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一日)는 객관적으로만 본다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24시간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관념 속에는 하루의 길이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게다가 역사 속의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달력의 최소 단위인 하루에 대한 개념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역사 속에서 문화권에 따라 하루를 시작하는 시점도 차이가 많았다. 이집트와 초기 그리스에서는 일출(日出)가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반면 바빌로니아와 태음력을 사용하는 중동의 민족들과 유대인에게는 일몰(日沒)이 하루의 시작점이었다. 한편 초기 아랍인들과 움브리아인,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정오(正午)부터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 하루가 시작되었을까? 우리나라, 중국, 일본과 기원전 2세기경의 이집트에서는 한밤중에 하루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정연식 교수는『중종실록』 중종 11년 7월 신사의 내용에 중종 11년(1516)에 문소전(文昭殿)에서 장순왕후의 위판을 도둑맞아 새 위판을 봉안할 때 제주(題主)는 7월 ‘초나흘’ 3경 3점에 하고 별제(別祭)는 ‘초닷새’ 4경 1점에 행한다고 한 기록이나 『숙종실록』 숙종 6년 11월 병진의 내용에 숙종 6년(1680)에 인경왕후가 죽어 상례의 진행절차를 논의할 때에 김수항은 3경 3점은 그 전날이고 3경 4점은 그 다음날에 해당되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 등을 근거로 하루는 자정부터 다음날 자정까지를 말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연식,⌈조선시대의 시간과 일상생활⌋『역사와 현실』37, 2000년 9월 참고)
자정을 기준으로 하루가 시작되는 또 다른 근거로 정연식 교수는 유희춘이『미암일기(眉巖日記)』신미년 8월 27일자에서 선조 4년(1571) 8월 22일 신시(申時)에 강릉(康陵) 정자각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참봉 이탕이 처음 보고한 시각이 22일 밤 3경 5점으로서 23일과 엇갈린 때라 한 점, 정약용은『목민심서(牧民心書)』진황육조 설시(賑荒六條 設施)에서 기근 시 사망자 조사보고에서 동짓날 자시부터 시작하여 닷새째 되는 날 해시까지 죽은 자의 명부를 작성하여 5일 단위로 명부를 만들도록 하고 있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권3, 연박(煙朴)에서 담뱃대장수 연박은 정월 초하루 자시에 나서 백년을 살고 섣달 그믐날 해시에 죽는다면 3만 6천 일을 산 것이 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민간에서도 자시를 하루의 시작으로 여겼음을 뜻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하루의 시작점이 언제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그리고 전근대사회에서 하루의 시작은 지역에 따라, 경우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양했던 것 같다.
박성래 교수는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도 사면령이 내려질 때의 기준 시각을 매상(昧爽)으로 하였기 때문에 동틀 무렵에 하루가 시작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성래,⌈한국 전근대의 역사와 시간⌋『역사비평』 50, 2000년 참고)
하여튼 한국과 중국, 일본의 시간관념이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밤 12시(24시, 혹은 0시)부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점과 가장 비슷했던 것 같다. 이것은 자시(子時)에서 하루가 시작하여 해시(亥時)에 하루가 끝난다는 중국의 12간지 개념이 한국과 일본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 같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가 하루(一日)였다. 다음 세 편의 소설 속에서 하루의 시간적 구조가 어떠한지 살펴보자.
구소련의 작가 A.I. 솔제니친의 유명한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Odin den iz zhizni Ivana Denisovicha)]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포로로 잡혔던 경력이 ‘간첩’으로 오판되어 참혹하고 비인간적인 수용소 생활을 하는 평범한 농민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의 하루 생활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묻고 있다.
소설 속에서 슈호프의 하루는 이렇다. “ 새벽 5시, 이 시간이면 언제나 어김없이 기상 신호가 온 바라크(막사) 안을 울렸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호는 9시에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물론 점호가 9시에 끝난 적은 한 번도 없다. 두 번, 아니 때로는 세 번씩이나 인원점검은 반복된다.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빨라야 10시, 그리고 기상은 5시다. -중략- 이렇게 하루가, 우울하고 불쾌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가 지나갔다.”
일제시대인 1934년 8월 1일부터 9월 19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박태원의 중편소설인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에서는 주인공 ‘구보’가 경성 시내를 돌아다니며 보낸 하루를 특별한 사건없이 재현하며 '미학적 자의식'이라는 모더니즘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박태원의 소설 속에서 구보의 하루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는 아들이 제방을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떼어들고, 그리고 문간으로 향하여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중략- 오전 두시의 종로 네거리- 가는 비 내리고 있어도, 사람들은 그곳에 끊임없다. -중략- 구보는, 벗이, 그럼 또 내일 만납시다, 그렇게 말하였어도, 거의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유신독재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76년 무렵에 최인훈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하루는 일상성의 단조로운 되풀이이고, 삶이 근본적으로 하루의 되풀이 속에 있다는 내용을 설파했다. 사실 최인훈의 이 소설은 제목과는 달리 소설가 구보씨의 단 하루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1969년 11월 하순부터 1972년 5월 하순까지 근 1년 6개월 남짓 동안의 소설가 구보씨의 생활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 즉 최인훈의 소설은 15편으로 이루어진 하루 이야기의 연작이라고 할 수 있다.
최인훈의 소설 제1장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에서 구보씨의 하루는 이렇다. “1969년이 다 가는, 그믐께를 며칠 앞둔 어느날 아침, 소설가 구보씨는 잠에서 깼다. -중략- 8시에 기념 촬영을 하고 모임이 끝났다. 구보씨는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차를 기다렸다. -중략- 버스가 왔다. 구보씨는 황황이 이십 원 길의 나그네가 되어 밤 속으로 외마디 소리처럼 사라졌다.”
위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공통적인 하루의 시간적 구조는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의 기간이다. 또한 기계적 시간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 시간적 구조에서도 인간 개개인이 느끼는 하루는 저마다 다르다.
사실 과학적으로 따져 봐도 지구의 자전으로 생기는 하루의 길이는 매일 다르다. 왜냐하면 지구가 항상 같은 모양으로 자전축을 돌지 않기 때문이다. 2월 15일 경의 태양일은 실제로는 24시간 15분으로 가장 길고, 11월 1일경의 태양일은 23시간 44분으로 가장 짧다. 거기에다 한 술 더 떠 하루의 길이는 수백 만 년 동안 조금씩 길어져왔다. 지구의 자전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차이는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는 감정일 수 있고 느낌일 수도 있다. 가수 김광석은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 품은 담배연기처럼’(서른 즈음에)이라고 노래했고, 가수 송창식은 참새의 하루를 ‘아침이 밝는구나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재 너머에 낟알갱이 주우러 나가봐야지 -중략- 이제는 졸립구나 언제나 그렇지만 마누라 바가지는 자장가로 부르는 사랑의 노래’(참새의 하루)라고 소리쳐 노래했다.
그런가하면 ‘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는 격언도 있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도 있다. 여기서 `하룻강아지'라는 말은 `하릅강아지'가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하릅’은 짐승의 나이 ‘한 살’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하루’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뭐 이런 것이 대수이랴. 하룻밤이면 만리장성도 쌓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역사적이고 과학적이면서 객관적인 하루 개념보다도 우리에게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하던 내일이다.”라는 랄프 왈도 에머슨이 한 마디가 아닐까?
첫댓글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하루는 걸리겠습니다. 아~ 긴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