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시대 (1616~1911) | ||
개관 | ||
1. 시대상 개관 : ●淸의 수도변천 : 흥경(1616) → 요양성(1621) → 심양(1625) → 북경(1644) | ||
① 여진족의 한 부족인 만주족은 누르하치의 지도아래 1616년 후금을 세웠다.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1644년중국을 통일 했다. 청은 그들의 고유한 전통과 제도 위에 명의 제도와 체제를 계승하는 유연성을 보였으며, 고위 관료의 절반 이상을 만주족이 차지하고 8기제도(八旗制度)라는 독특한 군사 및 행정조직을 시행해 지배를 강화했다. 1680년대 初부터 1770년대 末까지 청은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전례없는 인구의 증가와 영토의 확장, 도시화 상업화 등이일어났다. | ||
강희제(康熙帝 : 1661~1722年) ●政治 :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은 강희제는 7세 즉위하여 61년간 청을 통치하였다. 그는 러시아와 조약을맺어 만주의 북쪽 국경을 확정하고, 외몽골・티베트・네팔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해외무역을 장려하고 서양 선교사 활동을 받아들였다. ●文化 : 강희제는 학문이 깊고 문교를 중시해, [강희자전(康熙字典)] [古今圖書集成] 등 수 천권의 도서 편찬을 후원했다. ●造景 : 香山의 정의원(靜宜園), 玉泉山의 정명원(靜明園), 萬壽山의 청의원(淸漪園)과 장춘원(長春園), 원명원(圓明園)을 합해 3산5원이라 부른다. 여기에 열하행궁은 모두 강희제의 계획으로 시작되어 건륭제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강희제는 자금성 안에 있던 어화원(御花园)과 건복궁(建福宮) 화원과 자녕궁(慈寧宮) 화원을 새로 조성했으며, 자금성 서쪽의 북해, 중해, 남해를 보수해 황가원림을 발전시켰다. 향산에 행궁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청화원 옛터에 장춘원(長春園)을 조성하고 장춘원 북쪽에 원명원(圓明園)을 조성하였다. | ||
옹정제(雍正帝 : 1722~1735年) ●政治 : 엄격한 원칙으로 외척과 관료들을 철저하게 견제하고 감시하며 군주제를 구축하고 붕당과 관료주의 폐단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개혁정책을 펴나갔다. 옹정제는 서양 학문의 반입을 금지시켰다. ●造景 : 옹정제는 원명원을 확충 개조하고 '원명원 28경'을 명명하는 등 장춘원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었다. | ||
건륭제(乾隆帝 : 1735~1796年) ●文化 : 황제이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자이기도 했으며, 신강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소유했다. [사고전서(四庫全書 : 백과사전)]를 편찬 ●造景 : 건륭제는 재위 60년 동안 많은 원림을 조성해 황가원림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6차례의 강남 순행을 통해 체험한원림을 재현하기 위해 대규모 이궁원림을 조성했다. ‘원명원 28경'을 40경으로 확장했으며, 원명원 동쪽에 장춘원을 건설하고 향산의 정의원을 고쳐 확대해 '정의원 28경'을 두었다. 또한 어머니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해 청의원(清漪园)을 조성했고, 장춘원을 크게 고치고 그 서쪽에 서화원(西花園)을 두어 황세자가 책을 읽고 거주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옥천산 정명원을 확장해 옥천산 전체에 '정명원 16경'을 두었다. | ||
