사는 이유라면 뒷 부분은 우리가 사는 목적입니다. 그 가운데 “육체”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육체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우리 육체와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실 때 우리 육체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 때 우리 육체안에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육체가 있고 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도 육체안에서, 예수님이 사는 것도 육체안에서,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도 육체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육체는 예수님이 우리안에 사는 공간이요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는 통로입니다.
육체는 죽으면 남게될 한 줌의 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머무는 성전입니다. 고후4:11이 중요합니다.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우리 죽을 육체”, 죽음은 분명 육체의 한계요 숙명입니다. 그러나 그 죽을 육체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잘 깨지고 부숴집니다. 그런데 그 안에 보화가 있습니다. 질그릇안에 있는 보화입니다. 우리가 질그릇이라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그릇이기 때문에 더욱 주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우리는 질그릇 같아서 문제가 아니라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몰라서 문제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금강석이 되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질그릇을 보화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가 보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보화를 담는 것입니다. 옛날 용문산기도원에서 평생 기도하고 살았는 데도 말한마디 잘못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혀를 잘라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용기는 가상하나 그는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보화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보화를 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잘 보화가 안된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 속에 예수님이 없는 것으로 슬퍼하십시오.
우리 평생 몸으로 예배합시다. 집에서 T,V로 설교듣는 것은 몸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드려야 산 제사입니다. 몸으로 기도합시다.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수하고 옷을 입고 새벽에 나와야 기도입니다. 금요일 몸이 나와야 기도입니다. 몸으로 봉사합시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봉사아닙니다. 우리 몸을 그대로 두면 죽을 육체입니다. 몸을 움직여 주님께 나오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선교도 몸으로 해야 합니다. 앉아서 선교 선교한다고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준비하고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건강하십시오. 그러다 때가 되면 우리는 둘 중의 하나로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 대부분 몸이 약하거나 병들어 하나님께 갈 것입니다. 그때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아름다운 몸을 주셔서 70년 80년, 90년 쓰다가 하나님께 갑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중에는 특별하게 하나님께 순교의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경기도 용인에 가면 한국선교 백주년 순교자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 3층을 올라가면 그곳에 한국에서 순교한 외국인 선교사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순교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순교자 사진 마지막에는 사진박스가 하나 있는데 사진이 없습니다. 대신 거울이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하고 들어가 보면 자기 어얼굴이 보입니다. 그 밑에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주를 위해 죽을 때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일지 모르나 한 가지 결심합시다. “하나님, 우리의 삶이 얼마인지 모르나 주님 오라고 부르실 때까지 이 몸으로 주님만 존귀하게 하옵소서. 이 몸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선교하게 하옵소서. 때가 되어 주님 부르실 때 오로지 내 몸에서 주님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인생관
빌 1:19-26 / 김필곤 목사
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인생관
오늘은 반년이 끝나고 반년이 시작되는 첫 주일에 지키는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단어 그대로 설명하면 과거 대부분 농사 짓고 살던 시절 신앙인들이 보리를 추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반년시 시작되는 첫 주일 지난 반년을 감사하고 반년을 감사를 다짐하면서 시작하는 감사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항상 감사절이 되면 감사 설교를 했는데 우리가 빌립보서를 강해하면서 얼마 전 감사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순서에 의해서 빌립보서 다섯 번째 강해로 “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인생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얼마전 50대 한 배우가 호텔에서 자살을 하였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남편에게는 아내이고 아들에게는 어머니, 부모에게는 딸, 형제에게는 누이인 그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 중 한 명이 죽었고,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 우울해 했다고 합니다. 1990년부터 유명 연예인으로 자살한 사람은 33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연예인 자살률이 세계적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한해 매년 1만 2천 명이 넘게 자살을 합니다. 하루 36명, 40분마다 1명 자살하는 자살 대국입니다. 10대와 20대, 30대 청소년, 청년층 사망원인의 1위는 자살입니다. 2003년부터 16년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한 번도 다른 나라에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교통사고 사망자의 3배, 산업재해 사망자의 6배 규모라고 합니다. 자살 주요동기는 첫째가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문제, 둘째가 파산, 가난과 같은 경제생활 문제, 셋째가 불치병과 같은 신체 질병, 넷째가 이혼과 같은 가정문제, 다섯째가 업무상의 문제로 자살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극한 고난을 넉넉히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냉혹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고통스러워 자신이 겪고 있는 바로 그 일을 “나 혼자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며 죽음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더는 견딜 수 없고,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은 마치 감기를 핵폭탄으로 치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극단적인 고통이 다가 와도 자살로 인생을 끝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살을 글자를 바꾸면 “살자”가 됩니다.
