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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5. 06. 21. 13:22
1910~20년대 노령 연해주에서의 한국독립운동과 러시아 혁명
2015.04.03. 19:03 l http://mioakiyama.blog.me/220319919806
1. 한인의 연해주 진출
일찍이 러시아의 연해주는 20세기 초 한국독립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곳이었다. 이 곳은 1860년대 이래 많은 한인들이 진출하여 경제적 기반을 쌓아두었던 곳이었고, 그들의 경제력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있어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연해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촉발된 것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체결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많은 지사들이 연해주로 망명하였으며, 이들이 점차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해주 지역은 만주, 미주, 중국 관내 등과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지로 거듭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지사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은 고종의 밀명을 받았던 전(前) 헤이그 특사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을미의병 당시 의병장이었던 유인석(柳麟錫, 1842~1915), 훗날 봉오동 전투의 주역이 되는 홍범도(洪範圖, 1868~1943)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성명회(聲明會), 권업회(勸業會) 등을 비롯한 항일운동단체를 결성하고, 일제에 대한 무력적 항쟁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연해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큰 장애물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1914년의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되었다는 점과, 1917년 공산주의 세력(볼셰비키)의 주도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제정 러시아와 러시아 공화국이 차례로 붕괴되고 새로이 소비에트 러시아1가 들어섰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반공산주의 세력(멘셰비키)이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러시아는 이른바 ‘적백내전(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в России)’에 휘말리게 되었다. 내부의 혁명으로 러시아가 혼란에 빠지면서, 연해주 지역의 한국독립운동 또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연해주 지역이 항일독립투쟁의 주축 중 하나였던 만큼 그 독립투쟁의 역량에서는 결코 타 지역에 뒤지지 않는 열정을 자랑할 것이나, 본 글에서는 1910년대 이후 촉발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의 한국독립운동, 그 중에서도 성명회와 권업회에 대해 좀 더 다루어 볼 것이며, 나아가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독립운동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던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2. 성명회
1910년 일제는 한국 강점에 있어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내었는데, 이 시기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한인 학생들이 모여 한인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이상설, 유인석, 이범윤 외 6명이 주축이 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을 규탄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항쟁기관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는 취지서를 발표하고 일제히 궐기하였다. 이것이 바로 성명회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일제에 완전히 강점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난 뒤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결의하고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는 한편 각국 정부에도 ‘대한일반인민총대 유인석(大韓一般人民總代 柳麟錫)’ 명의의 한문과 러시아어, 프랑스어로 번역된 서한을 발송하여 합병이 무효임을 알렸다.
한편으로 성명회 소속 회원들은 소수의 인원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과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였고, 이범윤은 두만강이 얼 때를 기다려 200명 단위의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함경도, 평안도 지역으로 진입시킨 뒤 1만여의 병력이 모이면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제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명회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성명회 궐기 이전 1910년 7월에 러시아와 일본이 미국의 만주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제2차 러일협약을 체결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병합에 대해 참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때때로는 일본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무력적 수단의 사용 또한 불사하였다.
결국 일본 정부는 러시아에게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독립운동으로 인해 일본이 받는 피해가 막심함을 역설하였고,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이상설, 이범윤 등 수뇌부 20여 명을 구금하고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정치활동을 엄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로써 성명회는 결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되고 말았다.
