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章 광란(狂亂)의 바다.
1
"객창(客艙:객실)으로 들어가자."
범위가 적엽명에게 말을 건넸다.
오진검 조차 태연하게 서있을 수 없는 비바람. 하늘에서 떨
어지는 빗방울과 바다에서 퉁겨 올라오는 바닷물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사방이 온통 성난 물바다였다.
삼판(衫板:갑판) 위에는 선원 몇몇만이 닻을 내리기에 여념
없을 뿐, 승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사양하지 마라. 다른 때 같았으면 고물에 앉아가든 돛대에
매달려 가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재수 없게도 폭풍의 중심권에
들어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끄릉……!
늑대가 화답(和答)했다.
겁 많은 놈은 오진검을 따라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객창
으로 들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꾸르릉……!
꽈앙!
거칠게 다가온 해일 한줄기가 뱃전을 후려쳤다.
삼판 위에 놓인 물건들은 밧줄로 단단히 묶였지만 금방이라
도 퉁겨져 오를 듯 심하게 요동쳤다.
적엽명도 상당히 곤란해 보인다.
닻을 굳게 움켜잡고 있지만 바닷물에 휩쓸리는 것은 시간문
제처럼 비쳐졌다. 더군다나 한 손은 황소만한 늑대를 움켜잡
고 있으니.
"객창으로 들어가자고!"
범위는 혹여 비바람 소리에 들리지 않았나 싶어서 내력(內
力)을 섞어 고함질렀다. 손을 뻗으면 서로 마주 잡을 수 있
는 거리지만 고함을 지르지 않고는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적엽명이 비칠거리며 일어섰다.
짚으로 만든 도롱이는 물에 잔뜩 베어 몹시 무거워 보였고,
커다란 방갓은 바람에 날려갈 듯 마구 요동친다. 설혹 방갓을
벗고 있다 할지라도 적엽명의 굳건해 보이는 얼굴, 여인네처
럼 커다란 눈에 샛별을 박아놓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는 볼 수
없었으리라. 비바람이 워낙 거세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드니
까.
하지만 그가 움직인 곳은 오진검이 서있는 상실 난간 쪽이
아니었다. 그는 늑대 갈기를 움켜쥐고 고물 안쪽으로 기어들
어 갔다.
"폭풍이 몰아치고 있단 말야! 삼판에서 폭풍을 맞는다는 것
은 자살행위야!"
적엽명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예비 닻으로 몸을 가리고 방갓을 깊숙이 눌러썼다.
우르릉……! 꽈앙!
거친 파도가 삼판을 훑었다.
적엽명도 범선을 뒤흔들 만큼 강도 높은 파도에 사정없이
휘말렸다.
'미친 놈!'
범위는 낯선 사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상실로 들어가자고 하면 감지덕지 따라올 줄 알았는데.
범위는 몸을 돌려 자신의 객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험한 파도와 비바람 때문에 더 이상 난간에 서있기가 부
담스러웠다.
왜? 자신은 왜 낯선 사내에게 호기심이 치미는 것일까?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왜 까닭 모를 질투가 이글이글 타오르
는 것일까?
최대 연적이랄 수 있는 한광도 무시해버린 자신이거늘.
'일급 관찰 대상자야. 일급……'
그는 상실로 들어서기 전, 적엽명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예비 닻 속에 파묻혀 분노한 파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낯
선 사내는 동전 한 닢처럼 왜소해 보였다.
선장과 선원들은 뱃삯을 곱으로 받은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승객들은 궂은 날씨에 배를 탄 책임을 져야 한
다. 언제 침몰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혹은 정말 목숨으로.
철썩! 꾸르릉……!
해일은 하늘을 삼켜버릴 듯 뛰어올랐다.
사방이 한 밤처럼 새까맣다. 바닷물은 다른 색이다. 노란
색이랄까? 회색이랄까? 좌우지간 늘 보아왔던 푸른색은 아니
다.
촥! 촤아악……!
삼판을 휩쓸고 가는 해일은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
던 정겨운 바다와는 거리가 멀었다. 뱃전을 두들기는 소리는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소리와 비슷했다. 사실 해일이 등짝을
한번씩 후려 칠 때마다 묵중한 둔기에 얻어맞는 충격을 받곤
했다.