자신도 자살을 기도했던 존스 홉킨스 대학교 의과 대학 정신 의학 교수인 재미슨은 “목숨을 끊기로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이 겪은 일을 해석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 건강이 좋을 경우에는, 어떤 일을 겪더라도 그것이 자살을 정당화할 만큼 비참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한 우울증을 견디거나 인내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면 극한 고난이 다가와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우리가 반기지 않은 수많은 어려움이 노크도 하지 않고 찾아옵니다. 이럴 때 어떤 극한 고난이라도 넉넉히 이기고 일어날 수 있도록 평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한 인생관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울은 죽음이라는 극한 고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을 택해야 할지, 삶을 택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데 23절을 읽어 보십시오. 죽음과 삶 사이에 끼어있으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삶을 선택했고, 고난을 넉넉히 이겼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극한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바울의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감옥의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사도 바울의 인생관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인생관이란 우리말 큰 사전에 보면 "인생과 세상에 관하여 가지는 의견", "인생의 의의, 가치, 목적 따위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전반적인 사고체계" 등으로 풀어 놓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view of life로 표현하듯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입니다. 인생의 본질, 의미, 가치 등에 대한 총체적인 견해입니다.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고난이 다가오면 그 고난을 디딤돌로 삼고 일어날 수도 있고, 그 고난이 거침돌이 되어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넉넉히 이기려면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평소에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고난을 이기려면 항상 희망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19).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이것(투토)’은 바울이 처해 있는 상황, 곧 환영과 배척을 받고 있는 처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 문장을 보면 감옥생활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1장 13절에 보십시오. “나의 매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에도 “나의 매임”, 17절에도 “나의 매임”이라고 세 번이나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 처형당할지 모르는 극한 고난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고대 그리스말로 '아포리아(Aporia)'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위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절체절명의 상황을 말합니다. '막다른 곳에 다다름'을 말하는 것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Lack of Resources)', 즉 '길 없음(Impasse)의 상태'이자 '출구 없음(No Exit)의 상태'를 뜻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감옥에서의 석방 혹은 성결한 생활로 인한 영적 구원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결국,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정신의 감옥, 질병의 감옥, 불치병의 감옥, 가난의 감옥, 실패의 감옥, 능력의 한계의 감옥 등 어떤 감옥이 와도 탈출하고 일어설 것이다는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늘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절망의 인생관을 가지지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희망의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난관이 다가오면 10명의 정탐꾼처럼 우리는 그들에 비해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좌절하는 절망적 인생관을 갖지 말고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넉넉히 이기는 희망적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자신의 신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읽은 19절을 다시 자세히 보십시오. 2가지 이유 때문에 감옥에 풀려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너희의 간구”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오늘날도 기도하고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얼마든지 모든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살아서 빌리보 교인들과 함께 있을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도 극한 고통 가운데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어떤 고난의 환경에서도 이런 인생관을 갖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히스기야는 불치병으로 깊은 절망의 순간이 찾아 왔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여 치유받고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한나는 불임이라는 고난이 찾아 왔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여 은혜 가운데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낳아 민족 지도자가 되게 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떡 한조각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했던 사렙다 과부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선지 생도의 아내는 남편이 죽고 부채로 인해 파산의 위기에 처해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갈 위기에 처했지만 엘리사를 만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모든 고난의 늪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얼마든지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인생관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고난을 이기기 위해 타인중심의 인생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1:22-26).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나만 죽으면 끝나지”라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이 땅을 떠나 속히 주님께 가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21절에서 죽은 것도 유익하다고 했지만 그가 살아서 복음 전파의 열매를 맺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죽음과 삶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운명 선택권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전개해 갈 때 바울 자신의 선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미래에 대한 바람이 있습니다. 바울의 바람은 어떤 것입니까?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유익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까? 첫째는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살게 되면 빌립보 교회를 방문하게 될 것이고 빌리보 교인들의 믿음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빌립보 교인들의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그가 살아서 돌아가면 빌립보 교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셋째는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자랑이 바울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앞세우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의 믿음의 진보가 있게 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의 기쁨이 있게 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것이 많게 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감옥에서 놓이게 되면 그 모든 것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나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나 죽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나와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진보를 보여주고, 기쁨을 주고, 자랑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을 보십시오. 홍해 앞에 서 있는 모세를 보십시오.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이 땅에 피해만 준다면 빨리 천국에 가야 하지만 한 사람이라고도 누군가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살아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인생관이 다른 것은 자기 중심의 인생관이 아니라 더 나아가 타인 중심의 인생관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극한 고난의 상황에 처해 있어도 우리는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난을 넉넉히 이기고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에는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남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할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그리스도인의 황금율은 남을 돕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조금 성숙하면 어떻게 됩니까? 부모를 생각합니다. 형제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이웃을 생각합니다. 교인도 성숙하지 못한 교인은 자신밖에 모릅니다. 교회도 성숙하지 못하면 자기 교회밖에 모릅니다. 암 세포와 같은 것입니다. 예의도 없고, 도덕도 없습니다. 자기 이익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성숙한 교회는 남을 위해 사는 교인이 많은 교회입니다. 자신이 가진 시간, 자신이 가진 재능, 자신의 언어, 자신의 물질, 자신의 건강, 자신의 믿음으로 얼마나 많이 남을 섬기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베푸는 삶을 인생관으로 가진 삶이야 말로 참으로 고귀한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놓았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평가는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모았느냐가 아니라 남을 위해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주었느냐에 따라 평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2-13)“
3. 고난을 이기려면 항상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1:20b-21).
