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 / 구다겸
허리까지 닿는 긴 생머리가 스르륵 식탁 앞에 앉는다. 머리카락 사이로 빼꼼한 눈이 식탁을 해찰한다. “밥이 너무 많잖아.” 한 숟갈뿐인 밥에서 반을 덜어내 동생 밥그릇에 올린다. 그걸 보고 태민이는 왜 그렇게 조금 먹냐며 한숨을 푹 쉰다. 아들은 산더미 밥을 와구와구 먹고 학교에 가고, 딸은 개미 눈곱만큼 먹고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간다. 나는 허물처럼 남은 그릇들을 치운다. 거의 정물화가 된 우리 집 아침 풍경이다.
소민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작년에 고등학교 진학을 해야 했지만 포기했다. 학교에 안 다닌다고 하면 큰 문제가 있는 줄 알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다. 6년째 가족 외의 사람과 말을 안 할 뿐이다. 대인관계가 힘드니 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것뿐. 그걸 빼면 소민이는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책 읽고, 그림 그리고, 애니메이션 보고 잘 지낸다. 조바심 내는 건 소민이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이다. 그중 내가 으뜸일 것이다.
작년 1월, 교과서와 고졸 검정고시 책 한 보따리를 아이 방에 넣어주었다. 대안학교도 보냈다. 낯선 사람들이 두려워 교실에 들어가지 못해 일대일 수업을 받았다. 그러자니 우리 집 형편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수업료를 내야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소민이는 선생님과도 말을 하지 않았다. 소민이가 내게 말하면 내가 선생님께 전달했다. 그렇게 소민이와 나는 매주 영어단어와 한자 쪽지 시험을 봤고, 국어 문법, 고전 문학, 현대 문학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내가 다시 고등학생이 되었다. 소민이는 태평인데 나만 머리에서 김이 났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건만, 검정고시 관련 책은 방바닥에서 헤엄을 쳤다. 내 기대는 익사하고 만 것일까. 책상 위를 점령한 건 소설책과 만화책. 궁금해서 들어가 보면 소민이는 십중팔구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아이는 사람으로 태어나 침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안학교에서 배운 논어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경하고, 언행을 삼가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사람들은 사랑하되 어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 이렇게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울 것이다.
사람이 되고 나서야 공부하라는 말인 듯했다. 사람이 되는 덕목을 보면 모두 ‘관계’에 대한 것이다. 철렁했다. 관계를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공부는 때가 아닐지도 몰랐다. 조금 느긋하게 지켜보자고 나를 다독였다. 당시 목돈 들어갈 일들이 줄줄이 생기며 내 얄팍한 지갑이 비명을 질러댔다. 대안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검정고시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왔다. 나는 참다못해 방바닥에 쌓인 책들을 책상 위로 올렸다. 혼자서 영 공부가 안되면 대입 종합학원에 다녀보자고 했더니, 알겠단다. 다행히 다른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 낮 시간에 소민이 혼자 공부할 수 있다고 했다. 급한 마음에 부리나케 등록했다. 오랜만에 소민이와 떨어진 아주 여유로운 한때를 보냈다.
소민이는 그날 하루 학원에 갔다. 말로는 계속 가겠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달을 채우고 환불도 받지 못했다. 푸르른 초여름에 나 홀로 마른 풀이었다. 건들면 바스러지는.
검정고시 날이 일주일 남았을까? 소민이가 드디어 책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내심 아주 간당간당 통과하길 바랐다. 그런 뒤 소민이에게 할 말들을 생각했다. “침대랑 한 몸처럼 지내더니 잘 됐다.” “것 봐. 한 만큼 돌아오는 거야. 몇 개만 더 틀렸음 내년에 시험 또 볼 뻔했잖아.” 등등. 그런데 결과는, 나의 완패였다. 영어 수학 만 점에 나머지 과목들은 한 개씩만 틀렸다. 심지어 국어는 OMR카드에 답을 잘못 기입했는데 바꿔 달라고 말을 못 해서 틀렸단다. 소민이는 말하지 않았을 뿐 그 정도만 공부하면 되겠다는 계산을 이미 끝내 놓았던 것이다.
한고비가 넘어갔다. 그러고 나자 더 큰 고비가 우뚝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한 생명체를 온전히 책임진다는 것의 무게는, 먹이고 재우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아이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잡는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무게였다.
일단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회 경험을 하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싶어 집 근처 가장 가까운 대학에 수시 지원했다. 설마 했는데 1차에 덜컥 붙어버렸다. 난감했다. 고등학교도 다녀보지 않은 열여덟 살짜리를 대학에 보내도 될까, 그래도 집 앞이니 내가 수시로 따라다니며 도우면 되지 않을까, 소통이 안 돼서 교육 불능으로 제적당하면 어쩌지, 그래도 아이가 배우고 싶다는 학과를 선택했으니 만족해야 할까, 온갖 걱정이 어퍼컷을 날려댔다.