천해원(天海員)이라고 불리는 선원들은 삼판에 남아 있어야
한다. 돛대가 부러지지 않도록 있는 재주를 다 발휘하면서 배
의 방향을 조절해야 한다. 돛폭을 조절하기도 하고, 있는 힘
껏 동여매기도 하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돛대와 몸을 묶어준 굵은 밧줄 한 가
닥.
그래도 바다가 잔잔해지고 난 다음에 보면 그들 중 대부분
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쿠웅!
엄청난 해일이 배의 측면을 후려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한
범선이 거세게 흔들렸다.
"하하! 이놈아, 걱정하지 마라. 설마하니 바다에 빠져죽을
운명이겠니. 네 놈은 그저 앉은자리에서 송아지 한 마리를 먹
어치우는 식성이나 발휘하면 돼."
적엽명은 육포를 꺼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늑대에게 던져주
고 자신도 한 조각 입에 집어넣었다.
모두 사실이다. 자그마한 송아지나 염소 같은 것은 앉은자
리에서 먹어치우는 놈이 바로 늑대다. 성질마저 포악해서 먹
이가 귀한 겨울철에는 민가까지 내려와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다. 여름이라고 방심할 수 없다. 모두가 문을 열어놓는 유
월…… 유월은 늑대의 해산달이다. 성질이 가장 사나워질 때.
그러고 보면 인간과 늑대는 궁합이 맞지 않는 것 같다.
늑대는 허겁지겁 달려들어 육포를 씹어 먹었다.
적엽명은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늑대는 벌써 뱃속으로 꿀
꺽 삼켜버리고 입을 벌리며 헥헥거린다.
놈은 굶어죽기 일보 직전에 발견되었다. 아니, 무리들에게
뜯어 먹히려던 찰나였다고 한다. 옆구리에 길게 찢어진 상처
자국은 무리들 중 한 놈의 이빨자국이었다. 꼬리가 중간에서
잘린 것도, 엉덩이의 살점이 한 움큼 떨어져나가 짝궁둥이가
된 것도……
전형적인 패배자다. 발목이 덫에 걸려 절름발이가 되기 전
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는 도태(淘汰)
되어야 할 퇴물(退物)에 불과하다.
육신뿐 아니라 야성도 망가졌다. 토끼에게도 달려들지 못하
고, 동네 어귀에서 좀 사나운 듯한 개를 만나면 꼬리를 말며
움츠린다. 피난처는 인간의 등뒤. 발목 하나를 못쓴다 할지라
도 맹수는 맹수일 터인데 염왕은 맹수로써의 야성을 감쪽같이
잃어버렸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정신불구자라고나 할까.
염왕은 인간의 덫에 걸려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보다도 남편
과 자식들에게 공격당했다는 사실이 더 심한 충격이었는지 모
른다.
황함사귀 찬이 염왕을 발견한 것이 십 년 전이었다고 하
니……
염왕은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순되게도 절름
발이가 되어 일찍 죽었어야 할 놈이 제 수명을 한껏 누리며
살고 있다. 반면에 놈을 공격했던 다른 무리들은 얼마나 살아
남았을까?
이것이 세상이다. 질서와 혼돈이 마구 섞여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른 채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끄릉……!
육포 한 조각을 더 던져주자 염왕은 눈앞에 떨어져 있는 육
포를 앞발 사이로 끌어다 놓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적엽명은 게걸스럽게 쩝쩝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편안한 휴
식을 취했다. 못난 늑대가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처럼
그 역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 오히려 편안하다면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알맞다. 하지만 불행히도 적엽명은 그런 하루
하루를 보냈다. 적어도 바다 한가운데, 그리고 오늘처럼 폭풍
우가 몰아치는 밤에는 목숨을 빼앗고자 날아오는 검날이 없으
니 편안하지 않은가.
하루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살아온 나날들.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그가 터득한
삶의 방법이란 것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라는
것. 오로지 하나에만 집중하라는 것. 그런 삶을 살아서인가?
하루에 두세 시진밖에 잠들지 못하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
지금은 휴식을 청하는데 집중했다.
우르릉……! 꽈앙! 우지직……! 쿵!
