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이 땅에서 경험했던 천국 마 17:1-9, 벧후1:16-21
우리가 전도할 때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는 당신 천국 갔다 왔느냐? 아니면 당신 지옥 갔다 왔느냐? 같은 질문이다. 어느 누구도 살아생전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올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시작하실 때 처음 외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셨다(마4:17). 예수님께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이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이해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은 누구도 보지 못한 천국을 이해하도록 말입니다.
(마13:24) 그분께서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린 겨자 씨 한 알과 같다고 하셨는데 32절에는 이 비유를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 정도라고 하셨는데 이 땅에서 믿었던 천국은 마치 작은 겨자 씨처럼 미미하게 보일지라도 실제 천국 가서 본다면 작은 씨앗이 후에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 천국이 아닐까 생각한다.(마13:44-46) 44 또 하늘의 왕국은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으니라.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숨겨 두고 그것의 기쁨으로 인해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하늘의 왕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으니라. 46 그가 매우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이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만약 어느 밭에 값진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던가? 또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진주를 발견하였다면 그 사람은 즉시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그 밭이나 그 진주를 사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시니 천국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세상에는 없다는 말씀이시다. 정말 사람들이 천국을 믿는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가장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정말 천국의 가치는 이 땅에 있는 어느 것으로도 헤아릴 수 없으며 인간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므로 천국에서 오신 예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천국을 여러 가지 비유로 이야기 하셨지만 인간이 살았을 때는 천국을 갈 수 없고 죽어서 영혼으로 갈 수 있다는 것에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 예수님을 믿지는 않는지 생각해 본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사후에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이었는데 그 길은 오직 한가지 즉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하지만 천국을 100% 확신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은 주님의 제자들이 죽기 전에 천국이 임한 것을 보는 장면이 연출된다. 천국의 권능이 잠시 임한 것을 인간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것을 기록하여 놓아서 천국의 실존을 이해하기에 하나의 샘플이 아닌가 생각한다. 과연 죽지 않고 살아서 이 땅위에 임하였던 천국을 경험한 제자들을 통해 천국이 어떤 곳인가 생각도 해보고 또 천국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오신 분이 아닙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탄생을 말한다면 예수님은 처녀 몸을 통해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적어도 팔백년 전 이사야는 말하기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하리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마1:23). 이성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남자 없이 여자 혼자서 아기를 낳을 수 있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은 능치못하심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는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으로 변형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적어도 한 달 전쯤 제자 3명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을 때 예수님 얼굴이 해같이 빛나셨고 온 몸에서도 빛이 나온 모습을 제자들이 목격했다는 사실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셋째는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사망은 죄 때문에 오는 형벌인데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범한 죄값을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넷째는 부활입니다. 부활이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인데 이 땅에서 부활을 보여주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부터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즉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지만 죽은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말씀하신 대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망권세를 물리치셨으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는다면 사망권세를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는 승천입니다. 승천이란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인데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신 후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서너 번 부활의 몸을 보여 주신 후 오백명정도가 보는 앞에서 구름 타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는 자신의 선택이지만 이런 믿음의 결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생애의 중요한 사건 가운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사 변형되신 것에 대한 말씀을 한번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이미 삼년이 지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시점에 이스라엘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마16:13-16) 13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들어오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 곧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14 그들이 이르되 어떤 이들은 주께서 침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도 하며 다른 이들은 에레미야나 대언자들 중의 하나라고 하나이다, 하거늘 15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매 1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것을 네게 계시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 기슭에 있는 성읍이다. 로마는 이 지역을 헤롯 빌립보에게 하사하였는데 헤롯왕의 아들인 빌립보는 로마 황제 칭호인 가이사랴와 자신의 이름인 빌립보를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한 곳이다.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한 것은 결코 쉬운 말 한마디가 아닌 목숨을 건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이사랴 빌리보에는 이방신전과 로마황제의 신전이 있는 곳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야말로 성령님에 의해 고백되어 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 다시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셨다고 했습니다(마16:21).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성질 급한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듣자 베드로는 강하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부인하기를 이 일이 결코 주께 임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라고 만류하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호된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마16:24)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신앙교육을 새롭게 전환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란 예수님 안에서 가졌던 야망, 꿈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건설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저마다 한 자리를 차지할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구원 받는 다는 것인데 제자들은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이 땅에서 건설될 메시아 왕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큰 자인가? 서로 논쟁도 하였고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요구하기도 하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아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 받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런 제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든 바꾸어 주어야 하셨습니다. 얼마 후면 오순절에 신약교회 모습이 드러나게 될 때 제자들은 교회의 기둥으로 서야 할 것이지만 제자들의 현 수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연약함을 잘 아셨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된다는 유대교의 메시야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메시야가 죽고 부활함을 확실한 방법으로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지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사 예수님의 변형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1. 변형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갈릴리의 어부출신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하셨는데 이 예수님이 올라가신 산은 신학자들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변화산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이 셋을 데리고 그저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기록했기 때문에 확실한 이름을 알 수는 없으나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가버나움에서 가장 가까운 타보르산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는데 높이 588m이인 타보르산은 갈릴리호에서 서쪽으로 18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타보르 산 정상에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하고 대화하였다고 하여서 로마카톨릭교에서 세운 예수 변화기념교회와 그리스 정교회가 세운 엘리야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타보르산이 바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였던 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로 보는 사람들은 높은 산이 영적으로 높은 산이 아닌 실제 높은 산이며 그 산이 바로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헤르몬 산이라는 것이 가장 근접한 해석이라고 합니다. 이 헤르몬 산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서쪽으로 약 4km 정도 떨어져있는 2814m 높은 산입니다. 헤르몬 산의 정상에는 일년 내내 눈이 덮여 있으며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갈릴리 호수로 흘러들어가고 요단강을 흐르며 이스라엘 전체를 풍요롭게 하는 축복의 근원지라 할 수 있습니다.
