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2 - 여자들의 은신처로 벚꽃이 예쁜 소담한 절 도케이지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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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아침 일찍 가마쿠라역 근처 일본인 민박집 빌라 사크라에 체크아웃을
하고는 7~ 8분을 걸어 가마쿠라 鎌倉(겸창) 역에 도착해 코인로카 에
배낭을 넣고는 JR 패스를 사용해 북쪽으로 한정거장 가마쿠라 북역 에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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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칙 아침 8시가 안된지라 엔카쿠지 절 이 문을 열지 않았기로 10분을 걸어
철길 반대편에 자리한 조치지 淨知寺(쟁지사) 절을 찾아서는
대나무 막대가 걸린 너머로 절 내부를 훔쳐보고는 나와 절 주변을 산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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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지 절 뒷편은 등산로 인데 조금 올라가다가 되돌아 내려와서는.....
민가 몇채를 지나 "도케이지 東慶寺(동경사)" 절을 찾아 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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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벚꽃이 늦은지라 와카야마와 이누야마 그리고 하마마쓰며 시즈오카에서
벚꽃을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여긴 양지바른 곳 인지.....
벚꽃등 여러 종류 "꽃" 이 피었기로 마눌도 얼굴에 웃음이 돌고 마음이 들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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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는 사시사철 꽃이 피니 2월 초순 복수초 를 시작으로 홍매와 백매 가 피고 3월 피안매
하순에 백목련, 4월 초순 사쿠라 가 피고 6월에는 화창포, 자양화, 반화생에 7월 길갱,
그리고 9월에 석안, 10월에 추명국등 국화 가 만발하고 11월 하순에 단풍 이 곱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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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절은 세월의 연륜인양 고풍스러운 분위기 를 자아내는데 아담하면서도 소란스럽지
않은 분위기에다가 뜰이 숲속까지 이어지고 여러 종류의 꽃이 예쁘다 보니.....
전문적으로 사진찍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분주한데도 소음이라고는 없이 정숙한 분위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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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케이지 東慶寺(동경사) 는 1285년 호조 도키무네의 처 가 남편을 기리며 세운 절이라고
하는데, 이후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에 남편 둘 을 모두 전쟁에서 잃은 도쿠가와의
손녀 "센히메 千姬(천희)" 가 세속과 인연을 끊은 뒤에 은거해 살았던 절 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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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두차례에 걸친 남편을 잃은 애처로운 사연 을 지닌 고귀한 신분의 여인들 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인지 몰라도....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남편의 학대 를
피해 이 절에 도망쳐서 3년 이 지나면 정식으로 "이혼을 요구" 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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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에 일본은 소위 "미쿠다리한 三行半(삼행반)" 이라고 해서 남편이 3줄반 짜리
이혼서 를 주면서 아내를 내보내는데,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아내가 먼저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었으니 심지어 아내는 인격체 라기 보다는 남편의 재산 에 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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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자는 먼저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보니... 남편에게 실망한 여자는
이 절로 도망쳐 들어오면..... 당시에 절은 치외법권 지역 이므로 남편이
아내를 찾아 절로 들어 올수 없으니 3년이 지나면 자동 이혼 이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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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도망쳐 들어온 여자들은 비구니가 되기도 하고 혹은 반비구니 상태로 그 기간
"3년" 을 머물렀다고 하는데.... 모든 일에는 명암 이 있으니 부정을 저지른
간큰 유부녀 가 새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악용하는 사례 도 더러 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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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히메 千姬(천희) 는 에도(도쿄) 막부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장녀 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로 1597년 야마시로국(山城国) 후시미성(伏見城) 에서
태어나 성장하는데, 1600년 동서 20만 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가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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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씨의 동군이 승리해 에도 막부가 수립되자 센히메는 정략결혼 을 하게
되는 것이니... 불과 7세 어린 나이로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아들 인
도요토미 히데요리 에게 시집을 가서는 오사카성 (大坂城) 에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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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남편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 는 센히메의 생모인 에요의 친 언니 인
요도도노 (요도기미, 아사이 나가마사의 세 딸) 로 히데요리와 센히메 는
서로 이종사촌 자매 간이기도 한데 부부 관계는 원만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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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오고쇼(大御所)가 되어 에도에서 슨푸(시즈오카)로 물러나고
센히메의 아버지 도쿠가와 히데타다 가 2대 쇼군 으로 취임하는데 결국에는
에도 도쿠가와 막부가 1614년 도요토미 가문과 결별하면서 오사카 전투 가 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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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겨울과 여름 전투를 거치면서 패배한 도요토미 가문은 당주 도요토미 히데요리
와 히데요리의 생모 요도도노 가 함께 자살 하면서 멸망하였으나....