3. 권업회
한편 1911년이 되면서 새로운 연해주의 총독으로 곤다티라는 인물이 새로 부임해왔다. 1911년 6월의 러일범인인도조약을 통해 러시아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처벌할 권리를 일본인에게 이관하긴 하였으나, 곤다티는 이조차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인은 굉장히 혐오하였으나, 한국인에 대해서는 꽤나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곤다티는 한국인을 적극적으로 러시아인으로 귀화시키는 정책을 장려하였으며, 한국인의 귀화 신청 즉시 일체의 절차를 건너뛰고 국적을 부여하여 주는 파격적 정책까지도 시행하였다.2 그는 한국인의 토착성과 임지개간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중앙정부에 대해서도 한국인의 질 높은 노동력을 이용하여 극동 지역을 개발하자는 의견을 종종 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34
한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총독이 부임해오자 독립운동은 다시금 활력을 얻었다. 한편 이 시기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각각 출신지역에 따라 북한파(함경도), 서도파(평안도), 남도파(서울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중 북한파의 주도로 권업회의 발기회가 개최되어 위원을 선출하였는데, 부회장에 홍범도 등이 임명되었다.5
러시아 정부 또한 이 지역의 한인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할 목적으로 권업회의 활동을 장려하고, 나아가 서도파와 남도파에게도 권업회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다. 마침 그들 또한 1910년의 경술국치 이후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연합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권업회에 적극 가담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한인들의 이러한 결정을 환영하면서 권업회의 성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또한 권업회의 명예회원으로 곤다티 총독을 비롯한 연해주 지역의 핵심 관료들이 가담함에 따라 권업회는 러시아 영내에서 설립된 한인들의 연합체이자 거대한 독립운동 세력으로 발전하였으며, 러시아 당국의 보호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권업회는 권업이라는 글자대로 노령지역 동포들에게 노동과 저축 등을 권장하여 독립군의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권업이라는 이름만 보면 단순한 노동장려단체로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 기만책이었다. 권업회의 최종목표는 어디까지나 조국의 독립이었다. 권업회는 21세 이상의 성인이면 남녀, 신앙의 차이를 두지 않았으며 3인 이상의 보증서를 가져오면 모두 받아들였다.
또한 권업회는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워 교육에도 힘쓰는 한편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간하여 강력한 항일논조를 담은 기사를 연일 내보냈다. 권업신문은 1912년부터 권업회가 해산하는 1914년까지 총 126호가 발간되었는데, 이것은 러시아 지역에서 간행된 유일한 한인 신문이자 민족지였다. 국권회복과 민족주의를 목적으로 한 권업신문은 순한글로 간행되었으며, 매주 일요일마다 간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특기할 점은 권업신문의 주필이자 신문부 부장이었던 인물이 바로 훗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등을 집필한 신채호(申采浩, 1880~1936)였다는 것이었다. 또한 권업신문의 편집과 감수를 러시아인 듀코프와 포드스타빈이 담당하였다. 1906년의 러일범인인도조약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기간지에 러시아인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의 파격적 지원과 독립운동가들의 각고의 노력에 힘입어 권업회는 해산 직전인 1914년 약 8500여 명의 회원을 둔 거대한 독립운동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같은 해 마침내 권업회는 그 동안 쌓아온 자본을 바탕으로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결의하고,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하여 사관생도를 육성하려 하였다.
대한광복군정부에 초대 통령으로 추대된 이상설은 곤다티 총독과 비밀리에 교섭하여 광복군이 사용할 조차지를 임대하였으며, 이 곳에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광복군 병사들을 양성하였다.
이상설, 이동휘 등은 연해주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모아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시행할 하나의 정부를 구상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러일전쟁 10주기를 맞아 러시아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크게 일어나고, 시베리아 한인 이주 50주년 기념일이 되는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세우고 초대 정통령으로 이상설을, 부통령으로 이동휘를 추대하였다.