(마17:1-2) 1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취해 따로 그들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사 2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매 그분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그분의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이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갑자기 변형되셨는데 얼굴이 해같이 빛나셨으며 예수님 입으신 옷도 빛과 같이 하얗게 변형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보여주신 변형된 모습이라는 뜻은 마치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것 같은 의미로 예수님은 이제까지 본 모습과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 하면 육을 지닌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서 대화하려면 예수님이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제자들은 산에 올라오느라고 피곤하였는지 곧 잠들었다가 예수님의 대화소리에 깨보니 예수님이 변형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조금전 산에 같이 올라오셨을 때 주님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라워하였을까? 제자들은 빛속에 감추어진 예수님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을 막달라 마리아가 만났을 때 3일 전에 만났던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을 동산지기라고 착각하였던 것처럼 졸다가 깨어난 제자들도 변형된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라워하였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이 변형된 모습은 예수님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은 그 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로부터 해같이 광채가 나왔으며 또 이 광채는 옷에도 반사되어서 그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다면 그 광채가 얼마나 빛났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그 어떤 세탁하는 사람도 그 옷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옷에 반사된 광채가 그 정도였으면 실제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광채는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능합니까? 변형되신 예수님은 이것을 통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본래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던 그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십니다. 우리들도 빛이신 예수님과 늘 교제하며 살아간다면 예수님 얼굴에 나타난 광채가 우리에게도 반사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삶은 죄를 멀리하고 늘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빛과 어둠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빛에 거하면 어둠은 자연적으로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안짓겠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죄를 멀리하게 됩니다.
2.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다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햇빛처럼 변화되는 놀라운 일이 있었는데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BC 1443년경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킨 지도자로서 예수님 기준으로 1400년 전의 사람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고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왕하2:11)는 북이스라엘 아합왕 때 인물이었는데 아합왕의 시대가 BC 874-853년이었으니 엘리야는 800년 전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들 조차도 600년의 시간차를 두고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인데 이 높은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직 천국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온 구약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죽은 사람들이나 혹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오직 여기 높은 산 위에서 과거에 이 땅에 살았던 두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대화하였던 사건은 정말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으로 이 땅에서 잠깐 천국을 보여준 것입니다. 또 의문이 가는 것은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를 본적도 없는데 어떻게 즉시로 알아봤을 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서 보게 될 수많은 사람들 중에 성경에 나오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왕, 엘리야, 바울을 본다면 즉시로 알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셨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했다는 이런 이야기는 어떤 공상적인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입니다. 변화산상에는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였던 천국이었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천국이 제자들의 눈앞에 보여진 것입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했던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왜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났을까요? 이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가 읽었던 마태복음에는 이 부분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으나 누가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눅9:30-31) 30 보라 두 사람이 그분과 이야기 하는데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더라. 31 그들이 영광중에 나타나서 앞으로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져야 할 그분의 별세에 관하여 말하였으나