센히메 는 할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불타는 성에서 극적으로 구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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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측실 사이에서 출생한 나아히메 (奈阿姫) 가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자 센히메는 자신의 양녀로 삼아 구했는데... 나아히메는 덴슈니 (天秀尼) 라는
법명을 받고 불문에 귀의후 36세로 자녀 없이 요절 하여... 도요토미 가문은 단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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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19세인 센히메 는 도쿠가와의 부하 무장이었던 혼다 다다카쓰의 손자 인
쿠와나번의 번주 혼다 다다토키 (本多忠刻 와 재혼하였고 화장비 명목으로
에도 막부 로 부터 10만석 (쌀 1석은 한 사람이 1년 먹는 양식) 의 영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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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도요토미가의 원한 을 갚으려고 했던지 쓰와노번의 번주인 사카자키 나오모리 가
쿠와나번으로 향하는 센히메의 혼례 행렬을 덮쳐 센히메의 가마를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당하여 자살 하고 사카자키 가문은 멸문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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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년 혼다 가문이 하리마국(播磨國) 히메지(姫路) 로 영지가 변경되면서 히메지 신덴번
초대 번주가 된 남편 혼다 다다토키 와 함께 8월 28일 히메지 성(姫路城) 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이듬해에는 장녀 가쓰히메(勝姫) 에 이어 장남 고치요(幸千代) 가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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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다다토키와 센히메 부부는 금슬도 좋았지만 1621년 아들 고치요가 세살로 사망하고
이후 남편 혼다 다다토키 와 어머니 에요가 연이어 사망 하자 상심한 센히메 는
딸 가쓰히메와 함께 혼다 가문을 나와 친정인 에도성(江戸城 도쿄) 으로 되돌아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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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입문하여 덴주인 이라는 법명을 받은 센히메 는 딸 가쓰히메 와
함께 에도의 다케바시 저택에서 거처하였다는데... 이후 여기
도케이지 절로 들어와서는 세속과 인연을 끊은뒤 조용히 살았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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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센히메의 딸인 가쓰히메 는 1628년 외조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가 되어 공주의
신분 이 된후 이케다 미쓰마사와 혼인 하였다는데, 미쓰마사는 하리마국 히메지 번의
제3대 번주이자 이나바 돗토리 번의 번주이고 비젠 오카야마번의 초대 번주 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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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신분이 된 도쿠가와 가쓰히메 와 결혼하기 12년 전인 1616년 이케다 미쓰마사 는
아버지가 사망하니 하리마 히메지번 을 물려받았으나 어린지라 이나바 돗토리번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성장한후 오카야마로 옮겨서 31만석의 영지 를 지닌 다이묘가 되는데
어릴때부터 학문을 즐겼으며 제도를 개혁하고 문무를 장려하는 등 번정개혁 에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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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 가쓰히메와 결혼 후 1632년 숙부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다다카쓰가 사망 하자....
3세였던 사촌 동생 미쓰나카(光仲)가 오카야마 번을 상속해야 했으나 나이가 어리니
막부는 미쓰마사 를 오카야마번으로 전봉 하니 오카야마번의 실질적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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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마사 는 천성적으로 명석해 스스로 학문을 닦았으니 철학자인 나카에 도주와 구마자와
반잔을 스승으로 삼고 유학을 공부 했으며 인정(仁政) 을 정치이념으로, 검소함 을
좌우명으로 삼았으니‘비젠풍(備前風)’이라 명명하여 널리 퍼뜨리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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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년에 오카야마 대홍수로 번정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신들의 봉록을 깍고 사무라이를
통제해 백성들을 보살폈으니 인정이라는 유교이념을 모범삼아 관리들에게 농민을 잘
보살피도록 하여 안정시키고 조세 수입을 증가시키며 농민의 자립을 촉진시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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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년 학문수련 을 위해 설립한 하나바타케 교죠(花畠教場)는 일본 최초로 설립된 사무라이
교육 시설로 번교(藩校) 로 발전시켰고, 1668년 에는 서민 자제들을 위한 데나라이쇼
(手習所) 라는 교육기관을 수백군데 만들었으니 훗날 오카야마 번의 향교(鄕校) 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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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쓰마사 는 유학자 로서 지주인 절을 도태시키고 신사를 정리 하는 등 대담한
종교정책을 펼쳤으니... 이러한 통치 행위에 대해 훗날 명군(名君) 으로
추앙했는데 그는 에도 시대 초기의 명군 세명 중에 한 사람 으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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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좋아한 미쓰마사 는 가신들과 함께 『효경(孝經)』을 읽다가‘쟁신(諍臣)’ 이라는
장을 놓고“군신 간에는 마음가짐이 같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간언하는게 너희의 할일이며, 너희도 타인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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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 반잔의 영향을 받아 양명학 에 관심을 갖고 반잔을 번정에도 참가시켰는데 양명학을
숭상하는 것 때문에 막부로 부터 모반 혐의 를 받았으니... 미쓰마사는 위장을 하여
막부의 혐의를 벗어났으며 반잔 은 몇 차례에 걸쳐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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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외에는 이단으로 본 조선 처럼 일본도 임진왜란때 전라도 영광에서 잡아온 포로 조선
유학자 강항에게서 퇴계학(주자학) 을 배웠으니 성리학의 일파 양명학을 탄압 했는데
공주 가쓰히메를 정실로 맞고도 측실 로 미즈노씨(水野氏), 오오무라씨(大村氏) 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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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주인 (天樹院) 이라고 불린 센히메 모녀 의 이런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삶 은 역사와
맛물려 좋은 소재이다 보니...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각종
소설과 영화 및 "NHK 대하드라마 공주들의 전국" 등 드라마의 소재 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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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림도 좋고 설명도 너무 좋습니다.
하아.... 무슨!
그냥 두서없이 늘어놓른....
자세한 소개 감사합니다
여기 절에는 꽃이 어찌 많은지....
꽃동산에 온 듯한 느낌입니다!
항상 관광지 정보 습득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서툰 글인데도 좋게 보아 주시니.....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저로서야 기쁜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