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조선은 임오군란 후 청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고, 다시 집권한 민씨 세력은 개화정책에 소극적이어서 근대적인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근대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개화파 세력에게는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이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파 인사들이 우정국 개국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갑신정변이라 한다(1884).
이들은 청과의 의례적 사대 관계를 폐지하고, 입헌 군주제적 정치 구조를 지향하면서, 인민 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 지조법을 실시하고,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하였으며,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즉, 개화당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를 개혁하여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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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전개 과정․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오후 7시경, 우정국 신청사에서 축하연이 베풀어졌다. 이 자리에는 주인격인 홍영식과 손님격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윤치호,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 등 조선측 인사들과, 외국인으로 미국 공사와 서기관, 영국 총영사, 청국 영사와 서기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및 통역관,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 모두 18명이 참석하였다.
연회가 거의 끝나 가는 오후 10시경, 별안간 밖에서 불이 났다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지자, 민영익이 재빨리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질 듯 도로 들어와 쓰러졌다. 몸에 칼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는 재빨리 국왕이 있는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궁궐 문은 미리 내통한 문지기에 의해 열렸으며, 김옥균 등은 취침 중이던 국왕을 만났다. 김옥균은 국왕과 왕비 및 왕세자 일행을 이웃에 있는 경우궁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 때, 일본군이 궁궐 주변을 지키면서 청군의 습격에 대비하였으며, 궐내는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 생도와 군인들이 수비하였다.
김옥균 등은 민씨 정권의 고관들을 처단하고, 개화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하여 갑신정변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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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종은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대신들을 보면서 개화당에 대한 믿음을 버렸다. 왕비의 환궁 요구에 따라 고종은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청군이 공격해오자 급진 개화파의 군대는 수와 무기의 열세로 패퇴하였고, 일본군은 일본 정부의 훈령에 따라 철수해버렸다.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홍영식은 끝까지 왕을 호위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개화사상이 국민 속에 퍼지지 못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개혁이 일본의 힘을 빌려 정변의 방식으로 추진됨으로써 국민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200명)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1500명)이 개입한 것도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개화당 정권이 3일 만에 무너지자, 고종은 새 내각을 통해 각종 개혁 조치를 무효화하고, 예조 참판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정변개입에 항의하고 김옥균 등 망명자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도리어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이 희생된 데 대하여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하였다. 이에 정부는 한성조약을 맺고, 사죄와 더불어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에 비해 정치적으로 불리해진 일본은 청과 담판하여 텐진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청․일 양국 군대를 철수하고 장차 군대를 파병할 경우에는 서로 알릴 것을 약속하였다. 갑신정변 이후에도 조선에 대한 청의 내정 간섭은 여전히 심하였다. 청․일 두 나라는 서로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면서 경쟁하였고, 10년 후에는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1885~1887). 이렇듯 열강의 조선 침략이 격화되자,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인 부들러나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 등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논의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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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때의 14개조 정령의 일부
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에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해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6. 각 도의 환자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갑신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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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재밌네요
도움 감사합니다.
감사함돠
감사합니다 많이배워가요ㅎㅎ
감사합니다.
갑신정변의 상황이 선하게 그려지네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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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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