귀청을 찢어발기는 굉음(轟音)이 터지며 배가 기우뚱거렸
다.
"이런!"
침상에 누워있던 범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번 해일은 심상치 않다.
몸이 한쪽으로 휩쓸릴 만큼 거센 해일, 그리고 방금 전에
들린 소리는…… 바람소리, 천둥번개 소리, 해일 소리에 묻혀
세상이 굉음으로 둘러싸인 지경에서 거침없이 제 목소리를 일
구어낸 소리.
선체가 기울어 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탁자고,
침상이고 완만한 기울기로 기울어진 채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배가 손상됐다!'
그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즉시 객창 문을 박차고 뛰쳐
나갔다.
끄릉! 끄응……!
염왕이 맥없이 나뒹굴며 이 앓는 소리를 냈다.
적엽명은 행낭을 끌어당겨 안에서 노란 유지(油紙)를 꺼냈
다.
"염왕, 이리 와라."
끄릉……!
늑대는 작은 신음만 뱉어낼 뿐, 뱃멀미가 심한지 축 늘어진
몸을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후후! 걱정하지 마라. 해남파 사람들…… 다른 것은 몰라
도 물에 대해서만은 이인자(二人者) 자리를 좋아할 사람들이
아니다. 뱃질로 먹고사는 선원(船員)들도 해남파 무인에게는
한 수 양보해야 돼. 그런 사람들이 세 명이나 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까 왔던 범위는 검보다도 장난감 배를 먼저 만졌
던 인물이다. 물에 빠져죽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끄응……!
늑대는 적엽명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 혹은 관심이 없는
듯 객창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웅얼거렸다.
유지를 풀어 제치자 향긋한 내음과 함께 갈색 환약이 드러
났다.
끼무릇의 덩이뿌리를 말려서 곱게 갈은 다음 꿀로 버무린
환약이다. 의원들은 반하(半夏)라는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만
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린다거나 알지 못할 불안감이 전신을
엄습할 때 끼무릇 덩이뿌리를 자근자근 씹다 보면 마음이 안
정된다.
폭풍우 속에서도 향긋한 냄새는 번져갔다.
늑대가 즉시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쳐들고 코끝을 찡긋거리는 것이 몸에 좋은 약이라는
것은 알아챈 모양이다.
"바보 같은 놈…… 먹어라. 뱃멀미가 한결 가실 거야."
환약 두 알을 던져주자 염왕은 한 입에 꿀꺽 삼켜 버렸다.
반하는 씹어 먹어야 제 맛이 난다. 하지만 한낱 미물에게 그
런 주문까지는 하기 어렵고, 삼켜도 제 효능은 그대로 나타나
뱃멀미가 한결 가시리라.
적엽명은 좀 더 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뒤로하고 예비 돛을
제쳤다.
"으음……!"
침통한 신음을 발할 수밖에 없었다.
한 낮이 분명한데 사위는 저녁처럼 새까맣다.
거센 폭풍은 무게가 십일만관(十一萬貫:400t)은 족히 나간
다는 대범선을 가랑잎처럼 흔들어대며 세상만물을 모조리 삼
켜버릴 듯 꿈틀거렸다.
상황이 급박해졌다.
돛대 세 개 중 하나가 부러져 삼판 위에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다. 방금 전에 들은 굉음은 돛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그
것도 주 돛이……
이런 경우는 선장도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폭풍이 닥치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자신만만하게 배를 띄
운 것은 일명 천해원(天海員)이라 일컫는 선원 열두 명을 믿
는 바가 컸다.
튼튼한 밧줄로 몸을 돛대에 칭칭 묶은 사람들.
일반적으로 대폭풍이 닥칠 경우, 돛을 내리는 것이 상리(常
理)였다. 그리고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바다의 진노(震怒)가
멈추기만을 간절히 갈구했다.
천해원이 있다면 경우가 달라진다.
세상에는 은자 한 닢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왕왕 존재한
다. 천해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생존 가능성
이 채 삼 할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바다 일을 그들은 은자 한
닢에 맡는다. 그것도 귀한 일자리라고 날씨가 심하게 궂은 날
에나 맡을 수 있으니……
돛대에 몸을 묶은 천해원은 선장이 휘두르는 깃발을 보며
돛의 폭이며 방향을 조절한다.