여기서 별세라는 것은 세상을 이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이나, 사무엘이나 다윗같은 기라성 같이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1400년 전 모세와 800년 전 엘리야를 초청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관하여 먼저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들이 영광중에 나타나서 앞으로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셔야 할 그분의 별세에 관하여 말하였다(눅9:31)”는 이 말씀은 모세와 엘리야가 곧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낸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1절에서 보면 엿새, 높은 산, 영광 된 모습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구약에는 메시야 오시는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신명기에는 주 네 하나님께서 네 한가운데서 곧 네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니라(신18:15). 또 스가랴에는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 그를 위하여 애곡하며 사람이 자기의 처음 난자를 위하여 쓰라리게 슬퍼하듯 그를 위하여 쓰라리게 슬퍼하리로다(슥12:10). 이런 말씀을 본다면 예수님은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오시리라고 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실제로 부활하셨던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다가 오셔서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눅 24:27)고 기록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구약에서 대언자들이 오리라고 한 예언자가 예수님이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의 대화를 통해 메시아는 이 땅에서 죽어야 할 분임을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가르치셨습니다. 모세가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문 앞에 둔 모압 땅에 와서 죽을 당시 나이가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어둡지 아니하였고 타고난 힘이 줄지 아니하였더라(신34:7). 모세는 노환으로 자연사 한 것이 아니며 모세가 모압땅에서 죽었으나 아무도 이날까지 그의 무덤에 대해 알지 못하느니라(신34:6)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무슨 말을 하고 엘리야는 무슨 말을 했을까?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에 관해서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했는가 하면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육신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를 원치 않으셨고 결정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지만 육신적으로 생각할 때는 떠나기가 싫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절실한 내용이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혼을 잃으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 혹은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혼을 대신하게 하겠느냐?(마16:26).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별세에 대하여 모세와 대화를 나누셨는데 모세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나는 모압 땅에서 죽었지만 내 시체가 없어졌던 것처럼 아 당신의 시체는 없어지므로 세상 사람과 다르고 당신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위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시냐? 그러니 십자가 지는 것에 대해 걱정 마시고 십자가를 지십시오, 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또 모세는 예수님에 대해 예언하신 신명기 말씀을 들려주었을 것이라 생각도 해봅니다. 신명기 말씀이 사도행전3장에서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3:22) 진실로 모세가 조상들에게 이르되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희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너희는 그의 모든 일에서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선지자의 이름을 들면서 당신은 나 같은 선지자라 말하지 않았나 생각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지자가 있었지만 별세를 앞둔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모세를 필요로 하였던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팔백년 전에 살았던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엘리야는 디셉 사람으로서 구약에 살았던 모든 대언자는 최소한 5대 족보가 다 있는데 엘리야는 그저 아비가 누군지 어미가 누군지 마치 멜기세덱과 같이 족보가 없는 대언자였습니다. 그런 엘리야 대언자도 모세 못지않은 큰 기사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언자도 죽지 않고 살아서 하늘로 승천한 자는 없지만 승천한 엘리야는 다시 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말4:5) 보라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대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이로써 예수님의 별세를 앞둔 엘리야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하늘로 승천한 사람 아닙니까. 말라기 선지자가 말하기를 다시 오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나와 같이 하늘로 승천할 것이며 또 나같이 재림할 것입니다. 엘리야는 승천과 재림을 실제로 경험하였으므로 예수님의 별세에 관해서 힘을 실어 주었으리라고 생각해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구약시대 어떤 선지자보다도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서 확신과 담대함을 주었고, 승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상에 나타났고, 또 예수님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이미 1400백년 전 또는 800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났던 저들을 만나기 위하여 그 얼굴이 빛처럼 변화되어서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에 대해서 많은 격려를 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는 것을 깨닫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라는 외침을 통해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를 즐거이 지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4. 베드로가 요청한 장막 셋이 의미하는 것은 ?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는 동안 제자들은 졸다가 깨어나니 지금 세 명의 제자들은 평생 보지 못할 놀라운 광경을 보는 것입니다. 모세는 1400년 전 사람이고 또 엘리야는 800년 전 사람인데 이렇게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부활이시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죽었던 모세가 어떻게 다시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던 엘리야가 어떻게 다시 보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의 주님이시고 장차 우리들도 천국에 들어가면 모세도 만나고 엘리야도 볼 것이겠지만 우리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나보게 될 줄 믿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눈으로 보고 또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장차 예수님이 어떠한 사역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졸다가 깨어난 베드로는 예수님께 마음에도 없는 엉뚱한 요구를 하였습니다.
(마17:4) 그때에 베드로가 응답하여 예수님께 이르기를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온즉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여기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게 하옵소서, 하더라.
