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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누워 있던 침대에는
항상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지요.
침대 주위엔 약 냄새가 진동을 했어요.
어머닌 늘 그 냄새를 거칠게 들이마시며
온 종일 주무시기만 했어요. 그리고
어쩌다 잠에서 깨어 나와 눈이 마주치면
힘없이 웃어 주곤 하셨지요.
어느 날 어머닌
힘없는 미소를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길고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셨어요.
그 후, 밤마다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나를 송두리째 삼키는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요.
나는 밤마다 울었고, 아버진
어머니가 저세상에서 이런 너를 보며
울고 계실 거라고 야단치셨어요.
아버지의 신경질적인 꾸짖음은
그날 밤 어머니 침대에 드리워졌던
바로 그 길고 어두운 그림자 같았어요.
나는 억지로 울음을 참았지만, 서글픔과 두려움에
속으로 속으로 더 아프게 절규했어요.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가족사는 참 기구했다. 어머니와 누나는 뭉크가 어렸을 적에 결핵으로 사망했고 여동생은 평생을 중증 정신질환자로 지냈다. 남동생도 결혼한 지 며칠 만에 돌연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가족들의 불행으로 매사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으로 변한 아버지 밑에서 우울한 유년기를 보낸 뭉크도 평생 신경쇠약과 조울증, 공황장애에 시달려야 했다. 뭉크가 왜 <절규>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절규>는 뭉크의 아픈 기억과 내면 깊이 침잠된 공포를 그린 것이다. 그림의 배경은 오슬로의 구불구불한 피오르드 해안선이다. 물결처럼 요동치는 붉은색과 파란색의 강렬한 대비는 당시 극도로 불안한 화가의 정신 상태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해질 무렵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변했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극도의 피로를 느낀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기대섰다. 검붉은 피오르드 해안 위로 불의 혀가 뻗어 나왔다. 두려움에 떨며 뒤쳐진 나를 남겨두고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다. 그때 나는 거대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연의 절규를 들었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쇠경쇠약에 시달리던 뭉크가 공황발작을 일으켜 허상을 본 것이다. 아무튼 뭉크는 그러한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으로 담아냈다. 그림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리며 경악하는 화가의 모습은 파랗고 붉은 배경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다. 어머니의 침실에 드리워졌던 그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그림 속 배경에 겹쳐진다. 뭉크는 오랜 세월 자신을 괴롭혀왔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 그림을 통해 벗어 던지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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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규>, 캔버스에 유채, 1893, 91×73.5cm,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
<절규>라는 작품으로 근대 서양 미술사의 대표 화가로 부상한 뭉크는 유럽 예술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노르웨이 출신이다. 뭉크는 화가지망생인 스무 살 무렵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화가 프리츠 탈로(Frits Thaulow, 1847~1906)의 후원으로 3주간 파리 연수를 다녀오면서 창작에 대한 일대 전기를 마련한다. 화가의 경험과 기억이 작품의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뭉크가 겪었던 성장기의 아픔, 공포, 불행과 같은 어두운 감정들은 이후 뭉크의 화폭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죽은 나를 그린 자화상
죽은 자기 자신을 상상해서 그리는 것만큼 무모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뭉크는 두려움과 공포 등 주로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탓에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죽은 자기 존재를 상상하며 자화상을 그렸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895년에 그린 <저승에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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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승에서,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95, 81.5×65.5cm, 노르웨이 오슬로 뭉크 미술관
뭉크는 그림의 배경을 검은색과 주황색으로 표현했는데, 마치 불구덩이에 서있는 모습을 그린 것 같다. 그림 속 화가는 발가벗은 상태로 몸 전체가 벌겋게 그을렸다. 온몸이 금방이라도 불길에 휩쓸려 버릴 것 같은 극도의 공포와 긴장감으로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뭉크는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의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다.
<저승에서, 자화상>과 같은 해에 완성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화상>은 이미 죽은 자신의 영혼을 그린 것이다. 커다랗게 뜬 화가의 눈과 거친 붓 자국은 내면의 갈등과 집착을 전달한다. 화가는 빛을 아래에서 위로 향하게 하는 독특한 기법으로 인물의 표정을 더욱 강렬하고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림 속 화가의 모습은 죽은 자의 환영처럼 보인다. 이미 죽었지만 그대로 죽음을 받아 드릴 수 없는 영혼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일까? 특히 뿌옇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는 전체적으로 배경을 이루며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함과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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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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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뼈가 있는 자화상>, 석판화, 1895, 45.5×31.7cm, 소장처 불명
<팔뼈가 있는 자화상>은 석판화로 제작된 것이다. 화가의 두상만 표현된 이색적인 자화상이다. 바탕도 온통 암흑일 뿐이다. 그리고 그림 하단에 있는 팔뼈가 매우 인상적이다. 뭉크는 왜 팔뼈를 그려 넣은 것일까? 구도상 이 팔뼈는 화가 본인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바탕이 온통 검기 때문에 추론만 가능할 뿐이다. 뭉크는 자신의 존재를 몸은 이미 죽어서 뼈만 남아 있고 영혼만 살아있는 상태로 표현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썩지만 영혼은 금방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이승을 떠돌기도 한다는 속설을 담아낸 것이다.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 이 세상에 단 한 조각도 남게 되지 않았을 때 그 영혼까지 완전히 소멸된다고 뭉크는 생각했다. 바꿔 말하면,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란 그 영혼을 이 세상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 주술과도 같은 것이다.
모순의 강을 건너는 화가의 삶과 예술
평생을 괴롭혀온 뭉크의 신경쇠약과 공황장애는 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매사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말년으로 갈수록 그는 사람들을 피해 그림에만 전념했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20세기 초반 유럽 전역은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전쟁이 온 세상을 질식시키고 있을 무렵 두려움과 공포를 주제로 하는 뭉크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의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고, 1933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명예훈장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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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대와 시계 사이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42,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 미술관
살아생전에 뭉크가 겪었던 정신적 고통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머지않아 세상을 등질 것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실제로 뭉크의 내면은 온통 죽음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오직 죽음 밖에 없었다. 그러나 뭉크는 같은 시대에 활동한 다른 화가들에 비한다면 제법 장수한 화가로 꼽힌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그렸지만 그는 아주 긴 세월을 살았다. 사는 것 못지않게 죽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한풀 꺾일 무렵 여든을 넘긴 늙은 화가는 그제야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물론 바로 그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죽음의 공포를 캔버스에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