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역사
7월 23일
1967년 : 미국 디트로이트서 사상 최대 흑인폭동
미국에서 자동차 도시로 손꼽히는 디트로이트에는 남북을 가르는 8마일 로드(8 mile road)가 있다. 흑인이 1920년대 시내 중심지로 몰리자 백인은 북쪽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8마일 로드를 만들었다. 백인은 1950년대 이 길을 따라 높이 2m짜리 차단벽을 설치했다. 부유한 백인은 교외(suburb)에서 살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가난한 흑인은 도심에서 살면서 신세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제가 사라졌지만 흑인은 '검둥이'에 불과했고, 8마일 로드는 인종의 경계선이 되었다.
도로를 경계로 쌓였던 인종 갈등은 1967년 7월 23일에 폭발했다. 백인 경찰이 무허가 술집을 단속하면서 흑인 손님 80여 명을 모조리 체포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항의 시위는 대규모 폭동으로 번졌다. 흑인 청년은 '억압을 받는 환경을 없애려면 폭력이라도 사용해야 한다'고 외쳤다. 1992년 LA폭동까지 최대 규모의 흑인폭동이었다.
이 폭동은 전국적 규모로 번져 동부 뉴욕에서 서부 샌프란시스코까지 그리고 북부 디트로이트와 그랜드래피즈, 또 시카고에서 남부 피닉스와 휴스턴에 이르기까지 전국 23개 도시에서 연달아 일어났다. 뉴욕시 맨해턴의 가장 번화한 5번가에서도 흑인청소년들이 7월 26일 밤 상가를 파괴,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존슨 미국 대통령은 흑인폭동으로 거의 마비된 디트로이트에 4천1백 명의 공수부대 병력을 급파했다. 연방군이 투입된 디트로이트시는 27일 밤 저격수들과의 총격전이 그치고 폭동발생 5일만에 점차 평온을 돼 찾았다.
닷새 동안 계속된 폭동으로 43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체포된 시민수는 3천5백 여명에 달하며 방화와 약탈로 인한 피해액은 1억5천만 달러 이상으로 집계됐다.
당황한 미국 정부는 사회 무질서 대책 국가자문위원회(커너 위원회)를 만들었다. 커너 위원회는 1968년 2월 29일 "미국은 두 개의 사회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하나는 흑인사회, 하나는 백인사회다. 두 사회는 분리되어 있고 불평등하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했다. 흑인 폭동의 원인은 백인 사회의 인종주의라고 못박았다. 흑인에게 눈총을 보냈던 백인 사회는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을 통해 흑인과 저소득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종 차별을 없애고 일자리를 창출하자." 커너 위원회 개혁안은 이상적이었지만 폭동이 잠잠해지자 정치권은 모른 척했다. 백인은 흑인 폭동을 계기로 서둘러 디트로이트에서 벗어났고, 일본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자동차 산업은 점점 쇠퇴했다. 흑인만 남은 도심 한복판에 인종차별은 사라졌지만 일자리는 줄었다.
1936년 : `홍도야 우지 마라` 초연(初演)
`한국형 최루극`의 원조 `홍도야 우지마라`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이었던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에 의해 1936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초연됐다. 가난했던 시절, 비극적인 홍도의 삶에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셨고, 몰려든 인파로 극은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부잣집 아들인 광호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만, 결국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남편의 약혼녀까지 살해한 뒤 순사가 된 오빠에게 잡혀가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여주인공 홍도 역에는 차홍녀, 홍도의 오빠 철수 역은 황철, 남편 광호 역은 심영이 맡았다.
한 많은 여인의 기구한 일생’은 당시 가장 중요한 관객층이었던 화류계 여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연극의 성공은 기생들의 집단관람과 ‘입소문’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한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유랑 극단들이 나중에 임의로 지은 이름이었고, 첫공연 때의 제목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희곡 원제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였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30년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대중 신파극의 상징이 됐고, 1938년에는 법정에 선 홍도가 오빠의 변론으로 무죄선고를 받게 되는 후속 편까지 제작됐다. 나아가 1940년에는 김영춘이 노래하고 콜롬비아 레코드가 제작한 레코드가 만들어져 10만장이나 팔렸다.
극작가 임선규는 폐결핵으로 병상에 누워 이 작품을 집필했다. 임선규는 일제강점기 최고 인기배우 문예봉의 남편이다. 문예봉은 1932년 16세의 나이로 이규환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에 출연해 일약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됐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 시대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문예봉의 인기는 신문 학예면(문화면)을 끊임없이 달구었고 거리에서 우연히 친구 아이를 안고 있어도 그의 "모성애"가 회자될 정도였다. 그는 "3천만의 연인"이었다.
임선규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데뷔작 ‘수풍령’이 민족주의 성향이 짙다 하여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1940년대에 이르러 부부는 친일(親日)로 돌아선다. 광복된 뒤 그는 절필하다시피 했으나 친일 행적은 멍에였다. 1946년 11월 그는 남로당 창당대회에 모습을 나타냈고 결국 1948년에 문예봉과 함께 월북했다.
북한에서의 임선규의 삶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 문예봉의 행적은 비교적 소상하다. 월북 이듬해 문예봉은 북한의 첫 혁명 극영화 ‘내고향’에서 혁명가의 아내역으로 출연했고, 52년에는 북한 최초로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납북된 이광수의 전향을 위해 문예봉의 미모가 동원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그도 남로당 숙청과 "피바다예술"의 본격적인 대두로 인해 북한 무대예술계에서 한동안 모습을 감춘다. 청순미와 조선적 여성미가 더해진 애상적인 이미지가 항일빨치산 혁명예술에서 투사의 역할을 하는 데는 결함이 되었다. 문예봉은 1965년 잡지 조선영화에서 나운규를 "천재적인 예술가이며 정열적인 인간"으로 묘사한 수필이 화근이 돼 반혁명반동으로 몰려 안주협동농장으로 추방된다. 나운규는 '임자없는 나룻배’에서 신출내기였던 문예봉의 연기를 탄탄하고 개성적인 연기로 뒷받침 해준, 자신에게는 "선생님"과 같은 존재였다.
임선규도 당시 서울에서부터 앓았던 폐결핵이 악화되고 당 방침에 맞는 작품을 써 내지 못해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문예봉과 별거 상태로 주을 온천부근의 결핵 환자 요양소에서 여생을 보내다 1970년 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예봉은 1980년 춘향전의 월매역으로 복귀하면서 복권되었다.
문예봉의 복권은 나운규와 영화 ‘아리랑’의 복권과 상관관계를 갖는 듯하다, 1970년만 해도 나운규는 북한 문예사전에 "사상성없는 퇴폐주의적이며 기회주의적인 감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993년 문학예술사전은 아리랑에 대해 "부족점은 있으나 당시 인민들의 지향과 농촌현실의 모순을 폭로하고 영화적 형상수법을 혁신한 비판적 사실주의 영화"로 평가하고 있다.
문예봉은 1982년 김일성 70회 생일을 맞아 배우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인민배우"가 되었고 국기 훈장 제1급을 받았다. 4남매와 13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던 그는 안정적인 삶을 누리다 1999년 3월 26일 사망했다.
문예봉(1917년 1월 3일 ~ 1999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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