② 가경제 이후 淸은 쇠락하기 시작해 새로운 원림의 건설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8대 도광제 때에는 원림들이 훼손되기도했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에는 영불연합군에 의해 5원의 대부분은 소실되고 파괴되었다. 다만 청의원(淸漪園)의 일부분은 광서제가 어머니 서태후의 천수를 축원하는 의미에서 1888년에 복원하고 이화원(頤和園)으로 개명했다. | ||
③ 19세기 아편의 수입과 은의 유출을 청의 경제를 피폐하게 하였다. 1,2차 아편전쟁으로 홍콩과 구룡이 영국에 할양되었으며, 심한 홍수와 기근으로 태평천국운동과 염군(捻軍)의 난이 일어났고, 1884년 청불전쟁, 1894년 청일전쟁의 폐배로청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반식민지와 같은 형태로 전락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선통제(宣统帝: 푸이)가 퇴위하고 권력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임시정부에 이양되었다. | ||
2. 문화와 예술 | ||
① 淸의 문화는 元, 明에 이어 희곡과 소설이 발달했다. 소설로는 [부생육기(浮生六記)]와 조설근(曹雪芹)의 [홍루몽(紅樓夢)]이 있다. 홍루몽의 주인공의 활동배경이 되는 대관원(大觀園) 의장은 당시의 원림건축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후의 중국 원림은 대관원을 표준으로 삼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에서는 회화와 공예가 특히 발달했다. ② 淸의 건축은 明의 건축문화를 계승하면서 상업과 수공업을 비롯한 산업의 발전, 인구의 급속한 증가, 도시의 발달은 거축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영토의 확장으로 인한 다양한 민족들의 활동은 건축의 내용을 풍부하게했다. 특히 라마교 건축이성행했는데, 열하의 승덕 교외에 건설한 라마교 사찰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18세기 후반에는 티베트 건축양식에 영향을 받기도 해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 궁은 티베트 건축의 백미로 평가된다. |
3산 5원 | 구분 (재위년) | 강희제 (1661~1722) | 옹정제 (1722~1735) | 건륭제 (1735~1796) | 비고 | |
향산 | 정의원 | 1677年 행궁 조성 | 1745年 확장 | |||
옥천산 | 정명원 | 1680年 징심원 조성 | 1750~1759年 확장 | |||
만수산 | 청의원(淸漪園) | 1702年 행궁 조성 | 1749~1764年 청의원 조성 | 1888頤和園개명 | ||
창춘원 | 1684年 조성 | 1760년대 개수 | ||||
원명원 | 원명원 | 1709年 조성 | 1725年 확충 | 1737年 확장 | ||
장춘원 | 1745 건설. 1760 서양루완공 | |||||
기춘원 | (= 만춘원) | 1769年 건설 | ||||
피서산장 | 1703年 공사시작 | 1790年 확장 |
3. 淸시대 원림의 특징 | ||
● 청은 왕조가 개국할 때 북경의 명의 도성과 궁실을 계승함으로써 황궁의 건축에 집중할 필요가 없었다. 淸初의 황제들은성실하고 근면한 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원림문화에 대한 관심과 소양이 컸으며, 안정된 정치 경제를 바탕으로 황가원림 건설에 주력해 황가원림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 ||
(1) 이궁과 황가원림의 발달 | ||
