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화원화가 신윤복 신윤복은 조선 후기 화원화가로 1758년에 태어났다. 화원으로 오래 봉직한 신한평의 아들이다. 그에 관한 일대기는 거의 알려진게 없다. 여색을 밝히고 음란해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구전이 오경석 선생과 오세창 선생 이동주 선생을 통해서 들릴 뿐이다. 이는 비단 신윤복 뿐만 아니라 여느 화원화가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일대기에 대해서 알려진 화원은 거의 없다. 신윤복의 작품은 현존 숫자가 매우 적은 편이다. 그나마 국보 135호로 지정된 혜원풍속도첩에 22점의 그림이 있어 그나마 그의 그림 수준을 알 수 있다. 이 혜원풍속도첩의 그림은 특이하게도 도회지 기방의 풍속을 담았다. 과거 윤두서, 조영석의 풍속화가 주로 농가를 주제로 삼았고 단원은 서민과, 고고한 양반을 주제로 삼은 반면에 신윤복이 선택한 소재는 상당히 특이하달까 신윤복의 그림을 보면 요염한 기생이 등장하고 멋드러진 양반내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멋드러진 한량도 있고 집안의 노비를 탐하는 50대의 채신머리 없는 양반도 있다 기생들이 웃옷을 벗고 멲감는 모습을 훔쳐보는 10대 후반쯤의 스님도 있고 훔쳐보다가 걸려서 끌려나온 스님도 있다. 이러한 풍속화들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양반이나 승속에 대한 비판보다도 당시 풍속의 풍성함, 혹은 에로틱함에 대한 찬양같다는 느낌이 더 든다. 즉 시대가 그만큼 화평하고, 음양 조화가 잘 이루어져 웃지 못할 하지만 건강한 풍속을 이뤘다는 정조 대의 자부심이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원과 혜원의 그림을 보건데 , 아무래도 정조 연간부터 신윤복이 죽기 전인 순조 초년까지는 상당히 조선은 풍족한 국가였고 그 것을 이룩한데 대한 조선 백성의 자부심은 대단했었던 듯 하다. 신윤복의 기년작은 1813년을 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신윤복이 1813년 근처 어느 년엔가 졸한 듯 하다. 여색을 밝혀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풍문처럼 신윤복은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고 춤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상당히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인물이었던 듯 싶다. 그 시대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지만 지금 시대에는 사진한장 남아있지 않은 당시 시대를 보여주니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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