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박물관 순례 2, 백제, 신라 그리고 비화가야...... 4
<책을 펴내며>
백제와 신라, 그리고 비화가야를 답사하며
이 글을 통해 나는 백제의 역사 서술을 6세기 성왕과 위덕왕 때 이룩한 문화적 전성기를 기억하는 방향으로 크게 전환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낙화암 삼천궁녀’라는 허황된 전설로 왜곡된 백제 멸망의 이미지를 바로잡고자,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갈 때 백성들이 왕이 떠나는 것을 만류하며 머물기를 바랐다는 백마강의 유왕산을 답사했다. 여기서는 이 고장에 전해지는 백제의 노래 <산유화가>를 소개하고 백제의 마지막 역사를 되새겼다. 아울러 아름다운 백마강변의 유서 깊은 유적인 부산서원과 대재각을 답사하여 백제 이후의 부여를 소개했다.
신라의 역사는 고신라와 통일신라로 나뉘는데, 고신라시대의 상징적인 유적은 경주 시내 대릉원 일원에 분포한 신비롭고 거대한 신라고분이다. 일련번호 155호에 달하는 이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 발굴 과정, 그리고 여기서 출토된 6개의 금관을 비롯한 부장품들의 예술성과 역사성을 종합적으로 조명했다. 이 신라 고분 발굴기는 그 자체가 마립간 시기(약 350~600년) 고 신라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가야 유적은 그동안 <답사기>에서 단 한 곳도 다룬 적이 없었다. 유적들이 계속 발굴 중이었고 학술적으로도 새롭게 조명되면서 기다려온 것인데, 올해(2023) 일곱 지역의 가야 고분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 이제 심기일전으로 답사기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가야 유적 중에는 대개 김해의 금관가야와 고령의 대가야가 집중 조명되고 있지만 가야의 범위가 결코 좁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서는 가야 답사기의 프롤로그 격으로 비화가야 창녕 답사기를 실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우아한 자태로 우리를 맞이한다. 책에서 사진으로 볼 때는 왜소한 인상을 주지만 실물은 키가 훤칠하고 5층의 체감율이 단아한 비례감을 자아내어 백제 미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성의 존재를 증언해주는 가장 확실한 유물이자 백제의 아름다움을 실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다시 말해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있기에 부여가 고도로서 존재감을 갖고 백제의 미학이 살아나는 것이다.
“한성백제 5백년(493년)”
“웅진백제 60년(63년)”
“사비백제 120년(122년)”
서울 석촌동 돌무지무덤, 근초고왕릉
공주 송산리 벽돌무덤, 무령왕릉
부여 능산리 돌방무덤, 성왕릉, 위덕왕릉
학부모들은 돌무지무덤을 적석분, 벽돌무덤을 전축분, 석실무덤을 석실분으로 배웠겠지만 나는 요즘 학생들이 학교에서 접할 용어로 강의했다.
가야는 1세기 전후부터 6세기 중엽까지 우리나라 고대국가 형성기에 낙동강 유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갖고 있던 미완의 왕국이다. 가야는 문헌에 따라 가야, 가라, 가락, 임나 등 여러 명칭으로 나오는데 변한의 12개 소국 중 김해의 가락국이 맹주로 등장하면서 느슨한 연맹체제로 개편되기 시작하여 300년 무렵에는 김해 금관가야, 함안 아라가야, 고령 대가야, 고성 소가야, 상주 고령가야, 성주 성산가야 등 6가야로 퍼져 있었다. 우리가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시기는 사실상 삼국에 가야까지 더한 사국시대였다.
그러나 가야는 끝내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신라에 병합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가야는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없다.
2023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가야 고분군 7곳이 세계유산으로 등제되었다.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경남 합천 옥전 고분군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전북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비화가야의 ‘비화’는 ‘빛들’ 또는 ‘빛이 좋은 들’이라는 뜻으로 비사벌이라고도 부른다. 비스듬한 기울기를 갖고 있는 창녕 비사벌은 과연 빛이 좋은 들판이다.
교동 고분군과 송현동 고분군은 각기 따로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었는데, 2011년 통합되어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으로 재지정되었다.
이들 고분은 5~6세기에 축조된 비화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