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소설(白雲小說) - 이규보
우리나라는 은(殷) 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동쪽에 봉해지면서부터 문헌(文獻)이 비로소 생겼는데, 그동안에 있었던 작자(作者)들은 세대가 멀어서 들을 수가 없다.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사적이 갖추 기록되어 있고, 또 그가 수(隋) 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시(五言詩) 네 구(句)가 실려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구법(句法)이 기고(奇高)하여 화려하게 꾸민 흔적이 없으니, 어찌 후세의 부화(浮華)한 자가 미칠 바이겠는가. 상고하니,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신(大臣)이었다.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의 태평시(太平詩)가《당시류기(唐詩類記)》에 실려 있는데, 그 시는 고고(高古)하고 웅혼(雄渾)하니 초당(初唐)의 모든 저작에 비해도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이때 동방의 문풍(文風)이 아직 왕성하지 못했는지라, 을지문덕의 이 한 절구시(絶句詩) 외에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여주가 또한 그러하였으니 기이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그 소주(小註)를 상고하니,
하였다. 상고하건대, 영휘는 바로 고종의 연호이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방학자들은 모두 그를 유종(儒宗)으로 여긴다.
그가 지은 비파행(琵琶行) 한 수가 《당음(唐音)》유향(遺響)에 실려 있는데 작자는 무명씨로 적혀 있다. 후세에 그에 대한 의신(疑信)이 결정되지 못하는데 혹자는,
라는 글귀로 최치원의 저작이라는 증거를 댄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는 단안을 내릴 수가 없다.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檄文) 한 편과 같은 것은 비록 사적(史籍)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기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벌써 죽이기를 의논했다.’라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하니,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었고, 또《계원필경(桂苑筆耕)》10권을 간행하였다. 나는 일찍이 중국 사람은 포용력이 넓어서 외국 사람의 글이라고 경홀하게 여기지 않고, 이미 사책에 실었을 뿐더러, 또 그 문집이 세상에 행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갸륵하게 여겼다. 그러나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을 위하여 특별히 그 전(傳)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혹 그의 사적이 전을 설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서일까?
최치원은 12세에 바다를 건너 당 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한 번 과거를 보아 갑과로 급제하였고, 드디어 고변(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서는 황소에게 격문을 보내니 황소의 기가 꺾였으며, 뒤에 벼슬이 도통순관 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려 할 때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주었는데, 그 한 구에,
하였고, 그의 자서(自敍)에도,
하였으니, 대개 열두 살에 당 나라로 들어갔다가 스물여덟 살에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말한 것이다. 그 행적이 이처럼 뚜렷하니, 이것으로 전을 설치한다면 예문지에 실린 심전기(沈佺期)ㆍ유병(柳幷)ㆍ최원한(崔元翰)ㆍ이빈(李頻) 등의 반장 정도되는 열전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만약 외국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지(志)에는 써야 할 것이다. 번진호용열전(藩鎭虎勇列傳)에서는 이정기(李正己)ㆍ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다 고려 사람인데도 각각 그 전을 만들어 그 사실을 소상하게 기록했는데, 어째서 문예열전에서만 최치원을 위하여 그 전을 설치하지 않았는가?
내가 사의(私意)로 헤아리건대,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기함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몸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사들을 압도했음에랴. 만일 전을 설치하여 바른 대로 그 사적을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삼한(三韓)은 하(夏) 나라 적부터 중국과 통하였으나 문헌이 민멸되어 전하지 않고, 수ㆍ당(隋唐) 이래로 비로소 작자가 있다. 을지문덕이 수 나라 장수에게 준 시와 신라 진덕 여주가 당 나라 임금에게 바친 송(頌)과 같은 것이 비록 간책(簡冊)에 실려 있으나 알려지지 않았다. 최치원에 와서야 당 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고 문장으로 이름을 천하에 날렸다. 그가 남긴 시 중의 한 연구(聯句)에,
하였는데, 동년인 고운은,
하였다.
