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임진성 / 차재문
봄은 기별이 무리 지어 따라오는 계절이다. 틈새마다 만발한 감정 꽃이 부풀어 오른다. 가만히 눈을 감고만 있어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굳이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다. 천천히 고개를 들면 기지개를 켜는 만물이 다 보이고 오감이 열린다. 계절의 여왕 앞에 고개를 숙여도 행복하다. 기쁨과 맞닿아 있고 흙살을 비집고 올라오는 희망이 있어 더욱 그렇다.
봄이라. 보이는 삶들이 잎맥처럼 핏줄이 선명하다. 엄동에는 숨죽인 나에게 안부를 묻고 토닥인다. 봄에는 가장 높은 정신적 푸르름을 꿈꾼다.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는 계절이다. 타인에게 쉽게 말하지 못하는 내밀한 자존감을 지키고 감정을 다스리면, 숱한 생각이 담긴 비밀창고는 쉽게 열리지 않는다.
봄꽃이 피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만큼 간절하다. 찬란하면서 허전하기도 하고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그러니까 겨울을 걸어 나온 희망을 맡기는 거지 무얼 맡기겠나. 봄이니까. 내 얼굴이니까. 잠시만 방심하면 무너질 것 같으니까. 그러면서 힘들게 건져 올린 봄이니 초록 생명이 가득한 봄의 어느 날에 맡기면 되는 것 아닐까. 다시 남파랑 길을 걷는 고행을 선택하면 그뿐. 이 길을.
비가 내리고 싹이 트는 우수가 내일모레다. 남해군 평산포 북쪽의 낮은 구릉에 놓인 산성에는 겨울을 밀어내지 못한 낙엽이 쌓여 있다. 낙엽은 나무의 흔적이다. ‘존재’라는 이름을 붙이면 나무가 더욱 존엄해 보인다. 낙엽이 되기까지 순환하는 계절과 자연현상을 이겨낸 서사가 그다. 낙엽은 그냥 무심코 바라보기만 하면 나처럼 지상에 모여 살다가 어디론가 흩어지는 나그네일 뿐이다. 어떤 때는 나보다 낙엽이 더 쓸쓸해 보일 때가 있다. 이때는 풍경을 앞서갈 필요가 없다.
햇볕이 들어오는 성벽의 통로마다 듬성듬성 군락을 이룬 ‘봄까치꽃’이 고개를 들었다. 언 땅을 다 털어내지 못한 흙살이 봄볕을 받아 한꺼번에 파랑으로 무리 지어 피고 번진다. 땅바닥에 바짝 붙어 피는 꽃이라 발에 밟힐 것 같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땅에 엎드린 꽃. 잘날 것도 없는 봄까치꽃 앞에 절로 고개를 숙인다.
식물은 ‘본능’이 이끄는 데로 살아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순서가 인간의 시간 개념과 달리 공간개념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흙과 햇빛과 바람에서 양분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것이지 인간처럼 학습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느 계절에 임의로 태어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식물은 제철에 태어나 꽃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 식물의 ‘본능’은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간이 봄의 전령사로 까치를 끌어들이고 지혜의 수레바퀴를 굴려 ‘봄까치꽃’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선물했다. 성벽의 통로마다 자작하게 올라와 ‘나 여기 있다고’ 신호를 보내는 봄까치꽃이 따사로운 졸음에 겨운 눈을 껌벅이고 있다.
인적이 끊긴 산성에 봄이 오고 있다. 엄동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다시 풀이 자라고 그가 자란 흙에다 또 씨앗을 묻고 새 생명을 기다리고 있다. 산성은 여기에 있는데 이곳에 살았던 백성의 잔상은 흔적조차 잡히지 않는다. 상상을 끌어모아도 금세 모였다가 스치고 흩어진다. 산성이 퍼질러 놓은 동시대 역사의 현장이 아득하다 못해 적막하다. 오늘 들른 이곳 산성은 무엇 하나 남기고 증명할 흔적이 거의 없다. 인간은 기억이 가물거릴 때 어지럼증을 느낀다. 허물어진 곳을 보완한 성벽의 석축과의 대화도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다. 다만 수필 글쓰기로써 산성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토닥거릴 뿐이다.
임진성은 통일신라 시대 전후 남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비하기 위하여 쌓은 석축 산성이다. 향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고 ‘민보성’이라고 부른다. 발굴 조사에서 성내 건물지와 집수지에서 토기와 청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산성이 태평할 때는 사철 꽃이 피고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봄의 상록수가 번졌을 것이다. 성 밖의 이웃들과 왕래하면서 향약이나 두레로 태평을 기원하고 품앗이로 우의를 다졌다. 임진성은 단단하고 견고하고 높았지만, 왜구의 침범이나 전쟁이 나면 바람 앞의 등불로 흔들렸다. 성안에 남아 성문을 지키던 백성들은 항전하다 도륙되었다. 군사는 부족했고 무기는 빈약했고 조정은 쉽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래 이래 일본의 침략은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현재 진형형인 역사전쟁이다.
동문 터를 지나 몇 걸음 더 걷다 보면 빗물을 모은 집수지를 만난다. 장대석으로 쌓은 틈새에 잔돌을 끼워 물의 누수를 방지했다. 곡식을 저장한 창고는 바라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 포만감이 있다. 집수지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여윈 마음의 불안이 동반한다. 가뭄에 장사 없다고, 집수지 바닥을 상상하는 건 수백 년이 지난 길손에게조차 괴로운 일이다.
가뭄이라는 터널이 지옥이라면 단비는 천국에 이르는 통로이다. 나처럼 길을 걷는데 중독된 사람은 어렴풋이 느끼는 게 있다. 모든 것을 가지려는 인간은 욕망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다. 있는 것은 있는 데로, 없는 것은 없는 데로 만족하면 축복이다. 길을 걸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주워 담다 보면 소박한 영감을 얻는다. 세상 이치는 둥근 곡선처럼 유연하게 살면 되지만 순례길은 정면이 중심이고 구원이다.
임진성 외곽을 따라 걸었다. 키 큰 소나무 몇 그루가 반긴다. 길손이 기대도 될 만큼 넉넉한 품새다. 성城이라는 든든한 벽은 방치되면 무너진다. 나에게도 차마 바닥을 다 드러내지 못한 마음성(心城)이 굳게 닫혀 있다. 이는 나를 감추고 비밀로 채우는 벽이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끄트머리 성벽이다. 걸어야 한다. 산성처럼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길을 나서야 한다.
성안의 창창한 노송은 오랫동안 햇빛을 받았지만 언젠가는 삭정이 된다. 오랫동안 인기척이 끊긴 임진성도 역사의 삭정이 되었다. 산성에 너부러진 돌멩이들도 전쟁이 발발하면 무기가 되고 백성의 방패막이가 된다. 오늘 나는 우두커니 성안을 걸었고 긴박함을 잃은 성은 스스로 삭정이로 남아 길손을 반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