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볼
김양희
아무리 굴려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
모양대로 구르며 벽으로 간 공은
스스로 길을 내가며 돌아올 줄 안다
밀어도 기울지 않는 동그란 결정체
모서리란 말을 가져본 적이 없어
상처를 선물하거나 받을 줄도 모른다
나팔꽃이 나팔꽃에게
지하철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이른다
기둥 꼭 잡고 있어
사람들에게 쓸려나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
큰바람만 아니지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사람 속에
나팔꽃 새순처럼
기둥에 매달린 아이
자동문 열릴 때마다
더 꼭 매달리는 아이
서운암의 봄
봄볕이 내려앉자 설법하시는 항아리
금낭화 할미꽃 옹기종기 둘러서서
가득 든 말씀도 듣고
텅 빈 말씀도 듣는다
절망을 뜯어내다
우리를 탈출한 고릴라가 돌아다닌다
어떻게 나갔어?
대체 비결이 뭐야?
철망을 하루에 한 칸씩 나도 몰래 뜯었지
절망을 뜯어냈다고?
철망을 뜯어냈다고!
오타를 고치려다 눈이 주운 어휘 한 잎
절망을 하루에 한 줌 몰래 뜯어내야지
넌 무작정 온다
아침 저녁 오소소 찬 기운 돋는 소리에
나무는 나뭇잎을 조곤조곤 타이른다
저것 봐 까치 날갯짓
너도 날 수 있어 맘껏
모자와 장갑 목도리 단단히 준비하고
바람이 손을 잡아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
나무는 작별의 진실 말해줄 수가 없다
누구의 미래든
세상은 무작정 온다
떨어진 나뭇잎 어리둥절한 발자국들
그래도 또 살아야지 지나온 길 지우며
메밀꽃
물질하고 돌아온 엄마 손에서 짠맛 난다
바다를 드나들며 일흔 해 절여진 섬
초저녁
누운 숨소리
메밀꽃처럼 밀려온다
나무개구리
단풍도 들기 전 잎사귀 다 쏟아내고
수명을 다한 듯 시간을 견디는 나무
잔가지 모두 쳐내고 큰 둥치만 남겼다
그마저 가망 없어 전기톱 들이대는데
움푹 파인 줄기 틈 손톰만한 개구리가
고목을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봄비가 물어오는 서너 차례 안부 끝에
물오른 둥치에서 늦잎이 돋아나더니
개구리 오간데 없고 노란 감꽃 파다하다
전집 열두 권
지금 소설 속을 맨발로 걷는 느낌이야
이야기를 밟다보면 슬픔은 희석되지
기쁨의 눈물 같은 거 정말 신파라 해도
누구에게나 있는 열두 권 소설책은
곳간 깊이 숨겨놓은 잘 여문 알곡이지
그렇게 간직만 해도 풍부한 자산이야
잠 속에 비운 뇌를 꿈으로 채워나가
기억하려 할수록 멀어지는 무의식 말고
되도록 상상만으로 포만감을 노려봐
맨손이 적합할 거야 힘 쏙 뺀 맹물처럼
흥미진진한 사건 혹은 담백한 배경
무한히 텅 빈 곳으로부터 시작문은 열리지
빨간 장화
여인을 움직이는
목 짧은 고무장화
바람도 따라잡기 버거울 만큼 재바르다
바퀴를 달아놨을까
소리보다 먼저 온다
밥집 문을 닫는 무교동 아홉 시가
바닥에 주저앉아 하루를 벗겨낸다
장화 안
투명 비닐봉지
까만 양말 하얀 발
어떻게 살아냈는지
다 말하지 않아도
불어터진 발 무늬 찍히는 바닥은 안다
첫새벽
눈밭 질러간
어미 노루 발자국
지갑
엄마가 놓고 간 엄마에게 향기가 나요
허물 벗는 체크무늬
귀퉁이 뜯어진 실밥
날마다 여섯 남매가 드나들던 아랫목
그 아랫목
한 번 이라도
당신에게 온기였을까
돈도 가족사진도 시나브로 빠져나가고
희미한
옛이야기처럼 얼룩만 남았어요
밀물썰물
섬에는 하루 두번 약속하듯 장이 섭니다
파도는 한번도
거르지 않고 나가
왁자한 뭍 소문들을 갯바위에 팝니다
모래톱 발자국도 흥정 끝에 넘기고
좌판에 펼친 소식
바람의 웃음소리
보자기 잔뜩 꾸려 이고 갯가로 돌아옵니다
- 김양희 시인의 시조집 『넌 무작정 온다』 (2020. 고요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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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집˚감상하기
김양희 시인의 시조집 『넌 무작정 온다』
안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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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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