그런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민이는 대학 들어가기 전 관련 공부를 하겠다며 컴퓨터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다. 컴퓨터 학원은 한 달씩 수강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정별로 등록해야 한단다. 6개월 치 수강료가 수백만 원이었다. 이 역시 집에서 온라인으로 혼자 들을 수 있다기에 등록해주었다. 사양 낮은 집 컴퓨터로는 공부가 힘들다 해 컴퓨터도 바꿔주었다.
‘애가 학교만 다녔다면… 그랬다면… 공짜로 공부하고 공짜로 옷 입고 공짜로 밥 먹었을 텐데.’
내가 빨래처럼 쥐어짜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해줘야지. 엄마니까.
몇 주가 지났다. 소민이 曰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탈수기 같은 녀석. 마지막 영혼까지 탈탈 털려버렸다. 학원에 환불 얘기를 하니, 다른 강좌로 바꿔 들으라며 설득하는 통에 환불도 받지 못하고 과목을 변경했다. 관성이 생겼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이 되었다. 그마저도 안 들어 버리는 ‘웬수 덩어리’가 가슴에 턱 얹혔다. 소민이를 일 년 동안 잘 도와주겠다던 내 열정은 꺾이고 꺾여 접이 매트가 되었다. 그래도조금의 희망이라도 보이면 나는 1초 만에 촤르르 매트를 펼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민이가 마음껏 구를 수 있게.
더위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소민이가 다니던 애니메이션 학원 원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민이 요즘 어쩌고 있냐며. 그간의 사정을 말했더니 펄쩍 뛰며, 다시 학원을 보내라고 했다. 소민이 더 좋은 대학 가야 한다고, 갈 수 있다고. 소민이도 합격한 대학에 큰 확신이 있는 건 아닌 터라 등록하지 않고, 애니메이션 학원을 다녀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은 귀찮아서, 어느 날은 기분이 안 좋아서, 어느 날은 오전 내내 놀다 보니 오후에도 계속 놀고 싶어서, 소민이는 갖가지 이유로 반 이상은 빠졌다. 쥐어뜯은 내 머리털도 반 이상은 빠졌을 거다.
관성은 영원할까? 아니다. 관성은 이유가 있을 때 방향을 바꾼다. 일주일 세 번 가는 것도 힘들어하던 학원을, 소민이가 올 1월부터는 매일 8시간씩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다. 1월 한 달 동안은 언제 또 안 간다고 할까 가슴에 시한폭탄을 안고 지냈다. 그 불안함이 2월 들어서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4월,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났다.
“엄마, 나 이번 주부터 주말에도 나갈래.”
‘이게 대체 무슨 일, 무슨 일, 무슨 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쟤가 어디 아픈가, 참, 쟤는 아픈 애지. 그나저나 왜 저래, 무섭게. 기적인가?
소민이 마음이 바뀐 이유가 궁금했다.
“힘들지 않겠어? 왜 그러고 싶어졌는데?”
“좋은 대학 갈 거야.”
“갑자기?”
“어, 김태민이 요즘 나를 너무 하찮게 생각하는 것 같아. 좋은 대학 가서 기를 팍 죽여줄 거야.”
고작 그게 다라고? 이유가 너무 하찮아서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하찮도록 작은 이유들이 모여 삶을 밀고 당기는 것 아닐까. 소설 『숨그네』속 주인공은 소민이 또래의 남자아이다. 그는 독일계 루마니아인으로 러시아 수용소에 끌려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네를 탄다. 그가 수용소에서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행복을 얻기 위해 아주 작은 목표를 만들어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지를 이탈하면 매질당할 것을 알면서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기기 위해 울타리 말뚝에 쌓인 눈을 몰래 먹고자 한다. 그리고 감시를 피해 그 일을 해내고 만다.
“하얀 모자 같은 그 눈을 한 줌 쥐고 삼키면 눈이 혈맥과 입을 지나 목에서 심장까지 시원하게 훑고 내려가는 잠깐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에게는 하루하루 순간순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한낱 울타리 말뚝에 쌓인 한 줌 눈일지라도.
컵에 물을 가득 부으면 볼록하게 솟아오른다. 표면장력을 넘기는 한 방울이 더해질 때 흘러넘친다. 그동안 소민이 안에는 ‘작은 이유’들이 담기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믿어주는 선생님이 학원에 가는 이유가 되고, 인사 건네는 친구들이 더 잘하고 싶은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볼록하게 솟아오른 상태에서 동생이 이유 한 방울을 떨구지 않았을까? 그 한 방울에 주륵! 흘러넘친 것 아닐까.
4월 10일 국회의원 선거 날, 모두 쉬는 공휴일에 소민이는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12시간 꼬박 그림을 그렸다. 놀고 싶다고 몸을 틀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그 시간을 꿈과 노력으로 채웠다.소민이 안에 옹크렸던한 방울들이 세상을 향해 흘러넘치고 있다. 언젠가 소민이의 그림이세상 사람들까지흠뻑 적시지 않을까.
때때로 아이가 목마를 때, 내가 한 방울의 물을 보태줄 수 있기를.
첫댓글 순식간에 읽었습니다.
한 방울로 흘러넘친 소민이의 세계가 세상으로 스며들 날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