① 청의 최전성기인 건륭시대는 원림건설에서도 최전성기였다. ② 강희제 때 개시되어 건륭시대에 최고조에 달했던 청시대 황가원림은 웅대한 규모를 바탕으로 자연경관과 인공경관이 결합된 산수원림을 재현했다. ③ 대규모의 원림은 집금식(集錦式)의 배치와 구성을 추구해 큰 원림 속에 작은 원림들이 포함되는 원중원(園中園)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또 강남의 조원수법을 흡수해 이를 응용 발전시켰다. ④ 한 편 원림 속에 사(寺), 관(觀), 사묘(祠廟)를 비롯 다양한 종교 건축들이 도입되어 풍경을 다채롭게 했다. ⑤ 청代의 황가원림은 단순한 휴식과 관상을 위한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황제들이 대부분 기거하면서 정무를 펼쳤던이궁이자 행정과 정치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 ||
(2) 주택과 사가원림 | ||
① 청시대의 주택은 사합원(四合院)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1동의 건물은 3칸으로 구성되는데, 중앙의 가장 넒은 칸은거실, 양옆은 침실과 주방이다. 이런 건물이 마당을 중심으로 모여 주택을 구성한다. ② 중심이 되는 정방(正房)과 동서 상방(廂房)이 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는 상태를 삼합원이라하며, 정방 맞은편에 하방(下房)을 추가하여 배치한 것을 사합원이라 한다. ③ 주택의 규모가 커지면 이런 사합원 구조가 종축선이나 횡축선을 따라 반복되며, 반복되는 수에 따라 양진식(兩進式, 3진식, 4진식 등으로 불린다. ④ 북경의 사합원 주택은 일반적으로 남북을 중심축으로 두고, 대문은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한다. 주택은 벽과 담으로 둘러싸여 내향적이고 폐쇄적인 구조이며, 마당은 자갈 등을 이용해 여러 가지 무늬로 포장하고, 화목을 심거나 분재로 장식을한다. 대형 주택은 이런 사합원이 주축에 따라 연접해서 배치되고 좌우로 별원이나 뒷편에 화원을 조성했다. | ||
(3) 강남원림 | ||
① 강남지역에는 관료와 귀족 그리고 큰 상인들의 저택이 많이 건축되었다. 이들의 건물은 단일한 축선보다는 두세 개의 축선을 따라 건물들이 복합적으로 배치됨으로써 커다란 건물군을 이루었다. ② 중축선 위에 문청(門廳), 교청(轎廳), 대청(大廳), 방(房)이 위치하고 좌우 종축선 위에 객청(客廳), 서방(書房), 주방(廚房) ③ 강남의 원림은 명 代의 기초위에서 확충되었으며 원림을 중시하는 풍조는 계속되었다. ④ 과유량(戈裕良)이 만든 소주의 환수산장(環秀山莊)은 대표적인 원림으로 이곳의 가산은 중국 원림 중 백미로 꼽힌다. | ||
4. 대표원림 | ||
(1) 원명원 (圓明園) | ||
① 북경 서북쪽에 위치한 원명원은 강희제가 4째아들(옹정제)에게 지어준 별장이며, 옹정제가 후에 대대적으로 확장해 이궁으로 조성했다. 일반적으로 원명원이라 함은 원명원, 장춘원, 기춘원 이 세 원림을 아우르는 명칭이다. 3개의 원림은 궁궐을 하는 공간과 원림공간이 결합된 구성을 취한다. 이들 원림은 북방원림의 전통에 남방 사가원림의 양식을 보태 조성한것이다. 원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관이었으며 각각의 경관은 보다 작은 경구로 구성되어 전형적인 원중유원(園中有園: 원림속에 또 다른 정원)의 형식을 따랐다. ② 원명원: 담으로 둘러싸여있으며 안에는 복해(福海)라는 큰 호수와 전호(前湖), 후호(後湖)라는 작은 호수가 있다. 원림의남쪽에는 궁궐이 그 뒤로 후원이 위치한다. 궁궐은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 황제가 정무를 보는 곳)과 구주청안전(九州淸晏殿: 침전건물)이 이궁의 중심을 이룬다. 복해의 한 가운데에는 봉래・영주・방장을 상징하는 작은섬 3개를 조성하였고, 가장튼 중앙의 섬위에는 봉도요대(蓬島瑤臺 : 신선의 누각을 상징)이 있다. 건륭제는 원명원 곳곳에 강남의 명원과 수려한 자연을 모방한 경관을 조성했다. ③ 장춘원 : 원명원 동쪽에 위치한 장춘원은 중앙의 큰 섬위의 순화헌(淳化軒)이 중심이며넓은 호수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장춘원 북쪽에는 서양식 건물인 서양루 등과 정원이 있는데, 유럽풍(바로크양식)으로 조성된 최초의 황가원림이다. ④ 기춘원 : 만춘원으로 개명 | ||