베드로의 장막 셋을 짓겠다는 요구는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도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했고 아무 생각없이 내뱉었던 베드로의 뜬구름 잡는 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고 있을 때에 처음부터 본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잠결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눈을 떠 보니까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눅9:32-33) 32 베드로와 또 그와 함께한 자들은 깊이 잠드니라. 그들이 깨어나서 그분의 영광과 그분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그분을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이르기를 선생님이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온즉 우리가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선생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게 하옵소서 하나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알지 못하더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자기가 한 말을 자기도 모르는 자가 장막을 짓겠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누구인가 하면 십자가 지기 전 성령을 받지 못하고 그 심령이 깨어 있지 못한 자들입니다. 짐승들도 때와 시기를 아는데(렘8:7) 하물며 제자들은 때와 시기를 알지 못하고 여기에 장막 셋을 짓겠다고 엉뚱한 요구를 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지금이 어느 때인지 시기와 때를 분별하지 못하면 베드로처럼 여기에 장막 짓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졸다가 갑자기 깨어나서 예수님께 한다는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이곳에 장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님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짓겠다는 베드로의 요청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엿새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안된다고 했다가 호되게 꾸중 들었는데 방금 전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장막을 짓겠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눈앞에 벌어진 천국의 영광에 도취되어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을 깨닫지 못하고 장막을 짓고 그곳에 머물겠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스승이 앞으로 가시는 길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베드로의 잘못은 현실에 안주하는 자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셨으나 베드로는 사태파악을 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겠다고 한 것은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하는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 씨름하고 계시는데, 베드로는 눈앞에 펼쳐진 천국에 취하여 그 자리에 머물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현실안주하는 평안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까지 이 땅에 살게 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그냥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잘 되고 형통하니까, 그냥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한시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베드로와 같은 현실안주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결국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죽음을 앞두고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있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딤후4:1-2) 1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곧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2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전도는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걸어야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편리한 신앙을 버리고 늘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목표지향의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5. 하나님의 음성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십자가를 지시는 별세에 대해 무관심한채 횡설수설 할 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마17:5)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보라 그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직접 음성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면서 구름 속에서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라는 음성입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확신을 못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것입니다.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그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더라(눅9:35)”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본질상 하나님과 같다는 의미이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아들이라는 표현은 육신적인 부모가 자녀를 낳는다는(born) 의미가 아닙니다.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begotten입니다. 이는 이 땅에 어떤 특수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즉 어떤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쓰이는 단어가 begotten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로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으라고 강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류의 죄값을 속죄하고자 이 땅에 오신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러한 경험은 실로 엄청난 경험입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것들을 지금 세 명의 제자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만 들었던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음성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일로 인해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마17:6) 제자들이 그 음성을 듣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더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으므로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마17:7) 예수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손을 대시면서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예수님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17:8) 그들이 눈을 들어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들이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오직 자기들과 함께한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한동안 꿈과 같기도 한 엄청난 사건이 휘몰아 친 후에 남아계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종점은 결국 예수님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 앞에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바로 보기만 하면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율법과 예언은 그림자이고 예수님은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자들을 위해 변형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마17: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날 때까지는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제자들에게 본 것을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실 때 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어설프게 말했다가 사람들에게 혼란만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예수님의 사역이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
6 베드로의 생애 중 가장 놀라운 경험
오늘 우리는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신 사건을 조명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실로 엄청난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해와 같이 밝게 빛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형된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이미 아주 오래전에 죽었던 모세와 하늘로 승천했던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셨던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연출의 의도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정말 믿을 수 있습니까? 입으로 수없이 믿는다고 해도 그것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것에 대해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합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자신이 경험한 체험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벧후1:19-21)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20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21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베드로의 변화산에서 체험보다 더 확실한 것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은 개인적인 의견이나 주장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감동시키시고, 성령님의 의도대로 기록하게 하신 것이 성경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의 생각이 자리할 아무런 여지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깨닫게 하십니다. 베드로도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오셔서 그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의도와 목적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온전히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시는 말씀을 깨닫는 것이 경험보다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가 경험한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성령님의 도움으로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많은 기적은 당시뿐만 아니라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성경을 읽는 자마다 신비에 쌓이게 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의 감동을 받게 합니다. 특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얼굴이 갑자기 변형되어 태양과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예수님이 1400년 전에 살았던 모세와 800년 전에 살았던 엘리야와 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들 외에 어느 누구도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 제자는 이러한 일들을 너무나 확실한 사건이라고 베드로는 변화 산상에서 예수님을 정확하게 베드로서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벧후1:16-17) 16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려 줄 때에 교묘히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며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니라. 17 뛰어난 영광으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그분께서 나서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말씀처럼 베드로는 나중에 가서 깨달았습니다. 또 제자들은 죽었던 모세와 승천했던 엘리야를 통해서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살았던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화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면서 제자들은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가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하였으며,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 갇혀있는 관점에서 벗어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 세상과 자신들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베드로의 고백이
베드로 후서 1장에 있는 말씀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려 줄 때에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는데 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는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높은 산에 임했던 천국이 너무나 확실한 것이라고 하면서 예수님 죽음과 부활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으면서 장차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