극한 고난 가운데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투옥이나 배척 등과 같은 외적인 환경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앞에 어떤 말로 수식되어 있습니까?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면 사는 대로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을 존귀하게 하고, 죽으면 죽음으로 주님을 존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고난이라도 넉넉히 이기게 하는 그의 인생관입니다. 그의 생명이 지금 끝이 나든 더 살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달에 죽든, 6개월 살다 죽든, 10년 살다 죽든, 50년 살다 죽던 그에게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신은 죽도 좋습니다. 자신은 감옥에 갇혀도 좋습니다. 자신은 체면이 깎여도 좋습니다. 자신은 손해를 보아도 좋습니다. 자신은 비난을 받아도 좋습니다. 자신은 자존심이 상해도 좋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편할 때만, 자신이 대접을 받을 때만, 자신이 잘 나갈 때만, 자신이 출세할 때만, 자신이 건강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 감옥에 갇혀 극한 고난을 받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에서라는 말은 내 삶을 통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되 그의 삶을 통해서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이 생각이나 말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몸으로 그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높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주체이고 자신은 도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시대 바울을 사용하여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 의견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고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자존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으시면 그만입니다. 자신을 도구로 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일을 하시면 그만입니다. 바울의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의 동기는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의 삶은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삶이 아닙니다. 단순히 교회 일에 열심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의 삶의 원리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21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말은 앞에 “가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21절이 20절의 이유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바로 그의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행동의 동기요, 힘이요, 목적이요, 그의 생각이요, 비전이요 그의 전부라는 말입니다. 이 짤막한 말 속에 그의 인생관 모두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뿐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그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바라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그의 삶에 의미를 주고 그리스도만의 그의 삶에 목적을 주고 그리스도만이 그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없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조차도 그리스도와의 관계하에서 의미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는 것이 철저히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면 죽음이란 불안의 대상도 공포의 대상도 아닙니다. 죽음은 그리스도를 잃은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고통에서 해방되는 날이요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광스런 날이요 상급을 받는 시상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고 말씀합니까?
두 가지로 수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선한 양심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하나님의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행20장 17절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헤어지면서 그들에게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는 것을 봅니다. 33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으로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끄럼이 없는 담대한 삶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계속 선한 양심에 따라 살았다고 강조합니다(행 23:1; 24:16; 딤후 1:3)”
둘째는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다고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죄로 석방되든, 유죄를 받고 사형을 당하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땅에서 얻는 것에 인생을 바친다면 죽어 무엇을 얻겠습니까?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결국,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놓고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고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이고 가치였다면 죽음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가치 없는 것 모두를 놓아두고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죽음의 순간에도 세상에 대해 아무런 미련이나 후회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삶의 세상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죽은 후에 갈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인생관을 가지고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기며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땅 살면서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체면도, 물질도, 세상의 명예도, 권력도, 쾌락도, 출세도 아닙니다. 우리의 최대의 관심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에게 주어진 건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에게 주어진 물질, 자녀, 환경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립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존경을 받으시고 사랑받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보여지고 알려지고 들려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 우리는 고난을 넉넉히 이기려면 항상 희망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19).
2. 우리는 고난을 넉넉히 이기기 위해 타인 중심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1:22-26).
3. 우리는 고난을 넉넉히 이기려면 항상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1:20b-21).
새해의 소원
빌 1:19-21 / 엄기호 목사
한 초등학생이, ‘새해 소원’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詩를 지었습니다. “예뻐졌으면 좋겠어요. 더 많은 친구를 사귀고 싶어요. 우리 가족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아빠가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어요. 공부 잘할 수 있었으면 해요.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평화로운 세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새해가 되면 누구나 불타는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올 일년, 이것만은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소원 한 가지씩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가는 정치가로서의 소원이 있고, 사업가는 사업가로서의 소원이 있으며, 주부는 주부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소원이 있습니다. 심지어 문전걸식하는 걸인에게도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소원의 종류를 크게 나누어 생각해보면 먼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진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을 뜻을 알고, 자기의 신분을 알며 올바른 목적을 세운 사람이 있습니다. 또, 인간의 욕심을 따라 가진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큰 학자가 되겠다든지, 큰 부자가 되고, 큰 사업가가 되고, 많은 명예를 얻고, 인기를 얻고, 세상 권세를 얻겠다’고 하는 사람의 욕심을 따라 가진 여러 가지 소원도 있습니다. 또, 악마의 유혹을 받는 소원이 있습니다. 일시적인 향락과 성공을 위하여 사람들을 배신하고, 모함하고, 인격을 짓밟고, 생명을 해합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마음 속에는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올해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소원을 성취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여러분의 삶에 큰 성공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위치를 아는 소원이 되어야 한다.