자신들의 목숨이 한 가닥 밧줄에 걸려 있으니, 그들은 최선
을 다할 수밖에 없다.
누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천해원을 자원한 사람들도 목숨이 하나인 것은 마찬가지다.
돈이 원수인지라 어쩔 수 없이 사지(死地)에 뛰어들었지만 집
에 두고 온 처자식이 눈에 밟혀서라도 기필코 살아야 하는 사
람들이기도 하다. 몸이 약하건 강건하건, 게으른 자이건 부지
런한 자이건 가릴 것 없이 일단 고용하기만 하면 제 몫을 다
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천해원…… 그들에게 폭풍은 굶어죽기 일보직전에 있는 가
족들에게 양식을 안겨다 주는 마지막 돌파구이자 목숨을 앗아
가는 악마이다.
성난 바다에서 그들이 믿을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선장.
다행스럽게도 능력이 뛰어난 선장을 만나면 -능력이 뛰어나
지 않으면 폭풍우 속으로 배를 몰지도 않겠지만- 생존할 가능
성이 훨씬 높아진다.
그런 면에서 해남호(海南號) 선장인 추형은 천해원을 자원
한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추형과 함께 배를 타면 거의
대부분 무사귀환(無事歸還)한다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그런데 지금은……
주 돛과 함께 생사를 걸었던 천해원 네 명이 온데간데없이
증발하고 말았다. 돛대가 부러지면서 바다에 휩쓸려 들어갔음
이 분명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생사도 불분명하게 되었다.
부러진 주 돛에는 누로(樓櫓:망루)와 선등(船燈)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점은 주 돛 하부에 삼실(三室:
삼등실)의 통풍구(通風口)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해일이 한번씩 몰아칠 때마다 삼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바닷물은 백여 명에 이르는 승객들을 물에 빠진 새앙쥐 꼴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조만간 바닷물로 꽉 차게 되리라. 그
때가 되면 배가 침몰하는 것 또한 불문가지였다.
천해원들은 망연자실한 채 부러진 돛대만 바라보고 있는 실
정이었다. 그리고 바다에 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다는 해남파
무인들. 그들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엽명은 해일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뱃전에 설치된 밧줄을
움켜잡고 한 걸음씩 나아갔다.
꾸……릉! 철썩! 촤아악!
먹물 같은 파도가 해남호를 집어삼킬 듯이 달려들었다가 물
러갔다.
적엽명이 사장(斜檣:앞 돛 종범)에 다가갔을 무렵에는 배가
훨씬 더 기울어져 제대로 걷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사장을 활짝 펴라! 후장(後檣:뒷돛 종범)은 걷는다. 복명
(復命)!"
적엽명의 목소리는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질타하는 듯 우렁
찼다. 동시에 그는 활대(돛 위에 가로 댄 나무)를 움켜잡고
아딧줄[돛줄]을 감아놓은 물레를 돌리기 시작했다.
"사장을 활짝 펴라! 후장은 걷는다!"
상리(常理)에 벗어난 주문이었다. 선장의 뜻과도 상반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앞 돛에 몸을 묶고 있던 천해원 네 명은 자
신도 모르게 적엽명의 지시를 받아들여 고함을 내질렀다. 그
리고 적엽명을 도와 아딧줄을 풀어나갔다.
"후장을 걷어라! 복명!"
"후장을 걷어라!"
"후장을 걷고 있다!"
멀리 뒷 돛 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해일을 넘어 미약한 인간의
소리가 전달된 것이다.
"후장을 완전히 걷어라! 복명!"
"후장을 완전히 걷어라!"
천해원은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지시하는 대로 행동했다.
금방이라도 바다에 빠지게 될 듯이 위태롭게 몸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도 바랄 수 없었다.
몸이라도 자유로우면 헤엄이라도 쳐보련만- 폭풍이 이는 바
다에서 헤엄을 친다고 살 수 있는 가망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
만 그래도 바다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니까
- 돛대에 몸이 묶인 상태에서 배가 침몰한다면…… 머릿속이
하얗게 재가 되어버린 것은 당연했다.
