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 방 지 : 신숭겸장군유적지
*소 재 지 : 대구광역시 동구 신숭겸길 17(지묘동)
*주요유적 : 순절단(표충단)/표충사/표충재/상절당
고려태사 개국공신이며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장군은 초명이 능산이며
신라말기에 전라도 곡성현에서 탄생하였는데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천성이 용맹스러웠으며 활쏘는
재주와 무예가 뛰어나 장수다운 자질을 보였습니다.
장군은 서기918년6월 홍유,배현경,복지겸 등과 논의해 폭군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는데
큰공을 세웠고, 서기927년 가을에 왕건과 함께 신라를 치고 돌아가던 후백제 견훤을 팔공산에서 맞아 싸웠으나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기를 맞았는데 이때 장군은 절대위기에 처한 왕건을 숨기고 자신이 왕으으로 가장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여 후세에 충렬과 절개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1.신숭겸장군유적지 안내도
2.한실골가는길(팔공산올레길 2코스) 안내판 : 2코스의 출발점인 신숭겸장군유적지
3.스토리와 함께 하는 왕건길(태조 왕건과 연관된 지명유래 소개)
위 사진에 나온 지명외에도 아래와 같은 지명유래가 있습니다.
1)독좌암(獨坐巖)
왕산기슭의 봉무정 앞에는 큼직한 바위가 하나있는데 이 바위는 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지묘동 동남쪽으로 도주
하다가 봉무토성앞 바위위에 홀로 앉아 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시량리(矢王里) : 왕건이 도주하다 왕을 잃어버렸다는 뜻(실왕리가 후세에 시량리로 변경된듯 함)
3)반야월(半夜月) : 왕건이 도주일때 날은 반야였고 중천이 달이 떠있어 탈출로를 비췄다는 뜻
4)안심(安心) : 이 지역에 도달하여 안심이 되었다는 뜻
5)은적사(隱跡寺) : 왕건이 숨어서 정세를 살폈다는 뜻
6)안일사(安逸寺) : 왕건이 편안히 쉬어간 곳이라는 뜻
7)무태(無怠) : 왕건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말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고 일렀다는 뜻
4.신숭겸장군유적지
1)유적지 정문과 안내문
2)신숭겸장군 동상 및 후면부에 새겨진 사안도
3)순절단(殉節壇) ; 표충단이라고도 함
*순절단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안내문(정문에서 오른쪽편에 위치해 있음)
*신숭겸장군나무
*순절단 : 사당이 없던 시기에 신숭겸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낸 단소
*고려장절신공 순절지지비(高麗壯節申公 殉節之地碑)
이 비는 고려개국공신 신숭겸장군의 순절지에 세워진 것으로 순조19년(1819) 신숭겸의 28대손 의직이 세웠다고
하며 철종7년(1856) 순절비 보호각을 설치했고 고종9년(1872)과 1928년 두번에 걸쳐 비각을 중수하였습니다.
4)상절당과 표충사가 있는 곳으로 가기위한 홍살문/유적지 풍경/사진촬영모형물
5)태조왕건나무
6)신숭겸장군 일대기 전시물
7)충렬문(忠烈問 : 상절당으로 들어가는 정문)과 상절당(尙節堂)
신숭겸장군의 높은 절개를 추모하기 위해 1991년 설립했으며 강당(교육 및 회의실)과 서고로 사용함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내부촬영은 못함
8)표충사(表忠祠) 유적 : 들어가는 정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내부촬영 못함
정문으로 들어가면 표충재(고택), 동재와 서재, 충렬비각이 보이고 여기를 지나면 경의문(표충사 들어가는 정문)이 나오고 문안으로 들어가면 사당인 표충사가 있습니다.
그 뒷편에 매판단(埋板壇:고종8년(1871) 전국 서원철폐령때 훼철된 표충사 현판을 묻은 곳)이 있고 그 뒤에
왕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표충사
왕산아래 제일 윗채가 표충사로 선조40년(1607)에 신숭겸장군의 외후손인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영남지방에
사는 공의 후손들과 협력하여 옛 지묘사터에 세웠으며 그후 사우가 퇴락하자 현종11년(2670) 건물을 다시 짓고
동년8월에 영정을 봉안하였고 현종13년(1672) 표충사라 사액되었습니다.
숙종2년(1676) 공과 함께 순절한 김락장군을 배향하였고 영조2년(1726) 다시 공의 후손 신길원 공을 다시 배향
하였으나 고종8년(1871)에 훼철되고 말았으며 1988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중건하고 1993년에 신숭겸
장군의 영정과 신위를 모시고 매년 한식에 향사를 받들고 있습니다.
*표충사로 들어가는 정문일대 모습
*서재
*동재
*표충재
*충렬비각(忠烈碑閣)
선조40년(1607) 외후손 유영순이 신숭겸장군의 충절정신을 기려 세웠는데, 비문은 후손인 예조판서 신흠이 짓고
글씨는 여주목사 김현성이 썼으며 전문은 안변도호부사 김상용이 썼는데 비문에 의하면,
"신숭겸은 평산신씨의 시조로 전라도 곡성에서 출생하여 광해주(지금의 춘천)로 이거, 918년 태봉의 기장으로서
홍유,복지겸 등과 궁정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후 대장군이 되어
태조10년(927) 공산동대전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에 왕건이 포위당하자 그를 탈출시키기 위해 옷을 바꿔입고
전사하였다. 왕건은 그의 충절을 기려 시호를 장절이라 했는데 그의 장렬한 전사는 고려 역대의 추앙을 받았다.
신숭겸장군의 순절후 예종15년(1120)8월 왕이 서강에 행차시 그해 10월 팔관회에 참관해서 김락,신숭겸을 소재로 한 잡극중 가상이 관복을 입고 말을 타고 도는 것을 보고 이것이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을 말함을 알고 감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조선 정도5년(1781)에 비각이 허물어지면서 비가 넘어져 누운 것을
관민이 힘을 모아 다음해 8월에 바로 세웠으며 같은 해에 비각도 고쳐 세웠다"
(현재의 비각은 1979년 대구광역시에서 보수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