대개 중국의 오악(五岳)은 모두 곤륜산에서 발달하고, 황하(黃河)는 성수해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가 윤주(潤州) 자화사(慈和寺)에 쓴 시의 한 글귀에,
하였다.
학사(學士) 박인범(朴仁範)이 경주(涇州) 용삭사(龍朔寺)에 쓴 시에,
하였다.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사천(泗川) 구산사(龜山寺)에 쓴 시에,
하였는데, 우리나라가 시로 중국을 울린 것은 이상 세 사람에서부터 시작했다. 문장이 나라를 빛내는 것이 이와 같다.
세속에서 전한 바에 의하면, 학사(學士) 정지상(鄭知常)이 일찍이 산사(山寺)에서 공부할 적에 달 밝은 어느 날 밤 혼자 절에 앉아 있노라니, 갑자기 시 읊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시에,
하니, 그는 귀신이 알려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뒤에 시원(試院)에 들어가니, 고관(考官)이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가 많다.’라는 것으로 글제를 삼고 봉(峯) 자 운(韻)을 냈다. 지상은 갑자기 그 글귀가 기억나서 이내 시를 잇달아 지어서 써 올렸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고관은 그 시를 읽어가다 함련(頷聯)에 이르러선 경어(驚語)라고 극찬하고는 드디어 우등으로 뽑았다 한다.
그러나 ‘중은 보느니’ ‘학은 보느니’한 한 연구는 비록 아름답지만, 기타의 것은 모두가 어린애의 말인데, 무엇을 취할 것이 있다고 우등으로 뽑기까지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시중(侍中) 김부식(金富軾)과 학사 정지상은 문장으로 함께 한때 이름이 났는데,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서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세속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상이,
라는 시구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부식(富軾)이 그 시를 좋아한 끝에 그를 구하여 자기 시로 삼으려 하자, 지상은 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 뒤에 지상은 부식에게 피살되어 음귀(陰鬼)가 되었다. 부식이 어느 날 봄을 두고 시를 짓기를,
하였더니,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면서,
하매, 부식은 마음속으로 매우 그를 미워하였다. 뒤에 부식이 어느 절에 가서 측간에 올라 앉았더니, 정지상의 귀신이 뒤쫓아 와서 음낭을 쥐고 묻기를,
하자, 부식은 서서히 대답하기를,
하니, 정지상의 귀신은 음낭을 더욱 죄며,
하자, 부식은,
하고 얼굴빛을 변하지 않았다. 정지상의 귀신이 더욱 힘차게 음낭을 죄므로 부식은 결국 측간에서 죽었다 한다.
복양(濮陽) 오세재 덕전(吳世才德全)은 시를 힘차고 준수하게 지었다. 그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 퍽 많지만, 강운(强韻)을 달아서 지은 것은 못 봤다.
그가 북산(北山)에 올라 극암(戟巖)을 시제(詩題)로 해서 시를 지으려고 할 때 사람을 시켜서 운자를 내게 하자, 그 사람은 일부러 험한 운자를 냈는데, 오 선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뒤에 몽고(蒙古) 사신이 왔는데 그는 시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이 시를 보고 재삼 찬탄하며,
하고 물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멍하니 대답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하였다. 그가 권변(權變)에 어두움이 이와 같았으니 한탄스럽다.