"후장종범(後檣縱帆)을 완전히 걷었다!"
고물 쪽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소리를 하나로 모아 질러대는 고함.
"사장을 동북으로!"
"사장을 동북으로!"
천해원은 감정이 없는 목석처럼 적엽명의 말을 복창했다.
"좀 더 느슨하게, 물레를 빨리 돌렷!"
"좀더 느슨하게!"
맞바람은 여간 강한 게 아니었다.
다섯 사람이 힘을 합쳤건만 강풍에 이끌린 면포는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딧줄만 팽팽하게 당겨진 것이
금방이라도 '툭!'하고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후장마저 거둬
버렸는지라 저항 없이 몰아쳐 온 바람은 곧바로 사장을 후려
갈겼다.
피잉……! 푸드득……!
"엇싸!"
"엇싸!"
"어엇싸!"
"어엇싸!"
"황토를 파내어 넘치는 운하!"
"황토를 파내어 넘치는 운하!"
"백성은 굶는대도 나는 즐겁다!"
"영차!"
"배는 흔들흔들 끄는 자들 어찔어찔!"
"어찔어찔!"
"어찔어찔 허리라도 엉덩이는 둥글다!"
적엽명은 힘차고 맑은 노래를 불렀다.
천해원 네 명은 노랫가락에 맞춰 물레를 감았다 풀고, 풀었
다가는 다시 당겨 감기를 반복했다.
꾸르릉……! 촤악! 꾸르릉……! 휘잉……!
황소도 단번에 날려버리는 강풍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
다. 키를 넘어서는 해일도 끊임없이 몰아친다. 돛은 좀처럼
방향을 틀지 못했고, 배는 점점 기울어져 간다. 그러나 천해
원 네 명은 잠시나마 공포감을 잊고 일에 몰두했다.
수양제(隋陽帝)가 대운하를 팔 때 민초들의 입에서 흘러나
온 원가(怨歌)는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퇴색되지 않고
구전(口傳)으로 이어졌다.
적엽명이 부르는 노래는 그들도 부를 줄 안다. 허나, 지금
과 같은 상황에서 노래를 부를 엄두가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든든했다.
배는 금방이라도 침몰할 듯 휘청거렸지만 적엽명 같은 사람
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가득 피어났다.
"어서 끌어라, 빨리 끌어라!"
"어엇차!"
"어서 당겨라, 빨리 당겨라!"
철썩! 촤아악!
"영차!"
"끌고 가는 그 애한테 약간 반했다!"
"우하하하!"
"소, 소협(小俠). 도대체 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떠는 추형은 꼭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재수 없기 이를 데 없는 악몽(惡夢)을.
"너는 말이 너무 많아. 나는 말 많은 놈들을 무척 싫어해.
왜 그런 줄 알아? 입 냄새. 말 많은 놈들은 입 냄새가 심해.
구역질이 치밀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살음(殺音)이었다.
"소, 소협. 폭풍이…… 지금 빨리 천해원에게 지시를 내려
야……"
추형은 독사를 만난 개구리처럼 손발이 얼어붙어 꼼짝달싹
도 하지 못했다.
여자가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눈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온다 등등. 온갖 잡소리
를 다 들었지만 코웃음만 흘렸는데.
이제 앞으로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는 것은 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의 눈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온다는 말만은 동
네방네 떠들고 다녀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백의를 입은 사내, 한광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을 쏟아
냈다.
조금이라도 섣부른 행동을 하면 단칼에 요절내겠다는 듯이.
눈에서 시퍼런 불이 쏟아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소협, 말을 해야 알 것 아닙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
렀는지. 심기가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용서하시고……
아! 소예! 그 계집이 소협의 비위를…… 컥!"
추형은 말을 잇다 말고 단발마를 토해냈다.
그것뿐이다. 추형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이마 한 가
운데 틀어박힌 단검이 모든 생각을 앗아갔다. 쓰러지지도 못
했다. 양어깨를 붙잡은 손의 임자가 쓰러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말이 많다고 했잖아. 그리고 똑바로 알아둬. 네가 죽는 이
유는…… 더럽기 때문이야. 맑은 영혼을 가진 여자를…… 더
럽혔어. 왜 그랬지? 왜? 욕정을 해소할 데가 그렇게 없던가?