첫째, 대한민국 백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대한민국 백성임을 자각한다면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나라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민족의 죄에 대하여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는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16세기 스코틀랜드 개척자요 개혁의 영웅이었던 ‘존 낙스’는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한국을 나에게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큰 근심을 물리쳐 주시고 소원을 만족케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둘째, 우리는 성령교회의 한 일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한 해 동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겠다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순복음의 진리는 죄와 죄책감에서의 자유입니다. 먼저, 성령충만할 때 얻는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과 기쁨 안에서의 자유, 구원의 자유입니다. 또 교회를 위해 봉사, 헌신, 충성하는 자유, 즉 실천 행동을 통한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신앙의 성숙이 없고 사회에 변화가 없고 우리의 삶에 진정한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기도에 힘쓰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능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능력은 바로 기도에서부터 나왔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 어떤 곳에서도 기도를 했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성전에서 기도했고, 집에서도, 길에서도, 심지어는 감옥에서도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세의 우리 성도들에게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고, 깨어서 근신하는 성도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합시다. 우리 교회는 단순히 우리교회만을 위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와 이 나라에 비전을 심어주고, 서울과 성남과 광주와 분당과 하남지역의 많은 이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줍시다.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합시다. 성령의 기적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깨닫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여러분 모두 성령충만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만을 믿는 성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백성된 저와 여러분은 분명 죄악과 구별된 성도입니다. 성도의 삶은 성령충만한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생활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듣고,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가정을 하나님의 가정으로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안식처로 가정을 창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실 때에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을 만들어 안식을 누리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정에서 해야할 일은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주 앞에 조용히 앉아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새로 깨달은 것이나 의심되는 것을 함께 나누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며, 가정예배를 통해 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삶의 내용은 사랑에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봉사를 많이 하고, 많은 예배를 드렸다 해도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위선이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은 사랑의 용광로여야 합니다. 가정은 사랑의 샘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언제나 충만히 받고 나누는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소원을 가져야 한다.
오늘 본문,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20)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바울에게 세 가지 소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모든 일에 부끄럽지 않은 자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공적이나 사적이나 그리고 자기를 박해하는 원수들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기를 소원하였습니다(행 24:16). 또한 교회 성도들 앞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우리 또한 모든 일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항상 담대한 자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서운 박해와 환난과 결박 앞에서도 담대했고, 옥에 갇히기까지 복음전파에 담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돌과 지중해의 풍랑과 육체적 질병 등,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전파에 담대한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앞에 올 환난을 추호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변함없이 복음전파에 담대한 자가 되기를 소원한 것이었습니다. 담대한 자 앞에 불가능은 가능한 역사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배짱으로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존귀히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바울은 살게 될지 아니면 죽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살게 되면 사는 대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이 소원이요, 죽게되면 죽는 대로 역시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부터 귀하고 값진 소원을 갖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한 자가 되기를 소원합시다. 항상 담대한 자 되기를 소원합시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기를 소원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소원성취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에서 떠난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준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시험준비를 미리하는 사람은 낙제하거나 망신을 당하지 않습니다 합격자의 대열에 영광스럽게 됩니다. 천국의 상급을 예비하는 삶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인내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인내하여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20년을 인내하며 고향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13년을 인내한 후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욥, 다윗, 바울 모두 인내하여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환난에서 인내하면, 축복의 사람, 믿음의 사람, 승리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충성하는 사람을 하나님을 축복하십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 각 기관에서, 교회학교에서, 교구에서 충성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이 세상을 위해 사는 자는 이 세상과 더불어 망할 것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자는 그로부터 썩지 아니하는 영생을 보장받습니다.
올해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모든 소원들을 주안에서 다 이루시고 소원성취 하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질병을 치유받고, 삶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실패와 절망감, 외로움에서 일어나고, 죄와 악한 상황에서부터 구원받고,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부터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산업에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땀 흘리는 곳, 씨를 뿌리는 곳마다 30, 60, 100배의 결실이 있기를 축복하겠습니다. 항상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아니하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한 해가 되고(신 28:13).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는 생애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2004년도 올 한 해 동안 여러분의 모든 소원이 주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풍성하게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온전하는 뜻을 이루어 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빌 1:19-21 / 성흥모 목사
2003년도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한해를 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한다는 것이 마음으로 부담이 되고, 덧없이 나이만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들도 많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비결이라는 책들도 수없이 많은데, 나만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아서 정말 부끄러운 가운데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때도 많았으며, 목적의식이 뚜렷하지 못하여 망설인 때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한해를 돌아보면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바로 이것이 부족하여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우리들 자신이 다 알고 있습니다.