이 대한광복군정부에 공식적으로 편성된 독립군의 수는 현재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가늠할 수 없으나, 1914년 이후 일제 군경에 의해 압수당한 권업회 내부 문서에 따르면 1914년 당시에만 해도 만주에 수만 명, 미주에 855명, 이상설 통령 산하의 연해주 지역 병력 약 3만 명이 군사훈련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이 병력을 중심으로 하여 연해주 지역을 독립운동의 핵심이자 중추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권업회에 대한 러시아의 협력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권업회의 활동이 철저하게 러시아 정부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6 비록 권업신문에 친러적인 기사가 다수 수록되어 있고, 총독 곤다티 등이 명예회원으로 가입했어도 러시아는 자국의 이익에 불합치할 경우 성명회에게 그랬던 것처럼, 권업회 또한 강제로 해산시킬 수 있었다.7
결국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권업회의 해산은 러시아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러시아와 일제는 완전한 동맹국이 되었으며 러, 일의 공동방위체제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계엄령이 발표되고,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영사관이 권업회의 해산과 권업신문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러시아 당국이 수용함에 따라 권업회는 3년여 간의 짧지만 큰 족적을 남긴 활동을 매조지하였다. 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결코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시대와 지리적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명쾌히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4. 러시아 혁명
1917년 러시아에는 격변기가 찾아왔다. 그 격변기를 통칭하여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는데, 이 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끈 자가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1870~1924)이었다. 1887년 형 알렉산드르가 니콜라이 2세 암살기도에 투신하였다 실패하고 사형을 당한 것을 계기로 레닌은 본격적으로 혁명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1905년 니콜라이 2세가 입헌군주정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진압한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레닌은 《4월 테제》 라는 글을 통해 총파업을 주장했으나 실패하고 핀란드로 망명하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 레닌은 독일의 지원을 받고 비밀리에 귀국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이미 2월 혁명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로마노프 왕조가 멸망하고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들어선 직후였다.
레닌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을 결집하여 10월, 군대의 통솔권을 쥐고 있던 레프 트로츠키와 제휴하여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를 붕괴시키고 새롭게 소비에트 러시아를 세웠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건국은 세계사적으로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탄생’ 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큰 의의를 가진다.
한국독립운동에도 혁명은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는데,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 이후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도 수많은 사회주의 정당이 등장하였다.
이후 1919년 레닌과 전 러시아 공산당의 발기로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제3인터내셔널)8이 발족하였다.
코민테른은 1국 1당주의를 내세우면서 공산주의의 완전한 건설을 목표로 하는 단체였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에 더욱 열광적이었는데 서유럽의 공산당들은 자국의 식민지 통치 정책에 정면으로 반박하기 어려웠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코민테른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아시아 지역의 독립운동에도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공공연하게 지지를 표명하거나 자금을 지원해주곤 하였다.
이러한 소련의 행보는 코민테른의 창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레닌이 가지고 있던 생각에 기인하였다. 레닌은 일찍이 『제국주의론』 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제국주의를 곧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된 형태로 생각하였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로 세력을 양분하여, 자본주의 부르주아들을 모조리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레닌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곧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이로 인해 소련은 공공연하게 한국, 중국, 몽골 등 당시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배 아래 놓여 있던 동아시아의 소국들에 대해 독립운동에 쓰일 자금을 지원하거나 각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한국의 신간회의 결성이나 중국의 국공합작에는 이러한 코민테른의 지지와 승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뿐만 아니라 중국 등지의 독립운동가들도 소련에 대해 점차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상술한 1국 1당주의 정책에 의해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은 유일당이 되기 위해 서로 정치적인 암투를 벌였다.
이는 한국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세력도 마찬가지였으며 그 때문에 불거진 문제가 1919~1920년의 1, 2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과 1921년의 자유시 참변이었다.10 이 두 사건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극도의 반공주의가 확산됨으로써, 훗날 김구나 이청천 등이 공산주의에 대해 미온적 입장을 보이던 여운형, 김원봉 등과의 제휴를 거부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5. 결론
이상으로 1910년부터 20년대까지 러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한국독립운동, 그 중에서도 성명회워 권업회, 마지막으로 러시아 혁명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았다. 연해주 지역 한인들은 성명회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에 나서기도 하고, 권업회를 조직하여 한 때 러시아 극동 지역의 독립운동의 구심점까지 노릴 정도로 세를 불렸다. 또한 1914년에는 극동총독과 교섭하여 광복군을 양성할 조차지를 마련하는 한편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결의하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는 업적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이들 독립운동은 모두 단 하나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들의 독립운동이 러시아 지역에서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며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였고,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즉각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단체를 해산시키거나 심지어는 무력적인 진압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래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또한 이 시기 일제가 러시아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말은 ‘일제가 정당히 병합한 한국의 일부 불순세력’ 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국내외를 막론하고, 나라 잃은 국민의 설움을 겪으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사른 그들의 고고한 뜻이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박환, 『러시아한인민족운동사』, 탐구당, 1994
박환, 『대륙으로 간 혁명가들』, 국학자료원, 2003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 러시아 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황동하, 『일제 식민지시대(1920년~1937년) 지식인에 비친 러시아혁명 : 대중적으로 유통된 합법잡지를 중심으로』, 한국서양사학회, 2009
황동하,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전환, 레닌을 어떻게 보았는가 : 변혁적 활동가들의 러시아혁명 인식의 과거와 현재』, 수선사학회, 2013
정식명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Росси?йская Сове?т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흔히 소련으로 알려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적백내전이 적군의 승리로 끝나고, 1922년 12월 소비에트 러시아를 비롯하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합하여 건설된 것이 바로 소련이다.