아니야. 나는 너 같은 놈들을 잘 알아. 분명 허겁지겁 달려들
었겠지? 울고불고 난리 치는 여자에게 주먹질을 했을 게고.
됐어. 너는 이제 그만이야. 그만……"
손의 임자는 양어깨를 풀어주었다.
스르륵……!
추형의 신형은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힘없이 주저앉았다.
한광의 솜씨는 깨끗했다.
추형의 이마에서는 피가 조금밖에 흐르지 않았다. 이마에
꽂힌 단검을 뽑아내고 경직된 얼굴 근육만 풀어준다면 산 사
람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선장을 순식간에 처치한 한광은 무표정하게 삼판을 바라보
았다.
선장실에서는 삼판 위의 광경이 한 눈에 잡힌다.
선장실에까지 들리는 우렁찬 노랫소리와 힘차게 물레를 돌
리는 모습이. 그리고 그 너머에 조그만 거루[새끼배]가.
작지만 세 명은 탈만한 거루다.
이렇게 폭풍이 심한 날에 거루를 탄다고 하면 미쳤다고 손
가락질 받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건 일반인들의 경우이고
물에서 태어나 물에서 자란 해남파 무인들은 조그만 뗏목 하
나만으로도 해협을 건널 수 있다.
거루를 확인한 한광은 눈길을 다시 삼판 위로 던졌다.
"후후! 무슨 짓을 하는 게지? 이게 무슨 관선(官船)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군."
그는 늑대 사내를 비웃었다.
관선에는 고물에 노(櫓)가 있다. 키[舵]를 조정하는 키잡이
도 있어 방향을 조절하기가 쉽다. 관선이라면 이런 경우에 당
연히 후돛을 걷고 사장을 펼친다. 그리고 노군(櫓軍)이 일제
히 노를 젓기 시작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배는 범선이다.
노도 없을 뿐 아니라 키잡이도 없다. 오직 바람에 의존하는
배란 말이다. 그런데 바람에 순응하기는커녕 비위를 건드려?
성난 바다 한가운데서?
"후후후!"
한광은 잘게 웃었다.
해남오지 선출은 한 번으로 끝난다. 이십 년이 지나는 동안
불행히 죽는 사람이 생겨도 그 자리는 공석으로 비워둔다. 이
십 년, 기한이 다 찰 때까지.
십이대(十二代) 해남오지는 실력 차가 뚜렷해서 수굴일지를
짐작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한가(翰家)에서 배출한 건곤검(乾
坤劍) 한혁(翰赫)은 백년 이래 최고수라는 명성을 얻으며 수굴
일지가 되었다.
그것은 그가 이십 년 전, 해남오지의 일원이 되는 순간 결
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곤검과 같이 선출된 해남오
지들도 지난 이십 년 간 부지런히 경륜(經綸)을 쌓고, 무공을
수련했지만 처음의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십삼대(十三代) 해남오지는 누가 낫다 못하다 말할 수 없었
다. 각기 검의 특징이 뚜렷해서 막상 검을 부딪치지 않고는
우열을 논할 수 없다.
수굴일지는 이십 년 후에나 판별된다.
과연 수굴일지라는 명예로운 휘호(徽號)는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이번 해안소행은 큰 수확을 안겨주었다.
마수광의의 목을 잘랐고, 또 다른 공적을 쌓아 줄 먹이를
선물로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런 점들보다도 색다른 사내가
나타났다는 점에 대해서 그는 더욱 큰 흥미를 느꼈다.
늑대사내가 천해원을 통솔하는 힘은 결단에서 나오고 있다.
남다른 결단력이다. 모양새는 허름하고 볼품없지만, 하는 행
동도 건방지기 이를 데 없지만 굼벵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고
뭔가는 있는 놈으로 비쳐진다.
흥미가 일었다.
마수광의를 쫓을 때보다 더한 흥미다. 지금에 와서는 선착
장에서 당한 불쾌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색다른 인간에
대한 흥미만이 온통 마음속을 가득 사로잡는다.
"마음껏 재주를 부려봐라. 마음껏…… 후후후!"
살 길이 없는데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즐
겁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