굶주린 사람이 있다면 그냥 주저앉아 음식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면 틀림없이 그는 앉아서 아사할 것입니다.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 박차고 일어나 음식을 찾아 나서고,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꿈을 가진 사람이 계속 누워있는 채로 꿈만 꾼다고 하면 그의 정신은 아사의 위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마음 속의 꿈을 자기의 목표로 전환시키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겨서 행동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다이아몬드는 하나의 광석이지 결코 빛을 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금강석 다이아몬드광석이 하나의 보석인 다이아몬드가 되기 위해서는 갈고 닦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하여 얼마나 힘쓰고 애를 쓰면서 성실하게 살아오셨습니까? 여러분, 성공과 실패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하였습니까? 그가 성공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실패가 여러 번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길에는 역경, 갈등, 거부, 패배, 좌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인생이고,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힘들지만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2003년은 참으로 아름답고 성실하게 살아온 한해였습니다. 저를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응원하여 주었고 지켜보아 주었고, 함께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애쓴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 중에 저의 아내가 가장 큰 후원자였고, 그리고 장로님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제자훈련하면서 여러 많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고, 경건의 시간 Q.T.를 하여 나눌 수 있었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해주는 것처럼 친구가 친구의 얼굴을 빛내준 것에 대하여도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동역하는 교역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 중에는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이지만 정말 한해동안 최선을 다하여 협력하신 분들이 있었기에 일년동안 목회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은 우리 교회 창립 50주년을 참으로 의미있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할 때는 영주교회의 선배 목회자와 그 동안 섬겨오신 모든 교인들 앞에 참으로 두렵기조차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사에 그치지 않고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보람 있는 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까 하여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좋은 항존직의 일꾼들을 세울 수 있었고, 아주 훌륭한 음악회를 가졌으며, 50주년기념행사를 잘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일에 협력하신 모든 교우들과 특별히 50주년사업위원들에게 모두 감사를 드립니다. 50주년 기념주일에 헌금을 드려 전액 이웃의 어려운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의미도 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여전도회에서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별도로 조직하고, 가장 큰 사업으로 몽골에 수도 울란바토르에 영광의 주님, [아드릭 에이징] 교회를 건축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안광표 선교사님과 담바 전도사님이 수고하여 이제는 틀이 잡혀가는 교회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여전도회에서 50주년 기념화보를 제작하였는데, 제가 후암교동협의회 목사님들에게 증정하였으며, 함께 성경을 연구하는 남시찰의 동역자 8분의 목사님들에게 증정하였는데, 정말 대단한 여전도회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화보를 보면서 여전도회가 지금도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고 있지만, 다음 세대를 위한 역사적인 교육이요 무언의 가르침이라고 칭찬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최선을 다하신 것 같은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하여 정신을 차릴 것으로 보여집니다. 앞장서신 편집위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전도회가 별도로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제 해단하여도 앞으로 더 좋은 사업을 계획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유별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부끄럽지 않게만 살아가면 되는데, 그것이 힘든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럽고, 나 자신에게도 부끄럽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심히 부끄럽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나 죄송스러운 것입니다. 한해를 마감하면서 사도 바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정말 일생에 걸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힘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1-4)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받는 것이 있다면 자기에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충성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사도 바울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의 열정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열정이 사도바울의 가장 자랑스러운 신앙입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하였으면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는 과거에도 충성하였고 지금도 충성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충성을 다할 것이었습니다.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함을 받을 수 있다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오직 충성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저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갇혔다는 감옥을 보았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시위대 뜰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군인들이 바울에게 묶여서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하는데, 바울과 함께 하루만 보낸 군인이라고 하면 예수 믿어 구원받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죄수를 잡아두는데, 죄수가 도망하지 못하게 하려고 군인 한 명을 죄수와 함께 묶어두기도 하고, 한 방에 넣어두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들어갔다고 걱정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로마가 그렇게 빨리 복음화가 이루어지고 기독교가 국교로 발전된 것은 군인들이 복음을 빨리 받아들인 데 있었습니다. 로마는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서 장기간 투옥된 것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서는 여러 가지 반응이 나왔습니다. 바울을 존경하고 지도 받던 성도들은 바울의 몫까지 열심히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의 투옥이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형제들에게 담대함을 일으켜 하나님의 말씀을 열정적으로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13절-14절입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바울을 시샘하는 교회나 집단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하도 이방인을 위하여 열심을 내니까 바울을 시기하고 견제하는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도하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었는데, 바울이 잡혀 들어가니 이제야말로 우리가 앞장서서 전도의 실적을 올리고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바울을 시기하고 시샘하는 이들은 바울의 전도 실적을 따라잡기 위하여 투기와 분쟁으로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면, 감옥에 있는 바울이 배아파하라고 전도하였다고 합니다. 15-18절입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로마 황제의 시위대가 있는 감옥에 보내신 것은 정말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들어가게 되니 전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가만 있느냐 하면 바울은 감옥에 있는 동안 시위대 군인들에게 전도하였고, 옥중서신을 기록하였습니다. 옥중에서 기록한 서신이니 우리에게 얼마나 감동과 감화를 주는 성경입니까? 에배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적어도 7권의 성경은 옥중에서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그만 돌아다니게 하시고 감옥에 넣어놓고 서신을 통하여 장차 신약성경을 기록하고, 오고 오는 성도들과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였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것도 은혜요, 하나님의 기회였습니다.
어려운 역경에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기도 다른 의미에 있어 영적인 기회입니다. 나의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라는 점입니다.