선배 중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난 자가 일곱 사람인데, 그들은 스스로 한때의 호준(豪俊)이라 생각하고 서로 어울려서 칠현(七賢)이라 하였으니, 아마 진(晉) 나라의 칠현을 사모한 것이었으리라. 매일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며 시를 짓되 자기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하니, 세상에서 그를 빈정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내 나이 19세였는데, 오덕전(吳德全)이 망년우(忘年友)로 삼아 항상 그 모임에 데리고 갔었다. 그 뒤 덕전(德全)이 동도(東都 경주(慶州))에 놀러갔을 때 내가 다시 그 모임에 참석하였더니, 이청경(李淸卿 청경은 이담지(李湛之)의 자)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하므로, 내가 곧 대답하기를,
하니, 모두들 크게 웃었다. 또 나보고 시를 짓게 하면서 춘(春)ㆍ인(人) 두 자를 운(韻)으로 부르기에 내가 곧,
라고 불렀더니, 모두들 불쾌한 기색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곧 거만스런 태도로 거나하게 취해서 나와 버렸다. 내가 젊어서 이처럼 미치광이 같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광객(狂客)으로 지목했었다.
내가 옛날 과거에 급제하던 해에 동년(同年)들과 통제사(通濟寺)에 놀러 갔었다. 그때 나와 4~5인은 일부러 뒤떨어져서 말 안장을 나란히하고 천천히 가면서 시를 창화(唱和)하였다. 맨 먼저 지은 사람의 시운(詩韻)을 가지고 각기 사운시(四韻詩)를 지었다. 이 시는 이미 노상에서 입으로 부른 것이라 붓으로 쓸 만한 것이 있지도 않거니와, 또한 시인의 상어(常語)로 생각하여 아예 기억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두 번이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하고, 그 사람은,
는 한 시구만을 외면서,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또한 믿지 않았다.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라는 한 시구 만을 기억하고,
하였다. 내가 비록 총명하지는 못하나 또한 매우 노둔한 사람은 아닌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 그때 갑작스레 짓고 조금도 유의하지 않아 우연히 잊어서일까. 전번 구양백호(歐陽伯虎)가 나를 찾아왔을 때 좌석에 있던 어떤 손이 이 시에 언급하고 이내 묻기를,
하니, 구양백호는 선뜻 대답하기를,
하자, 그 손은 약간 의심하였다. 그러자 구양백호는,
하였다. 아, 과연 이 말과 같다면, 이는 실로 분에 넘치는 말이니 감당할 바 아니로다. 전에 부친 절구를 차운하여 구양백호에게 주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시서육경(詩書六經)ㆍ제자백가(諸子百家)ㆍ사필(史筆)의 글로부터 유경벽전(幽經僻典)ㆍ범서(梵書)ㆍ도가(道家)의 설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깊은 뜻은 궁구하지 못했지만, 그를 섭렵하여 좋은 글귀를 따서 글 짓는 자료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또 복희(伏羲) 이후 삼대(三代)ㆍ양한(兩漢)ㆍ진(秦)ㆍ진(晉)ㆍ수(隋)ㆍ당(唐)ㆍ오대(五代) 사이의, 군신의 득실이며 방국의 치란이며 그리고 충신의사(忠臣義士)ㆍ간웅 대도(奸雄大盜)의 성패ㆍ선악의 자취를 비록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기억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들을 간추려 기송(記誦)하여 적시에 응용할 준비를 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혹시 지필을 가지고 풍월을 읊게 되면, 아무리 백운(百韻)에 이르는 장편(長篇)ㆍ거제(巨題)라 할지라도 마구 내려 써서 붓이 멈추지 않는다. 비록 금수(錦繡)와 주옥(珠玉) 같은 시편은 이루지 못하나 시인의 체재는 잃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건대, 자부함이 이와 같은데 결국 초목과 함께 썩게 되는 것이 애석하다. 한 번 붓을 들고 금문(金門)ㆍ옥당(玉堂)에 앉아서 왕언(王言)을 대신하고 고초(稿草)를 검토하며 비칙(批勅)ㆍ훈령(訓令)ㆍ황모(皇謨)ㆍ제고(帝誥)의 글을 지어 사방에 선포하여 평생의 뜻을 푼 뒤에야 말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대수롭지 않은 녹을 구하여 처자를 살릴 꾀를 하는 자의 유이기를 바랐겠는가.
