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밑에 쓴 글 중에 라마단 금식기간에 대해 말을 했었는데
24일부터가 라마단 기간이군요.
우리나라에는 이슬람신자가 별루 없어서 인지 인터넷에서
정확한 정보를 구하기가 쉽진 않군요.
저 역시 이슬람신자가 아닌지라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제가 아는 한 제가 이해하는 한 써볼까 합니다.
계략적인 것은....
유래는 중요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 정신과 의미가 중요한 것이죠.
라마단 기간 동안에는 금식을 하죠.
이런 부분은 대게 다들 아실 겁니다.
힘겹습니다. 해가 뜬 후부터 해가 뜰때까지 굶는 겁니다.
가볍게 물이나 약간의 음료는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한달 가까이 되는 기간에 완전 굶는 것은 불가능 하죠.
그래서 저녁에는 먹습니다.
그런데 불을 활활때서 연기가 밖으로 새나가는 그런 음식은 하질 않습니다.
저녁에서 약간의 소식만하는 겁니다.
왜 이런 금식을 하느냐....
웰빙이라 건강을 위해서 노폐물 배출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겠죠.
금식을 하면 식대는 확실히 굳겠죠.
점심만 하더라도 5000원 잡고 한달이면, 15만원이군요... 햐...
금식하면 부자되겠군요....
이 돈을 기부하는 겁니다.
자신이 굶어 봄으로써 가난한 다른 사람의 처지도 이해하고,
연기가 나는 음식을 하지 않음으로서
어쩔 수 없이 굶는 사람을 배려하고 또 배려하는 마음 역시 배웁니다.
어린 자녀들에게도 이러한 사실들을 일깨워 주는 겁니다.
굶주림을 느끼면서 현재 자신의 삶의 고마움도 느끼는 겁니다.
물론 굶을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굶어서는 안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업상 다른 종교인과 식사를 해야하는 사람도 있고,
환자의 경우도 그렇고,
임산부나 수유중의 아이를 가진 어머니 역시 식사를 거를 수는 없지요.
예외 없는 규칙은 없는 법입니다.
식사는 하는 겁니다.
그 대신에 먹은 만큼의 배를 기부하는 겁니다.
물론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기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에게는 라마단 기간의 금식과 기부는
불교의 덕을 쌓는 행위, 천주교의 천국에 복을 기르는 일인 것입니다.
주위에 이슬람교인들은 드물겠지만,
혹여 이슬람교인을 보시거든 라마단 케림(자비로운 라마단)이라고 해주십시오.
그냥 지나치더라도 그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서구사상에 입각해서 이슬람교에 대해 좋지 못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같습니다.
일부다처제라든지 한손에는 코란을 한손에는 칼을 이라던지...
일부다처제의 경우 제가 알기로는 어쩔 수 없는 차선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가 취약했던 예전에
미망인이 되면 여성으로서 생존마저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성비의 불균형으로 어쩔 수 없이 일부다처가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허용이죠. 해라가 아닌 겁니다.
한손에는 코란을 한손에는 칼을 이라는 말도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이 만든 말이라는군요.
제가 생각하는 성전의 의미 자위적 방어입니다.
테러리즘과 결부되는 것이 안타깝지만,
코란을 수백번을 읽고, 코란의 뜻 대로 살려고 하는 그들에게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이 성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란 상호 이해와 우정의 계약에 바탕을 둔 관계다.
너희를 여러나라와 부족으로 나누었으니 너희는 서로 이해하리라.
우리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가장 가깝다. 너희는 기독교인을 보호하라.
이런 글들이 코란의 경전의 한 구절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무슬림은 폭력과 테러와 분쟁의 원인이다라고 보는 시각
뭔가 정말 많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참 우습죠.
천주교와 이슬람교의 하나님(야훼, 알라)은 유일신으로 같은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
형제지란이랄까?
어쩌면 진정한 종교인들을 뒤로하고,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 하는 추악한 경제적 목적의 무력적 분쟁은 아닐런지.
이슬람교에서도 예수의 존재는 인정합니다.
그 위대성 역시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신의 아들이 아닌 위대한 선지자로서 숭앙하는 겁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너희는 서로 이해하리라.
예수천당 불신지옥.
알라의 이름으로의 테러.
이 둘 사이의 괴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어느 한쪽이 완전한 악이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기동전함 나데시코의 한 대사가 생각납니다.(애니 광팬... ㅡㅠㅡa)
어떤 사람에게도 입장이 있듯이 각자의 정의를 갖고 있는 법이야.
덧붙여 말하면 내가 좋아했던 애니에서는 적에도 내편에도 정의가 있었어.
재수없는 사장이 하는 말이지만,
다들 각자의 정의가 존재하는 것이겠죠.
그래서 풀 수 없는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러한 노력은 하지 않은체
불리우는 이름이 다르다는 이유로 반목과 질시를 끊지 못하는 것은
이름이 지닌 무서움 때문인 것같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울 때 그 이름에 의하여 귀속당해 버립니다.
똥을 장미라고 한다면, 우리는 장미를 떠올리며 똥을 바라볼 겁니다.
순간 아름다움을 상상하다 큰 실망을 하겠지요.
우리의 이슬람교에 대한 생각은 장미를 똥이라 부르는 것과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장미인데도 똥을 생각하며 차마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의 판단은 유보한체
그러한 생각의 효과를 노리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천주교가 붉은 장미라면, 기독교는 분홍색, 이슬람교는 흰색 장미쯤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꽃말을 따지지 마시고, 색의 의미도 잊으시고, 단지 저의 비유일 뿐입니다.
한 장미인데도 아름다운 향기와 아름다운 모습과 제각각 아름다운 색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데 정작 우리는 각각에 제 멋대로의 이름을 붙이고,
그 선입견으로 그들을 구분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세상의 모든 것에는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길가의 돌틈바구니 속에서 자라나는 작은 풀도 어여쁜 꽃을 피우고,
힘든 처지의 누군가의 위로가 되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표면적인 이름이 아닌
진정한 가치, 존재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한주가 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