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政大夫行昌原府使金海鎭管兵馬僉節制使鄭公墓碣銘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兼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春秋館成均館事世子二師 李荇撰
嘉善大夫刑曹參判 成世昌 書
公諱光輔。字運之。東萊鄭氏。其顯自高麗左僕射諱穆始。其後至八代。有諱龜齡。仕終結城縣監。縣監生諱賜。以集賢殿直提學。爲養出補晉州牧使。牧使生諱蘭宗。四捷科第。參佐理勳。爲名將相。贈諡翼惠。筆法擅一世。雖兒童走卒。皆知其名。公卽其胄子也。今領樞府公光弼。位經議政府領議政。朝野方倚。以爲蓍蔡。於公爲次。公少習擧子業。屢見絀。竟以門蔭出身。積功課。累階至通政。其京官。則爲瓦署別提。爲主簿者三。曰司宰監,宗簿寺,軍資監。再爲司憲府監察。爲掌苑署掌苑,平巿署令,掌隷院司議,宗親府典簿。爲僉正者三。曰掌樂院,禮賓寺,濟用監。爲通禮院奉禮。其外任。則爲連山縣監。爲平壤府判官。爲郡守者五。曰旌善,豐基,錦山,淳昌,草溪。爲府使者二。昌原,延安。公四轉品而至堂上階。歷踐外邑者。至於九。雖不可謂大達。其亦顯矣哉。公天性方嚴。居官務奉職。不自顧其不喜者。用是爲詆毀。然亦不少悔也。年未至。棄官。退居于宜寧闍崛山之下。爲終焉之計。副提學君。每請告省謁。以經幄任重。不能長侍膝下。親舊競勸公還朝。不聽。領樞府公。亦惟友于之切。走書請。前後相繼。終不能得也。其執性蓋如是云。公之疾。提學君。請諸朝。馳驛歸侍藥。竟不效。以甲申三月初九日終。享年六十八。嗚呼哀哉。諸孤奉其柩。反葬于廣州省達里。從先兆也。公配全義李氏。大護軍格之女。先公二十六年歿。生四男四女。男長漢龍。水原判官。次士龍。卽副提學君。年十九。登第。又擢重試狀頭。方以文章名。次元龍。進士。次彥龍。義禁府都事。女長適監察李煕業。次適幼學朴從庠。次適部將李允耦。次適評事李膺。判官娶參奉柳繼根之女。生四男一女。男純祐,純祉,純福,純祜。提學娶部將成烈之女。進士娶護軍朴軫之女。都事娶府使李希雍之女。生一男。純嘏。監察生二男二女。男安國。次安邦。兼司僕。女適南應奎。評事生二男。揚廷,賓廷。葬有日。提學君。於余有知己之分。以狀徵余文。將表諸墓道。敢不諾而銘之。詞曰。
公之祖先。奮庸高麗。爵爲僕射。望隆一時。厥緖聯聯。施厚報遲。直學爲親。棄榮若遺。屈牧遠州。色養怡怡。積德不食。惟後之貽。翼惠是收。理無參差。擢科策勳。若或相之。或將或相。出入咸宜。何以爲證。丞相之辭。公其胄子。享有當菑。領樞是弟。提學吾兒。族大以貴。觀聽嗟咨。堂上之班。位則不卑。九邑之長。數豈云奇。老而彌元。與世背馳。闍崛之麓。鼎津之湄。是惟樂地。歸歟何疑。我隣我里。或樽或棋。採有陵丘。釣有陂池。卒歲優游。曰期曰頤。大運不留。一疾莫醫。謂蒼昭昭。胡遽止斯。餘慶有歸。終不我欺。廣州之原。松梓猗猗。豈無新阡。祖考我思。反葬於是。先兆在玆。刻此墓石。昭示無隳。
絀:꿰멜출.물리칠출.치(菑) : 따비치. 詆: 꾸짖을저.흉볼저. 闍;성문층대도.嘏;복하.
咨탄식할자. 湄;물가미. 陂;긴등파. 隳 ; 무너질휴.(壞也)[道德經] 載惑隳.
怡怡 : 즐거워하는 모양.[論語.子路]朋友切切偲偲.
偲偲 ; 서로 건면하고 격려하는 모양.[論語.子路]朋友切切偲偲.
昭昭 ; 밝은 모양.[老子] 俗人 작고 밝은 것.[中庸]天斯昭昭之多也.
猗猗 ; 아름답고 성한모양.[詩經.淋淇澳]錄竹猗猗.길고 잇다른 모양.[嵇康]微風餘音 霏霏猗猗.
통정대부 행 창원부사 김해 진관병마 첨절제사 정공 묘갈명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지경연사홍문관대제학춘추관성균관사 세자이사 이행은 짓고 가선대부형조참판 성세창은 글을 쓰다.