아, 뜻은 크고 재주는 높건만, 부명(賦命)이 궁박(窮薄)하여 나이 30이 되도록 오히려 한 군현(郡縣)의 직임도 얻지 못하였으니, 외롭고 괴로운 온갖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내 두뇌를 알 만하다. 이때부터 경치를 만나면 부질없이 시를 읊고 술을 만나면 통쾌하게 마시며 현실을 떠나서 방랑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라, 바람은 화창하고 날씨는 따스하여 온갖 꽃이 다투어 피니, 이처럼 좋은 때를 그저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학록(尹學錄)과 함께 술을 가지고 구경하면서 수십 편의 시를 지었다. 흥이 무르익었을 때 취기로 인해 졸았는데, 윤학록이 운자를 부르며 나더러 시를 지으라고 권하기에 나는 곧 보운(步韻)으로 다음과 같이 지었다.
문장은 반마처럼 하려 하였는데 / 文章班馬擬同參
윤학록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하품하고 기지개하면서 깨니 바로 한 꿈이었다. 그래서 꿈속에 있었던 일을 윤학록에게 갖추 말하기를,
하고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따라서 희롱으로 다음과 같이 한 절구를 지었다.
내가 본래 시를 즐기는 것은 비록 포부(抱負)이기는 하나 병중에는 평일보다 배나 더 좋아하게 되니,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매양 흥이 날 때나 물(物)을 접촉했을 때에는 시를 읊지 않는 날이 없다. 그렇지 않으려 하여도 되지 않으니, 이것 또한 병이라고 말할 만하다.
일찍이 시벽편(詩癖篇)을 지어 뜻을 나타냈으니, 대개 스스로 상심한 것이다. 또 매일 한 끼니 식사는 두어 숟갈을 뜨는 데 불과하고 오직 술만 마실 뿐이라 항상 이것으로 걱정하였는데, 백낙천(白樂天)의《후집(後集)》에 실린 노경(老境)에 지은 것을 보았더니 병중에 지은 것이 많고, 술 마시는 것 또한 그러하였다. 그 한 시는 대략 이러하다.
꿈에 얻은 시를 수작한 시는 이러하다.
운모산(雲母散)을 먹는 데 대해 지은 시는 이러하다.
그 나머지의 시도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이런 시를 보고난 다음에 너그럽게 생각하기를,
하고, 따라서 그가 병중에 지은 시 열 다섯 수를 화답하여 다음과 같이 정을 서술한다.
낙구(落句)는 빠졌다.
백운거사(白雲居士)는 선생의 자호이니, 그 이름을 숨기고 그 호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이렇게 자호하게 된 취지는 선생의 백운어록(白雲語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집에는 자주 식량이 떨어져서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선생은 스스로 유쾌히 지냈다. 성격이 소탈하여 단속할 줄을 모르고 우주를 좁게 여겼으며, 항상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다. 초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갑게 곧 가서 잔뜩 취해 가지고 돌아왔으니, 아마도 옛적 도연명(陶淵明)의 무리이리라.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며 이렇게 세월을 보냈다. 이것이 그의 실록(實錄)이다. 거사(居士)는 취중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또 다음과 같이 스스로 찬(贊)을 지었다.
내가《서청시화(西淸詩話)》를 상고하니,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시란 보는 일을 읊는 것이다. 내가 옛날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노란 국화를 보았더니, 역시 떨어진 것이 있었다. 문공이 시에서 이미 ‘황혼의 풍우에 원림이 어둡다.’ 하였으니 ‘보는 일을 읊은 것이다.’고 하여 구양수의 말을 일축했어야 옳았을 것이고, 굳이 초사를 이끌었으면 ‘구공(歐公)은 어찌 이것을 보지 못했는가?’라고만 했어도 또한 족했을 것인데, 도리어 ‘배우지 못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편협하였을까?