원문을 자세히 번역하면 18절 하반절의 말씀을 자세히 번역해야 합니다. 18절 말씀으로 하나의 단락을 짓지 말고, 18절 하반절의 말씀을 19절에 붙여읽어야 합니다. 18절 말씀에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하여 "나는 기뻐한다" "그러나 또한 기뻐할 것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18절 하반절의 "또한 기뻐하리라"는 말씀은 19절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새로운 단락은 19절 말씀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18절 하반절 말씀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원문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이러한 세밀한 것을 연구하고 적용하여 헬라어 성경 네슬 알란트 27판에서부터 이 점을 밝혀 두 '기뻐한다' 동사를 구별하여 인쇄하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이것을 반영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19절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렇게든 저렇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바울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갇힌 상태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떠한 심정으로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위하여 옥중 생활을 돌보아주고 있는데, 바울은 자기보다는 교인들이 더 걱정스러웠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설립하신 사도가 죄인의 모습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으므로 교인들이 혹시라도 상처를 입지는 않을까 하여 염려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최고지도자가 감옥에 들어가 있으니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요, 부끄러운 것도 아니요, 오히려 복음의 진보와 진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하는 것과 다르게 앞으로도 계속하여 기뻐할 것이며, 감사한 마음으로 감옥 생활에 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장래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유의 몸이 되어 마음껏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어도 좋고, 이대로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하여도 좋고, 이것이 자신의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최장 2년간 감옥 생활하기도 하였습니다.
19절입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에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아는고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것이"란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지만, "감옥에 갇혀있는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은 감옥에서 사형당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풀려 나와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에서는 "나는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압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두 가지 다른 상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앞으로 사형을 면하고 살아 있게 될지, 아니면 여기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두 가지 상황을 놓고 말하고 있습니다. 23절 하반절에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과 24절에서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장차 일어날 두 가지 상황을 놓고 면밀하게 재어보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더 좋은 일이냐? 사는 것이 좋은 일이냐, 아니면 죽는 것이 좋은 일이냐?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좋은 결과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은 안다"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육체의 죽음이라고 하면 그를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만들어줄 것이었습니다. 죽으면 천국에 가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감옥에서 석방된다고 하면 다시 자유의 몸이 되어 생명 걸고 복음을 전파할 것입니다. 구원의 의미를 이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면 그것으로 족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21절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는 이유도 죽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사람이 이쯤 정신차려야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어야 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19절에서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스가랴 4:6에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사는 것은 자기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원동력, 세상에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는 비결은 성도들의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이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 혼자 있다는 생각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서로를 격려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시시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 부끄럽지 않게 주의 부르신 자리에서 충성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의 힘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말을 다루시는 분들의 말을 들으면 명마와 졸마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졸마는 전후좌우 쳐다보는 것이 많은 것은 졸마요, 명마는 앞만 보고 달리는 말이라고 합니다. 명마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에게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기대하고 있으며, 무엇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있어야 기도도 할 수 있고,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는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으면 무엇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며, 하나님도 그런 사람은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빌2:13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에게 소원이 없으면 하나님도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 있습니까? 소원이 있어야 하나님도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열정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이요, 그것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실패하여 낙심이 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에 바르고 합당한 일이라고 믿으신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세요. 다시 한번 도전하세요. 여러분이 하시는 일에 몰입해야만 합니다. 목회자는 열정으로 목회해야 합니다. 장사하시는 분들도 신명나게 장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면서 우리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라고 고백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침묵 깨기”(Breaking the Silence)
빌립보서 1:20-21 / 김영봉 목사
금식 기도를 시작하셨습니까? 무슨 금식을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금식하면서 회개해야 할 두 가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전도(evangelism)에 열심을 내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교회가 더욱 열매를 맺는 데 헌신하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계십니까? 금식하면서 여러분 자신의 영적 갱신을 위해, 와싱톤한인교회의 갱신과 부흥을 위해, 그리고 연합감리교회의 영적 대각성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혹시, ‘나 하나 빠지면 어떠랴?’라고 생각하는 분은 안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역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포토맥 강을 보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쉬는 날이면 Great Falls에 가서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 봅니다. 지난 주간처럼 비가 많이 온 후에는 특히 그 도도한 흐름에 감동하게 됩니다. 그 거대한 물줄기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입니까? 웨스트 버지니아에 위치한 작은 샘물 Fairfax Stone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작은 샘에서 나온 물이 383마일 즉 616 킬로미터를 굽이굽이 흐르면서 한 방울 한 방울 모여 거대한 물줄기가 된 것입니다. Fairfax Stone의 작은 샘물만 본 사람은 그 작은 물줄기가 포토맥 강을 만드는 첫 방울이라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포토맥 강물을 바라 보면서, 그것이 멀고 먼 산골짜기의 한 샘물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경이감이 듭니다. 거대한 강도 한 방울의 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모여 중창이 되고 합창이 되어 죽어있는 영혼을 깨워 일으킬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그 비전을 바라보며, 나 한 사람의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하십시다. 캐머러 감독님으로부터 시작된 이 금식기도 운동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연합감리교회를 깨워 일으키는 데 사용될 수 있도록 내 몫의 헌신을 다하십시다.