공의 휘(諱)는 광보(光輔) 자(字)는 운지(運之)이니 동래정씨이다. 동래정씨가 현달하게 된 것은 고려 좌복야 휘(諱) 목(穆)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8대에 이르러 휘(諱) 귀령(龜齡)이 결성현감의 벼슬을 하였다. 현감의 아들 사(賜)가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다가 봉양을 위하여 진주목사로 임명되어 나갔다. 목사(牧使)의 아들 난종(蘭宗)이 네 번이나 과거에 급제하여 좌리공신에 오르고 이름난 장상(將相)이 되어 익혜(翼惠)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필법(筆法)이 당세에 으뜸으로 비록 어린아이나 병졸(兵卒)일지라도 그 명성을 알고 있었으니 공(公)이 바로 그의 맏아들이다. 지금의 영중추부사공(領中樞府使公) 광필(光弼)이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의 지위에 있으면서 조야(朝野)가 모두 의지하여 귀감(龜鑑)을 삼았으니 공(公)의 다음 동생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익혀 여러 번 응시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문벌의 음덕으로 관직에 나아가 공과(工課)를 쌓아서 여러 차례 승진되어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그의 서울의 관직으로는 와서(瓦署) 별제(別提)가 되었고 주부(主簿) 벼슬을 세 번 했으니 즉 사재감(司宰監) 종부시(宗簿寺) 군자감(軍資監)이고 두 번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을 지냈다. 장원서(掌苑署)의 장원(掌苑) 평시서(平市署)의 서령(署令) 장에원(掌隸院)의 사의(司議) 종친부(宗親府)의 전부(典簿) 등을 역임하고 첨정(僉正)의 벼슬을 세 번 하였으니 즉 장악원(掌樂院) 예빈시(禮賓寺) 제용감(濟用監)이었고 통례원(通禮院)의 봉례(奉禮)가 되었다. 외직(外職)으로 연산현감(連山縣監) 평양부(平壤府)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군수(郡守)를 다섯 번 지냈으니 정선(旌善) 풍기(豊基) 금산(錦山) 순창(淳昌) 초계(草溪)의 군수였고, 부사(府使)를 두 번 지냈으니 창원(昌原) 부사와 연안(延安) 부사였다. 공(公)은 품계(品階)가 네 차례 바뀌어 당상(堂上)의 품계에 오르는 동안 역임한 고을이 아홉 고을이니 비록 크게 영달했다고 할 수 없지만 또한 현달한(顯達) 것이 아닌가! 공은 천성이 방정(方正)하고 엄격하여 관직에 있으면서 직책을 받드는데 힘을 다하였으며 좋아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로써 비방을 받았으나 공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나이가 벼슬을 그만 둘 때가 아니었지만 관직을 버리고 의령(宜寧)의 도굴산(闍崛山) 아래에 물러나 거처하며 말년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부제학(副提學)인 아들이 매 번 찾아뵙고 보살펴 드리고자 하였으나 맡은 중임에 오랫동안 슬하에서 모시지 못하였다. 친구들이 공에게 조정에 돌아오기를 경쟁적으로 권하였지만 못들은 체 하였으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인 동생이 또한 간절한 우애로서 글로 청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았으니 공(公)의 앞뒤 서로 잊고자 하는 그 뜻이 집작을 꺾지 못함이 이와 같았다. 공(公)이 병이 드니 아들 제학(提學) 군이 조정에 그 사실을 알려 청하니 말을 달려 돌아와 시약(侍藥)을 하였으나 효력이 없어 갑신(甲申.1524)년 3월 초 9일에 일생을 마치셨으니 향년 68세였다. 오호라 슬프다! 여러 상주들이 운구를 받들어 광주 성달리에 장사 지내니 선영이 계시는 곳이다. 공의 배위(配位) 전의이씨(全義李氏)는 대호군(大護軍) 격(格)의 따님이다. 4남 4녀를 두셨으니 맏 아드님은 한룡(漢龍)으로 수원판관(水原判官)이다. 둘째 아드님은 사룡(士龍)이니 즉 제학(提學)군(君)으로 나이 19세에 과거에 오르고, 또한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여 나라에 문장으로 유명하다. 셋째는 원룡(元龍)이니 진사(進士)이고, 넷째는 언룡(彦龍)인데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다. 맏딸은 감찰(監察) 이희업(李熙業)에게 둘째 딸은 유학(幼學) 박종상(朴從庠)에게 셋째 딸은 부장(部將) 이윤우(李允耦)에게 넷째 딸은 평사(評事)이응(李膺)에게 각각 출가(出嫁)하였다. 판관(判官)은 참봉(參奉) 유계근(柳繼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男) 1여(女)를 낳았으니 순우(純祐) 순지(純祉) 순복(純福) 순호(純祜)이다. 제학(提學)은 부장(部將) 성열(成烈)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진사(進士)는 호군(護軍) 박진(朴軫)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도사(都事)는 부사(府使) 이희옹(李希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순하(純嘏)이다.