구양수가 설사 박학 다문한 지경에 이르지 못한 자라 하더라도 초사가 어찌 유경벽설(幽經僻說)이기에 구양수가 보지 못했겠는가? 나는 개보(介甫 왕안석의 자)를 장자(長者)로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옛날 매성유(梅聖兪 성유는 송(宋)의 시인 매요신(梅堯臣)의 자)의 시를 읽고 마음속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옛날 사람들이 그를 시옹(詩翁)이라고 호칭하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겉으로는 약한 듯하나 속으로는 단단한 힘이 있어 참으로 시 중의 우수한 것이었다. 매성유의 시를 알아본 뒤라야 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옛사람들이 사령운(謝靈運)의 시에,
는 것을 용하다고 하나, 나는 좋은 점을 모르겠다. 서응(徐凝 당(唐) 나라 시인)의 폭포시(瀑布詩)에,
는 것은, 나는 매우 좋은 시구라고 생각되는데, 소동파(蘇東坡)는 악시(惡詩)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나 같은 자의 시를 알아보는 것은 옛날 사람에 미치지 못함이 매우 멀다. 도잠(陶潛)의 시는 담연히 화평하고 고요하여 마치 청묘(淸廟)의 거문고가 줄이 붉고 구멍이 커서 한 사람이 창(唱)하면 세 사람이 화답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 체를 본받으려 하나 끝내 비슷하게도 할 수 없으니 더욱 가소롭다.
송(宋) 나라 선자(禪子) 조파(祖播)가, 우리나라에 오는 구양백호(歐陽伯虎)의 편을 이용하여 시 한 수를 우리나라 공공상인(空空上人)에게 부치고, 겸하여 까맣게 옻칠한 바리때 다섯 개와 반죽장(斑竹杖) 한 개를 주었으며, 또 암자의 이름을 토각(兎角)이라 지어 손수 그 액자를 써서 부쳤다.
나는 두 조사(祖師)가 천 리 밖에서 서로 뜻이 합한 것을 가상히 여기고 또 구양(歐陽) 군의 시명(詩名)을 듣고 무척 사모하였다. 그래서 두 수의 시로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선사(禪師) 혜문(惠文)은 고성군(固城郡) 사람이다. 나이 30여 세에 비로소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여러 승질(僧秩)을 거쳐 대선사(大禪師)에 이르렀다. 그는 일찍이 운문사(雲門寺)에 머물렀었는데 위인이 강직하므로 한때 유명한 사대부들이 많이 그를 따랐다. 시 짓기를 즐겨 산인체(山人體)를 체득하였다. 그가 일찍이 보현사(普賢寺)에 쓴 시는 이러하다.
그윽한 풍치가 담겨 있으며, 함련(頷聯)은 사람들의 전송(傳誦)하는 바가 되었다. 그는 호를 송월화상(松月和尙)이라 하였다.
내가 꿈에 깊은 산에서 올라가 길을 잃어서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누대(樓臺)가 매우 특이하게 화려하였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여기가 어떤 곳이냐고 물으니, 선녀대(仙女臺)라고 대답하였다. 조금 뒤에 미인 6~7명이 문을 열고 나와서 맞이하므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더니, 이내 시를 청하였다. 그래서 나는 곧 다음과 같이,
고 불렀더니, 여러 선녀들은 자못 기뻐하지 않았다. 나는 비록 그 까닭은 몰랐지만 곧,
고 고쳐 지었다. 여러 선녀들이 다음 구를 계속 지으라고 청하기에, 내가 여러 선녀들에게 사양하니, 한 선녀가 다음과 같이 연속시킨다.
내가,
하니, 박장 대소하였다. 따라서 꿈을 깼다. 나는 추후에 그 시를 연속하여 다음과 같이 지었다.
서백사(西伯寺) 주지(住持) 돈유 선사(敦裕禪師)가 시 두 수를 부쳐왔다. 사자(使者)가 문에 이르러 독촉하므로 주필(走筆)로 다음과 같이 화답해 부쳤다.