이번의 금식 기도의 초점은 전도에 있습니다. ‘전도’라는 말은 요즈음 아주 인기 없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단어를 들을 때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상황이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도하는 경향으로 인해 이같은 거부감이 만들어졌다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감화시키거나 감동시켜서 전도하기보다는 위협하고 협박하듯 전도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 자신들에게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도 내면에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그 음성을 애써 외면하고 거부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전도하려면 거부하게 되고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단어는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가장 큰 부담은 ‘해야만 하는 것을 아는데 하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신앙 생활을 웬만큼 한 사람이라면, 믿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 중 하나가 전도라는 점을 모두 인정합니다. 하지만 막상 전도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 부담스럽고, 귀찮고, 번거롭습니다. 개인주의 사고에 깊이 빠져 사는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것 자체가 번거롭고 귀찮은 일입니다. 게다가, 거부 당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 중 하나는 거부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른 체 하고 사는 길을 택합니다.
복음에 대한 이 무거운 침묵, 이것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위험한 침묵’(dangerous silence) 혹은 ‘치명적 침묵’(fatal silence)이라고 부르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이 침묵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저도 알고 여러분도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금식 기도를 제안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로와지면. 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고 입을 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에 대한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은총을 힘 입어 영적으로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금식과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새로와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체험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에게 뭔가 간절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 없이, 단순히 어떤 목적을 위해 전도하자고 하면 필히 실패할 것입니다. 전도는 교회를 키우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힘을 잃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전도는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나에게 참된 희망이 되고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어 준 ‘도’(道, the Way)를, 그것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전’(傳)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웨슬리 신학대학교 총장께서 초청을 하셔서 분당에 있는 만나 교회의 김병삼 목사님과 식탁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로 나눈 대화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후배 목회자들을 미래의 지도자로 키우는 데 힘을 모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화 중간에 김병삼 목사께서 자신의 건강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분은 한 동안 과체중에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성경의 원리에 따라 건강을 관리하는 방법을 개발한 어떤 목사님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지금은 체중도 줄었고 건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도 그 목사님을 초청해 부흥집회를 해 보라는 겁니다. 제가 농담으로 여기고 웃었더니, 곁에 있던 사모님까지 합세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두 분 다 그 목사님의 건강 비법을 통해 고질병을 치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저에게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목회자들에게 일종의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저를 심하게 괴롭히는 고질병이 있었다면 솔깃해 져서 그 자리에서 연락처를 적어 달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이게 전도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님을 치료했다는 그 건강 비법은 정통 의학계에서 보면 비웃을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 자신이 그 방법을 통해 효험을 보았고 자신처럼 효험을 본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아무런 주저함 없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선전하셨습니다. 그것을 전하는 분의 눈빛이 반짝거렸고 얼굴에는 열정이 보였습니다. 그것이 체험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전도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이 체험한 그것이 자신에게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보면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컨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삶의 이유와 소명을 찾습니다.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절망하고 있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삶에 영원한 차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살아오면서 얻은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신음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원하고도 참된 사랑을 경험하고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고 나면,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간절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받은 치유를 그 사람도 받게 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복음에 대한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전도는 가장 먼저 내가 전도를 하려는 그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전도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를 하면서 쭈볏 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아쉬워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전해 주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그 사람이 내가 전하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거부 당하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거부 함으로써 손해를 보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입니다.
보험 세일즈가 좋은 비교가 될 것입니다. 보험 세일즈를 하는 분들은 보험 가입 실적에 따라 정해진 커미션을 받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커미션을 위해 세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실패한다고 합니다. 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를 턴다는 느낌이 들어서 항상 쭈뼛거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수입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보험 가입자의 미래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보험 세일즈에서 성공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론이지,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어느 보험 세일즈맨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 사람도 처음에는 그렇게 믿고 일하려 해도 막상 낯선 사람 앞에 서면 주눅이 들었다고 합니다. 반복적으로 자기 암시를 스스로의 마음에 보냅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미래를 위해 돕는 거야!’ 하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일즈를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자신을 통해 생명 보험을 들은 20대 직장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사는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세일즈맨은 보험금을 마련하여 슬픔에 빠져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 전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보험을 들면서 써 놓은 쪽지를 전달했습니다. 그 쪽지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거든, 이 돈은 어머님께 드리는 나의 마지막 선물이 될 것입니다.” 노모는 그 돈을 받아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광경을 보자, 그 보험 세일즈맨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객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신념으로 일을 한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전도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자신 없어 하는 이유는 나의 전도를 통해서 전도된 그 사람이 변화하고 새로와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던 사람이 믿음의 길에 들어서서 변화되며 그 변화로 인해 그의 삶의 빛깔과 열매가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되면, 전도에 대한 침묵을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아쉬운 것이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요, 교세를 키우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것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도움을 주려는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으로 얻을 수 있는 확신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확신입니다.
저는 저의 가족사 안에서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증조 할머니로부터 할머니로 그리고 어머니까지, 여성만 3대째 믿던 가정이 마침내 아버님까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온 가족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형제와 가족들의 신앙 수준은 다 각기 다릅니다. 철저히 헌신된 사람도 있고, 문지방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헌신적인 신앙을 통해서 우리 가족이 경험한 영적인 축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내놓을만한 것이 별로 없는 평범한 가족이지만, 영적으로는 나눌 이야기가 참 많은 가족입니다.