(2) 이화원 (頤和園) | ||
① 북경의 서북쪽 10km에 위치한 3,400m 규모의 황가원림으로 건륭제가 황태후의 60세 생일을 축하하고 이곳의 물길을보완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원래 이곳은 옹산(옹산)과 서호(西湖)가 있었는데 건륭제는 그 이름을 만수산(萬壽山)과 곤명호(昆明湖)로 명명하고 원림공사를 완료하고 청의원(淸漪園)이라 하였다. ② 이화원은 크게 만수산 공간과 곤명호 공간으로 나뉘며, 만수산 공간은 동측의 궁궐공간과 곤명호를 마주하는 만수산 남사면지역과 북사면 지역으로 나뉜다. ③ 궁궐공간은 전조후침의 배치이며, 궁궐로서 격식은 갖추었으나 전체적으로 주택과 같은 분위기이다. 주요 건물로는 황제의 침궁인 옥란당(玉蘭堂), 황후의 침궁인 의운관(宜운館), 서태후의 침궁인 낙수당(樂壽堂)등이 사합원 형식으로 위치해있다. ④ 곤명호를 마주하는 만수산 남측 공간의 중심은 동일한 축선상에 배치된 배운전(排雲殿)과 불향각(佛香閣) 건물군이 있으며, 특히 동서 720m에 이르는 회랑은 곤명호 주변을 따라 경관을 감상하기에 적합하다. 또한 273칸의 회랑의 보에는 산수신화 고사를 소재로 한 다양한 그림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⑤ 만수산 북측 공간은 좁고 긴 호수와 울창한 수목이 그윽하고 심오한 경관을 이룬다. 이곳의 중심건물은 티베트 불교양식으로 지어진 사대부주(四大部州)건물 군이다. ⑥ 곤명호는 중간에 제방이 있어 3개의 수면으로 나뉜다. 3개의 호수섬에는 용왕묘(龍王廟), 치경각(治鏡閣), 조감당(藻鑑堂)이 각각 위치하는데 이는 봉래, 방장, 영주산을 상징한다. 서쪽 제방에는 6개의 다리(항주 서호의 6교를 모방)가 조성되었으며, 서로 다른 형식의 다리와 제방은 강남 지역의 경치를 연상하게 한다. | ||
(3) 승덕피서산장 (承德避暑山莊) | ||
①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약170km 떨어진 하북성 승덕에 위치한다. 서늘한 기후와 아름다운 경치, 풍부한 물로 피서와 휴식, 수렵을 위한 좋은 환경을 갖추었다. 강희제代 시작된 이궁공사는 8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건륭제에 다시 확장을 해1790년 560ha 규모로 완공되었다. ② 원림은 크게 궁궐구역, 호수구역, 평원구역, 산악구역으로 구성된다. 궁궐구역은 정궁, 송학재, 만학송품, 동궁 등으로이루어져 있고 전조후침의 구성을 따랐다. 그 뒤로위치한 호수구역은 섬과 제방, 다리에 의해 몇 개의 수역으로 나뉜다. 건물로는 강희제가 머물렀던 여의주(如意洲), 황제가 글을 읽었던 월색강성(月色江聲), 연우루(煙雨樓), 상제각(上帝閣) 등이섬과 제방위에 건축되었고, 문원사자림(文園獅子林: 소주의 獅子林 참고), 수심사(水心榭: 호수의 갑문역할), 지경운제(芝徑雲堤: 항주 서호의 풍경을 모방) 등이 주요 경관요소이다. 평원구역인 동쪽의 만수원 숲속에 사슴을 길렀고, 서쪽의 초지 시마태(試馬埭)에는 건륭제가 몽고의 귀족들과 연회를 벌이거나, 씨름등을 관람했다. 평원구역 서편의 산악구역에는 소나무가 울창한 송운협(松雲峽), 빼어난 계곡안 이수욕(梨樹峪) 등이 경관을 이루었다. ③ 피서산장의 주위에 있는 8곳의 시묘와 함께 신강, 사장, 몽고 등지에 있는 소수민족의 종교건축형식을 도입함으로써 다민족을 포용하려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상징성도 함께 갖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