선사는 다음과 같이 답서를 보내왔다.
어느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푸른 옥으로 된 조그마한 연적(硯滴)을 나에게 주기에, 두드려보니 소리가 나고 밑은 둥글고 위는 뾰족하였으며, 매우 작은 두 구멍이 있었는데, 다시 보니 구멍이 없어졌다. 꿈에서 깨어 그를 이상히 여겨 시로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지주사(知奏事) 최공(崔公)의 집에 천엽류(千葉榴) 꽃이 만발하였다. 그것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한(內翰) 이인로(李仁老)ㆍ내한 김극기(金克己)ㆍ유원(留院) 이담지(李湛之)ㆍ사직(司直) 함순(咸淳)과 나를 특별히 초청하여 문자를 내서 시를 짓게 하였다. 나의 시는 다음과 같다.
내가 늦게 출세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내가 중추(中秋)에 용포(龍浦)에 배를 띄워 낙동강(洛東江)을 지나서 견탄(犬灘)에 정박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밤은 깊고 달은 밝은데, 급류의 여울은 돌을 치고 푸른 산은 물결에 잠겼으며 물은 매우 맑으니 뛰는 고기와 달리는 게를 굽어 보며 셀 수가 있었다. 그래서 배에 의지하여 길게 휘파람부니 기분이 상쾌하여 쇄연(灑然)히 봉영(蓬瀛 봉래(蓬萊)와 영주(瀛洲))의 생각이 감돌았다. 강가에 용원사(龍源寺)가 있었는데, 그 절 중이 나와 맞이한다. 서로 대하여 약간 이야기를 나누고 따라서 두 수의 시를 이렇게 썼다.
흥이 날 때 경솔히 읊은 것이라 또한 격률(格律)에 맞는지 알지 못하겠다.
다음날 배를 띄워 노를 젓지 않고 물의 흐름을 따라서 동으로 내려가 밤에 원흥사(元興寺) 앞에 정박하여 배 속에서 기숙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밤은 고요하고 사람은 잠들었는데, 오직 들리는 것은 물 가운데서 고기가 팔딱팔딱 뛰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팔뚝을 베고 조금 졸았으나 밤 기운이 차가워서 오래 잘 수가 없었다. 어부의 노래소리와 상인의 피리소리는 원근에서 서로 들리고, 하늘은 높고 물은 맑으며 모래 빛에 언덕은 하얗고 달빛에 찬란한 물결은 선각(船閣)을 흔든다. 앞에는 기암 괴석이 있어 마치 범이 걸터앉고 곰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듯하였다. 나는 건(巾)을 잦혀 쓰고 배회하노라 자못 강호(江湖)의 낙을 얻었는데, 하물며 날마다 미인을 끼고 관현(管絃)ㆍ가무(歌舞)로 마음껏 논다면 그 낙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은 두 수의 시를 지었다.
이때 한 아전을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였다.
나는 조칙(朝勅)을 받들어 변산(邊山)에서 벌목(伐木)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벌목하는 일을 항시 감독하므로 나를 ‘작목사(斫木使)’라고 부른다. 나는 노상에서 장난삼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이것은 나의 하는 일이 지게꾼이나 나무꾼의 일과 같기 때문이다.
처음 변산에 들어가니 겹겹이 산봉우리가 솟았다 엎뎠다 구부렸다 폈다 하였고 옆에 큰 바다가 굽어보이고 바다 가운데 군산도(群山島)ㆍ위도(蝟島)가 있는데, 모두 조석으로 이를 수가 있었다. 해인(海人)들이 말하기를,
하였다. 일찍이 주사포(主使浦)를 지날 때 밝은 달이 고개에 떠올라 모래 벌판을 휘영청 비추어서 기분이 상쾌하기에 고삐를 놓고 천천히 가며 앞으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침음(沈吟)하였더니 마부가 이상히 여겼였는데,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나는 당초 시를 지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저절로 지어졌다.