그래서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이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얘들아, 내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너희도 엄마 아빠에게 물려받을 것 중에서 믿음이 제일 귀한 것임을 알아라.” 그랬더니 아들 아이가 대답합니다. “그것 말고 물려 줄 것이나 있나요?”
그 아이의 말이 맞을 지 모릅니다. 저에게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재산도, 가보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 아이들이 살아있는 참된 믿음을 가진다면, 다른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반대로, 재산도 물려주고 진귀한 가보도 물려 주었는데 믿음을 전하지 못했다면, 그 모든 유산이 오히려 타락의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식만 그렇습니까? 내가 아끼는 친구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내 부모에게 혹은 형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읽었습니다. 빌립보서를 쓸 당시 그는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언제 끌려나가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자신의 인생관을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바울의 삶의 동기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 그렇게 하여 그분의 능력을 힘 입는 것,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는 것, 그분의 능력으로 그 소명을 이루는 것, 그렇게 하여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높여지는 것, 그렇게 살다가 죽어 그리스도와 영원히 연합하는 것, 그것이 바울 사도가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의 삶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므로, 죽는 것은 오히려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이 땅에서 추구한 것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바울의 표현을 빌어 여러분의 인생관을 요약하라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나에게는, 사는 것이 돈 버는 것이다”라고 하시겠습니까? “나에게는, 사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하시겠습니까? “나에게는, 사는 것이 골프다”라고 하시겠습니까? 혹은 “나에게는, 사는 것이 먹는 것이다”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하게 되면, 그 다음 구절이 어떻게 이어질 것 같습니까? “나에게는, 사는 것이 돈 버는 것이니, 죽는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가 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는, 사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니, 죽는 것은 실패입니다”가 되지 않겠습니까?
영원하고 참된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사로잡히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도에 대해 회개하는 이 기간에 먼저 저와 여러분 모두가 우리의 믿음을 되돌아 보고 그 믿음을 새롭게 하십시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고후 5:7)이 되십시다. 죽음 너머에까지 이르는 소망을 가지고 사십시다. 우리를 영원히 불태울 사랑을 품고 사십시다. 마지막 숨이 다할 때가지 삶의 의욕을 펌프질해 주는 진정한 소명을 따라 사십시다.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고, 그 고백이 진실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치명적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한 영혼을 하나님 앞에 회복하고 그 안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요 보람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전도는 가장 먼저 전도를 받는 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만, 전도하는 본인에게도 더 없는 기쁨을 안겨 줍니다. 나의 기도와 봉사와 희생을 통해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자라가며 변화할뿐 아니라 그의 가정 전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 안에서 변모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때로 교우들께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목회만큼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이 칭찬인지 동정인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저는 목회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 변하는 것을 보는 기쁨 때문입니다. 믿지 않던 사람이 믿음을 가지면서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은 더 없는 기쁨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정체되어 있다가 하나님을 체험하여 얼굴 표정이 변하고 삶이 변하며 가정 전체가 변화하는 것을 보는 것은 다른 모든 고민과 아픔과 상처를 상쇄하고도 남는 기쁨입니다.
게다가, 잃어버린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보고 싶어하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혹은 다 큰 자식이 방황을 하다가 가출을 했다 합시다. 그 부모들에게는 잃어버린 자식 혹은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외에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럴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되찾아야 할 자녀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어떤 자녀들은 길을 잃었고, 어떤 자녀들은 반항하고 가출을 했고, 또 어떤 자녀들은 자신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간절히 찾으십니다. 하나님 없는 그들의 삶은 허비될 것이 분명하고 불행으로 끝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전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그분 앞에 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 있다면 자신이 전도하여 얻은 사람들이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살전 2:19-20)
그래서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감독님과 함께 하는 금식 기도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좀 더 기도의 열기를 집중시키기 위해 ‘수요 금식 기도회’를 제안합니다. 12월 31일까지 적어도 3개월 동안 수요일 저녁 한 끼를 같이 금식하고 수요 예배에 참석하셔서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십시다. 미스바에 모여서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함께 모여 금식하며 기도하십시다. 금식하면서, 전도에 열매 맺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그동안 지켜온 무겁고도 위험하며 또한 치명적인 침묵을 깨뜨리십시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 사도가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고 믿고 살아가도록 힘쓰십시다.
이같이 믿음을 새롭게 하고 더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다 보면, 복음에 대한 침묵을 깨뜨리고 전도에 대해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전도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늘에서 하나님은 천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 누구에게서라도 이런 말 한 마디를 전해 들었다고 합시다. “당신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을 해 주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금식 기도를 통해, 나에게는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정립하고, 내 삶의 이유를 다른 이들에게 담대하게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거룩한 기쁨과 희열이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전도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 사는 것이 오직 하나님 나라,
그 뿐이었던 주님, 저희를 깨워 주소서. 사는 것이 오직 주님, 그뿐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우리 삶의 전부이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허락하소서.
그렇게 살아 내 믿음을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에 이르게 하소서.
주님 다시 오실 때 그 앞에 내 놓을 이름이 있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