감찰(監察)은 2남 2녀를 낳았으니 이들 안국(安國)과 안방(安邦)은 모두 사복(司僕)을 겸하였고, 딸은 남응규(南應奎)에게 출가했다.
평사(評事)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양정(楊廷)과 빈정(賓廷)이다. 장례지내고 며칠 후에 제학(提學)군이 나에게 친분이 있으므로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의 글을 청하며 장차 묘의 비석을 세우려 하니 감히 허락하지 않을 수 없어 명(銘)을 지어 말하기를
공의 선조는 고려 때에 공적을 떨쳐 벼슬이 복야(僕射)였으며 당대에 명망이 높았도다.
그 실마리가 이어져 후덕으로 베풀고 천천히 보답을 받았구나 직제학공(賜)이 부모를 모시고자 영화를 버리는 유훈을 만들었도다. 먼 고을의 목사(牧使)로 나아가 기쁜 마음으로 봉양 하였도다. 덕을 쌓느라(積德) 쉬임(休息)이 없었으니 영광이 후손에게 이르렀도다.
익혜(翼惠)공이 결실을 거두니 이치에 어긋남이 없도다. 과거에 급제하여 공신에 책봉되어 상공(相公)이 되었도다. 혹은 장수(將帥)로 혹은 재상(宰相)으로 출입함이 모두 마땅하도다. 무엇으로 증명하리오. 승상(丞相)의 말(辭)로 알 수 있도다. 공(公)은 그의 맏아들로서 향유(享有)하기를 받침 하였도다.
영중추부사는 동생이요 제학(提學:士龍)은 나의 아들이로다. 종족이 크게 번성하고 귀하게 되니, 보고 듣기에 부러워하도다. 당상(堂上)의 반열에서 지위가 낮지 않았고 아홉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니 운수가 어찌 이상하지 않았는가.
늙을수록 원기가 그치지 않아 세상과 더불지 않고 돌아섰구나.
도굴산(闍崛山) 기슭과 정진(鼎津)의 물가에서 이곳이 즐거운 땅이라 돌아가리라 어찌 의심을 하였을까!
나의 이웃과 마을에서 술도 마시고 바둑도 두고 구릉에서 나물도 뜯고 못에서 낚시도 하면서 넉넉히 즐기며 해를 보내며 즐기기를 기약하더니
큰 운수는 오래 머물지 않아 한 번 질병이드니 의원도 막지 못하였도다.
밝고 푸른 하늘이여 어찌 이렇게 급히 돌아가시게 하였는가.
남은 경사가 무궁하게 자손에게 돌아가리니 끝내 우리를 속이지 않으리라
광주(廣州)의 언덕에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울창하도다.
어찌 새로운 유택의 땅이 없었겠는가
조고(祖考)께서 나를 생각하심이여!
이분들 계신 곳에 공의 유택을 마련하니 선영이 이곳에 있도다.
이 묘석(墓石)에 글을 새겨 공의 업적을 밝히니 빠짐이 없을까 하는 마음이다.
가정(嘉靖) 을유년(乙酉 :1525) 8월 일 세움
(정재홍 번역)
※이행(李荇1478-1534).文臣. 자(字) 택지(擇之) 호(號) 용재(容齋).청학도인(靑鶴道人)‘어택어수(漁澤漁叟),본관은 덕수(德水).사간(司諫) 의무(宜茂)의 아들.1495(연산군1)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 이어 검열(檢閱) 전적(典籍)을 역임 1504(연산10)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응교(應敎)로서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 이어 함안에 이배되고, 이듬해 거제(巨濟)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당했다.
1506년(중종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교리(校理)에 등용, 이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며, 이듬해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4년(중종9) 사성(司成)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고,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신진사류(新進士類)인 박상(朴祥).김정(金淨)등이 연산군의 비(妃) 신(愼)씨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를 반대했다. 1517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왕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의 중용(重用)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좌천, 이어 사직했다.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일파가 제거되자 부제학(副提學), 이어 대제학(大提學)에 승진하고, 공조참판(工曹參判).이조 판서를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대제학을 겸임했다. 1539년((여지승람(輿地勝覽))) 수찬당상(修撰堂上)이 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을 찬진(撰進)했다. 이듬해 좌의정에 올라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專橫)을 논박하다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직. 이어 함종(咸從)에 뮤배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후에 신원(伸寃)되었고, 중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著書] 용재집(容齋集.[文獻]燕山君日記. 中宗實錄.國祖人物考. 韓國人名事典(新丘文化社)에서 轉寫하였음.
첫댓글 묘지묘갈명란 제23호를 참초 하세요. 의제님 번역 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의재님의 0통정 대부 행 창원 부산 휘 광 보 좋은 정보을
글 잘 하고 갑니다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