시(詩)에는 아홉 가지의 불의체(不宜體 마땅하지 않은 체)가 있으니, 이는 내가 깊이 생각해서 자득한 것이다.
한 편 안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은 바로 재괴영거체(載鬼盈車體)요, 옛사람의 뜻을 절취하는 것은, 좋은 것을 절취함도 오히려 불가한데 절취한 것도 또한 좋지 못하다면 이것은 바로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다. 그리고 강운(强韻)을 근거없이 내어 쓰는 것은 바로 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요, 그 재주를 요량하지 않고 운자를 정도에 지나치게 내는 것은 바로 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요, 험한 글자를 쓰기 좋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혹되기 쉽도록 하는 것은 바로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요, 말이 순조롭지 못한데 사람이 그것을 쓰도록 힘쓰는 것은 바로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요, 통상 말을 많이 쓰는 것은 바로 촌부회담체(村夫會談體)요, 구가(丘軻 구는 공자 이름이고 가는 맹자 이름이다)같은 것을 쓰기 좋아하는 것은 바로 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요, 거친 말을 산삭하지 않은 것은 바로 낭유만전체(莨莠滿田體)다. 이 불의체를 능히 면한 뒤에야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다.
대저 시란 뜻으로 주를 삼는 것이니 뜻을 베푸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이 그 다음 어렵다. 뜻은 기운으로 주를 삼는 것이니, 기운의 우열로 말미암아 곧 천심(淺深)이 있게 된다. 그러나 기운은 하늘에 근본한 것이니, 배워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운이 약한 자는 문장을 수식하는 데 공을 들이고 뜻으로 우선을 삼지 않는다. 대개 문장을 다듬고 문구를 수식하면 그 글은 참으로 화려할 것이나, 속에 함축된 심후한 뜻이 없으면 처음에는 꽤 볼 만하지만, 재차 음미할 때에는 맛이 벌써 다한다. 시를 지을 때에는 먼저 낸 운자가 뜻을 해칠 것 같으면 운자를 고쳐 내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의 시를 화답할 경우에 만일 험한 운자가 있거든, 먼저 운자의 안치할 바를 생각한 다음에 뜻을 안배해야 한다.
시구 중에 대(對)를 맞추기가 어려운 것이 있으면, 한참 동안 침음(沈吟)해 보아서 능히 쉽게 얻을 수 없거든 곧 그 시구는 아낌없이 버리는 것이 좋다. 시를 구상할 때에 깊이 생각해 들어가서 헤어나지 못하면 거기에 빠지고, 빠지면 고착되고, 고착하면 미혹되고, 미혹하면 집착되어 통하지 못하게 되니, 오직 이리저리 생각하여 변화 자재하게 해야 원만하게 된다.
혹은 뒷글귀로 앞글귀의 폐단을 구제하기도 하고, 한 글자로 한 글귀의 안전함을 돕기도 하니, 이것은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순전히 청고(淸苦)로 시체(詩體)를 삼으면 산인(山人)의 체격(體格)이요, 순전히 화려한 말로 시편을 장식하면 궁액(宮掖)의 체격이다. 오직 청경(淸警)ㆍ웅호(雄豪)ㆍ연려(姸麗)ㆍ평담(平淡)을 섞어 쓴 다음에야 체격이 갖추어져서, 사람들이 능히 일체(一體)로 이름하지 못한다.
시의 병통을 말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쁜 일이다. 그의 말이 옳으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나의 뜻대로 할 뿐이다. 어찌 듣기 싫어하기를 마치 임금이 간언을 거절하는 것과 같이 하여, 끝내 자기의 허물을 모르고 넘길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시가 이루어지면 반복 관찰하되, 지은 것으로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이나 또는 평생 심히 미워하는 자의 시를 보듯하여, 하자(瑕疵)를 열심히 찾아도 오히려 하자가 없어야만 그 시를 세상에 내놓는다.