이 지역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제 2차 러일협약 체결 이후 러시아로 귀화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는데, 이는 러시아로 귀화할 경우 러시아의 법을 적용받으므로 일본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06년 러일범인인도조약이 체결되자 러시아는 자국의 안정을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한국계 러시아인들을 러시아 국경 밖으로 추방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곤다티의 전임 총독인 운테르베르게르의 경우 한국인들을 일제의 앞잡이로 생각하였으며, 이에 한국인에 대해서도 그다지 호의적이 아니었다.(박환, 『러시아한인민족운동사』, 탐구당, 1994, 14쪽)
박환, 위의 책, 117쪽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곤다티가 한국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론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차 러시아와 일본이 다시금 전쟁을 할 때를 대비하여,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을 대일복수전(對日復讐戰)의 선봉에 세우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박환, 위의 책, 121쪽
또한 당시 러시아는 일제를 완전한 동맹국이 아닌 언젠가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해야 할 가상적국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곤다티 총독을 비롯한 권업회의 활동에 가담한 러시아인들은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을 모아 하나의 큰 중심적인 단체로 만들고, 장차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당시 이들이 대일전선에서 러시아를 위해 공을 세워주기를 바랬던 것으로 보인다.
박환, 위의 책, 179쪽
맑스의 주도로 설립된 국제 노동자협회를 제1인터내셔널, 독일사회민주당과 카우츠키 등의 발의로 설립된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를 제2인터내셔널이라고 하며, 역사상 세 번째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정치세력이라는 측면에서 코민테른을 제3인터내셔널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코민테른 설립 당시 제2인터내셔널이 건재함에 따라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후발주자인 코민테른은 정당성 면에서는 분명히 제2인터내셔널보다는 아래였으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이자 소비에트 러시아와 혁명의 주도자 레닌이라는 막강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으므로, 결국 제2인터내셔널은 대부분 코민테른에 흡수되었다.
물론 신간회의 해산이나 국공합작의 결렬에도 코민테른의 지시가 큰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코민테른의 노선변화에 따라 신간회가 해체되었으며, 국공합작도 이루어질 수 없었을 정도로 코민테른은 당시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가들뿐만 아니라 당 시기 한국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1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은 고려공산당이라는 공산당 단체의 두 갈래였던 이르쿠츠크파(노령파)가 자신들이 적통임을 주장하며 상해파의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으로부터 지원받은 400만 루블을 갈취하여 상해파와 노령파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된 사건이었고, 2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은 임정 국무총리였던 이동휘의 측근 한형권으로부터 자금을 인수받은 김립이 레닌이 지원해준 독립운동 자금 200만 루블 중 60만 루블을 개인적으로 횡령했다는 의혹에서 불거진 문제였다.
결국 김립은 상해 도심에서 김구가 보낸 암살단에 의해 암살되었다. 결과적으로 1차 사건은 노령파와 상해파의 내부갈등을, 2차 사건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반목을 불러왔다. 더군다나 1차 사건 이후 노령파와 상해파의 갈등이 폭발한 것이 원인이 되어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으니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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