무릇 옛사람의 시체를 본받으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시를 습독(習讀)한 뒤에 본받아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표절도 오히려 어렵다. 도둑에게 비하면, 먼저 부잣집을 엿보아 그 집 문과 담의 위치를 눈익혀 둔 뒤에야 그 집을 잘 들어가 남의 것을 탈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되 남이 모르게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의 낭탁(囊橐)을 더듬고 협상(篋箱)을 열 때에 반드시 잡힐 것이다.
나는 젊을 때부터 방랑하여 몸을 단속하지 않고 글 읽는 것이 매우 정하지 못하여, 비록 육경(六經)이나 자사(子史)의 글도 섭렵했을 뿐, 원리를 궁구하는 지경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제가(諸家)ㆍ장구(章句)의 글임에랴. 이미 그 글을 익숙히 알지 못하는데 그 체를 본받고 그 말을 도둑질하겠는가. 그래서 부득불 새말로 짓게 되는 것이다.
《서청시화(西淸詩話)》에 이산보(李山甫)가 한사(漢史)를 보고 읊은 시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나는 이를 아름다운 시구로 여긴다. 그런데 고영수(高英秀)라는 자가 기롱하기를 ‘파강시(破舡詩)’라 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무릇 시란 물(物)의 체(體)를 말하기도 하고, 또는 그 체를 말하지 않고 곧장 그 용(用)을 말하는 것도 있다. 산보(山甫)가 뜻을 밝힌 것은, 필시 한(漢) 나라를 배[舡]에 비유하고 곧장 그 용을 말하기를 ‘반쯤 빠졌다’ ‘깊이 잠겼다’고 한 것이리라. 만일 그 당시에 산보가 있어서 말하기를,
라고 하였더라면, 영수(英秀)는 무슨 말로 답변했겠는가. 《시화》에서는 또한 영수를 함부로 지껄이는 경박한 무리로 여겼다면 반드시 그의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위심시(違心詩) 열두 구를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대저 만사가 마음과 틀리는 것은 거개 이와 같다. 작게는 일신의 영췌(榮悴)ㆍ고락(苦樂), 크게는 국가의 안위(安危)ㆍ치란(治亂)이 마음과 틀리지 않은 게 없다. 졸시(拙詩)는 비록 작은 것을 들었으나 그 뜻은 실로 큰 것을 비유하는 데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사쾌시(四快詩)는 이러하다.
그러나 가뭄 끝에 비록 비를 만난다 하더라도 비 뒤에는 또 가물 것이고, 타향에서 친구를 본다 하더라도 방금 또 작별할 것이고, 동방 화촉이 생이별하지 않을 것이라 어찌 보장하며, 금방에 이름 걸리는 것이 우환(憂患)의 시초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보장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마음에 틀리는 게 많고 마음에 맞는 게 적은 것이니 탄식할 뿐이다.
첫댓글 내용은 주로 시화(詩話)에 관한 것으로 대부분이 《이상국집》21~23권과 후집(後集) 권11에 수록된 글과 중복되는데,
자구(字句) 출입과 문장 수정은 물론 많다. 중복된 것은 다음과 같다.
권20 잡저(雜著)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 권21 설서(說序)ㆍ논시설(論詩說)ㆍ칠현설(七賢說)ㆍ오덕전극암시발미(吳德全戟巖詩跋尾),
권22 잡문(雜文) 당서불립최치원열전의(唐書不立崔致遠列傳議)ㆍ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
권23 기(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후집(後集) 권11 잡의(雜議) 왕문공국시의(王文公菊詩議)ㆍ이산보시의(李山甫詩議).
방대한 문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다읽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방대한 분량에 주눅이 듭니다.
후학을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은것을 진심으로 감사 드립
니다.
좋은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